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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3 / 세잔과 오르탕스

결혼의 이유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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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 30세 때 19세 모델 마리 오르탕스 피케와 만나 결혼… 10년간 부모에게 아내의 존재 숨겨
⊙ 오르탕스, 자신과 아들의 존재를 숨기는 세잔의 우유부단함과 괴팍함에 지쳐 낭비벽 생겨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폴 세잔
(Paul Cezanne·1839~1906년)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만 결혼을 하는 데는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이유가 사랑. 비록 사랑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은 잘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성질 고약한 예술가가 결혼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 세련된 정물화로 유명한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년)이 바로 그 보기 드문 예이다. 세잔은 서정적인 그림 스타일과는 상반되는 폭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런 그가 왜, 어떻게 결혼이라는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세상과 不和한 화가
 
  1870년대 파리 시내의 카페 게르부아는 저녁때가 되면 늘 젊은 화가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말끔하게 정장 차림을 한 그들은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한껏 들뜬 분위기였고 그 가운데엔 언제나 에드가르 드가와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등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옮겨 구석 자리를 보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홀로 붙박이처럼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물감으로 얼룩진 작업복 차림에 말없이 한참 동안 테이블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술잔을 쾅! 던지듯이 내려놓곤 “흥, 놀고들 있네!”라고 버럭 소리 지르며 뛰쳐나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익숙한 듯이 주변 사람들은 남자의 거친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체 이 무례(無禮)하고 불쾌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렇다. 그가 바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형태 묘사법으로 동료들에게 혁신의 아이콘이 된 후기(後期) 인상파(印象派) 화가 폴 세잔이다.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대던 그의 삶은 늘 세상과의 불화(不和)로 삐그덕거렸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거기에서 새로움이 탄생했다.
 

  1895년 세잔의 단독 전시회가 열리고 나서 카미유 피사로는 “나의 열정은 세잔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드가도 이 세련된 야수(野獸)의 매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극찬했다. 세잔은 빛과 형태를 한데 결합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인상주의 그림에서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 느낌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것을 추구했다. 하지만 세잔은 빛나는 색채와 함께 투박하지만 뚜렷한 선(線)으로 형태를 표현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했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수백 년간 서양미술을 지탱해오던 원근법(遠近法)과 명암법(明暗法) 같은 조형의 원리를 뿌리째 뒤흔드는 가히 혁명적인 기법이었다.
 
  전통적인 명암법에 의하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림의 원칙은 한쪽 방향에서 비치는 빛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재를 묘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잔은 빛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했다. 그는 “인상파의 말대로 물체는 빛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빛에 따라 색채가 달리 보인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형태”라고 주장했다. 세잔은 형태와 색채를 사물에서 해방시켰고 그의 영향을 받아 피카소는 형태를, 마티스는 색채를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 있었다.
 
  마티스는 세잔의 초상화 작품을 직접 소유하기도 했는데, 그림을 거실에 걸어두고 쳐다보며 “나의 그림에도 이런 깊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이 내재(內在)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피카소가 “나의 유일무이한 스승인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와도 같다”며 칭송한 것은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세잔은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시에서는 지금껏 프랑스에서 미술계에 큰 성과를 남긴 화가에게 세잔 메달(Cezanne Medal)을 수여하고 있다.
 
 
  강압적인 아버지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인 출신의 성공한 은행가였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자신이 공동으로 설립한 은행에 아들을 취직시키고 싶었지만 세잔의 머릿속은 온통 화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엑상프로방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을 했고 대학 시절 아버지의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은행 일은 도무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오만하고 인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집 안에서는 아내를 무시하고 자녀들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독재자로 군림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잔의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은 바로 이런 강압적인 아버지에게서 기인한 것 같다. 이런 아버지에게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세잔에게는 정말이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게다.
 
  세잔은 이 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3년 동안이나 싸운 끝에 1891년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어머니의 지원 사격이 있었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이것은 세잔의 승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사업가의 기질은커녕 사회성도 없고 말까지 더듬는 아들에게 아버지인 루이 스스로 굴복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하튼 세잔은 마침내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날 수 있었다.
 
  세잔은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으로 소박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사교성(社交性)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는 화가 동료들이 건네는 재담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는 친구들의 관심을 조롱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했다. 그리고 이 당시 여느 무명(無名) 화가들처럼 세잔도 파리에서 열리는 살롱전에서 낙선(落選)을 반복했다. 특이하게도 그때마다 자신의 낙선에 항거하기 위해 수레 가득 캔버스를 싣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어둡고 기괴한 데다 폭력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다. 아마도 낙선의 이유를 본인만 몰랐던 것 같다.
 
 
  “내 허락 없이는 날 만질 수 없어!”
 
