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롱을 읽으면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박정자 교수)
⊙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택”
⊙ “1933~1939년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으로 치닫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셈”
⊙ “소수의 독재자만이 역사와 미래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 “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
⊙ “공무원은 일의 필요도에 따라서 늘려야지, 실업 퇴치를 위해 공무원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
⊙ “1939~1945년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 나치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정치적 분쟁 때문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민족을 매도할 수는 없었다”
⊙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택”
⊙ “1933~1939년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으로 치닫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셈”
⊙ “소수의 독재자만이 역사와 미래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 “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
⊙ “공무원은 일의 필요도에 따라서 늘려야지, 실업 퇴치를 위해 공무원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
⊙ “1939~1945년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 나치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정치적 분쟁 때문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민족을 매도할 수는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지식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1905~1983년)은 이 말을 받아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꼬집었다. 아롱의 말대로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아편 중독자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노재봉(盧在鳳) 전 국무총리는 3년 전 인터뷰 때 이런 현실에 대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맨날 사르트르나 찾고…. 지식인이라면 레이몽 아롱을 읽어야 하는데, 아롱은 알지도 못하고….”
철학에 대해서는 영 모르는 기자도 학교 시절부터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년)의 이름은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레이몽 아롱은? 사실 기자부터도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다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대형 서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얼마나 되는지 검색해보았다. 《지식인의 아편》 《산업사회와 미래》 《권력과 지성》 《사회사상의 흐름》 《자유냐 평등이냐》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자들》 《지식인 삶의 고독한 존재》….
이쯤 되면 레이몽 아롱의 책들도 꽤 많이 번역되어 나온 것 같은데, 문제가 있다. 1980년대에 번역되어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됐다는 점이다. 사르트르의 책들이 계속 새로운 판본으로 나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지식인의 아편》은 아직도 나오고 있다기에 대형 서점에 나가 책을 찾아보았는데…. 도저히 읽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40여 년 전의 낡은 편집,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깨알만 한 글씨, 그리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번역….
70대 우파와 30대 좌파의 知的 칼싸움
그러던 차에 최근 반가운 책이 나왔다. 《마르크시즘을 ‘지식인의 아편’으로 규정한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기파랑 펴냄)이다. 역자(譯者)는 기파랑 주간인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역자는 1982년 《20세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냈던 이 책을 39년 만에 다시 펴냈다. 원제(原題)는 《참여하는 방관자: 장 루이 미시카(정치학자·후일 파리 부시장 역임), 도미니크 볼통(사회학자·후일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 소장)과의 대담(Le spectateur engagé)》이었다. 한국어판으로 490페이지이니 제법 두툼한 책인데도 술술 읽혔다.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이 1981년이니, 꼭 4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그렇게 술술 읽힌 것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늘의 대한민국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발간 직후부터 우파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은 이 책이 70대 후반의 우파 성향 노(老)지식인과 막 30대에 접어든 68세대 좌파 성향 지식인의 대담이라는 점이었다. 스탈린주의는 배척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좌파적인 두 젊은 지식인은 레이몽 아롱이 과거에 했던 말이나 그가 썼던 글들을 철저하게 공부한 후 인정사정없이 몰아친다. 노지식인은 “이것 보시오!”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하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치열한 지적(知的) 칼싸움을 보는 것 같다. ‘인터뷰는 모름지기 이래야 돼’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다.
책은 시기에 따라 3부[제1부 ‘혼란의 프랑스(1930~1947년)’, 제2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1947~1967년)’, 제3부 ‘자유와 이성(1967~1980년)’]로 나뉜다. 그리고 각 부는 ▲이념운동과 지식인들의 태도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지도계급의 능력 ▲국제적 대사건들이라는 세 축(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30년대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과 프랑스 내 좌우익 대립, 프랑스의 패전(敗戰)과 비시 정권의 수립, 1945년 이후 프랑스 정치의 혼란, 알제리 독립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논쟁, 68사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실태 등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와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역자가 충실하게 각주를 달아놓아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대중운동의 근본적인 우매성’
오늘날 우리는 왜 레이몽 아롱에 주목해야 하나? 아롱이 평생 좌우(左右)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많은 젊은 지식인처럼 아롱도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꼭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동시에 우리에게 가르쳐줄 진정한 역사철학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롱은 “거의 1년간 마르크시즘을 공부한 후 그것이 정확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역사의 분석만으로는 앞으로 취해야 할 정치 방향을 이끌어낼 수도 없고, 또 인간 사이의 모순이 제거될 사회의 도래를 예견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아롱은 1920년대에 서구 지식인들의 소련에 대한 열광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또 이미 그때부터 기질적으로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메시아 사상이나 밀레니엄 사상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1920년대의 나에게 볼셰비즘은 특별한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이몽 아롱은 그 시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롱은 동(同)시대의 지식인들에 비해 전체주의의 대두와 폭력성을 먼저 목격하고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이 시기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막 대두하고 있던 나치즘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아롱은 이를 통해 “대중운동의 근본적인 우매성, 정치의 비(非)합리성, 그리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우매한 정열을 이용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나치즘이라는 대중운동의 포퓰리즘적 속성을 꿰뚫어 본 것인데,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선택’과 ‘결단’
아롱은 자유문명 세계를 위협하는 전체주의는 “히틀러인 동시에 또 스탈린이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있었다. 1939년 6월 프랑스철학회 발표에서 그는 “히틀러가 만일 필요성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결국 스탈린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그 동맹이 불과 두 달여 뒤에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를 보면서 아롱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현실 공산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아롱의 고등사범학교 동창 사르트르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은 ‘앙가주망(engagement·현실참여)’을 강조했지만, 레이몽 아롱은 ‘선택’과 ‘결단’을 강조한다. “한 사회 안에서 정치적 사상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기본적인 선택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체제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선택에서부터 결단이 나오는 것이며, 이 정확한 결단에 의해 한 개인은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택이며, 이 선택에 의해 우리 각자는 현재의 자기 자신, 또는 앞으로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롱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왜 아롱을 읽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우리야말로 ‘살고 있는 사회 체제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岐路)로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70여 년 전에 한번 그 선택을 했었다. 해방 후의 좌우익 투쟁과 6·25전쟁을 통해 우리는 결단하고 선택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지우려는 체제 전복(顚覆) 세력의 끊임없는 공작과, 우리 자신의 안이함과 나태함 때문에 다시 한 번 70여 년 전에 했던 선택과 결단의 번복(飜覆)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敵의 승리는 전쟁의 불행보다 훨씬 더 나쁘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강요됐던 베르사유 체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히틀러는 1936년 라인란트 진주(進駐),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할양 요구 등을 통해 기존 국제질서에 계속 도전했지만, 이를 제어해야 할 영국·프랑스 등 유럽 강국들은 눈앞의 전쟁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1938년의 뮌헨협정은 그러한 유럽판 ‘햇볕정책’의 절정(絶頂)이었다.
