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장에 물들다 〈11〉 내 안의 상처에 대하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물의 입자가 유리 가루처럼 콕콕 쑤시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물방울》 중)
⊙ 오른쪽 가슴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바로 그 파편 조각이었다(《파편》 중)
⊙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자전거 도둑》 중)
⊙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남진우의 ‘가시’ 중)
1948년 이탈리아 비토리아 데시카 감독이 만든 영화 〈자전거 도둑〉. 인간은 누구나 ‘자전거 도둑’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메도루마 (目取真俊)의 소설 《물방울》(2012, 국내번역)은 괴이하고 슬프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리얼리즘 속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어느 날 도쿠쇼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다. 다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엄지발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더러운 고름 같은 물방울이 도쿠쇼의 과거 감추고 싶었던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날 밤, 도쿠쇼와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동료 이시미네를 비롯한 전우(戰友)들이 유령으로 그 앞에 나타난다.
 
 
  괴이하고 꺼림칙한 소설
 
  오래전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물을 길으러 나간 도쿠쇼 일행은 근처에 정박한 군함에서 쏜 포탄에 맞았다. 일행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시미네도 파편으로 배가 찢어졌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도쿠쇼뿐이었다. 이시미네를 끌고 간신히 방공호에 가니 먹을 것과 물을 찾는 병사들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네발로 기어가다가 급기야는 땅바닥에 엎드려서 손발이 잘린 양서류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인다. 버림받은 데 대한 원망과 분노, 울음소리가 진흙탕을 기어가는 소리와 뒤섞였다.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며 곤두박질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된 병사들의 신음이 도쿠쇼의 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도쿠쇼오….’
 
  희미하게나마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이시미네.”
 
  귓전에 대고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그의 입에 볼을 가까이 대자 미약하게나마 호흡이 느껴졌다. 도쿠쇼는 몸을 미끄러뜨려 이시미네의 몸을 눕혔다. 배를 감은 각반이 밀리며 스으윽 하는 소리가 났다. 세쓰가 주고 간 종이봉투에서 건빵을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수통의 물을 손바닥에 받아 하얀 이가 보이는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입 밖으로 넘친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도쿠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통에 입을 댄 채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수통은 텅 비어 있었다. 물의 입자가 유리 가루처럼 콕콕 쑤시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도쿠쇼는 무릎을 꿇고, 늘어져 있는 이시미네를 내려다보았다. 어둠과 흙탕물이 스며들어 이젠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방공호 안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텅 빈 수통을 이시미네의 허리 부근에 놓았다. “용서해도, 이시미네….”〉

 

  결국 그는 살아남았고, 이시미네는 죽었다. 만약 이시미네가 얼마 안 남은 물을 마셨다면 살아났을까. 큰 상처를 입어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도쿠쇼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살아야 했다.
 
  도쿠쇼가 미군의 포로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이시미네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무사히 귀환한 것을 한 핏줄처럼 기뻐해주는 모습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도쿠쇼의 엄지발가락 끝에서 물이 나오자 이시미네가 유령이 되어 찾아왔다. 다리를 쓰다듬듯 손바닥으로 발목을 감싸고 열심히 물을, 그 더러운 물을 마시며 이시미네가 말한다.
 
  “고마워. 이제야 갈증이 해소됐어.”
 
  이시미네는 그 시절의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한 다음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벽으로 사라졌다. 새벽을 맞이하는 마을에 도쿠쇼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설은 일본의 전후(戰後) 문학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만 전쟁을 가장해온 일, 전후의 자기기만을 되묻고 있다. 인간 내면의 이기주의와 약함과 어리석음을 커다란 전쟁의 이념이나 구호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로 전한다.
 

 
  죽음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이동하의 소설 《파편》(1982)은 6·25 전후 소설이다. 소설 속 첫 문장은 이렇다.
 
  〈죽음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숙부(叔父)의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부음(訃音)에 접한 것은 저녁상을 막 물리고 난 때였다. 오토바이를 부르릉거리며 온 사내가 종이쪽지 하나를 훌쩍 던져주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바로 숙부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이었던 것이다.〉
 
  첫 문장 속 소설의 암호가 담겨 있다. 죽음, 숙부, 갑작스러움. 부음을 알리는 쪽지를 받고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오랫동안 양치질을 한다. 숙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서는데 아내가 같이 가겠다고 한다. 아내를 간신히 떼어놓고 눈이 날리는 거리를 지나 밤차로 K시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나는 회상에 잠긴다.
 