〈세잔 부인의 초상(Portrait de Madame Cezanne)〉
모델은 1886년 세잔의 부인이 된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 오르탕스의 평온한 모습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치 삶의 차분한 공기가 발산되는 듯하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소유했던 작품으로 마티스는 이 그림에서 묻어나는 고요함을 높이 평가했다. 세잔은 프랑스의 거대 화상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화가로서 예술의 성공은 인물의 얼굴에 달려 있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을 정도로, 초상화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천착했다.
  세잔의 괴상함은 가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곤 했다. 남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혐오했던 그는 다른 화가들과 악수는 물론 가벼운 신체접촉까지 다 거부했다. 한 번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걷던 중 세잔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자 베르나르가 재빠르게 그의 팔을 잡아주었는데, 세잔은 몸을 바로 가누자마자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베르나르의 손부터 쳐냈다. 그러곤 “손 떼!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날 만질 수 없어!”라고 버럭 화를 내며 앞서 가버렸다.
 
  얘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정말 문제가 심각하겠지만 다행히 그날 저녁 세잔은 베르나르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세잔은 사과의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마음 넓은 베르나르는 이것이 세잔이 사과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파리 화단(畵壇)에 적응하지 못한 세잔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869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된 그해에 열아홉 살 먹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Hortense Fiquet·1850~1922년)를 만나 드디어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다. 화가와 모델로 만난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同居)에 들어갔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세잔을 침실로 끌어들였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화단의 지대한 관심을 모은 이 스캔들은 당사자들의 구체적 언급이 없어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평소 세잔은 여성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 적이 많았고 앞서 말했듯이 신체적 접촉에 대해서는 거의 공황(恐慌) 수준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성격이 문제였지 겉으로만 보자면 그는 짙은 갈색 머리에 크고 검은 눈을 가진 꽤 잘생긴 축에 속하는 남자였고 오르탕스 역시 키가 크고 예쁜 얼굴을 지니고 있었기에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정신적 스승 피사로
 
〈목 맨 사람의 집(La Maison du pendu, Auvers sur Oise)〉
1873년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세잔이 판매했던 첫 번째 작품으로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 항상 만족하지 못했던 그가 유일하게 만족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이 〈목 맨 사람의 집〉이기는 하나, 실제로 이 집에 살던 사람들 중에 목 매어 죽은 사람은 없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오르탕스는 1872년에 아들을 낳았고 아들의 이름 역시 ‘폴’이라고 지었다. 세잔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오르탕스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있었다. 아버지 루이가 그 사실을 알면 생활비 지원을 당장에 중단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수입이 없었던 그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겨우 가족을 부양(扶養) 중이었고, 그의 가족은 파리 와인 시장 건너편의 작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며 살고 있었다. 오죽 사정이 딱했으면 급기야 동료 화가 피사로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불러들였을까.
 
  피사로는 집 안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던 세잔에게 옥외 그림을 소개해주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피사로의 영향은 세잔의 걸작 중 하나인 〈목 맨 사람의 집〉에 적용된 밝은 색채와 가벼운 붓놀림에 잘 드러나 있다.
 
  열 살 연상이었던 피사로는 세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괴팍한 성격까지도 받아주며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세잔은 자기만의 특유의 입체성에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결합하며 기량이 대폭 성장했다. 그야말로 후기 인상파의 새로운 거장(巨匠)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친구의 실수로 결혼 사실 들통나
 
〈사과와 오렌지(Pommes et oranges)〉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 하나의 시점으로 단일화된 전통적 원근법에서 벗어나 복수화된 시점에서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에 놓인 과일 접시와 중앙에 높이 솟아오른 과일 그릇, 그리고 오른편에 장식이 새겨진 화려한 포트의 시점이 각기 다르다. 이런 독특한 방식은 입체주의를 비롯해 이후 전개되는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과 한 알로 파리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공언한 세잔은 파리뿐 아니라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878년 겨울, 동거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버지 루이는 여전히 오르탕스와 손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마흔 살이 다 되어가는 그는 30km나 떨어진 여자 친구의 집과 아버지의 집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루이의 집에 파리에서 ‘세잔 부인과 어린 폴’을 언급하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친구 쇼케의 끔찍한 실수였던 것. 루이는 당장 세잔에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물었지만 세잔은 모든 것을 부인했다. 하지만 얼마 후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오르탕스의 아버지가 위독하니 친정집에 꼭 방문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이는 다시 아들을 추궁했고 세잔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이번에도 역시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을 했다.
 
