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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22〉“어째서 당장 가지 않는 거죠?”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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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샹푸는 얼어붙은 시진의 풍경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는 질문 자체를 받은 적이 없다는 듯 입술을 꽉 다문 뒤 다시는 열지 않았다.
⊙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그의 손도 얼었다가 터진 검붉은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소설 《원청》 중에서)
  한 남자가 있다. 가슴 앞 포대기에 딸을 안고서 회오리바람의 굉음 속을 걷고 있다. 딸의 울음소리는 그의 심장박동처럼 미약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떠나는 북쪽 남자의 이야기, 중국 소설가 위화가 쓴 《원청, 잃어버린 도시》(2022, 푸른숲)는 꽁꽁 얼어붙은 눈밭을 내딛는 결연한 한 남자의 발걸음에서 시작한다.
 
  〈그는 언제나 엽전 한 닢이 놓인 오른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거의 눈물이 쏟아질 듯한 두 눈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불쌍한 제 딸에게 젖 좀 먹여주십시오.”
 
  그의 입술은 터진 감자 껍질처럼 갈라져 있었고 손도 얼었다가 터진 검붉은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젖먹이 딸에게 엄마를 보여주기 위해 북쪽 남자 린샹푸(林祥福)는 먼 길을 걸어 드디어 남쪽 도시 시진(溪鎭)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내가 산다고 말했던 도시 원청(文城)은 존재하지 않는다. 왠지 시진이 원청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 마을을 아무리 둘러봐도 원청이란 지명을 아는 이가 없다. 아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린샹푸를 가슴 찢어지게 슬프게 했다. 품속의 어린 딸은 아무것도 모른다.
 
  북쪽에서 온 린샹푸에게 원청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혈육인 린바이자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여인인 샤오메이(小美)가 사는 곳이다.
 

  린샹푸는 어떤 고통을 겪어도, 지독한 한파가 몰아쳐도, 지붕이 날아가는 재난이 닥쳐도 절망스러운 표정을 삼키며 한 여자가 살고 있는 도시를 찾아 길을 나선다. 찾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설레게 만들고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는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 걸음을 멈추고 강한 북쪽 억양으로 이렇게 물었다.
 
  “여기가 원청입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사실에 린샹푸는 절망할 겨를도 없이 다시 얼른 포대기를 안고 길을 나섰다. 아이 엄마를 궁금해하는 시진의 여자들은 그에 관해 묻곤 했다. 그러면 린샹푸는 얼어붙은 시진의 풍경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는 질문 자체를 받은 적이 없다는 듯 입술을 꽉 다문 뒤 다시는 열지 않았다.
 
  〈린샹푸의 뒷모습은 천융량에게 커다란 봇짐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건 북방의 덜커덕거리는 베틀에서 짜낸 하얀색 거친 광목이지, 푸른 바탕에 무늬가 들어간 남방의 부드러운 옥양목이 아니었다. 하얀색 광목으로 둘둘 말린 봇짐은 이미 누르스름하고 곳곳에 얼룩이 가득했다. 천융량은 그렇게 큰 보따리를 생전 처음 보았다. 집을 통째로 담고 있는 듯한 봇짐이 북쪽 남자의 커다란 등에서 좌우로 흔들거렸다.〉
 
위화의 소설 《원청, 잃어버린 도시》(2022)
  한때 린샹푸의 아내였던 샤오메이에게도 원청은 애초에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린샹푸처럼 절박한, 반드시 찾아가야 할 곳이 아니다. 그저 “어딘가에 있겠지” 정도의 도시에 불과하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 누가 살고 있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샤오메이에게 원청은 뜬구름 같은 공간이 아니라 아픔의 공간으로 변해간다.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머리카락과 수염이 잔뜩 자란 한 남자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샤오메이도 린샹푸와 딸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옥불이라도 건너가겠다는 ‘우둔한 백곰 같은’ 남자는 샤오메이에게 있어 비극의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운명으로, 그녀는 막연히 눈물을 떨군다.
 