  조부는 친일파였다. 광복이 되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는 좌익이었고 빨치산이 되었다. 어느 날 공비가 출연해 마을이 피해를 입고 면 주재소가 불탔다. 아버지의 소행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흥분한 주민들이 몰려가 어머니를 학대했을 때 숙부가 나타나 구해주었다. 숙부는 국군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숙부는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다. 가슴 속에 파편이 박혔는데 수술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숙부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고 이런저런 사건으로 네 번이나 구속됐을 정도로 인생이 구겨졌다.
 
  K시에 도착한 ‘나’는 썰렁한 상가(喪家)에서 딱딱하게 굳은 숙부와 만난다. 경찰이 사체를 검시하는 과정에서 숙부의 가슴에 난 흉터를 보고 ‘나’는 악몽 같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숙부가 찾아와 어머니의 봉분 앞에서 허리를 꺾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느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오열을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끝내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그는 신음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자네 아버님 제살랑 5월 중 적당한 날을 택해 모시도록 하소. 가급적이면 중순 이전에 좋겠네.”
 
  돌아오는 차중에서 그는 불쑥 말했다. 나는 멍하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어머니의 줄기찬 희망 때문이었다. 6·25 한 해 전에 영영 행방을 감추어버린 아버지가 세상 어딘가에 아직도 살아 계시리란 희망을 내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날 밤 내내 잠을 설치면서 나는 그가 남긴 말을 곰곰 되씹었다.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는, 삼촌은 내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상흔과도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른다고까지 나는 생각했다.〉

 
 
  흡사 쇠공이 같은 것으로 頂門을 강타당한 듯한
 
  제대 후 숙부는 눅눅한 골방에 드러누워 누에처럼 보냈다. 파편을 빼는 재수술을 거부한 뒤 궂은날이면 육신의 어딘가가 아프다면서 오밤중에도 곧잘 끙끙 앓았고, 갈수록 말수가 줄어든 대신 뿌리가 점점 더 깊이 느껴지는 기침을 했다.
 
  그러나 숙부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 듣지 못했다. ‘그의 침묵을 보다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넣는 것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인을 다시 대한 것은 일몰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유해를 받아 안았을 때 상주인 종수가 보인 반응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재간이 없다. 그의 표정은 차라리 백치의 그것에 가까웠다고나 해야 할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한지에 쌓인 한 줌의 재도 그것을 받아 든 종수의 표정도 아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아주 작고 단단한 파편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쇄골(碎骨) 과정에서 발견했다면서 작업장 인부가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다 장난스럽게 올려놓았을 때 나는 흡사 쇠공이 같은 것으로 정문(頂門)을 강타당한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고인의 오른쪽 가슴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바로 그 파편 조각이었다.〉

 
  메도루마 의 소설 속 ‘물방울’과 이동하의 소설 속 ‘파편’은 서로 닮아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도쿠쇼가 전우 이시미네에게 물을 주지 않았던 상처가 ‘물방울’이라면, 6·25전쟁 당시 삼촌의 가슴 속 ‘파편’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상처다.
 
  ‘물방울’이 가해자이며 피해자이기도 한 전쟁의 상처에 관한 것이라면 ‘파편’은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비극적 상처일지 모른다. 다만 소설 《물방울》 속 이시미네 유령은 도쿠쇼의 엄지발가락 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현재와 과거의 화해를 암시한다. 소설 《파편》의 끝은 이렇다.
 
