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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5〉 읽을 수 없는, 읽은 적 없는 책이 돼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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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일은 받아쓰게 할 수 있지만, 콩트레스카르프 광장은 받아쓰게 할 수 없어’(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중에서)
⊙ “차라리 몰랐으면 또 모르지만 한 번 알고 나서야 인륜이 있는듸 어찌겠냐”(소설 《역마》 중에서)
⊙ ‘싸우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하라. 사랑하거든 투쟁하고, 투쟁하면서 사랑하라’(에세이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중에서)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은 예견된 것이라 해도 준비할 수 없는 일, 감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러스트=조선DB
  권여선의 소설 《실내화 한 켤레》(2014)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것이 행인지 불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보이는 바로 저기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불행이 여기저기서 오고 있다(고 느낀다). 코앞에 닥쳐오리라는 것도 안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도 않다. 울고 싶지 않지만, 안 울고 싶지도 않다. 감내해야 할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니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지만 기꺼이 불행이 온다면 부딪혀야 한다.
 
  다음은 이승우의 소설 《강의》(2014)의 한 대목이다.
 
  〈자신이 수렁에 빠졌다는 걸 인지했을 것이다. 인지했으면서도 인지하지 않은 척했을 것이다. 인지하지 않은 척하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빠지면 달아날 수 없으니까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걸 빠진 다음에야 알았을 것이다. 나는 내 신발을 삼킨 오래전의 모래 수렁을 떠올린다. 내가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혹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했을까. 모래밭에 가지 않았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말라. 그것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같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곳에 빠졌다면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빠졌다면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아서 그곳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무슨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냥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래밭이 쑥 꺼지면서 내 발을 잡아당겼다. 그것이 전부이다.〉
 
 
  “콩트레스카르프 광장은 받아쓰게 할 수 없어”
 
그런 일들이 왜, 그리고 무슨 연유로 일어나는지, 또 설령 안 일어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일러스트=조선DB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은 예견된 것이라 해도 준비할 수 없는 일, 감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독한 불행이라 해도 말이다. 글쓰기에 비유한다면 ‘받아쓰기 할 수 없음’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일은 받아쓰게 할 수 있지만, 콩트레스카르프 광장은 받아쓰게 할 수 없어. 그곳에서는 꽃장수들이 거리에서 꽃을 염색해 염료가 포도 위를 흘렀고, 버스가 출발했고, 늙은 남자와 여자들은 와인과 질 낮은 마르크에 취해 있었지. 아이들은 추위로 콧물을 질질 흘렸고, 더러운 땀냄새와 가난과 카페 데 자마퇴르의 술주정과 발 뮈제트의 창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발 뮈제트 위에 살았다. 파리헌병대 기병을 자신의 방에 맞아들이고 말털 장식을 한 헬멧은 의자에 두던 여자 관리인 남편이 자전거 경주 선수였던 복도 맞은편 세입자, 그리고 그날 아침 치즈가게에서 로토를 펼쳐보고 남편이 처음 출전한 큰 경주인 파리 투르에서 3등을 차지한 것을 알았을 때 그 여자가 느꼈던 기쁨.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웃음을 터뜨리다, 그 황색 스포츠 신문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며 울었다.〉
 
  행·불행이란, 운명이란, 한 개인을 중심으로 오가는 것…, 콩트레스카르프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꺼번에 ‘받아쓰기’ 할 수 없지만, 관찰자(조물주)의 눈으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무슨 인과법칙으로 일어나는지 알 수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다. 그저 어마어마한 운명에 압도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필 ‘그’ 광장에 꽃장수가 있고, 포도 위를 적신 염료가 있으며, 때마침 광장에서 버스가 출발했고, 광장 카페 이곳저곳에서 취한 남녀, 술주정뱅이, 창녀들이 보이는데 그들 눈에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보이고, 여자 관리인 남편(포주), 세입자, 치즈가게에서 무언가를 펼쳐보는 남자,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터뜨리다 스포츠 신문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우는 여자의 모든 일이 순식간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왜, 그리고 무슨 연유로 일어나는지, 또 설령 안 일어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닥쳐올 현실 앞에 관대하고 겸손하게 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머리 위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칸트)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임마뉴엘 칸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에 관한 논의는 철학의 고전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운명은 올림포스의 신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아퀴나스는 인간이 특정 환경이나 원인에 의해 행동한다는 결정론을 지지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명론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며 ‘인간이란 자연에서 살아가면서 도덕법칙을 지켜내는 존재’로 보았다. 칸트는 자신의 묘비에 ‘내 머리 위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이라고 써놓았다. 인간은 필연적인 이유나 원인이 없어도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보는 자유의지를 지지했다.
 

