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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2〉 나를 바보 같다 히죽거리는 이들에게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날리면 알게 되는 것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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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 그리고 죽어라.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 난 그대들이여!
⊙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발자국 하얗게 지우면서
‘지금은 나이 더 들어 뒷골목을 걸으며 저 초라한 이들의 집들을 대단타 바라보네.’ 벽화로 단장한 동네 골목. 사진=조선DB
  20세기 미국의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1963년)의 시선집인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2021)를 손에 들었다. 현대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시인이란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더 젊었을 때는
  뭔가를 이루는 게
  중요했지.
  지금은 나이 더 들어
  뒷골목을 걸으며
  저 초라한 이들의
  집들을 대단타 바라보네,
  삐죽삐죽 선이 안 맞는 지붕,
  오래된 닭장 철조망과 재,
  못 쓰게 된 가구들이
  잡다하게 들어찬 마당,
  울타리, 통나무 널빤지와
  상자 조각들로 지은
  바깥화장실, 그 모두를,
  고맙게도 말야,
  적절히 풍화된
  푸르스름한 초록 얼룩이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나를 기쁘게 하네.
 
  이것이
  이 나라에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목가’ 전문(정은귀 옮김)

 
  세월이 흘러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청춘이 지나고 머리가 희끗해지면 그제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 차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물론 주머니의 무게는 다를 수 있겠지만, 서로 비슷한 상태에 다다른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은 뜨개질처럼 한 땀 한 땀 완성할 때까지 무슨 형상을 갖게 될지 아무도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1804~1869년)가 쓴 〈눈부신 빛무리[暈輪]〉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인생이란, 처음 출발할 때에는 하나의 커다란 수풀, 하나의 미궁(迷宮), 이리저리 길이 엇갈린 미로(迷路)와 같다. 무수한 길과 길은 서로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온갖 착오(錯誤)를 거의 다 경험하고 나서 미로도 그 종점이 가까워지고 보면, 모두가 다 거기에서 만나기로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하나의 공지(空地)로 모여든다.
 
  인생은 누구나 다 성숙을 문제 삼아야 할 때가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부분은 경화(硬化)를 일으키고, 어떤 부분은 부패해간다. 참으로 원만하게 성숙해가는 부분은 많지 않다. 인생의 후반기로 접어들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결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띄기 훨씬 그 전부터 우리 내부에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동안에는, 청춘시대의 자존심과 예절에 의해서 가려져 있었는데, 예절이 없어지자 별안간 그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되면 보이는 것들
 
‘종이로 만든 학’ 등(燈) 앞에서 학생들이 기도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어쩌면 ‘공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될지 모른다. 사람의 표정 속에, 다문 입가에, 주름진 이맛살에 새겨진 나이 듦의 품격을 말이다. 그 품격은 젊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저녁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되면 보이는 것들이다. 깜깜한 밤, 무릎을 꺾고 나서야 우리의 화장 지운 민낯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얼굴에 사람의 지혜가 묻어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한 가지 더. 외교관들이 좋아하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을 연장시킬 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선 성공이다.’
 
  왜냐? 그만큼의 희망을 번 것이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니까. 아직 시간이 있다!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말이 또 있을까. 2023년,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한 해를 넘기기 전에 당장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아미엘(Henri Frederic Amiel·1821~1881년)에 따르면 운명은 두 가지 형식으로 우리를 파괴한다. 원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혹은 원하는 것을 들어줌으로 우리를 파괴시킨다. 그러니 파괴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시간이란 섭리에 순종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인 이성복의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시가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2014)를 펼쳐 보았다. 시인은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위안이 뭐가 있을까’라고.
 
  시인은 또 ‘나든 남이든 속이는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까발려야 한다’고, ‘빈대 한 마리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날리는 것과 같은 강박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삶에 당당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을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일까.
 
  〈― 열성적으로 가르치시는 것 같은데요.
 
  “내 깜냥보다 목표를 높게 잡아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안 해도 좋다는, 완벽주의 비슷한 방침이지요. 학생들은 주눅이 들겠지만, 내가 나 자신을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식으로 학생들을 몰아갑니다. 학생들이 건성으로 만족하는 것은 두고 못 봅니다. 칭찬도 안 합니다. 나는 카프카나 키에르케고르처럼 냉정하고 엄격합니다. 거짓은 편안하고 진실은 끔찍합니다. 하시딤의 선생 중에 코츠크라고 있는데, 아주 엄했지요. 그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진실이 무덤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괴테나 베토벤이 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위안이 뭐가 있을까요. 이것이 내 글쓰기입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나든 남이든 속이는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까발려야 다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카프카한테 배운 것이지요.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날리는 것과 같은 강박증이지요. 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잘 안 됩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때론 실눈을 떠야 보이는 것은…
 