이에 대해 레이몽 아롱은 “1933~ 1939년 사이에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으로 치닫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1938년 뮌헨협정 다음 날 한 강의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피한다 해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지 안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아롱은 ‘전쟁을 함으로써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모든 불행은 전쟁 그 자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에 대해 “적의 승리라는 결과는 전쟁의 불행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라고 반박한다.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은 안 된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의 언명을 아롱이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군(軍)기상관측대에서 복무했던 아롱은 패전 후 ‘밖으로 나가 싸움을 계속’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기관지 《자유프랑스》를 발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지목했던 두 전체주의자 중 하나인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전체주의자인 스탈린과 손을 잡아야 하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을 일단 수긍한다. 그는 “두 개의 악마적인 위협에 동시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그중의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만 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冷戰을 직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났다. 스탈린의 소련이 유럽의 절반을 장악하고 철(鐵)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롱의 생각 속에 내재해 있던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경계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롱이 독일의 분단에 대해 말하는 대목을 보자.
“어떤 사람들은 독일을 통일시켜 중립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945년 가을부터 소련이 동독을 소비에트화했기 때문입니다. 동독을 소비에트화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아롱은 여기서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밀로반 질라스에게 “이런 전쟁에서는 승자가 자신의 이념과 체제까지 함께 갖고 들어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소련군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해방군’이 아니라 진짜 ‘점령군’이었다. 1945~1948년 한반도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38선 이북을 점령한 직후부터 소련은 북한 땅의 소비에트화를 서둘렀다. 그런 상황 아래서 남북협상에 의한 단일정부 수립은 독일의 중립화 통일만큼이나 백일몽(白日夢)이었다.
아롱은 소비에트 치하의 삶에 대해 일말의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1949~1952년 시기에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지지자가 되려면 탁월한 무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유럽의 소비에트 지역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문득 ‘오늘날 한국 땅에서 북한 체제의 지지자가 되려면 아롱이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무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소비에트 지역은 이미 30년 전에 붕괴했고, 북한 지역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독립에 배치되나?”
냉전에 대한 직시는 전후(戰後)의 동맹관계 구축(構築)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먼저 아롱은 구적(仇敵) 독일(당시는 서독)과 화해를 강조했다.
“지금 유럽의 가장 큰 세력은 무수한 위성국가를 거느린 소련이다. 만일 세력균형을 이루고 싶다면 유럽에 미군이 주둔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의 서유럽공동체를 재건해야만 한다. 그런데 서독을 빼놓고는 서유럽공동체를 만들 수가 없다.”
전체주의 중국과 북한이라는 공적(公敵)을 앞에 두고도 일본과의 안보협력 얘기만 나와도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떨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마치 을사늑약이라도 되는 양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의 현실과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과거를 철저히 반성한 독일은 여전히 과거를 미화하려 드는 일본과는 다르다”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 했던 것과 같은 양심 성찰’ 운운하는 미시카의 말에 아롱은 이렇게 말한다.
“패전해서 전승국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 거지, 독일이 언제 자신의 양심 성찰을 한 적이 있나요?”
이렇게 말할 때, 아롱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롱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패퇴시킨 것은 프랑스인들의 항전과 희생이 아니라 미국의 힘이었다’고 쿨하게 인정하면서 프랑스인들의 고질적인 혐미(嫌美)감정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1918년에 승리를 안겨주었고, 1944년과 45년에는 해방을 도와주었으며, 전후에는 경제재건을 도와준 미국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적대적인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배은망덕이죠.”
나토 통합사령부에서 탈퇴한 드골, 그리고 많은 프랑스인과는 달리 레이몽 아롱은 미국과의 군사동맹, 즉 북대서양조약에 대해 그것이 프랑스의 주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 조약은 프랑스의 외교적 자주성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공격을 받은 나라를 도와준다는 상호공약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이것이 한 국가의 독립을 손상시킨다는 것입니까?”
전시(戰時)작전통제권 회수를 주권 문제,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인 양 호도하는 자들에게도 유효한 말이다.
“黨의 獨占 포기해야 자유화 가능”
레이몽 아롱이 이 대담집을 낸 1981 년은 소련이 아직 붕괴하기 전이었다. 아롱은 1970년대 미국의 약화와 소련 군사력의 강화를 이 책 곳곳에서 언급하면서, 소련의 위협을 강조했다. 아롱은 단시일 내에 소련 및 동구 사회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롱은 그 이유를 소련 정권이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서 찾았다.
“소련은 러시아가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있는 유일 당(黨)입니다.
소비에트 체제가 당의 독점, 당의 우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특히 당에 집중된 권력이 곧 사회주의이며 자유라고 되풀이 말하는 그 적의에 찬 경직된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동유럽 체제의 이러한 성격이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한, 그 체제에 자유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물론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여하튼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입니다.”
“동유럽 국가가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 위성국들로 하여금 체제 수정의 자유를 허용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체제가 즉각 바뀔 것입니다.”
