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되어라
⊙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자기 두레박 없어도 함께 두레박 쓸 수 있는
⊙ ‘바위 위 이끼가 되자’… 딱딱한 바위를 초록으로 덮어 생명이 싹트게
⊙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8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자기 두레박 없어도 함께 두레박 쓸 수 있는
⊙ ‘바위 위 이끼가 되자’… 딱딱한 바위를 초록으로 덮어 생명이 싹트게
⊙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8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의 이어령. 1990년 12월 19일, 17년 만에 부활된 청룡영화제에 참석해 이어령 장관이 수상자들에게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상민, 최진실, 이 장관, 원미경, 안성기, 최민수, 황신혜) 사진=조선DB
한국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아요. 닭살 돋고 낯간지러워 절대 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런 말을 안 쓰는 거예요.
서양 사람은 내(I)가 너(you)를 사랑(love)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은 벌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너와 내가 하나, 한 몸이 되는 건데 나와 너를 따지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랑해” 이러지 “내가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 고백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해요. ‘나, 너’를 빼고 그냥 “사랑해”. 사실 그것도 상당히 발전한 거예요.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해서 구혼할 때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니캉 내캉 함께 살자”라고 말했어요. 참 좋은 말이죠. 너와 내가 함께 살자! 살자는 건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동안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찾는 거였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그러고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팔도마다 다 틀려요. 그러니 찾는 과정이 어렵지요. 어렵지만 즐겁기도 하고요.
경상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디져도 그런 말 몬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거시기 혀!”, ‘널 죽도록 사랑해’는 “오메 거시기 혀!”. 또 다른 버전으로 “니가 오살나게 좋아브러”.
충청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임자밖에 서” 혹은 “꼭 말루 허야 하남”이죠. 충청도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 “뭐여…”라고 말하고, 기분 나쁠 때는 “뭐여!”, 짜증 날 때도 “뭐여!!”라고 하지요. 이처럼 같은 의미라도 쓰이는 방식,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사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 일일이 ‘찾아가는’ 것이지요.
# 문화부 장관 시절, ‘갓길’ 이야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표시’ 또는 ‘갓길 없음’ 표시가 나오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그것이 내가 만든 말이에요. ‘갓길’. 그래서 내 별명이 ‘갓길 장관’이 되었어요. 문화부 장관 하면서 뭘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고속도로 타고 가다 보면 ‘아, 내가 그래도 이름 하나는 바꿨구나’ 싶어요.
갓길은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한다면서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니,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 막 이런 어색한 말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저항감을 느껴 결국 바꾸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갓길은 입에 착 붙어요. 내가 그 이름을 짓기 전에는 노견(路肩), 혹은 길어깨라고 했어요. 노견이라고 하니까 무슨 길거리 개(路犬)을 말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막 욕하니까 그다음으로 제안된 이름이 길어깨였어요. 노(路)가 길이고 견(肩)이 어깨니까 길어깨. 노견과 함께 길어깨라는 이상한 이름이 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국무회의에서 “그 길을 ‘노견’이나 ‘길어깨’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당시 행정용어 표기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는데 내무부에서 갓길 통행 과태료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였어요. 사실 갓길은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가 그 길을 달리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길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관들이 “그건 당신 소관도 아닌데, 문화부 장관이 왜 나서냐, 그리고 길도 아닌데 갓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더 길로 착각하고 달릴 것 아니냐”며 반대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죠.
갓길의 기적, 《행정용어순화편람》(1992)
“‘길갓집’을 생각해봐라. 길갓집은 길의 가에 붙어 있는 집이지, 길 위에 있는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갓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게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장관회의가 아니라 나라 살림에 관한 회의다. 그 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온 사방에 다 붙을 건데, 그 글자는 문화에 관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막 밀어붙여서 결국 내무부에서도 ‘갓길’로 이름 붙이게 된 거예요. 갓길. 가에 있는 길, 갓길.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말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만든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써온 말 같지 않아요? 일제 시대 때 발행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찾아봐도 갓길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였지만 순우리말이어서 쓰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노견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과거엔 고속도로 표지판에 〈노견주행 엄금〉이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 ‘Road Should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자로 옮겨 만든 용어죠. 1960년대 정부 행정용어로 노견이란 한자어 대신 같은 의미의 길어깨라고 쓰기도 했어요. 1982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길어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론 길어깨로 쓰면서 표기는 노견이라 적고, 뒤죽박죽 써온 것이지요.
그러나 갓길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워서 써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착되었어요. 노견이 갓길로 바뀐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일제식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는데 갓길이 마중물이 된 셈이지요.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습니다. 앞서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죠.
어문 관련 단체 등 71개 기관에서 순화 대상 용어를 수집하였어요. 이렇게 모은 8673개 용어를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쳐 1차로 최종 확정해 《행정용어순화편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편람에 들어간 사례는 이렇습니다. 그땐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썼을까 싶어요.
고오바이 → 오르막·물매·비탈길
가께소바 → 메밀국수
가꾸목(角木) → 각목·각재
가도(假道) → 임시도로·임시통로
가리방 → 줄판
도선장(渡船場) → 나룻터
브로슈어(brochure) → 안내서
쇄정(鎖錠)하다 → 잠그다
시건(施鍵)장치 → 잠금장치
오시핀 → 납작못
영세민 → 저소득층
잠업(蠶業) → 누에치기
재식(裁植)하다 → 심다
절석(切石) → 마름돌
품신(稟申)하다 → 건의하다
핫 라인 → 직통전화
마을 입구 정자목, 쌈지공원, Vest Pocket Park
내가 만든 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주택가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을 만들어 ‘쌈지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3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쌈지공원이 수천 개 있어요. 과거 농촌 등 집단 거주지의 중심지나 마을 입구의 정자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생적인 소공원 형태의 ‘농촌 공동쉼터’를 도시에 정책적으로 적용시킨 것이죠.
‘쌈지’라는 건 작은 주머니를 말하는 우리말이에요. 작은 공원을 그냥 흔하고 평범하게 ‘작은공원’이라고 하지 않고 쌈지공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구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공원이 많아요.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하이트(Hudson Height)라는 곳이 있어요.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이죠. 이 지역에 3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는데 차가 빨리 지나가 보행자들이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됐었죠. 거기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켓공원이라 부릅니다. 이 포켓공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은 알아서 속도를 줄이게 됐죠. 또 포켓공원과 연계해 횡단보도도 훨씬 넓어져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받게 됐어요.