  인간 운명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인류사의 오랜 논쟁거리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驛馬)》(1948)를 살펴보자.
 
  화개장터에서 주막을 하는 옥화는 아들 성기를 쌍계사로 보낸다. 성기의 사주에 시천역(時天驛·떠돌이 운명)이 들었다고 해서다. 그런 중 어느 날, 체장수 영감이 딸 계연이를 데리고 주막을 찾아왔다. 장삿길을 떠나게 됐다며 잠시 계연이를 맡긴 것이다. 옥화는 예쁘장하게 생긴 계연이 왠지 마음에 든다. 아들 성기와 결혼시키면 성기의 역마살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계연도 자연스럽게 성기의 시중을 들면서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는 우연히 계연의 귓바퀴에 난 사마귀를 보고 계연이 자신의 동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체장수 영감이 36년 전 자기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냈던 남사당패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맞춰주”
 
소설을 극화한 KBS TV문학관 〈역마〉의 한 장면이다.
  결국 옥화는 체장수 영감에게 모든 사실을 듣게 된다. 계연은 옥화의 이복동생이고, 성기와 계연은 조카와 이모 사이로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모두 나중 다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고, 처음은 그저 쇠뭉치로 돌연히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이 골치가 띵하며, 전신의 피가 어느 한곳으로 쫙 모이는 듯한, 양쪽 귀가 머리 위로 쫓긋이 당기어 올라가는 듯한, 혀가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듯한, 눈 언저리에 퍼어런 불이 번쩍번쩍 일어나는 듯한, 어지러움과 노여움과 조마로움이 한데 뭉치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의 그의 전신을 어디로 휩쓸어가는 듯만 하였다.(중략)
 
  성기는 두 눈에 불을 켜듯한 형형한 광채를 띠고, 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또 모르지만 한 번 알고 나서야 인륜이 있는듸 어찌겠냐.”
 
  그리고, 부디 에미 야속타고나 생각지 말라고 옥화는 아들의 뼈만 남은 손을 눈물로 씻었다.
 
  옥화의 이 마지막 하직같이 하는 통정 이야기에 의외로 성기는 도로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중략)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켜고 난 성기는 옥화더러,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맞춰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옥화는 아들의 떠돌이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쳤지만 “나 엿판 하나만 맞춰주”라는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무너짐을 알게 된 것이었다. 옥화의 몸부림이 바로 운명이다. 그렇게 막으려 했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성기는 떠돌이의 삶인 엿장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자신의 역마살을 받아들여 엿장수가 된 성기는 이후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행·불행 여부는 오직 신만이 알 테지만 여백을 채우는 상상력은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엿장수 성기’는 엿가락을 얼마나 잘 자를까. 맛있는 엿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여기서 성기가 유랑의 삶을 택한 것은 운명에 패배했다기보다는 순응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마》의 마지막 문장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서,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거의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이 되어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일어나는 좋은 일과 나쁜 일만 있을 뿐
 
  이충걸의 인터뷰집 《질문은 조금만》(2023)을 읽다가 시인 장석주와의 인터뷰에 눈길이 갔다. ‘오직 시를 쓰는 재능은 시를 쓰지 않는 재능보다 훌륭하다는 진실뿐’이라는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천부적인 재능이란,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낭만주의자들이 퍼뜨린 거죠. 시는 타고나야 됩니다. 근데 엄청난 자기 헌신 없이는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없어요. 뛰어난 시인들은 사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기를 갈고닦고, 뭉툭한 쇠붙이를 갈아 바늘로 만들었어요. 그게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도 자기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냈었지. “사람들은 제가 톡 건드리면 음악이 탁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중략)
 
  인생에는 많은 기회가 있지만 그 안의 의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일어나는 좋은 일과 나쁜 일만 있을 뿐.(중략)
 
  성장기에 가해지던 물리적 체벌의 시절, 누가 누가 매를 잘 견디나 경쟁하던 날들은 시대의 룰이자 사회 코드가 되어 아이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날랐지. 그러나 욕창 위에 자라난 사람이 학교 밖에서 마주한 것은 개인적 디아스포라, 통념에 겁먹지 않는 개별적 의식. 청춘이 도자기처럼 부서져 가도 로큰롤 무법자 정신은 따로 날뛰었다.〉

 
  운명이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수동적인 운명이란 결정론과 다름이 없다. 운명은 갈고닦는 것이다. 《역마》의 성기처럼 운명(역마살)을 받아들여 미친 듯이 엿가위를 돌려야 한다. 기막히게 엿을 잘라야 한다. 청춘이 도자기처럼 부서져 가도 로큰롤 무법자 정신으로 ‘날뛰어야’ 한다. 그게 위험하고 두려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날뛰어야’ 한다.
 