  샤오메이는 첫 번째 남자인 아청을 버릴 수 없기에 이 불덩이 같은 비극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샤오메이는 린샹푸가 지도에도 없는 원청을 찾아 멀리 떠나가길 바란다. 그토록 보고 싶은 자신의 딸마저도 사라지길 원한다. 이런 절망적 운명이 샤오메이의 삶을 극적으로 파멸시킨다.
 
  아청이 샤오메이에게 말한다.
 
  “(린샹푸가) 점점 멀리 갈 거야. 원청을 찾아갈 테니까.”
 
  〈온갖 고생을 다 하고도 샤오메이를 찾지 못하자 그는 서글퍼졌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붉은 끈을 휘날리며 방울 소리를 내던 당나귀도 그립고 고향의 논밭과 집도 그리웠다. 그는 딸 옷에 든 은표와 자기 몸에 간직한 은화를 만지작거리며, 황허를 건넌 뒤 그 역참에 가서 당나귀를 도로 사고 고향의 저당 잡힌 땅도 도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기필코 만나기 위해 본래 자리를 떠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간 공간. 그 공간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우리도 때로 미지의 공간을 향해 걸어간다. 겨울의 눈꽃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설렘이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살면서 느끼게 된다. 그런 공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란 천(千)의 표정을 한 사람이거나 예쁜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는 그림 같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깨닫는 순간, 이제까지 자신을 감싸던 공기가 갑자기 낯설어지고, 창밖의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환한 빛으로 변한 것을 감지하게 된다.
 
  원청이란, 마치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서술한 가상의 신비함에 싸인 유토피아와도 같을 것이다. 지복으로 가득한 지상낙원,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각자 꿈꾸고 있는 원청이 있을 것이다.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소설 〈삼포 가는 길〉 중에서) 사진=한국영상자료원
  황석영의 중편 《삼포 가는 길》(1973)은 떠돌이 노동자, 술집 작부의 이야기다. 삼포가 어딘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고달픈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삶이 고달픈 이유는 뭘까. 무엇이 고달프게 만들까. 백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날 그들은 마을의 제방 공사를 돕기 위해서 삼십여 명이 내려왔다. 출감이 머지않은 사람들이라 성깔도 부리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리 경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밖으로 작업을 나오면 기를 쓰고 찾는 것은 물론 담배였다. 백화는 담배 두 갑을 사서 그들 중 얼굴이 해사한 죄수에게 쥐여주었다. 작업하는 열흘간 백화는 그들의 담배를 댔다. 날마다 그 어려 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여주곤 했다. 다음부터 백화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바라지 두 달 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백화를 만나러 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병사는 전속지로 떠나갔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어요.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그이는 앞사람들처럼 하룻밤을 지내구 떠나가군 했어요.”〉

 
  백화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옥바라지를 하느라 ‘갈매기집’에 있던 시절, 옷 한 가지도 못 해 입었다. 그러나 삶이 고달프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주머니는 늘 텅 비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단 사실이 삶을 부풀게, 풍요롭게 만들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3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병사를 전속지로 떠나보내는 아침마다 터미널에 나가서 먼지 속에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백화는 그 뒤부터 부대 근처를 전전하며 여러 고장을 흘러 다녔던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 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는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그들은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했다. 마침 장이 섰었는지 파장된 뒤인데도 읍내 중앙은 흥청대고 있었다. 전 부치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 곰국 냄새가 풍겨 왔다. 영달이는 이제 백화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씨가 백화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이오?”
 
  “전라선이에요.”
 
  “나는 호남선 쪽인데, 여비는 있소?”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구 가면 돼요.”
 
  그들은 장터 모퉁이에서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팥시루떡을 사 먹었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이에게 내밀었다.
 