도시 소공원(Vest Pocket Park)은 조끼주머니(Vest Pocket)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지만 요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인데 우리로 치면 바로 쌈지공원을 말합니다. 쌈지공원은 ‘the Vest-Pocket Park’의 순수한 한국적 표현으로 도심지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저소득층 고밀주거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복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습니다.(이은기의 〈도심지 쌈지공원의 이용 후 평가 및 개선방안〉 참조)
또 서울시에 ‘자락공원’이 있어요. 서울에는 크고 이름난 산이 많잖아요. 그 산과 평지의 접경지역에 공원을 만들고 자락공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치맛자락을 생각해보세요.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산이 치마를 입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또 ‘자락’은 치맛자락의 자락이기도 하지만 끝자락의 자락이기도 해요. 산의 끝자락, 주거지의 끝자락. 그 양쪽의 끝자락이 겹친 곳에 자락공원을 만드는 거죠. 산과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어지지 않으면 산은 섬처럼 고립돼요. 도시인의 생활반경에 산을 끌어들이는 거죠.
안상수체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
내가 장관이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이 막 민간으로 넘어올 때니까 중앙정부는 아직도 권위주의에 가득 차 있었어요. 서류나 문서는 모두 교과서의 글씨체처럼 딱딱한 명조체로 쓰고 그럴 때 나는 문화부의 모든 글씨체를 안상수체로 바꾸어버렸어요.
글자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디자인 아닌가요? 이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사람들이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이 있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널리 쓰이면서 날개를 달았죠. 통치계급, 즉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쓰는 서체의 권위가 무너졌어요.
서체의 변화가 문장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이루지 않았을까요? 또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면서 높다란 정부의 문턱도 낮아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권위주의를 깨고 좀 부드럽게 하고 싶어서 문화부 앞에 바람개비를 붙여놓기도 했지요. 우리가 바람개비 가지고 놀 때,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뛰면 바람이 없어도 바람개비가 돌아가잖아요. 바람이 없다고 탓하지 말고 스스로 뛰면 바람개비는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러자 어떤 장관이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중앙청이 권위가 있어야지. 문화부가 바(bar) 같아요. 뭐 거기다가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그럽니까?”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참 기분이 나빴어요. 중앙청의 청(廳)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고, 거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등청(登廳)한다고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데 중앙청으로 오는 사람들은 등청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을 쓰는 곳에 막 바람개비를 붙여서 돌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관리들이 그렇게 불평을 하는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어요.
“성공했네! 사람들이 bar로 알았으면 성공했네. 그러면 사람들이 막 들어올 거야. 우리한테는 그 문턱이 높았지만, 이젠 그냥 별 사람 다 들어올 거 아니야. 밤에도 들어올 거 아니야.”
# 문화부 슬로건1 부뚜막 위 부지깽이
그때는 관청에서 내거는 슬로건이 보통 ‘협조와 평화와 뭐…’ 이런 식이었어요. 관념적이고 한자 투의 말이었죠. 사실 슬로건은 지금도 그렇긴 하죠. ‘진보와 평화’ 하는 식으로. 내가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문화부의 슬로건이 뭐였는지 알아요?
첫 번째,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
부뚜막 위 부지깽이. ‘부’자 두음이 반복되니까 음운율이 생기죠.
부엌에 가면 놋그릇, 은그릇 같은 귀중품도 있고 식칼, 도마 같은 필수품도 있고 그중 제일 천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부지깽이는 밤낮 불에 타요. 끄트머리를 불태워가며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나면 다시 끄고, 다시 또 타고. 여러분이 특수한 사람은 못 되어도 부지깽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남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 불은 못 되더라도 불을 붙여주는 것이 부지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가장 천한 것이지만 또 가장 요긴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불을 붙여주는 부지깽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부지깽이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아무 나뭇가지나 하나 꺾으면 다 부지깽이로 쓸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가 막힌 발명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못 될지는 몰라도, 다들 부지깽이는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우습게 알지만, 부지깽이가 있기 때문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부엌에 식칼부터 은그릇까지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제일 하찮아 보이는 부지깽이, 심지어 무엇이나 될 수 있고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부지깽이예요.
그러니까 긴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라는 거죠. 자기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돼라, 공무원이 뭐냐, 너희 스스로 불이 되려 하지 마라, 너희가 밥이 되려 하지 마라, 밥 짓고 요리할 때 밑에서 자기를 그슬려가며 부지깽이처럼 봉사해라.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불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불을 이용하게 된 것도 부지깽이 덕분입니다. 사냥한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요.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불쏘시개 작대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꼭 필요한 물건이죠. 부지깽이로 이글거리는 불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을 겁니다. 따스함을 느꼈을 겁니다. 불 앞에 모여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 별을 보며 처음으로 신화(神話)라는 꿈을,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테지요. 종교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인이나 소설가로 부르는 사람 역시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별을 올려다본 최초의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불쏘시개,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요?
태초에 부지깽이를 든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 사이를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 모습 속에 견우직녀 설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이냐고요. 그런 농담 있잖아요.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마디로 줄이면 ‘뚝!’이 된다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다양한 분야의 봉사를 표현하는 게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예요. 봉사자 중에서도 문화 봉사자니까 그냥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계에 불을 붙이는 봉사자가 되어, 시인에게 불을 붙이고, 연극계에 불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문화부가 잘 되면 환하게 불이 탈 거 아니겠어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문화부라 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불이야’라고 하면 돌아볼 거 아니겠어요. 불이 났으니까.
# 문화부 슬로건2 우물가 옆 두레박
두 번째 슬로건은 우물가 옆 두레박이에요.