  〈외과 수술로도 적출해낼 수 없었던 그 작고 단단한 쇳조각은 암처럼 체내에 뿌리를 내린 채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인의 생명을 지배해왔음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둠이 서서히 묻어오는 하늘에 눈발은 여전히 엷게 날리고 있었다. 매운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문득 심한 자괴(自愧)를 의식했다.〉
 
  자괴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 몸속 ‘파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고 외면하려고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올해는 휴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 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율성, 홍범도, 김원봉, 윤이상 같은 이들의 ‘파편’이 아직도 우리를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영화 〈자전거 도둑〉(1948)의 한 장면. 자전거 도둑으로 의심받던 한 청년이 간질 발작으로 쓰러진 장면이다. 안토니오와 브르노 부자는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고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기억 속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상처가 파편일 수도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것은 우리 삶을 지배한다. 상처를 떨치기 쉽지 않다.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멀어지기 위해 애쓰다 보면 엉뚱한 비극을 맞기도 한다.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1995)을 읽는다. 이 작품은 ‘나’와 서미혜라는 인물, 그리고 영화 〈자전거 도둑〉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발생한 유년기의 상처를, 그 운명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누군가 ‘나’의 자전거를 훔쳐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동네 꼬마로 생각하였으나 ‘내’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은 동네 에어로빅 강사 서미혜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나’와 그녀는 서로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나’는 자전거 도둑을 보면서 영화 〈자전거 도둑〉을 생각한다. 1948년 이탈리아 비토리아 데시카 감독이 만든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피폐해진 로마를 배경으로 만든 흑백영화다. 영화 스토리는 이렇다.
 
  안토니오는 거리에 벽보를 붙이는 일을 한다. 그런데 아내가 전당포에 자신의 물건을 맡기고 마련해준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고 만다. 어린 아들 브르노와 백방으로 자전거를 찾아 돌아다니다 도둑으로 보이는 사람을 잡는다. 하지만 정작 자전거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한다. 자전거 도둑인 청년이 간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낙담한 채 돌아오다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보게 된다. 훔치려는데 이내 주인에게 붙들린다. 그 장면을 어린 아들 브르노가 목격한다. 다행히 주인은 용서했고, 브르노는 아버지 안토니오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 브르노는 ‘나’와 많이 닮아 있는 인물이고, 자전거를 볼 때마다 기억하기 싫은 어린 시절을 환기시킨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도매상으로 물건을 떼러 다녔다. 어느 날 계산 착오로 소주 두 병이 빠져 있음을 알게 되나, 혹부리 주인 영감은 결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후 아버지는 소주 두 병을 슬쩍 담음으로써 그 손해를 보상받으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주인 영감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고, 그 순간 ‘나’는 겁에 질린 아버지를 대신하여 도둑이라는 희생양이 되고 만다. 실제 도둑질을 한 아버지는 혹부리 영감의 교육 정신에 격려받아 ‘내’ 뺨을 갈긴다. 이 일을 겪은 후 죽는 한이 있어도 아비라는 존재는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내 앞에서 저 아이를 호되게 가르치는 꼴을 봬 주라우. 내가 그깟 술 두 병이 아까워서 기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기렇게 따끔하게 가르치는 건 바로 자식에게 말이야, 부모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아니갔슴매? 내 이 자리서 이녁이 하는 깜냥을 두고보고서리 까지것 그 술 두 병은 거저라두 주갔어. 내 이제껏 남한테 콩알 반쪼가리도 거저 준 적은 없지만서두, 이건 경우가 다르다우 아암.
 
  호되게라믄… 어떠케?
 
  쯔쯧, 이녁도 함경도 아바이 출신이믄 부랄 값도 못하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드러케 다루는지는 알 만하잖소? 그걸 왜 내게 묻소 으응? 아 안 그렇소?
 
  야! 간나야,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어서 말 좀 해보라우.
 
  짐짓 호령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허공 높이 허우적거렸다. 단 한 대에 내 뺨은 무섭게 부풀어오르며 감각을 잃어 갔다.
 
  길티… 기게 바로 진짜 교육이야.
 
  (중략)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 아마도 나는 그때 그런 끔찍한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벽지 안쪽이 손톱에 긁혀 남김없이 거덜 나 있었어요”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1995)
  이후 ‘나’는 혹부리 영감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영감의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하수도를 통해 가게에 침입해 그곳에 오물을 뿌려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복수로 인하여 혹부리 영감의 집은 파산을 하고 혹부리 영감은 죽게 된다.
 