아롱의 이러한 생각들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롱은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신사고(新思考)를 하는 지도자가 나타나 ‘독일의 일부’ 더 나아가 동유럽에 대한 강점(强占)과 ‘당의 독점’을 포기하고 위성국들로 하여금 ‘체제 수정의 자유’를 허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롱이 죽은 지 6년 후에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독일이 통일됐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다. 아롱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조건을 정확하게 짚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롱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공산당이 여전히 당의 독점, 당의 우위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상, 중국의 민주화는 요원할 것이다. 북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햇볕정책’ 유의 대북(對北) 유화정책과 관련해서도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들이 있다. 아롱은 “상업교류를 유지함으로써, 또는 그것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을 근본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서방 측 사람들의 생각에서 내가 우습게 여기는 것은 ‘데탕트 아니면 전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데탕트건 냉전이건 어느 한쪽에 전쟁의 위험이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그런 위험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데탕트건 냉전이건 그것은 똑같은 대결의 서로 다른 양상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아롱은 “서유럽의 취약성은 사람들의 두려움”이라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개탄한다.
“두 진영이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선, 강제수용소”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에 대해 이렇게 통찰력을 보여주었지만, 레이몽 아롱의 주전선은 역시 프랑스 국내의 좌익 지식인들과의 사상(思想) 전쟁이었다. 그 결정탄이 1955년에 나온, 좌익 지식인들의 신화(神話)를 분석하는 《지식인의 아편》이었다. 아롱은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하는 지식인과 그것을 비난하는 지식인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두 진영이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이러한 두 자세다”라고 말했다.
아롱은 젊은 시절 친구이기도 했던 사르트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르트르가 못 참은 것은 소련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소련이라면 강제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적 의지 같은 것을 떠올렸습니다. 게다가 나는 소련이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나 스탈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혁명의 초기부터 이미 지금의 현상으로 귀착될 요인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만일 내가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적이 아니고 스탈린주의적이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면 아마도 사르트르는 참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그 자체를 문제 삼으면 사르트르에게는 본질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됩니다.”
“사르트르는 강제수용소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대》지에 쓴 기사에서 약 1000만명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는 한사코 비판하기를 거부했던 변태적 심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롱은 이렇게 말한다.
“사르트르는 나중에 솔제니친이 보여준 현실의 본질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메를로퐁티처럼 계급사회와 악랄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소련의 길밖에 없으며, 이처럼 변화된 사회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은 공산당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잔혹성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지요.”
아롱은 왜 그렇게 완강하게 전체주의를 거부했던 것일까? 아롱은 말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입니다. 그런데 저쪽 체제는 국민들에 대한 신뢰의 거부에 기초를 두고 있고, 과두적(寡頭的) 극소수만이 미래에 대한 결정적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혐오합니다. 35년 전부터 그것과 싸워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소수의 독재자만이 역사와 미래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견해 차이 때문에 아롱은 결국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 옛 친구들과 등을 돌리게 됐다. 아롱은 이렇게 탄식한다.
“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정치란 아마도 너무나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어서 우정이 그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인민전선의 경제정책은 ‘무지의 소산’”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아롱의 반대는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아롱은 1936년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좌익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무척이나 흥미롭다.
“평균 노동시간이 주 45시간이던 시대에 40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동자산의 축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민전선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좌익이라고 해서, 또 인민의 복지를 원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명약관화한 경제 조치들을 적용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죠.”
아롱은 그런 잘못된 경제정책들은 정책 담당자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항상 정책 담당자의 악의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순전히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사람들의 경제적 무지는 참으로 심한 것이었습니다. 레옹 블룸도 포함해서죠.”
문재인 정권의 주 52시간제 강행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이른바 주 52시간제, 소주성(소득주도성장), 탈원전(脫原電), 부동산 정책 등이 정말로 단순히 무지의 소산일까? 혹시 대한민국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산층과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꿈을 망가뜨리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한 악의의 소산은 아닐까? “정치적 싸움은 선과 악의 대결이 결코 아니고,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더 혐오스러운 것 사이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아롱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롱이 경제와 관련해서 한 말 중에는 “경제분석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은 민중선동에 가까우며 참으로 웃기는 일”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이 먼저다’라느니, 소득주도성장이라니 하는 말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공무원 증원은 추악한 민중선동”
아롱과 68세대 신철학파 지식인인 미시카, 볼통과의 대담이 끝나고 6개월여가 지난 후인 1981년 5월 대선(大選)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했다. 1958년 드골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이래, 아니 프랑스 현대정치사 전체를 통틀어서 초유의 정치적 사변(事變)이었다. 아롱은 이 책의 말미에서 미시카, 볼통과의 가상대담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사회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사회 정책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먼저 아롱은 미테랑이 내세운 공무원 증원에 대해 “18개월 동안 20만명 이상의 공무원을 신규 채용함으로써 실업을 퇴치한다는 발상은 내게는 추악한 민중선동의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공무원 20만명을 늘리는 데는 지금 당장은 별로 비싼 값이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국고 부담은 해가 갈수록 점점 무거워질 겁니다. 공무원은 일의 필요도에 따라서 늘려야지, 실업 퇴치를 위해 공무원 수를 늘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아롱은 “일은 적게 하면서 돈은 더 많이 벌게 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미테랑 정권의 복지 확대 정책에 대해서도 “국가는 불의의 사고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만을 보호해주고, 자신을 지킬 수단을 갖고 있는 그 외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치즘 때문에 독일 매도할 수 없어”
레이몽 아롱은 어린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프랑스위원회에 가담해서 활동했다. 하지만 레이몽 아롱은 독일을 적대하지 않는다.
대담자인 장 루이 미시카는 “그런데 나치의 그런 현상을 보고도 당신은 독일 철학을 계속 공부할 마음이 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롱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아, 물론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세대는 1914~1918년 전쟁을 이유로 독일 문화를 비난하는 지식인들을 경멸하고 혐오했습니다. 그들 말을 들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바그너의 음악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바그너는 독일인이니까. 요즘 같으면 그는 반유대주의자니까 그의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독일의 문화와 정치를 가르는 선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1939~1945년 사이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 국가사회주의(나치즘-기자 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정치적 분쟁 때문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민족을 매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걸핏하면 집권 세력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친일파’나 ‘토착왜구’로 낙인찍고, ‘반일(反日)선동’을 정치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나라,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 거기에 놀아나는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참으로 신선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롱은 자신이 전쟁 중에 자유프랑스에 몸담았다고 해서, 이 이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평가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차원의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전쟁 동안에 내가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았고, 또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도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평가를 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보편적 양심인 척하는 위선을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천박한 일이죠.”