두레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두레박은 우물가에 하나를 공용으로 놔주기만 하면 그다음에 오는 사람이 손쉽게 물을 떠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두레박이 있어야 해요. 두레박 없이는 우물물을 길을 수 없어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전승돼온 것이 두레박일지 몰라요. 두레박이 없었다면 우물을 파지도 못했을 것이고 강가나 개울 곁에서만 살았을 겁니다. 두레박이 있었기에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었고 공동으로 우물을 쓰며 집단을 이루고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융단’이라면, 두레박은 ‘하늘이 내린 그릇’ 아니겠어요? 우물이 ‘집안의 작은 바다’라면 두레박은 ‘바다와 땅을 잇는 엘리베이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두레박을 자기 것 들고 가서 쓰고는 내 것이라고 싹 챙겨 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우물터에 갈 때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못난 짓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어쩌고 하는 이런 위선적인 말 대신, 모두가 쓰는 우물터에 내가 물 떠먹은 두레박을 안 가져가고 놔두는 그런 작은 선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거면 모든 동네 사람이 자기 두레박이 없어도 하나의 공동 두레박으로 편하게 쓸 수 있잖아요.
그 두레박과 같은 것이 문화시설이에요. 극장 하나 지어 놓으면 거기 와서 누구나 연극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화시설, 소위 문화 인프라를 우리가 만들자는 거죠. 부지깽이가 되어 문화에 불을 붙이고, 그 불 붙은 문화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부가 할 일이에요. 문화를 융성시키고 불 붙이는 일!
그런데 아무래도 후퇴한 것 같아요. ‘문화융성위원회’(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문화 융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 자문기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와 같은 어려운 말을 쓰잖아요. 내가 이미 몇십 년 전에 ‘부지깽이가 되자’라고 했는데 그게 융성(隆盛)이에요. 불 붙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그냥 ‘문화에 불 붙이자’ 하면 진짜 불이 붙을 텐데, ‘융성’이라고 하니까 이게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아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름 잘 붙인 거예요. 그래야 뭐가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부지깽이, 두레박 이러면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미심쩍어해요. 사람들은 묵직해야 쫓아오지 가벼우면 안 쫓아와요. 이해하긴 참 쉬운데도.
# 문화부 슬로건3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세 번째,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우리가 바위를 깰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있죠. 문화는 도저히 정치·경제를 못 깨요.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못하듯. 비유를 하나 해볼까요? 지금 맹장염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당장 수술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런데 또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고 해서 어디가 터져서 죽어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화는 밤낮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뭐라고 해요? 늘 “그거 다음에 하자”라고 말씀하시죠. 먹고사는 것, 그러니까 정치·경제·사회가 우선이지 문화는 밤낮 뒷전인데, 그 뒷전인 문화부의 장관이 뭘 할 게 있었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한강유역 정비가 잘 되기 전의 이야기예요. 여름만 되면 한강 부근에서 홍수가 나서 마포 일대에서 이재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강 다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했죠. 그러자 대통령 주재하에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를 열었어요. 내무부는 치안을 담당하고 보사부는 의약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각 부처마다 그런 재난 상황에 해야 될 역할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국방부는 국군장병들을 동원해 긴급 재난 구호 봉사를 하고요. 그런데 문화부는 뭘 하라고 시키는지 들으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 국무회의 끝까지 계속.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나서 이재민이 나왔을 때 문화부가 뭘 하겠어요. 잘 해봐야 합창단 데리고 가서 힘내라고 공연하는 건데 잘못하면 뺨 맞아요.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너희는 지금 신난다고 노래하고 춤추냐? 안 그러겠어요?
“이끼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어. 그게 문화”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건 정치·경제·사회 같은 바위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딱딱한 바위를 덮는 이끼는 될 수 있죠. 이 메마른 정치·경제·사회를 깰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노래, 시로 감동시켜 생명의 이끼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 딱딱한 바위에 초록색 이끼가 돋아나는 거 보세요. 기가 막히잖아요?
이런 게 기적이죠. 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딱딱한 바위를 초록색 부드러운 이끼로 다 덮어서 생명이 거기서 싹트게 하니 기적이지요.
이끼는 원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끼는 3억5000만 년 전 최초로 육상 생활에 적응한 식물군이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나라에서만 700여 종이나 된다고 해요. 집 주변의 돌담이나 그늘지고 축축한 마당, 습기가 많은 숲 속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흙이 무너지거나 공사 등으로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죠. 과거 유럽에서는 침대의 속재료와 건축 재료로 사용했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인들은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등 세상에 이롭게 사용됐어요. 지금도 이롭게 쓰입니다.
1995년에 서울에서 이끼가 사라지자 산림청에서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어요. 산성비 때문이지요. 이끼는 대기 및 토양 오염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도시 내 미세먼지 저감 솔루션인 ‘SH 스마트 이끼타워’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고 합니다. 이끼와 바람을 이용해 주변 약 50m 내의 미세먼지 흡착률을 높여 공기정화 효율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됐다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처럼 이끼만큼 이로운 게 없어요. 저 거대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바위를 덮을 만한 이끼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막에 가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게 문화예요. 그래서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게 내가 장관 재직 시절 내건 문화부의 세 번째 슬로건이었어요.
# 우리말을 낡고 옛날 것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그렇게 세 가지를 문화부 슬로건으로 내걸었더니 신문에서 문화부를 공격하기를, ‘요즘 이 아무개가 문화부 장관이 되더니 중앙청과 문화부 내에 고어(古語)가 난무한다’라는 거예요. 옛날 말이지만 이게 우리말인데, 사람들은 고어, 그러니까 고려 시대 때 말인 줄 알아요.
그 당시로 치면 21세기가 이제 곧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와서 지금 부지깽이니 두레박이냐는 거죠. 그 사람들은 부지깽이가 뭔지 몰랐나 봐요. 그러니까 고어라고, 나더러 옛날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놀음을 한다고 공격했겠지요.
그러나 우리 것은 맨날 낡고 옛날 거예요? 우리 것이 미래가 되면 안 됩니까?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손가락의 투구인 골무,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인 다듬이, 머리의 언어인 갓, 누워 있는 악기인 거문고, 현재 세계인의 고랑을 파는 호미, 한국인 손으로 빚어진 진주이자 다이아몬드인 나전칠기… 한국인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그려낸 별자리가 있어요. 그건 낮엔 안 보일지 몰라도 밤이 되면 밝게 빛납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안 보일 뿐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지깽이와 두레박은 버리거나 잊힌 것들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지만 별자리와 그 전설의 이야기들은 민족과 나라에 따라 다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천시하거나 잊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을 보면, 이것저것 붙여놓고 다시 말을 줄여놔서 뭘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건배사로 “나가자!” 그러기에, 나는 어디로 나가자는 말인 줄 알았더니 ‘나라와 가정을 사랑하자!’라는 말을 줄인 거라더군요.