 
  매트리스에서 시작되고 끝난 것으로…
 
운명을 함부로 다른 이들이 읽게 해선 안 된다. 함부로 평가하고 밑줄을 긋게 해서도 안 된다. 운명을 난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러스트=조선DB
  누구의 인생은 어쩌면 장편소설로 채울 수 없을 만큼 방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의 인생은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이세은의 소설 《달로 간 파이어니어》(2014)처럼 이렇게 묘사될 수도 있다.
 
  〈사건은 반지하 원룸 한가운데 있는 매트리스에서 시작되고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매트리스에서 시작되고 끝난’ 삶을 살아선 안 된다. 그게 운명이라고 해도 이런 한 줄 요약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강요하면 마땅히 거부하고 ‘날뛰어야’ 한다.
 
  이장욱의 소설 《우리 모두의 정귀보》(2014)는 ‘나’이면서 ‘우리’의 평범한 이야기다. 소설 속 정귀보는 놀랄 만큼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특징도 약점도 장점도 없는 삶.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 심각한 원한을 산 적도 없고, 특별한 인생관을 가진 적도 없으며,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추구한 적도 없다.
 
  〈그즈음 나는 평전 집필을 중단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정귀보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계약금을 받은 마당에 무책임하고 성급한 판단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은영의 소설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2013) 속 ‘그녀’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되려면 다양하고 기묘한 일을 경험해야 한다고 으레 믿고 있다. 일찌감치 성질이 고약하거나 최소한 ‘인명 구조요원 자격증’이라도 있어서 바다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식이다.
 
  〈자신이 평범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작가가 된다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가장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녀는 평범하지 않았지만, 흔히 사람들이 글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질들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정귀보’일지 모른다. 때로 평범하고 운명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남들의 이목을 받기 위해선, 무언가의 특출한 노력과 놀라운 결과물을 지녀야 하지만, 남들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해 보이고 소박해 보인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 보여도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그 생(生)은 부질없어 보이고 쓸데없어 보인다. 운명은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운명을 함부로 다른 이들이 읽게 해선 안 된다. 함부로 평가하고 밑줄을 긋게 해서도 안 된다. 운명을 난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읽을 수 없는 책 같은 삶
 
  김미월의 소설 《내 서재의 특별한 책 한 권》(2013)에 나오는 문장이다.
 
  〈하지만 어쩐지 읽을 수 없는 책이라서 오히려 어떤 아우라가 서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해될 수 없는 시에는 오히려 어떤 명예가 있다. 그렇게 말한 이가 누구더라? 엘리엇이었나? 보들레르인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지만 읽을 수 없는 책은 여전히 책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또 누구지? 동구권 작가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략) 내 서재의 특별한 책 한 권. 이보다 더 특별한 책이 어디 있겠는가. 읽을 수 없는 책, 읽은 적 없는 책, 그러나 여전히 책인 책.〉

 
  저마다의 인생, 타인이 쉽게 읽을[대할] 수 없는 사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없는 사람, 꼴불견이고 못생겼으며 지지리 가난해도 여전히 미스터리인 사람, 어제도 ‘그’이면서 오늘도 ‘그’지만 내일은 알 수 없는 ‘그’가 되어야 한다. 읽을 수 없고, 읽은 적이 없는데도 여전히 책인 그런 운명을 살아야 한다.
 

  가톨릭 신부(神父)이자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의 책 《사랑한다면 투쟁하라》(2008)의 뒷장에 적힌 표사(表辭)를 소개한다.
 
  〈이 책에 완전한 남자는 없다. 그들도 에움길과 오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배워라.
 
  쓰러짐이 대수가 아니다. 쓰러졌다면 일어서라. 싸우는 한 언제든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상처를 피하지 마라.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남성적 힘과 만나라. 열정과 만나라.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과 싸워라. 싸우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하라. 사랑하거든 투쟁하고, 투쟁하면서 사랑하라.〉

 
  운명을 등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안셀름 그륀의 말처럼, ‘사랑하면서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열정과 만나야 한다. 열정은 꿈꾸는 일, 싸우는 일, 사랑하는 일과 연결돼 있다. 사랑하거든 투쟁하고, 투쟁하면서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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