이 또한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을 만끽하면서 ‘친일파’를 단죄(斷罪)하고, 민주화운동 이력을 내세워 타인(他人)과 역사를 함부로 재단(裁斷)하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정치인들의 작태와는 대조적이다.
‘참여하는 방관자’
프랑스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영국 망명을 택한 레이몽 아롱은 ‘원조(元祖) 골리스트(드골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드골이 만든 프랑스인민연합(FPF)에 가담하고, 1958년에 드골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1968년 68사태의 와중에서 드골 정부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권력에 빌붙지는 않았다.
아롱은 “나는 내가 투표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자유롭게 비판한다”면서 이러한 입장을 “권력자의 견해와 상관없이 모든 문제에 대해 내 고유의 견해를 갖겠다는 지적 자만심 또는 야심”이라고 표현한다. 정권의 이익을 곧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하면서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작금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모습과는 참 다른 모습이다.
아롱은 스스로를 ‘참여하는 방관자’라고 정의한다.
“진행 중에 있는 역사의 목격자로서 그 역사에 대해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되, 그러나 그 현실에서 이탈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지는 않겠다는, 다시 말해서 참여를 하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행동의 주역과 방관자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한데 결합해보고자 했습니다.”
‘가장 굳게 믿고 있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아롱은 이렇게 답한다.
“아마 ‘진실과 자유’ 아닐까요. 이 두 개념은 내게는 서로 불가분의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사랑과 거짓에 대한 혐오야말로 나의 존재 양식과 사고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해요.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인터뷰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 번역한 박정자 교수
“아롱, ‘이래서 자유주의는 옳고 정당하다’는 확신 갖게 해줘”
― 레이몽 아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유주의자, 우파, 보수주의자.”
― 1982년에 《20세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됐습니까.
“문예출판사의 권유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책을 읽어보니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좌파이념이 주류가 되면서 아롱의 책을 다시 찾는 분들이 있어서 새로 번역하게 됐습니다.”
― 번역 이전에 아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까.
“아롱 자신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지만, ‘사르트르’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사르트르와의 관계 속에서 아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 어떤 점에서 매료되었습니까.
“50년간의 세계사와 유럽의 사상 사조(思潮)를 설명한다는 점과 함께 아롱의 고민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아롱은 1930년대의 암담한 시기를 살았고, 프랑스의 쇠퇴를 생생하게 목격했기에,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약화시킬 모든 대립 현상을 막아야 하는 집념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회가 허약해지면 그 나라는 자칫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한 그가 국가의 존속을 제일의 관심사로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겠죠.”
“부르주아 지식인들, 자기 계급 혐오”
― 사르트르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아롱은 그렇지 못한데, 프랑스에서도 그렇습니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르트르는 1940년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어요. 다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면서 참여문학을 제창한 것이 전 세계 젊은이들과 지성계를 강타하면서 ‘전 세계 지성의 교황’이라는 말까지 들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지식인 사회에서의 이야기였지, 책에서 아롱이 얘기하는 것처럼 일반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었어요. 우리나라도 1980년대 대학가가 좌파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별 관심 없었잖아요.”
― 아롱이 철학자이면서도 프랑스 국내 정치나 현실, 국제 정치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냉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1930년대 초 독일 유학을 하면서 히틀러의 부상(浮上)을 목격하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을 직접 체험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 30년간 신문사 논설위원을 했다는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 왜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은 아롱이 본 것을 보지 못했을까요.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들은 관념적이었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분리해서 생각하려 했죠. 한국 좌파들도 공산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 김일성의 잘못이라고는 해도 마르크스의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잘못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 그런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원래 부르주아 문인들은 다 자기 계급을 혐오합니다. 그것은 플로베르 시절부터 이어져온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이죠. 고질이에요.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있는 제3 계급이라고 했어요. 그는 지식인은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충원(充員)되지만 그 계급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배계급이 되는 상향(上向) 탈(脫)계급과 피(被)지배계급과 함께하는 하향(下向) 탈계급이 있는데, 후자(後者)를 택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길이라고 주장했죠.”
솔제니친과 新철학파
― 아롱을 인터뷰했던 미시카, 볼통 같은 신철학파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68사태의 주역인 좌파 지식인들이었죠. 미제국주의를 비난하고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인 세대입니다. 하지만 1975년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접하고,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나 소련의 죄악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인권・자유 같은 가치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레이몽 아롱을 다시 발견하게 된 거죠.”
― 아롱의 어떤 면에 그들이 주목하게 된 것일까요.
“미시카와 볼통이 책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들은 아롱이 ‘냉전 이래 우익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좌파라는 지배 사조를 거슬러 갔던, 그리고 소련과 스탈린 체제의 성격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일찍 정확한 판단을 내렸으며, 그로 인해 지식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며 학문적 과업을 수행하는 용기를 지녔던’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죠. 책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좌파 이념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어요. 그 때문에 대담에서도 아롱과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잖아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저자인 신철학파의 기수 베르나르 앙리 레비도 나중에 ‘나는 여전히 좌파’라고 했죠. ”
― 오늘날 프랑스에서 아롱의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새롭게 각광을 받는다기보다는 괜찮은 ‘우파의 고전(古典)’으로 기억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잊히기는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예요.”
― 오늘날 우리에게 레이몽 아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번에 책을 다시 번역하면서 느낀 건데, 아롱을 읽으면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롱은 평생 좌파 사조와 맞서 싸웠지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1980년대 초 모두 미국의 쇠퇴를 이야기하던 시절에도 미국의 재도약을 이야기했죠. 오늘날 우리 주변에 좌파 세력이 엄청 많지만, ‘이래서 자유주의는 옳고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맨날 사르트르나 찾고…. 지식인이라면 레이몽 아롱을 읽어야 하는데, 아롱은 알지도 못하고….”