지금 한글 세대들이 쓰는 한글에는 새로운 조어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몰라요. 이게 《혈(血)의 누(淚)》(‘피눈물이 난다’는 의미)라던 사람들이 한글 전용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문화부 장관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것들을 고려 때 이야기인 줄 알고 고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문자로 봤을 때 한자 세대로 시작해 일어 세대를 거쳐 한글 세대로 왔는데, 이 한글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 세대로, 또 한자 세대로 가고 있어요.
외국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바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죠.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 속에는 서구적인 사상이 있지만 그 속에 동양적인 전통이 담겨 있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속에는 거꾸로 동양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속에 또한 서구적인 사상까지 내포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이며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고정된 지역적 편견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시대 문화의 생명은 극히 짧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한 시대(시간), 한 지역(공간)이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만 안목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문학에서 고전적 작품이라는 것은 무수한 공간을 꿰뚫고 확충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존속시켜온 작품을 뜻합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타임리스(timeless)에 있습니다. 《햄릿》이 덴마크인이라서, 왕자라서, 고대인이라서 유명한 게 아니라 인물 속에 인간 총체의 한 비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덴마크 왕실의 인간들만 흥미를 갖는 인물로만 그려졌을 거예요.
당대에만 유행하는 사조, 뿌리가 없는 전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곧 잊히고 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은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요.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이의 지적(知的) 연맹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까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에서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풍토(風土)라는 한자를 쉽게 배워요. 우리말을 찾는 것이 곧 한자를 배우는 일이 된 거죠.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월간조선》 2022년 9월호 참조)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는 저의 실화입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쓸 수 없는 차를 민간에 불하해줬어요. 그럼 언론사들이 그 차를 불하받아 차체의 카키색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정도의 개조만을 거쳐 썼거든요. 책에서 내가 타고 있던 차도 그런 차였어요. 그 차를 타고 고향을 갔다가 오는 길에 본 장면인 거죠.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고개라는 게 뭘까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보세요. 그게 고개 노래잖아요. 각지의 아리랑마다 가사는 다 달라도 후렴은 똑같거든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게 해주시오, 고개를 넘어가세요, 넘지 마세요.’ 이러잖아요. 판소리에서 나온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춘향이 ‘(이도령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고개라는 건 이별의 마지막 경계선이에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쫓아 나오세요. 분명히 안방에서 하직 인사 하고 나왔는데도 마루 끝까지 따라 나와 “잘 가라” 하세요. 그래서 마당 아래에서 인사를 꾸벅 하는 거예요. “할머니 추워요, 얼른 방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할머니는 또 대문간까지 나오시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도 여전히 따라 나오세요. 돌담을 따라 돌아가는 골목길까지. 그럼 “아유, 얼른 들어가세요”라고 만류해보지만 할머니는 그러세요. “응응, 들어갈게, 들어갈게” 하시면서 막상 들어가지는 않으시고.
한국 사람들이 이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요. “들어가셔요” 그러면 또 쫓아 나오시고. 이 애틋한 동행은 보통 마을 입구까지지만 눈으로 하는 배웅은 계속 이어져요. 당신의 딸, 손자가 마을 고갯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딸이나 손자가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서 있는 거죠. 참 눈물겹죠. 그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자기 딸이나 손자를 영원히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어느 고개를 가든지 거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봤던 얼굴이 있는 거죠.
자동차에 놀란 村老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은 바로 그런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지프를 타고 속력을 내며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마침 그 앞에 나이가 든 시골 할아버지·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농부 특유의 옷차림에 장을 보고 오는지 할아버지는 작은 짐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본 거지요.
마차 정도나 다니지 지프가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에요. 시골에 있어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봤어도 자동차는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 나타나니까 평생 차를 피해보지 못한 이분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요. 그냥 뛰었으면 내가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 경황없는 가운데 두 노인이 손을 부여잡고, 또 그 보따리에 뭐 그리 귀중한 게 들었겠어요? 시골 장터에서 구입한 거라고 해봐야 양잿물, 북어대가리 그런 것일 텐데 그걸 다른 손에 또 꽉 부여 쥐고 놓질 않아요.
닭, 오리, 칠면조 이런 가금(家禽)으로 키우는 새들은 개나 여우 같은 육식 동물이 덤벼들 때 날 수가 없으니까 뛰어서 피해요. 그것도 길옆으로 숨어버리면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푸덕푸덕 달려가는 거죠. 바로 이 두 노인분이 그랬어요. 뒤에서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으니 길옆으로 피하면 간단한 걸, 기를 쓰고 앞으로만 계속 뛰는 거예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붙잡고 서로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
도시 사람들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쓰윽 보고는 느긋하게 길옆으로 슬쩍 피해주는데 자동차에 놀라 뛰어가는 촌로의 뒷모습에서 내가 뭘 봤겠어요.
그 장면을 보던 때 나는 25세나 26세쯤 되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글이거든요. 그때 그분들은 내게 역사 속에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했어요.
‘우리 조상들이 저런 모습으로 도망갔구나, 가축의 모습으로 쫓겨 다녔구나’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쫓겨 가던 뒷모습, 우리 역사 속에서 허둥지둥 가축처럼 쫓겨간 한민족.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때 내가 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던 거죠.
# 후에 찾아간 성황당 길 - 모든 것이 변하다
그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할 때고, 그 차도 신문사의 차라는 말은 앞에서 했고요. 그리고 한참 뒤에, 그 쫓기던 노부부가 있던 길에 다시 한 번 가봤어요. 그 불하받은 미제 군용 지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 국산차 에쿠스를 타고 갔죠. 에쿠스는 희랍어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네 바퀴 달린 말을 타고 그곳에 다시 간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였어요. 물론 어린아이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지만. 그때는 청다니 고개라는 이름이었는데, 밤에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는다는 전설이 있었지요. 동네의 어떤 사람이 장 보고 오다가 호랑이 때문에 놀라 허리를 다쳤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지금 가보니 거기는 호랑이가 나올 만한 깊은 산골도, 높은 고개도 아니었어요. 내가 지프를 타고 갔을 때만 해도 조그마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에 버스가 다니는 4차선 도로예요. 심지어 그 길의 아래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달려 있었어요. 다만 성황당 나무는 그대로더군요. 어지간히는 늙은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옛날처럼 서 있었어요.