  그녀도 어릴 적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간질 때문에 정상적인 성장을 멈춘 오빠에게 성적 상처를 받은 존재이다. 여동생 몸을 훔쳐보고 있었는데 나이에 따른 사춘기 호르몬 작용 때문이었다. 엄마가 집을 비우며 부탁했던 오빠의 식사 심부름이 두려워, 며칠 동안 방치한 나머지 간접 살인을 하게 된 아픔을 지니고 있다.
 
  〈하루는 엄마가 친정일로 고향에 가시면서 오빠 밥을 잘 차려주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무서우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자라고 하더군요. 다락문을 잠그는 자물쇠와 열쇠를 건네주면서, 밥을 줄 때를 빼고는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밥때뿐만 아니라 한 번도 다락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친구를 불러와서 잔 게 아니라 내가 아예 친구네 집에 가서 일주일을 보냈거든요. 민석 오빠는 하루에 한번쯤은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야지만 살 수가 있었는데….
 
  일주일 뒤에 돌아온 엄마가 다락문을 열어보니 걸레처럼 축 늘어진 민석 오빠가 뒹굴어져 나왔어요.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며칠 못 갔어요. 내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죠 뭐. 다락 벽지 안쪽이 손톱에 긁혀 남김없이 거덜 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난 그 집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출을 시작했죠.…〉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 후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피한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우연히 그녀를 만났으나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속 ‘나’와 서미혜는 잊어버리고 싶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 속 상처를 가지고 있다.
 
  소설 《자전거 도둑》에서 ‘나’는 영화 속 안토니오와 자신의 아버지를 동일시하며 무능한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결심한다. 그 결심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인지 연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서미혜는 조금 다르다. 약자인 오빠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자전거 몰래 타기를 한다.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 도벽(盜癖)이 생긴 것이다.
 
  내면의 상처, 혹은 파편, 물방울 고름, 혹은 자전거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슬픔이 슬퍼지지 않는다는 동화가 있지
  아무도 울지 않은 의자가 있다는데
  열두 번을 돌아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
  슬픔이 덧댈수록 슬퍼지지 않는다는 말
  이것은 어쩌면 아주 흔한 이야기
  덧대어본 울음이 울지 않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슬픔으로 웃으며 만날 수 있겠지
  어쩌면 나에게만 슬픔일 수 있는 이야기
  덧댄 마음들에 모든 슬픔이 달아날 때
  누군가 혼자, 쌓이는 의자에 앉아 슬픔에 두께를 준다
  아무도 울지 않았던 의자가 있겠지
  아픔이 없는 밤에 묵묵히 슬픔을 쓸어 담던 사람아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아프지 않을 때가 된 거지
  이것은 너무나 보편적인 매일의 이야기
  열두 번을 돌아간 의자 아래에 꽃이 뭉게뭉게 피어날 때쯤
  보편적인 의자에 사람들이 앉는다,
  열세 번째 슬픔을 준비하는 슬픔 없는 사람 뒤로
 
  -이제야의 시 ‘보편적인 슬픔’ 전문

 

  이제야 시인의 첫 시집 《일종의 마음》(2023)에 실린 ‘보편적인 슬픔’은 흔한 슬픔 이야기를 하면서 ‘나만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슬픔의 진원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덧댄 상처들이 울게 만든다. 그러나 이제는 ‘묵묵히 슬픔을 쓸어 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프지만,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아프지 않을 때가 된 거지’ 하며 툴툴 털고 일어나면 좋겠다.
 
  오래된 상처가 ‘열세 번째 슬픔을 준비하는 슬픔 없는 사람 뒤로’ 사라지면 좋겠다. 새로운 상처가 오래된 상처를 밀어내어 기억 속에서 사라지면 좋겠다.
 
  남진우 시인의 시집 《죽은자를 위한 기도》(1996)에 실린 ‘가시’는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에 등장하는 아버지, 간질을 앓는 오빠일 수도 있다. 메도루마 의 소설에 나오는 도쿠쇼의 ‘고름’(물방울), 이동하 소설의 숙부 몸속 ‘파편’과 비슷한 상처다.
 
  물고기는 가시를 숨기고 있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몸을 찌른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시를 숨기고 산다. 이 물고기가 그물에 걸린 뒤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올라 온 몸이 찢어발겨져서야 비로소 눈부신 자신을 드러낸다.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남진우의 시 ‘가시’ 전문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