철학에 대해서는 영 모르는 기자도 학교 시절부터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년)의 이름은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레이몽 아롱은? 사실 기자부터도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다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대형 서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얼마나 되는지 검색해보았다. 《지식인의 아편》 《산업사회와 미래》 《권력과 지성》 《사회사상의 흐름》 《자유냐 평등이냐》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자들》 《지식인 삶의 고독한 존재》….
이쯤 되면 레이몽 아롱의 책들도 꽤 많이 번역되어 나온 것 같은데, 문제가 있다. 1980년대에 번역되어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됐다는 점이다. 사르트르의 책들이 계속 새로운 판본으로 나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지식인의 아편》은 아직도 나오고 있다기에 대형 서점에 나가 책을 찾아보았는데…. 도저히 읽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40여 년 전의 낡은 편집,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깨알만 한 글씨, 그리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번역….
70대 우파와 30대 좌파의 知的 칼싸움
그러던 차에 최근 반가운 책이 나왔다. 《마르크시즘을 ‘지식인의 아편’으로 규정한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기파랑 펴냄)이다. 역자(譯者)는 기파랑 주간인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역자는 1982년 《20세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냈던 이 책을 39년 만에 다시 펴냈다. 원제(原題)는 《참여하는 방관자: 장 루이 미시카(정치학자·후일 파리 부시장 역임), 도미니크 볼통(사회학자·후일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 소장)과의 대담(Le spectateur engagé)》이었다. 한국어판으로 490페이지이니 제법 두툼한 책인데도 술술 읽혔다.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이 1981년이니, 꼭 4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그렇게 술술 읽힌 것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늘의 대한민국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발간 직후부터 우파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은 이 책이 70대 후반의 우파 성향 노(老)지식인과 막 30대에 접어든 68세대 좌파 성향 지식인의 대담이라는 점이었다. 스탈린주의는 배척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좌파적인 두 젊은 지식인은 레이몽 아롱이 과거에 했던 말이나 그가 썼던 글들을 철저하게 공부한 후 인정사정없이 몰아친다. 노지식인은 “이것 보시오!”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하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치열한 지적(知的) 칼싸움을 보는 것 같다. ‘인터뷰는 모름지기 이래야 돼’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다.
책은 시기에 따라 3부[제1부 ‘혼란의 프랑스(1930~1947년)’, 제2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1947~1967년)’, 제3부 ‘자유와 이성(1967~1980년)’]로 나뉜다. 그리고 각 부는 ▲이념운동과 지식인들의 태도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지도계급의 능력 ▲국제적 대사건들이라는 세 축(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30년대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과 프랑스 내 좌우익 대립, 프랑스의 패전(敗戰)과 비시 정권의 수립, 1945년 이후 프랑스 정치의 혼란, 알제리 독립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논쟁, 68사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실태 등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와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역자가 충실하게 각주를 달아놓아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레이몽 아롱은 누구인가? 저자 레이몽 아롱은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사회학자·역사가·철학자이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우파 지식인이다. 파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동갑내기 장 폴 사르트르와 동기동창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히틀러 집권 직전 독일에 유학했고, 귀국 후 고교 교사와 툴루즈대학 교수로 있던 중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런던으로 탈출,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위원회의 기관지 《자유 프랑스》에 합류함으로써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종전 후 1947년부터 30년간 《피가로》지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국립행정학교(ENA), 소르본대학교 등의 교수를 겸임했다. 젊은 시절 잠깐 좌파 운동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전체주의와 좌파 이념에 맞서 필봉을 휘둘렀다. 《지식인의 아편》에서 서구사회 내 마르크시스트들을 비판하여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과 결별했다. 《산업사회에 관한 18개의 강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환상적 마르크시즘》 등의 저서가 있다. |
‘대중운동의 근본적인 우매성’
오늘날 우리는 왜 레이몽 아롱에 주목해야 하나? 아롱이 평생 좌우(左右)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많은 젊은 지식인처럼 아롱도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꼭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동시에 우리에게 가르쳐줄 진정한 역사철학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롱은 “거의 1년간 마르크시즘을 공부한 후 그것이 정확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역사의 분석만으로는 앞으로 취해야 할 정치 방향을 이끌어낼 수도 없고, 또 인간 사이의 모순이 제거될 사회의 도래를 예견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아롱은 1920년대에 서구 지식인들의 소련에 대한 열광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또 이미 그때부터 기질적으로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메시아 사상이나 밀레니엄 사상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1920년대의 나에게 볼셰비즘은 특별한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이몽 아롱은 그 시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롱은 동(同)시대의 지식인들에 비해 전체주의의 대두와 폭력성을 먼저 목격하고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이 시기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막 대두하고 있던 나치즘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아롱은 이를 통해 “대중운동의 근본적인 우매성, 정치의 비(非)합리성, 그리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우매한 정열을 이용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나치즘이라는 대중운동의 포퓰리즘적 속성을 꿰뚫어 본 것인데,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롱은 자유문명 세계를 위협하는 전체주의는 “히틀러인 동시에 또 스탈린이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있었다. 1939년 6월 프랑스철학회 발표에서 그는 “히틀러가 만일 필요성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결국 스탈린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그 동맹이 불과 두 달여 뒤에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를 보면서 아롱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현실 공산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아롱의 고등사범학교 동창 사르트르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은 ‘앙가주망(engagement·현실참여)’을 강조했지만, 레이몽 아롱은 ‘선택’과 ‘결단’을 강조한다. “한 사회 안에서 정치적 사상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기본적인 선택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체제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선택에서부터 결단이 나오는 것이며, 이 정확한 결단에 의해 한 개인은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택이며, 이 선택에 의해 우리 각자는 현재의 자기 자신, 또는 앞으로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롱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왜 아롱을 읽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우리야말로 ‘살고 있는 사회 체제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지,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岐路)로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70여 년 전에 한번 그 선택을 했었다. 해방 후의 좌우익 투쟁과 6·25전쟁을 통해 우리는 결단하고 선택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지우려는 체제 전복(顚覆) 세력의 끊임없는 공작과, 우리 자신의 안이함과 나태함 때문에 다시 한 번 70여 년 전에 했던 선택과 결단의 번복(飜覆)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敵의 승리는 전쟁의 불행보다 훨씬 더 나쁘다”
![]() |
아롱은 1930년대 초 히틀러의 대두를 목격하면서 反전체주의자가 됐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이에 대해 레이몽 아롱은 “1933~ 1939년 사이에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으로 치닫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1938년 뮌헨협정 다음 날 한 강의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피한다 해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지 안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아롱은 ‘전쟁을 함으로써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모든 불행은 전쟁 그 자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에 대해 “적의 승리라는 결과는 전쟁의 불행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라고 반박한다.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은 안 된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의 언명을 아롱이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군(軍)기상관측대에서 복무했던 아롱은 패전 후 ‘밖으로 나가 싸움을 계속’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기관지 《자유프랑스》를 발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지목했던 두 전체주의자 중 하나인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전체주의자인 스탈린과 손을 잡아야 하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을 일단 수긍한다. 그는 “두 개의 악마적인 위협에 동시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그중의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만 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났다. 스탈린의 소련이 유럽의 절반을 장악하고 철(鐵)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롱의 생각 속에 내재해 있던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경계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롱이 독일의 분단에 대해 말하는 대목을 보자.