20대 후반의 나는 거기서 할아버지·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가축처럼 쫓겨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참 못났다, 왜 쫓겨 다니느냐고 가슴을 치고 화를 냈는데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내가 이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쓴 후예요. (계속)⊙
서양 사람은 내(I)가 너(you)를 사랑(love)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은 벌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너와 내가 하나, 한 몸이 되는 건데 나와 너를 따지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랑해” 이러지 “내가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 고백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해요. ‘나, 너’를 빼고 그냥 “사랑해”. 사실 그것도 상당히 발전한 거예요.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해서 구혼할 때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니캉 내캉 함께 살자”라고 말했어요. 참 좋은 말이죠. 너와 내가 함께 살자! 살자는 건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동안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찾는 거였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그러고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팔도마다 다 틀려요. 그러니 찾는 과정이 어렵지요. 어렵지만 즐겁기도 하고요.
경상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디져도 그런 말 몬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거시기 혀!”, ‘널 죽도록 사랑해’는 “오메 거시기 혀!”. 또 다른 버전으로 “니가 오살나게 좋아브러”.
충청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임자밖에 서” 혹은 “꼭 말루 허야 하남”이죠. 충청도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 “뭐여…”라고 말하고, 기분 나쁠 때는 “뭐여!”, 짜증 날 때도 “뭐여!!”라고 하지요. 이처럼 같은 의미라도 쓰이는 방식,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사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 일일이 ‘찾아가는’ 것이지요.
# 문화부 장관 시절, ‘갓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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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어느 독자가 〈노견 어원이 뭐냐. 갓길이면 어떨까〉라는 글을 투고했다. |
갓길은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한다면서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니,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 막 이런 어색한 말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저항감을 느껴 결국 바꾸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갓길은 입에 착 붙어요. 내가 그 이름을 짓기 전에는 노견(路肩), 혹은 길어깨라고 했어요. 노견이라고 하니까 무슨 길거리 개(路犬)을 말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막 욕하니까 그다음으로 제안된 이름이 길어깨였어요. 노(路)가 길이고 견(肩)이 어깨니까 길어깨. 노견과 함께 길어깨라는 이상한 이름이 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국무회의에서 “그 길을 ‘노견’이나 ‘길어깨’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당시 행정용어 표기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는데 내무부에서 갓길 통행 과태료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였어요. 사실 갓길은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가 그 길을 달리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길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관들이 “그건 당신 소관도 아닌데, 문화부 장관이 왜 나서냐, 그리고 길도 아닌데 갓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더 길로 착각하고 달릴 것 아니냐”며 반대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죠.
갓길의 기적, 《행정용어순화편람》(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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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다.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
이렇게 막 밀어붙여서 결국 내무부에서도 ‘갓길’로 이름 붙이게 된 거예요. 갓길. 가에 있는 길, 갓길.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말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만든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써온 말 같지 않아요? 일제 시대 때 발행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찾아봐도 갓길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였지만 순우리말이어서 쓰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노견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과거엔 고속도로 표지판에 〈노견주행 엄금〉이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 ‘Road Should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자로 옮겨 만든 용어죠. 1960년대 정부 행정용어로 노견이란 한자어 대신 같은 의미의 길어깨라고 쓰기도 했어요. 1982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길어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론 길어깨로 쓰면서 표기는 노견이라 적고, 뒤죽박죽 써온 것이지요.
그러나 갓길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워서 써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착되었어요. 노견이 갓길로 바뀐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일제식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는데 갓길이 마중물이 된 셈이지요.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습니다. 앞서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죠.
어문 관련 단체 등 71개 기관에서 순화 대상 용어를 수집하였어요. 이렇게 모은 8673개 용어를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쳐 1차로 최종 확정해 《행정용어순화편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편람에 들어간 사례는 이렇습니다. 그땐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썼을까 싶어요.
고오바이 → 오르막·물매·비탈길
가께소바 → 메밀국수
가꾸목(角木) → 각목·각재
가도(假道) → 임시도로·임시통로
가리방 → 줄판
도선장(渡船場) → 나룻터
브로슈어(brochure) → 안내서
쇄정(鎖錠)하다 → 잠그다
시건(施鍵)장치 → 잠금장치
오시핀 → 납작못
영세민 → 저소득층
잠업(蠶業) → 누에치기
재식(裁植)하다 → 심다
절석(切石) → 마름돌
품신(稟申)하다 → 건의하다
핫 라인 → 직통전화
마을 입구 정자목, 쌈지공원, Vest Pocket Park
내가 만든 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주택가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을 만들어 ‘쌈지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3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쌈지공원이 수천 개 있어요. 과거 농촌 등 집단 거주지의 중심지나 마을 입구의 정자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생적인 소공원 형태의 ‘농촌 공동쉼터’를 도시에 정책적으로 적용시킨 것이죠.
‘쌈지’라는 건 작은 주머니를 말하는 우리말이에요. 작은 공원을 그냥 흔하고 평범하게 ‘작은공원’이라고 하지 않고 쌈지공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구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공원이 많아요.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하이트(Hudson Height)라는 곳이 있어요.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이죠. 이 지역에 3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는데 차가 빨리 지나가 보행자들이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됐었죠. 거기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켓공원이라 부릅니다. 이 포켓공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은 알아서 속도를 줄이게 됐죠. 또 포켓공원과 연계해 횡단보도도 훨씬 넓어져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받게 됐어요.
도시 소공원(Vest Pocket Park)은 조끼주머니(Vest Pocket)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지만 요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인데 우리로 치면 바로 쌈지공원을 말합니다. 쌈지공원은 ‘the Vest-Pocket Park’의 순수한 한국적 표현으로 도심지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저소득층 고밀주거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복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습니다.(이은기의 〈도심지 쌈지공원의 이용 후 평가 및 개선방안〉 참조)
또 서울시에 ‘자락공원’이 있어요. 서울에는 크고 이름난 산이 많잖아요. 그 산과 평지의 접경지역에 공원을 만들고 자락공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치맛자락을 생각해보세요.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산이 치마를 입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또 ‘자락’은 치맛자락의 자락이기도 하지만 끝자락의 자락이기도 해요. 산의 끝자락, 주거지의 끝자락. 그 양쪽의 끝자락이 겹친 곳에 자락공원을 만드는 거죠. 산과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어지지 않으면 산은 섬처럼 고립돼요. 도시인의 생활반경에 산을 끌어들이는 거죠.