  “더 드세요. 날 업구 왔으니 기운이 배나 들었을 텐데.”〉

 
황석영의 중편 《삼포 가는 길》(1973)
  소설 《삼포 가는 길》의 앞부분에서 정씨와 영달 간의 심리적 거리는 상당히 멀다. 그러나 여로(旅路)가 이어지면서 심리적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백화도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이탈된 자다. 부서진 삶을 이어가는 떠돌이였으므로 결국 이들과 동화된다. 설원의 고된 길을 걸으며 결국 이들 사이의 정신적 유대감은 강화되며, 차츰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기차역에서 서로의 앞날을 묻고 걱정해주며 서로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려 한 장면은 이들이 연대감과 정(情)으로 묶였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장터 모퉁이에서 산 팥시루떡은 이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앞으로도, 평생 ‘따스한 온기’가 함께할 것임을 상징한다. 온기(溫氣)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다시 데워지는 것도 아니다. 잊었거나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장작을 가져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순식간에 다시 따스해지는 게 사람의 온기다. 그 온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욱 강하게 생기지만, 사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바탕으로 깔려 있다. 잊힌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떠났다.〉

 
  영달과 정씨 두 사람은 대합실 나무 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쯤 잠을 청했다. 모처럼 편안한 잠이었다. 깨어보니 대합실 바깥에 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기차는 연착이었다. 밤차를 타려는 시골 사람들이 의자마다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나눠 피웠다. 먼 길을 걷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더니 더욱 피로해졌던 것이다. 영달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쳇, 며칠이나 견디나….”
 
  “뭐라구?”
 
  “아뇨, 백화란 여자 말요. 저런 애들… 한 사날두 촌 생활 못 배겨나요.”
 
  (중략) 정씨 옆에 앉았던 노인이 두 사람의 행색과 무릎 위의 배낭을 눈여겨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불도저-편집자 주)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트럭-편집자 주)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외부적인 환경이 상전벽해처럼 변모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고향 삼포를 찾는 이의 눈빛은 빛나리라.
 
 
  만일 신께서 양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면…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2001)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2001, 문학동네)는 길 이야기다. 양치기였던 산티아고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산티아고는 수많은 시련을 마주하면서도 보물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반응하며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걷는다. 살렘의 왕이나 낙타몰이꾼, 연금술사의 조언이 그의 걸음에 영향을 미친다. 걸으면 걸을수록, 먼 거리일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산티아고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양털 가게 딸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그의 사람이 아니어서 양들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이틀 후 그가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에겐 모든 날들이 다 똑같을 것이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똑같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고향의 성을 떠나왔어. 그들은 이제 내가 그들 곁에 없는 것에 익숙해졌고, 나 또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지. 양들도 곧 내가 없는 것에 익숙해질 거야.’〉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둘러보라. 둘러보지 않으면 옆의 그가, 앞의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표정에 담긴 지금의 감정을 확인하기 어렵다. 삶은 믿는 행위다. 근본적으로 낙관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 《연금술사》의 한 대목처럼 ‘만일 신께서 양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면 인간에게도 그렇게 하시겠지’ 하는, 그런 낙관론자의 믿음이 때로 우리 삶을 해방시키도록 도와준다.
 
  더러 아프리카 사바나의 에티오피아 사어를 말하고 싶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평생 배울 일이 없지만 그 언어는 누구에게나 이국의 언어로 들리고, 그 언어를 쓰는 나라는 이국 땅이 아닐 수 없다. 왠지 그곳에 가려면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나야 하고 그 낙타에는 단검과 양탄자가 메어져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상상을 하니 느닷없이 심장이 오그라들기라도 할 듯 가슴이 조여 온다. 위를 바라보기가 겁이 난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이미 알 것 같다. 하늘 위, 땅 아래로 빨려들 것만 같다. 단검을 꺼내 휘두르고 싶다.
 
  〈“난 아직 살아 있어.”
 
  모닥불도 없고 달도 뜨지 않은 밤, 야자열매 한 움큼을 입에 넣으며 낙타몰이꾼이 산티아고에게 말했다.
 