“어떤 사람들은 독일을 통일시켜 중립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945년 가을부터 소련이 동독을 소비에트화했기 때문입니다. 동독을 소비에트화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아롱은 여기서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밀로반 질라스에게 “이런 전쟁에서는 승자가 자신의 이념과 체제까지 함께 갖고 들어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소련군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해방군’이 아니라 진짜 ‘점령군’이었다. 1945~1948년 한반도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38선 이북을 점령한 직후부터 소련은 북한 땅의 소비에트화를 서둘렀다. 그런 상황 아래서 남북협상에 의한 단일정부 수립은 독일의 중립화 통일만큼이나 백일몽(白日夢)이었다.
아롱은 소비에트 치하의 삶에 대해 일말의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1949~1952년 시기에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지지자가 되려면 탁월한 무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유럽의 소비에트 지역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문득 ‘오늘날 한국 땅에서 북한 체제의 지지자가 되려면 아롱이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무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소비에트 지역은 이미 30년 전에 붕괴했고, 북한 지역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독립에 배치되나?”
냉전에 대한 직시는 전후(戰後)의 동맹관계 구축(構築)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먼저 아롱은 구적(仇敵) 독일(당시는 서독)과 화해를 강조했다.
“지금 유럽의 가장 큰 세력은 무수한 위성국가를 거느린 소련이다. 만일 세력균형을 이루고 싶다면 유럽에 미군이 주둔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의 서유럽공동체를 재건해야만 한다. 그런데 서독을 빼놓고는 서유럽공동체를 만들 수가 없다.”
전체주의 중국과 북한이라는 공적(公敵)을 앞에 두고도 일본과의 안보협력 얘기만 나와도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떨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마치 을사늑약이라도 되는 양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의 현실과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과거를 철저히 반성한 독일은 여전히 과거를 미화하려 드는 일본과는 다르다”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 했던 것과 같은 양심 성찰’ 운운하는 미시카의 말에 아롱은 이렇게 말한다.
“패전해서 전승국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 거지, 독일이 언제 자신의 양심 성찰을 한 적이 있나요?”
이렇게 말할 때, 아롱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롱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패퇴시킨 것은 프랑스인들의 항전과 희생이 아니라 미국의 힘이었다’고 쿨하게 인정하면서 프랑스인들의 고질적인 혐미(嫌美)감정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1918년에 승리를 안겨주었고, 1944년과 45년에는 해방을 도와주었으며, 전후에는 경제재건을 도와준 미국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적대적인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배은망덕이죠.”
나토 통합사령부에서 탈퇴한 드골, 그리고 많은 프랑스인과는 달리 레이몽 아롱은 미국과의 군사동맹, 즉 북대서양조약에 대해 그것이 프랑스의 주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 조약은 프랑스의 외교적 자주성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공격을 받은 나라를 도와준다는 상호공약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이것이 한 국가의 독립을 손상시킨다는 것입니까?”
전시(戰時)작전통제권 회수를 주권 문제,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인 양 호도하는 자들에게도 유효한 말이다.
“黨의 獨占 포기해야 자유화 가능”
![]() |
베를린장벽 붕괴. 고르바초프가 위성국에 자유를 허용하면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졌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소련은 러시아가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있는 유일 당(黨)입니다.
소비에트 체제가 당의 독점, 당의 우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특히 당에 집중된 권력이 곧 사회주의이며 자유라고 되풀이 말하는 그 적의에 찬 경직된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동유럽 체제의 이러한 성격이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한, 그 체제에 자유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물론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여하튼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입니다.”
“동유럽 국가가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 위성국들로 하여금 체제 수정의 자유를 허용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체제가 즉각 바뀔 것입니다.”
아롱의 이러한 생각들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롱은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신사고(新思考)를 하는 지도자가 나타나 ‘독일의 일부’ 더 나아가 동유럽에 대한 강점(强占)과 ‘당의 독점’을 포기하고 위성국들로 하여금 ‘체제 수정의 자유’를 허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롱이 죽은 지 6년 후에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독일이 통일됐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다. 아롱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조건을 정확하게 짚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롱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공산당이 여전히 당의 독점, 당의 우위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상, 중국의 민주화는 요원할 것이다. 북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햇볕정책’ 유의 대북(對北) 유화정책과 관련해서도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들이 있다. 아롱은 “상업교류를 유지함으로써, 또는 그것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을 근본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서방 측 사람들의 생각에서 내가 우습게 여기는 것은 ‘데탕트 아니면 전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데탕트건 냉전이건 어느 한쪽에 전쟁의 위험이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그런 위험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데탕트건 냉전이건 그것은 똑같은 대결의 서로 다른 양상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아롱은 “서유럽의 취약성은 사람들의 두려움”이라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개탄한다.