이어령, 쌈지공원에서 울다 다음은 2016년 8월 26일 자 《주간조선》에 보도된 쌈지마당 이야기다. 1991년 6월 첫 번째 쌈지마당인 ‘중계쌈지마당’이 완공됐다. 연탄 실어 나르는 리어카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작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마을에 들어선 쌈지마당은 의외의 곳에 ‘짠’ 하고 나타나는 ‘마법의 예술공원’ 같았다. 중계쌈지마당 준공식 행사 당일, 이어령은 울었다. “고건 시장한테 준공식에 나와달라고 했더니 이분이 농을 해. ‘선배님, 서울시장을 너무 우습게 보시네요. 10억 건설 현장에도 테이프 끊으러 안 가는데 8000만원짜리 공사에 나가겠습니까. 껄껄껄. 가야지요. 100억짜리는 안 나가도 거기엔 나가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니 기쁘게 행사장에 왔지. 행사가 끝나도 갈 생각을 안 해. ‘장관님 먼저 가세요. 저는 민원이 많아서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하며 손사래를 치더라고. 거기가 무허가 건물이 많잖아. 시민들이 서울시장한테 하고 싶은 건의가 좀 많겄어. 시민들 틈에 뺑 둘러싸여 나더러 손사래를 치는데, 고건씨가 키가 크잖아. 혼자 삐죽이 서 있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 그런 마음으로 공원 입구를 나오는데 아이들이 만든 플래카드가 보여. ‘이.어.령.문.하.부.장.과.님.감.사.합.니.다.’ 노트를 한 장씩 찢어서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써서 매달아 놓은 거야. 서툰 글씨로 철자법도 다 틀리고. 그 근처에 수녀님들이 돌봐주시는 보육원 시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만든 거였지. 아이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걸 본 순간 눈물이 확 나더라고.” |
안상수체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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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인 안상수체는 받침이 세로획의 정중앙에 오면서 정사각형 틀을 벗어난 글꼴이다. 사진=조선DB |
글자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디자인 아닌가요? 이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사람들이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이 있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널리 쓰이면서 날개를 달았죠. 통치계급, 즉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쓰는 서체의 권위가 무너졌어요.
서체의 변화가 문장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이루지 않았을까요? 또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면서 높다란 정부의 문턱도 낮아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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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돌리고 있다. 사진은 2008년 8월 31일 서울 여의도 63바람개비축제를 알리는 바람개비 자전거 홍보단 모습이다. |
“그래도 중앙청이 권위가 있어야지. 문화부가 바(bar) 같아요. 뭐 거기다가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그럽니까?”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참 기분이 나빴어요. 중앙청의 청(廳)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고, 거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등청(登廳)한다고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데 중앙청으로 오는 사람들은 등청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을 쓰는 곳에 막 바람개비를 붙여서 돌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관리들이 그렇게 불평을 하는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어요.
“성공했네! 사람들이 bar로 알았으면 성공했네. 그러면 사람들이 막 들어올 거야. 우리한테는 그 문턱이 높았지만, 이젠 그냥 별 사람 다 들어올 거 아니야. 밤에도 들어올 거 아니야.”
# 문화부 슬로건1 부뚜막 위 부지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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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29일 《조선일보》 19면에 실린 〈휴식공간 중계 쌈지마당 준공〉 기사. 이어령 장관과 백상승 서울 부시장, 주민 등 150명이 참석해 준공식을 가졌다. 기사에는 중계 쌈지마당에 이어 금호 쌈지마당(성동구 금호2가), 창신 쌈지마당(종로구 창신동)도 다음 달 준공한다고 적혀 있다. |
첫 번째,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
부뚜막 위 부지깽이. ‘부’자 두음이 반복되니까 음운율이 생기죠.
부엌에 가면 놋그릇, 은그릇 같은 귀중품도 있고 식칼, 도마 같은 필수품도 있고 그중 제일 천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부지깽이는 밤낮 불에 타요. 끄트머리를 불태워가며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나면 다시 끄고, 다시 또 타고. 여러분이 특수한 사람은 못 되어도 부지깽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남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 불은 못 되더라도 불을 붙여주는 것이 부지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가장 천한 것이지만 또 가장 요긴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불을 붙여주는 부지깽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부지깽이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아무 나뭇가지나 하나 꺾으면 다 부지깽이로 쓸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가 막힌 발명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못 될지는 몰라도, 다들 부지깽이는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우습게 알지만, 부지깽이가 있기 때문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부엌에 식칼부터 은그릇까지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제일 하찮아 보이는 부지깽이, 심지어 무엇이나 될 수 있고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부지깽이예요.
그러니까 긴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라는 거죠. 자기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돼라, 공무원이 뭐냐, 너희 스스로 불이 되려 하지 마라, 너희가 밥이 되려 하지 마라, 밥 짓고 요리할 때 밑에서 자기를 그슬려가며 부지깽이처럼 봉사해라.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불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불을 이용하게 된 것도 부지깽이 덕분입니다. 사냥한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요.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불쏘시개 작대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꼭 필요한 물건이죠. 부지깽이로 이글거리는 불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을 겁니다. 따스함을 느꼈을 겁니다. 불 앞에 모여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 별을 보며 처음으로 신화(神話)라는 꿈을,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테지요. 종교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인이나 소설가로 부르는 사람 역시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별을 올려다본 최초의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불쏘시개,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요?
태초에 부지깽이를 든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 사이를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 모습 속에 견우직녀 설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이냐고요. 그런 농담 있잖아요.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마디로 줄이면 ‘뚝!’이 된다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다양한 분야의 봉사를 표현하는 게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예요. 봉사자 중에서도 문화 봉사자니까 그냥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계에 불을 붙이는 봉사자가 되어, 시인에게 불을 붙이고, 연극계에 불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문화부가 잘 되면 환하게 불이 탈 거 아니겠어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문화부라 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불이야’라고 하면 돌아볼 거 아니겠어요. 불이 났으니까.