  “난 음식을 먹는 동안엔 먹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소. 걸어야 할 땐 걷는 것, 그게 다지. 만일 내가 싸워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게 언제가 됐든 남들처럼 싸우다 미련 없이 죽을 거요. 난 지금 과거를 사는 것도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니까. 내겐 오직 현재만이 있고, 현재만이 내 유일한 관심거리요. 만약 당신이 영원히 현재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 행복한 사람일게요. 그럼 당신은 사막에도 생명이 존재하며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것은 그 전투 속에 바로 인간의 생명과 연관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요. 생명은 성대한 잔치며 크나큰 축제요. 생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직 이 순간에만 영원하기 때문이오.”〉

 

  산티아고는 바로 생명이 있기에 걷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명이 있기에 걷고 생각하고 느끼고 후회하며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문득 저 하늘 위 행렬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별이 새롭게 느껴진다. 사막 위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덕에 지평선이 조금은 낮아진 듯 보인다.
 
  낙타몰이꾼이 별 있는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오아시스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지 않는 거죠?”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제 역할에 충실하다. 우리 모두는 누구의 아들이거나 딸이고 누구의 아버지이거나 아내이자 고모다. 늘 세상의 역사에서 저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대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삶을 깨닫는다는 것은 당신의 발 아래 덫이 가득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그럼에도 결국 이 덫이 아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바로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바로 그때, 사막이, 침묵의 사막이 파도치는 바다로 바뀌는 순간이다.
 
  〈네가 울음을 터뜨리게 될 장소를 그냥 지나치지 마. 그 자리가 바로 내가 있는 곳이고, 네 보물이 있는 곳이니까.〉
 
  산티아고의 피라미드를 향한 탐험은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영적 탐구의 여정으로 확장된다. 그의 이름 산티아고가 “신으로부터 보상받는 자”를 의미하듯이….
 
 
  서정시 같은 오솔길로 보였다 사라지고
 
박담의 첫 시집 《꽃 위의 잠》(인문학사)
  시인 박담이 첫 시집 《꽃 위의 잠》(인문학사)을 지난 8월 30일 펴냈다. 시 ‘천마산에서 보내는 편지’는 여행자를 위한 격려와 같다. 우리는 누구나 ‘저 산 구름바다’를 건너왔다. ‘넘실거리는 운해’를 뛰고 걸으며 살아왔다. 그 걸어온 길에서 ‘서사문 같은 능선’이나 ‘서정시 같은 오솔길’을 만났었다. 숲을 지나올 때 들리던 바람소리가 ‘숲의 팔만사천법문’이 되는 기적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생이 환희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저 산 구름바다에 잠긴 거 보세요
  산마루 넘실거리는 운해로 이어지다 끊긴 섬들
  화도에서 진접까지 발끝 대고 있어요
 
  사슴 발목 담그던 샘을 지나 관음봉에 미치면
  산바라기한 책장이 쉬엄쉬엄 넘어가듯
  그대와 엮은 세월 뒤따라와
  서사문 같은 능선으로
  서정시 같은 오솔길로 보였다 사라지고
 
  새들의 눈물자리 노랑 단풍으로
  다람쥐 사랑자리 빨강 단풍으로 물들어
  부신 햇빛에 뒤채는데
  허공을 날던 바람새도
  바다 협주곡에 빠져 떠날 줄 몰라요
 
  숲의 팔만사천법문 독차지한 산골 여자가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고 싶어
  오는 길 열어 놓고
  연필 글씨로 비질하고 기다리니
  와서 저 산 구름바다에 잠긴 거 같이 보아요
 
  -박담의 시 ‘천마산에서 보내는 편지’ 전문

 
  시인은 번잡한 서울 생활을 접고 천마산 기슭에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상이 혼자 누리기 아까워 이렇게 정겨운 초대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끼고 절제한 언어로 그려낸 묘사가 한 폭의 수묵산수화처럼 농담(濃淡)이 교감하는 시적인 이미지를 남긴다. 예부터 ‘시는 글로 그린 그림이요, 그림은 붓으로 그린 시(如詩如畫)’라는 말이 한 치 오차 없이 어울리는 정통 서정시다. 거기다 무정 설법을 하는 숲을 전유한 화자인 ‘산골 여자’가 ‘오는 길 열어 놓고/ 연필 글씨로 비질하고 기다리니’ 누군들 만사 뒤로하고 달려가고 싶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온 네 개의 공간, 원청-삼포-피라미드-천마산은 자기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는 응축된 시간의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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