“두 진영이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선, 강제수용소”
![]() |
사르트르 |
아롱은 젊은 시절 친구이기도 했던 사르트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르트르가 못 참은 것은 소련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소련이라면 강제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적 의지 같은 것을 떠올렸습니다. 게다가 나는 소련이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나 스탈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혁명의 초기부터 이미 지금의 현상으로 귀착될 요인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만일 내가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적이 아니고 스탈린주의적이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면 아마도 사르트르는 참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그 자체를 문제 삼으면 사르트르에게는 본질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됩니다.”
“사르트르는 강제수용소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대》지에 쓴 기사에서 약 1000만명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는 한사코 비판하기를 거부했던 변태적 심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롱은 이렇게 말한다.
“사르트르는 나중에 솔제니친이 보여준 현실의 본질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메를로퐁티처럼 계급사회와 악랄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소련의 길밖에 없으며, 이처럼 변화된 사회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은 공산당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잔혹성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지요.”
아롱은 왜 그렇게 완강하게 전체주의를 거부했던 것일까? 아롱은 말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입니다. 그런데 저쪽 체제는 국민들에 대한 신뢰의 거부에 기초를 두고 있고, 과두적(寡頭的) 극소수만이 미래에 대한 결정적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혐오합니다. 35년 전부터 그것과 싸워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소수의 독재자만이 역사와 미래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견해 차이 때문에 아롱은 결국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 옛 친구들과 등을 돌리게 됐다. 아롱은 이렇게 탄식한다.
“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정치란 아마도 너무나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어서 우정이 그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인민전선의 경제정책은 ‘무지의 소산’”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아롱의 반대는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아롱은 1936년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좌익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무척이나 흥미롭다.
“평균 노동시간이 주 45시간이던 시대에 40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동자산의 축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민전선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좌익이라고 해서, 또 인민의 복지를 원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명약관화한 경제 조치들을 적용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죠.”
아롱은 그런 잘못된 경제정책들은 정책 담당자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항상 정책 담당자의 악의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순전히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사람들의 경제적 무지는 참으로 심한 것이었습니다. 레옹 블룸도 포함해서죠.”
문재인 정권의 주 52시간제 강행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이른바 주 52시간제, 소주성(소득주도성장), 탈원전(脫原電), 부동산 정책 등이 정말로 단순히 무지의 소산일까? 혹시 대한민국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산층과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꿈을 망가뜨리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한 악의의 소산은 아닐까? “정치적 싸움은 선과 악의 대결이 결코 아니고,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더 혐오스러운 것 사이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아롱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롱이 경제와 관련해서 한 말 중에는 “경제분석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은 민중선동에 가까우며 참으로 웃기는 일”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이 먼저다’라느니, 소득주도성장이라니 하는 말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공무원 증원은 추악한 민중선동”
아롱과 68세대 신철학파 지식인인 미시카, 볼통과의 대담이 끝나고 6개월여가 지난 후인 1981년 5월 대선(大選)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했다. 1958년 드골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이래, 아니 프랑스 현대정치사 전체를 통틀어서 초유의 정치적 사변(事變)이었다. 아롱은 이 책의 말미에서 미시카, 볼통과의 가상대담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사회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사회 정책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먼저 아롱은 미테랑이 내세운 공무원 증원에 대해 “18개월 동안 20만명 이상의 공무원을 신규 채용함으로써 실업을 퇴치한다는 발상은 내게는 추악한 민중선동의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공무원 20만명을 늘리는 데는 지금 당장은 별로 비싼 값이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국고 부담은 해가 갈수록 점점 무거워질 겁니다. 공무원은 일의 필요도에 따라서 늘려야지, 실업 퇴치를 위해 공무원 수를 늘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아롱은 “일은 적게 하면서 돈은 더 많이 벌게 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미테랑 정권의 복지 확대 정책에 대해서도 “국가는 불의의 사고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만을 보호해주고, 자신을 지킬 수단을 갖고 있는 그 외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치즘 때문에 독일 매도할 수 없어”
레이몽 아롱은 어린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프랑스위원회에 가담해서 활동했다. 하지만 레이몽 아롱은 독일을 적대하지 않는다.
대담자인 장 루이 미시카는 “그런데 나치의 그런 현상을 보고도 당신은 독일 철학을 계속 공부할 마음이 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롱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아, 물론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세대는 1914~1918년 전쟁을 이유로 독일 문화를 비난하는 지식인들을 경멸하고 혐오했습니다. 그들 말을 들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바그너의 음악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바그너는 독일인이니까. 요즘 같으면 그는 반유대주의자니까 그의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독일의 문화와 정치를 가르는 선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1939~1945년 사이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 국가사회주의(나치즘-기자 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정치적 분쟁 때문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민족을 매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걸핏하면 집권 세력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친일파’나 ‘토착왜구’로 낙인찍고, ‘반일(反日)선동’을 정치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나라,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 거기에 놀아나는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참으로 신선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롱은 자신이 전쟁 중에 자유프랑스에 몸담았다고 해서, 이 이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평가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차원의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전쟁 동안에 내가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았고, 또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도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평가를 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보편적 양심인 척하는 위선을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천박한 일이죠.”
이 또한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을 만끽하면서 ‘친일파’를 단죄(斷罪)하고, 민주화운동 이력을 내세워 타인(他人)과 역사를 함부로 재단(裁斷)하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정치인들의 작태와는 대조적이다.
‘참여하는 방관자’
프랑스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영국 망명을 택한 레이몽 아롱은 ‘원조(元祖) 골리스트(드골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드골이 만든 프랑스인민연합(FPF)에 가담하고, 1958년에 드골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1968년 68사태의 와중에서 드골 정부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권력에 빌붙지는 않았다.