빙허 현진건의 집필 공간이었던 서울 부암동 옛집의 2002년 모습이다. 폐가로 방치되다 철거되었다. 사진=조선DB
  인생은 질서 정연한 빛무리가 아니다. 때로 초가삼간 날리는 강박증으로 대해야 겨우 보이기도 한다. 강박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반어적인 상황을 맞닥뜨려야 뭔가의 정체가 드러난다. 때론 실눈을 떠야 드디어 윤곽이 보이기도 한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
  현진건(1900~1943년)의 단편 〈운수 좋은 날〉 (1924)에서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랜만의 행운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앓아누운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다 줄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아침에 나올 때 아내가 “오늘은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던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김 첨지는 계속되는 행운에도 점점 불안해진다.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김 첨지는 불러도 대답 없는 아내의 ‘불길한 침묵’에 역정을 낸다.
 
  〈“이런 오라질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치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뭇등걸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때에 빽빽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개똥이가 물었던 젖을 빼어 놓고 운다. (중략)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김 첨지는 아내의 죽음을 거부하며 강압적이고 과장된 행동으로 자신의 불안감과 자책감을 억누르려 한다. 하필 ‘운수 좋은 날’에 아내는 죽음에 이른다.
 
  우리 삶은 왜 아이러니여야 할까. 김 첨지가 “안 죽었어. 안 죽었대도 그래!”라고 화를 내며 소리를 질러보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가삼간을 다 날린 다음에야’ 김 첨지는 깨닫는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을.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육필원고. 사진=영인문학관
  김 첨지의 이런 자책은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1964)의 덜컹거리는 버스 속에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는 팻말을 보며 느꼈던 ‘나(윤희중)’의 부끄러움과 닮아 있다.
 
  무진은 우리의 비정한 현실, 삶과 죽음, 그리고 현실과 꿈, 혹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혼돈의 공간을 의미한다.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안개야말로 아이러니한 생의 ‘공지’다. 안 보여 답답할 때도 있지만 보이지 않아 좋을 때도 있다. 사람도 겉만 봐선 알 수 없다. 열길 물속보다 더 짙은 사람의 안개와 만날지 모른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안개 속에선 더 가까이 다가가야 보인다. 무엇을? 타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우리 삶이, 삶의 진실이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의미를 찾을 수도 없다. 찾기도 어렵다. 그냥 흘러가는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흘러갈 법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문학이다. 포착하지 않으면 ‘생의 빛무리[暈輪]’는 흩어져버린다. 알 수 없는 인생을 포착함으로 삶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서정인의 소설 〈강〉
  서정인의 소설 〈강〉(1968)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제각기 다른 인물이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을 보고 ‘이씨(세무서 주사)’는 싸구려 색안경으로 사치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김씨(늙은 대학생)’는 장님을 떠올린다. 한때 장님이 되어 검은 안경을 쓰고 안마장이 노릇을 하는 상상에 사로잡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씨(전직 초등학교 교원)’는 자신에게 뇌물을 받던 형사가 생각난다.
 
  이 세 사람이 군하리행 버스를 탄다. 창밖으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이들은 모두 상념에 잠긴다. 모두 같은 곳에 하차한다. 혼삿집에서 군하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버스가 끊겼다. 박씨와 이씨는 작부의 술집으로 가고 김씨는 혼자 여인숙에 눕는다.
 
  술집에선 술판이 벌어지고 술집 여자는 이씨에게서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는다. 김씨를 데리러 여인숙에 온 여자는 새우잠을 자는 김씨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남폿불을 끈다.
 
‘밖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사진=조선DB
  〈(김씨는)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자고 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낮에 본 사람이 분명하다. 대학생! 그녀는 살포시 김씨의 어깨를 밀어서 바로 눕힌다. 넥타이가 목에 켕기는지 턱을 좌우로 흔든다. 츳, 츳, 옷두 벗지 않구. 가엾어라.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넥타이를 풀고, 이불을 젖혀서 바지를 벗기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요를 바로 펴고…. (중략) 베개를 바로 베주고 그대로 엎드려서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학생!
 