# 문화부 슬로건2 우물가 옆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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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인왕동 유적 우물 바닥에서 출토된 두레박. 사진=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
두레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두레박은 우물가에 하나를 공용으로 놔주기만 하면 그다음에 오는 사람이 손쉽게 물을 떠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두레박이 있어야 해요. 두레박 없이는 우물물을 길을 수 없어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전승돼온 것이 두레박일지 몰라요. 두레박이 없었다면 우물을 파지도 못했을 것이고 강가나 개울 곁에서만 살았을 겁니다. 두레박이 있었기에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었고 공동으로 우물을 쓰며 집단을 이루고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융단’이라면, 두레박은 ‘하늘이 내린 그릇’ 아니겠어요? 우물이 ‘집안의 작은 바다’라면 두레박은 ‘바다와 땅을 잇는 엘리베이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두레박을 자기 것 들고 가서 쓰고는 내 것이라고 싹 챙겨 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우물터에 갈 때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못난 짓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어쩌고 하는 이런 위선적인 말 대신, 모두가 쓰는 우물터에 내가 물 떠먹은 두레박을 안 가져가고 놔두는 그런 작은 선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거면 모든 동네 사람이 자기 두레박이 없어도 하나의 공동 두레박으로 편하게 쓸 수 있잖아요.
그 두레박과 같은 것이 문화시설이에요. 극장 하나 지어 놓으면 거기 와서 누구나 연극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화시설, 소위 문화 인프라를 우리가 만들자는 거죠. 부지깽이가 되어 문화에 불을 붙이고, 그 불 붙은 문화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부가 할 일이에요. 문화를 융성시키고 불 붙이는 일!
그런데 아무래도 후퇴한 것 같아요. ‘문화융성위원회’(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문화 융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 자문기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와 같은 어려운 말을 쓰잖아요. 내가 이미 몇십 년 전에 ‘부지깽이가 되자’라고 했는데 그게 융성(隆盛)이에요. 불 붙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그냥 ‘문화에 불 붙이자’ 하면 진짜 불이 붙을 텐데, ‘융성’이라고 하니까 이게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아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름 잘 붙인 거예요. 그래야 뭐가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부지깽이, 두레박 이러면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미심쩍어해요. 사람들은 묵직해야 쫓아오지 가벼우면 안 쫓아와요. 이해하긴 참 쉬운데도.
# 문화부 슬로건3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세 번째,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우리가 바위를 깰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있죠. 문화는 도저히 정치·경제를 못 깨요.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못하듯. 비유를 하나 해볼까요? 지금 맹장염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당장 수술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런데 또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고 해서 어디가 터져서 죽어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화는 밤낮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뭐라고 해요? 늘 “그거 다음에 하자”라고 말씀하시죠. 먹고사는 것, 그러니까 정치·경제·사회가 우선이지 문화는 밤낮 뒷전인데, 그 뒷전인 문화부의 장관이 뭘 할 게 있었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한강유역 정비가 잘 되기 전의 이야기예요. 여름만 되면 한강 부근에서 홍수가 나서 마포 일대에서 이재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강 다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했죠. 그러자 대통령 주재하에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를 열었어요. 내무부는 치안을 담당하고 보사부는 의약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각 부처마다 그런 재난 상황에 해야 될 역할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국방부는 국군장병들을 동원해 긴급 재난 구호 봉사를 하고요. 그런데 문화부는 뭘 하라고 시키는지 들으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 국무회의 끝까지 계속.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나서 이재민이 나왔을 때 문화부가 뭘 하겠어요. 잘 해봐야 합창단 데리고 가서 힘내라고 공연하는 건데 잘못하면 뺨 맞아요.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너희는 지금 신난다고 노래하고 춤추냐? 안 그러겠어요?
“이끼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어. 그게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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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계곡 모습이다. 강원 평창군 가리왕산의 장전계곡. 사진=조선DB |
이런 게 기적이죠. 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딱딱한 바위를 초록색 부드러운 이끼로 다 덮어서 생명이 거기서 싹트게 하니 기적이지요.
이끼는 원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끼는 3억5000만 년 전 최초로 육상 생활에 적응한 식물군이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나라에서만 700여 종이나 된다고 해요. 집 주변의 돌담이나 그늘지고 축축한 마당, 습기가 많은 숲 속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흙이 무너지거나 공사 등으로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죠. 과거 유럽에서는 침대의 속재료와 건축 재료로 사용했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인들은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등 세상에 이롭게 사용됐어요. 지금도 이롭게 쓰입니다.
1995년에 서울에서 이끼가 사라지자 산림청에서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어요. 산성비 때문이지요. 이끼는 대기 및 토양 오염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도시 내 미세먼지 저감 솔루션인 ‘SH 스마트 이끼타워’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고 합니다. 이끼와 바람을 이용해 주변 약 50m 내의 미세먼지 흡착률을 높여 공기정화 효율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됐다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처럼 이끼만큼 이로운 게 없어요. 저 거대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바위를 덮을 만한 이끼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막에 가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게 문화예요. 그래서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게 내가 장관 재직 시절 내건 문화부의 세 번째 슬로건이었어요.
# 우리말을 낡고 옛날 것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그렇게 세 가지를 문화부 슬로건으로 내걸었더니 신문에서 문화부를 공격하기를, ‘요즘 이 아무개가 문화부 장관이 되더니 중앙청과 문화부 내에 고어(古語)가 난무한다’라는 거예요. 옛날 말이지만 이게 우리말인데, 사람들은 고어, 그러니까 고려 시대 때 말인 줄 알아요.
그 당시로 치면 21세기가 이제 곧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와서 지금 부지깽이니 두레박이냐는 거죠. 그 사람들은 부지깽이가 뭔지 몰랐나 봐요. 그러니까 고어라고, 나더러 옛날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놀음을 한다고 공격했겠지요.
그러나 우리 것은 맨날 낡고 옛날 거예요? 우리 것이 미래가 되면 안 됩니까?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손가락의 투구인 골무,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인 다듬이, 머리의 언어인 갓, 누워 있는 악기인 거문고, 현재 세계인의 고랑을 파는 호미, 한국인 손으로 빚어진 진주이자 다이아몬드인 나전칠기… 한국인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그려낸 별자리가 있어요. 그건 낮엔 안 보일지 몰라도 밤이 되면 밝게 빛납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안 보일 뿐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지깽이와 두레박은 버리거나 잊힌 것들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지만 별자리와 그 전설의 이야기들은 민족과 나라에 따라 다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천시하거나 잊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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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 등단 50주년 당시의 모습이다. 2006년 10월 24일 사진을 찍었다. 사진=조선DB |
지금 한글 세대들이 쓰는 한글에는 새로운 조어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몰라요. 이게 《혈(血)의 누(淚)》(‘피눈물이 난다’는 의미)라던 사람들이 한글 전용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문화부 장관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것들을 고려 때 이야기인 줄 알고 고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문자로 봤을 때 한자 세대로 시작해 일어 세대를 거쳐 한글 세대로 왔는데, 이 한글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 세대로, 또 한자 세대로 가고 있어요.