아롱은 “나는 내가 투표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자유롭게 비판한다”면서 이러한 입장을 “권력자의 견해와 상관없이 모든 문제에 대해 내 고유의 견해를 갖겠다는 지적 자만심 또는 야심”이라고 표현한다. 정권의 이익을 곧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하면서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작금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모습과는 참 다른 모습이다.
아롱은 스스로를 ‘참여하는 방관자’라고 정의한다.
“진행 중에 있는 역사의 목격자로서 그 역사에 대해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되, 그러나 그 현실에서 이탈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지는 않겠다는, 다시 말해서 참여를 하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행동의 주역과 방관자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한데 결합해보고자 했습니다.”
‘가장 굳게 믿고 있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아롱은 이렇게 답한다.
“아마 ‘진실과 자유’ 아닐까요. 이 두 개념은 내게는 서로 불가분의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사랑과 거짓에 대한 혐오야말로 나의 존재 양식과 사고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해요.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인터뷰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 번역한 박정자 교수
“아롱, ‘이래서 자유주의는 옳고 정당하다’는 확신 갖게 해줘”
朴貞子 1943년생. 서울대 불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조선일보》 《경향신문》 기자,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 전문위원,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 상명대 사범대학장, 프랑스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다시 보기》 《시뮬라크르의 시대》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역서) 《사상의 거장들》(역서) |
![]() |
사진=조준우 |
“자유주의자, 우파, 보수주의자.”
― 1982년에 《20세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됐습니까.
“문예출판사의 권유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책을 읽어보니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좌파이념이 주류가 되면서 아롱의 책을 다시 찾는 분들이 있어서 새로 번역하게 됐습니다.”
― 번역 이전에 아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까.
“아롱 자신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지만, ‘사르트르’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사르트르와의 관계 속에서 아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 어떤 점에서 매료되었습니까.
“50년간의 세계사와 유럽의 사상 사조(思潮)를 설명한다는 점과 함께 아롱의 고민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아롱은 1930년대의 암담한 시기를 살았고, 프랑스의 쇠퇴를 생생하게 목격했기에,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약화시킬 모든 대립 현상을 막아야 하는 집념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회가 허약해지면 그 나라는 자칫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한 그가 국가의 존속을 제일의 관심사로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겠죠.”
“부르주아 지식인들, 자기 계급 혐오”
― 사르트르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아롱은 그렇지 못한데, 프랑스에서도 그렇습니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르트르는 1940년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어요. 다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면서 참여문학을 제창한 것이 전 세계 젊은이들과 지성계를 강타하면서 ‘전 세계 지성의 교황’이라는 말까지 들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지식인 사회에서의 이야기였지, 책에서 아롱이 얘기하는 것처럼 일반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었어요. 우리나라도 1980년대 대학가가 좌파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별 관심 없었잖아요.”
― 아롱이 철학자이면서도 프랑스 국내 정치나 현실, 국제 정치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냉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1930년대 초 독일 유학을 하면서 히틀러의 부상(浮上)을 목격하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을 직접 체험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 30년간 신문사 논설위원을 했다는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 왜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은 아롱이 본 것을 보지 못했을까요.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들은 관념적이었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분리해서 생각하려 했죠. 한국 좌파들도 공산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 김일성의 잘못이라고는 해도 마르크스의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잘못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 그런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원래 부르주아 문인들은 다 자기 계급을 혐오합니다. 그것은 플로베르 시절부터 이어져온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이죠. 고질이에요.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있는 제3 계급이라고 했어요. 그는 지식인은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충원(充員)되지만 그 계급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배계급이 되는 상향(上向) 탈(脫)계급과 피(被)지배계급과 함께하는 하향(下向) 탈계급이 있는데, 후자(後者)를 택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길이라고 주장했죠.”
레이몽 아롱 어록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적의 편으로 넘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프랑스인은 별것도 아닌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꾸며서 나중에 그것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다.” ▲“의회민주주의는 너무나 산문적이어서 아무도 그것에 열광하지 않았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아쉬워지는 게 의회민주주의다.” ▲“미래가 인간의 자유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긴 거나 다름없다.” ▲“나는 반(反)파시스트였지만, 그러나 자기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시즘 안에 한데 집어넣는 그런 반(反)파시즘에는 반대했다.” ▲“지식인들은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도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이 세계를 비판만 하려 한다.” |
솔제니친과 新철학파
― 아롱을 인터뷰했던 미시카, 볼통 같은 신철학파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68사태의 주역인 좌파 지식인들이었죠. 미제국주의를 비난하고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인 세대입니다. 하지만 1975년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접하고,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나 소련의 죄악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인권・자유 같은 가치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레이몽 아롱을 다시 발견하게 된 거죠.”
― 아롱의 어떤 면에 그들이 주목하게 된 것일까요.
“미시카와 볼통이 책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들은 아롱이 ‘냉전 이래 우익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좌파라는 지배 사조를 거슬러 갔던, 그리고 소련과 스탈린 체제의 성격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일찍 정확한 판단을 내렸으며, 그로 인해 지식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며 학문적 과업을 수행하는 용기를 지녔던’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죠. 책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좌파 이념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어요. 그 때문에 대담에서도 아롱과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잖아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저자인 신철학파의 기수 베르나르 앙리 레비도 나중에 ‘나는 여전히 좌파’라고 했죠. ”
― 오늘날 프랑스에서 아롱의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새롭게 각광을 받는다기보다는 괜찮은 ‘우파의 고전(古典)’으로 기억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잊히기는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예요.”
― 오늘날 우리에게 레이몽 아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번에 책을 다시 번역하면서 느낀 건데, 아롱을 읽으면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롱은 평생 좌파 사조와 맞서 싸웠지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1980년대 초 모두 미국의 쇠퇴를 이야기하던 시절에도 미국의 재도약을 이야기했죠. 오늘날 우리 주변에 좌파 세력이 엄청 많지만, ‘이래서 자유주의는 옳고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