  남폿불이 피시식 소리를 낸다. 그녀는 일어나서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벽에다 건다. 남포는 호야가 시커멓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위에서부터 남포 호야 속으로 살며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김용택의 시집 《그 여자네 집》
  고된 우리 삶은 변하지 않는다. 내일 태양이 거꾸로 뜨지 않는다. 갑자기 주머니가 두둑해질 리 만무하다.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도 없다. 비극적인 운명을 그대로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생을 밝히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 필요한 게 아니다.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눈이면 충분하다. 잠시 잠깐, 우리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는 눈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이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상상만으로 즐겁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시를 외우는 것도 잠시나마 그런 함박눈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용택의 시 ‘그대 생의 솔숲에서’를 가만히 읊어본다. 시집 《그 여자네 집》(1988)에 실렸다.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김용택의 ‘그대 생의 솔숲에서’ 부분

 
 
  안동 헛제삿밥 같은 것들…
 
김종길의 시선집 《솔개》
  시인은 ‘솔숲’에서 상수리나무의 묵은 잎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것을 보며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잎이 진다고 생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잠시나마 과거의 삶을 내려놓는 기분에 잠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기분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생이 벅찰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김종길의 ‘솔개’를 큰 소리로 읽어본다. 잠시나마 정신이 번쩍 드는 시다. 이 시는 시집 《달맞이꽃》(1997)에 실렸다.
 
  시적 화자는 구국 항일 운동에 몸을 바쳤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년)의 고택인 ‘임청각’이 건너다 보이는 곳[경북 안동]에 서 있다. 근처에 이육사(李陸史·1904~1944년)의 시비도 있다.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김종길의 ‘솔개’ 전문

 
화엄사 홍매화. 사진=신윤철 작가, 화엄사 제공
 
이구락의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
  가만히 보면 육사와 석주의 정신적 풍모를 기리는 작품인데 현실에 안주하는 ‘헛제삿밥’ ‘따뜻한 아랫목’ ‘학’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육사나 석주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삭풍의 하늘을 올려다볼 수는 있다. 올려다봐야 솔개와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알 게 된다. 생의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이란 것을. 진실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 없다.
 
  굳이 육사나 석주, 혹은 솔개를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 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늙은 매화’면 충분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화엄 세계를 선홍의 매화로 완성할 수 있다. 이구락의 ‘야단법석’을 읽어본다.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2022)에 실렸다.
 
  돌담에 기댄 노구 일으켜 세우며
  늙은 매화가 내보인 빛깔이다
  선홍의 저 화엄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혼자 졸던 동백이 구경 삼아 내다보는, 화엄사 흑매
  봄날 노고단 아래서 벌어지는 한때의 야단법석
 
  -이구락의 ‘야단법석’ 전문

 
 
  그대 모르는 사이 해치우는 설거지처럼…
 
황동규의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생이란 늙은 매화에 잠시 반하듯이 찰나의 의미 찾기일지 모른다. 의미가 금세 사라지더라도, 사라질 수밖에 없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황동규의 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에서처럼 사랑은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설거지와 같다.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물비누로 정갈히 씻는 것’이면 충분하다.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에 실렸다.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질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도 없이.
 
  -황동규의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전문

 

  인생은 거창하게 성찬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인생에선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 보다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을 조금 열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많이’ 열어놓지 않아도 된다. 아주 조금이면 충분하다. 창문을 열어놓아야 ‘우리 모르는 새’ 자란 ‘새파래진 언덕’이며 ‘샛노란 유채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땅의 가슴이 간질이기 시작한’ 봄을 처음 느껴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아무리 마음 깊이 배려해도 어떤 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주 작고 소용없이 보이는 사소한 말 속에 상상도 못 할 진실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윳빛 창을 조금 열어놓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창문을 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슨 악의에서 나오는 말에만 정신이 팔린 채 분개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가라, 그리고 죽어라.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 난 그대들이여!
  가라, 그리고 괴로워하라. 반드시 괴로움을 겪어야 할 그대들이여!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할 바를 다하기 위해서다. 괴로워하라, 죽으라, 그러나 그대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인간이 되라. 한 사람의 인간이 되라.
 
  -로맹 롤랑의 ‘창문을 열어라’ 일부

 
장영수의 시집 《한없는 밑바닥에서》
  일부러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는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법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지 모른다. 언제 배웠을까. 장영수의 시 ‘묵상’을 소개한다. 시집 《한없는 밑바닥에서》(2000)에 실렸다.
 
  천주교 수위 시절
  밤중에 수녀관 담에서
  나를 부르던 찬모 아줌마
  그 뜨거운 옥수수빵 한 조각에
  나는 이 세상 사랑을 배웠으니
  일일이 열거해 무엇하리오
  사랑의 원천은 그렇게 나를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라
  여기는 나를 바보 같다고
  못난이들이 희죽거릴 때에도
  나는 그런 분들을
  흉내내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수의 ‘묵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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