외국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바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죠.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 속에는 서구적인 사상이 있지만 그 속에 동양적인 전통이 담겨 있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속에는 거꾸로 동양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속에 또한 서구적인 사상까지 내포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이며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고정된 지역적 편견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시대 문화의 생명은 극히 짧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한 시대(시간), 한 지역(공간)이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만 안목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문학에서 고전적 작품이라는 것은 무수한 공간을 꿰뚫고 확충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존속시켜온 작품을 뜻합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타임리스(timeless)에 있습니다. 《햄릿》이 덴마크인이라서, 왕자라서, 고대인이라서 유명한 게 아니라 인물 속에 인간 총체의 한 비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덴마크 왕실의 인간들만 흥미를 갖는 인물로만 그려졌을 거예요.
당대에만 유행하는 사조, 뿌리가 없는 전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곧 잊히고 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은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요.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이의 지적(知的) 연맹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까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에서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풍토(風土)라는 한자를 쉽게 배워요. 우리말을 찾는 것이 곧 한자를 배우는 일이 된 거죠.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월간조선》 2022년 9월호 참조)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는 저의 실화입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쓸 수 없는 차를 민간에 불하해줬어요. 그럼 언론사들이 그 차를 불하받아 차체의 카키색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정도의 개조만을 거쳐 썼거든요. 책에서 내가 타고 있던 차도 그런 차였어요. 그 차를 타고 고향을 갔다가 오는 길에 본 장면인 거죠.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고개라는 게 뭘까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보세요. 그게 고개 노래잖아요. 각지의 아리랑마다 가사는 다 달라도 후렴은 똑같거든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게 해주시오, 고개를 넘어가세요, 넘지 마세요.’ 이러잖아요. 판소리에서 나온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춘향이 ‘(이도령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고개라는 건 이별의 마지막 경계선이에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쫓아 나오세요. 분명히 안방에서 하직 인사 하고 나왔는데도 마루 끝까지 따라 나와 “잘 가라” 하세요. 그래서 마당 아래에서 인사를 꾸벅 하는 거예요. “할머니 추워요, 얼른 방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할머니는 또 대문간까지 나오시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도 여전히 따라 나오세요. 돌담을 따라 돌아가는 골목길까지. 그럼 “아유, 얼른 들어가세요”라고 만류해보지만 할머니는 그러세요. “응응, 들어갈게, 들어갈게” 하시면서 막상 들어가지는 않으시고.
한국 사람들이 이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요. “들어가셔요” 그러면 또 쫓아 나오시고. 이 애틋한 동행은 보통 마을 입구까지지만 눈으로 하는 배웅은 계속 이어져요. 당신의 딸, 손자가 마을 고갯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딸이나 손자가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서 있는 거죠. 참 눈물겹죠. 그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자기 딸이나 손자를 영원히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어느 고개를 가든지 거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봤던 얼굴이 있는 거죠.
자동차에 놀란 村老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은 바로 그런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지프를 타고 속력을 내며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마침 그 앞에 나이가 든 시골 할아버지·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농부 특유의 옷차림에 장을 보고 오는지 할아버지는 작은 짐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본 거지요.
마차 정도나 다니지 지프가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에요. 시골에 있어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봤어도 자동차는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 나타나니까 평생 차를 피해보지 못한 이분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요. 그냥 뛰었으면 내가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 경황없는 가운데 두 노인이 손을 부여잡고, 또 그 보따리에 뭐 그리 귀중한 게 들었겠어요? 시골 장터에서 구입한 거라고 해봐야 양잿물, 북어대가리 그런 것일 텐데 그걸 다른 손에 또 꽉 부여 쥐고 놓질 않아요.
닭, 오리, 칠면조 이런 가금(家禽)으로 키우는 새들은 개나 여우 같은 육식 동물이 덤벼들 때 날 수가 없으니까 뛰어서 피해요. 그것도 길옆으로 숨어버리면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푸덕푸덕 달려가는 거죠. 바로 이 두 노인분이 그랬어요. 뒤에서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으니 길옆으로 피하면 간단한 걸, 기를 쓰고 앞으로만 계속 뛰는 거예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붙잡고 서로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
도시 사람들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쓰윽 보고는 느긋하게 길옆으로 슬쩍 피해주는데 자동차에 놀라 뛰어가는 촌로의 뒷모습에서 내가 뭘 봤겠어요.
그 장면을 보던 때 나는 25세나 26세쯤 되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글이거든요. 그때 그분들은 내게 역사 속에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했어요.
‘우리 조상들이 저런 모습으로 도망갔구나, 가축의 모습으로 쫓겨 다녔구나’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쫓겨 가던 뒷모습, 우리 역사 속에서 허둥지둥 가축처럼 쫓겨간 한민족.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때 내가 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던 거죠.
# 후에 찾아간 성황당 길 - 모든 것이 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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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에 나오는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인 청다니 고개를 다시 찾았다.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이 되어 있었다. |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였어요. 물론 어린아이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지만. 그때는 청다니 고개라는 이름이었는데, 밤에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는다는 전설이 있었지요. 동네의 어떤 사람이 장 보고 오다가 호랑이 때문에 놀라 허리를 다쳤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지금 가보니 거기는 호랑이가 나올 만한 깊은 산골도, 높은 고개도 아니었어요. 내가 지프를 타고 갔을 때만 해도 조그마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에 버스가 다니는 4차선 도로예요. 심지어 그 길의 아래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달려 있었어요. 다만 성황당 나무는 그대로더군요. 어지간히는 늙은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옛날처럼 서 있었어요.
20대 후반의 나는 거기서 할아버지·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가축처럼 쫓겨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참 못났다, 왜 쫓겨 다니느냐고 가슴을 치고 화를 냈는데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내가 이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쓴 후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