  불쌍한 세잔, 그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평소의 루이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아들을 쫓아낼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인데,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루이는 말없이 3000프랑을 꺼내 세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르탕스를 친정에 보내주라는 뜻이었다. 자식 앞에선 독재자에 버금가는 엄격한 그도 결국 부모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노쇠한 그가 지긋지긋한 아들과의 실랑이를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일로 루이는 오르탕스의 존재를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세잔에게 가장 가혹한 벌은 생활비를 끊는 것이었으니, 루이는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세잔이 의지할 사람은 어머니와 어릴 적 친구인 작가 에밀 졸라밖에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이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엔 다시 돈을 지원받게 되었다.
 
  루이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세잔과 오르탕스의 결혼까지 허락했고 1886년 세잔은 47세에 그녀와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열네 살이 된 아들 폴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는 세상을 떠났고 세잔은 40만 프랑에 달하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제야 세잔은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겉으로만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사실 세잔과 오르탕스의 사이는 이미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자신과 아들의 존재를 숨기는 세잔의 우유부단함과 괴팍함에 지친 오르탕스는 스트레스로 낭비벽이 심해졌고 세잔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두 사람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고 세잔은 그녀를 오로지 책임감 때문에 부양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뒤늦게 굳이 결혼식을 한 이유는 바로 아들 폴 때문이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세잔은 폴이 사생아로 살아가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다.
 
 
  “사과가 움직이는 거 봤어?”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s)〉
약 30개 정도의 사과들은 다양한 색채가 혼합되어 표현되었고 각각이 하나의 정물화를 구성한다. 언뜻 보면 우연성에 의존한 배열처럼 보이지만 세잔이 고심 끝에 제작한 정물화로,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트리고 있다. 작품 내의 정물들은 안정과 불안정이 양립하며 하나의 평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통 인물화에서나 시도되던 것을 정물화를 통해 보여준 이는 세잔이 처음이었다.
  세잔과 오르탕스, 사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지 않는 상대였는지도 모른다. 세잔은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오르탕스를 믿지 못했고 더군다나 그녀는 그림과 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며 세잔의 그림에 대한 열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오르탕스는 세잔의 모델로는 최고였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참을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잔은 초상화 한 점을 그리는 데 보통 모델을 150회 정도 앉혀 놓았다. 모델료를 지불할 형편도 안 됐지만, 그런 그의 집요함 탓에 오르탕스 외에는 모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세잔이 그린 오르탕스의 초상화는 30여 점이 넘는다. 그는 정물화도 한 사물에 최소 100회 정도 그렸는데 그야말로 소재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오르탕스의 초상화들 속 그녀의 표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썩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델에게 완벽하게 정지한 채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기를 요구했다. 한 번은 그림 상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가 깜빡 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넘어지자 세잔은 “사과가 움직이는 거 봤어?”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한다.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기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과가 있는 정물화〉 속 사과들은 이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함께 ‘세상을 바꾼 3대 사과’가 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하나 더 추가되었지만.
 
 
  쓸쓸한 최후
 
  활달한 성격의 오르탕스는 파리를 벗어나는 것을 싫어해 세잔은 프로방스에서 혼자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가 죽기 한 달 전 젊은 화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는 노년의 쓸쓸함이 가득 배어 있다.
 
  “나는 지금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라네.… 고독이 나를 늘 야금야금 끌어내리니 말일세. 난 이제 늙고 병들었어. 무거운 납 같은 무기력으로 가라앉는 것은 열정에 자신을 맡겨 감각을 거칠게 만들기로 한 노인네에겐 위협이야.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그림을 그리다가 죽겠다고 맹세했네.”
 
  그의 마음속 바람 때문이었을까. 1906년 가을, 세잔은 여느 날처럼 야외 그림을 그리던 중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도 두 시간 넘게 그대로 작업을 계속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행인에 의해 발견돼 집으로 옮겨졌으나 세잔은 깨어나자마자 다시 작업실로 가 그림을 그렸고 결국 다시 쓰러진 후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세잔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르탕스와 폴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쓸쓸하게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둘의 사이를 보여주듯 오르탕스에게는 유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외아들 폴에게 전부 상속했다. 후에 오르탕스는 아들인 폴에게 재산을 어느 정도 받아냈는데, 그마저도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씁쓸한 후문(後聞)이 있다.
 
  어떤 이들은 오르탕스의 내조(內助) 덕에 까칠하고 메마른 남자였던 세잔이 사랑과 일상의 평온함을 알게 되었고 인간의 감정을 끄집어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전 세잔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그 성격에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와 멱살을 잡고 흔들어버렸을 것이다. 하나 그가 아무리 부정할지라도 세잔이 자신만의 화법을 이룩한 거장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아무리 봐도 오르탕스가 맞는 것 같다. 물론 세잔은 그 공을 기어이 ‘사과’에게 돌릴지도 모르겠지만.⊙
 
  - 필자의 공저(共著) 《발칙한 예술가들 - 스캔들로 보는 예술사》에서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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