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부를 물심양면 지원한 전두환 대통령
⊙ 김대중 사형 확정에 협조한 법관, 전국구 의원직 요구
⊙ 청와대 근처 요정 여주인 외화 밀반출 사건
⊙ 5공 정권과 맞선 이회창·이일규 대법관 이야기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 김대중 사형 확정에 협조한 법관, 전국구 의원직 요구
⊙ 청와대 근처 요정 여주인 외화 밀반출 사건
⊙ 5공 정권과 맞선 이회창·이일규 대법관 이야기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 서울 중구 서소문에 위치한 옛 대법원 건물.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조선DB
전두환 정권인 1986년 이른 봄, 나는 개인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거리는 최루탄 연기가 안개같이 덮인 전쟁터였다. 시위대가 손에 쥔 쇠 파이프는 아스팔트를 긁으며 섬뜩한 금속성 소리를 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소위 시국사범을 재판하는 법정도 이미 법의 권위가 실종된 난장판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서소문에 있던 서울지방법원 법정을 드나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던 퇴락한 청사였다.
5共 시절 어느 판사가 토로한 회의감
법정에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판사들 앞에서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당당하게 얘기했다. 방청석에서는 운동권 가요가 울려 퍼졌다. 재판을 받던 운동권 출신들은 갑자기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 법대 위의 판사들에게 날렸다. 그런 때면 판사들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뒤쪽의 쪽문을 통해 도망가기 바빴다.
나는 난장판이 된 법정의 변호사석에 혼자 서서 ‘이게 뭐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어느 날 한 소장 판사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눌 때였다. 그 판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운동권 재판을 할 때 들어보면 그 말들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법 교과서에만 매달려 공부하느라고 사회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정치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현실의 사법부 조직과 실정법에 매여 있는 몸이죠. 그들이 옳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형(刑)을 선고해야 해요. 그러면서 언제 고무신짝이 날아올지 눈치를 봐야 해요. 모멸감이 들면서 내가 판사가 맞나 하는 회의가 듭니다.”
임관한 지 얼마 안 되는 동기생 판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절대 도망 안 가요. 고무신짝에 맞더라도 법관이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법의 권위를 세우는 마지막 보루(堡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법원장, 대법관 등이 모두 자리에 연연하며 권력에 무릎을 꿇으니까 사법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내가 일선에서 본 전두환 정권의 법원 풍경이었다.
1987년 6월 10일의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사실상 힘을 잃고 항복했다. 헌법 개정이 있었고 직선제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나는 노태우 정권의 직속 기구로 들어가 또 다른 위치에서 현재의 사법부와 과거 정권의 사법부를 보게 됐다. 정보기관은 자체적으로 인식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었다. 안전기획부 청사 내부를 공개하고 언론에 북한 관련 정세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정보관을 보내 언론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던 관행을 과감히 바꾸려는 것 같았다. 법조 출입을 하는 정보관이 이따금씩 내가 있는 지휘부의 특수 부서를 찾아와 법조계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 초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秘話
“정권의 실세인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정기승을 대법원장감으로 추천했어요. 박철언 보좌관이 서울 시내 호텔에서 정기승을 만났고, 노 대통령은 정기승의 대법원장 발탁을 내락했죠. 여소야대 상황이지만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지지만 얻으면 국회의 동의는 무난하다고 봤습니다. 정기승은 김종필과는 공주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였거든요. 박 보좌관은 야당 의원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면서 임명동의안 통과 작업을 벌였어요. 의원들 반응을 분석한 결과 통과가 무난하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재야(在野)의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 등이 전국의 변호사를 상대로 임명 반대서명 작업에 들어간 겁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대법원장의 임명이 정치적인 쟁점이 됐죠.”
내가 물었다.
“그런데 정기승씨는 결국 국회 인준을 못 받지 않았습니까.”
정보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김대중과 김영삼 쪽이었습니다. 양김(兩金)은 자기 당 소속 의원들이 대법원장 임명 동의를 묻는 기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개별적 찬성을 원천봉쇄한 거죠. 그러자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도 적극적인 지지는 못하고 각 의원들에게 자유의사로 투표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도 통과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봤죠.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표결결과 과반수 148표에서 7표가 모자라 임명동의안이 부결이 되어버린 거죠. 14표의 무효표가 있었는데 그게 무효가 아니라 대법원장 후보 정기승에 대한 찬성표였어요. 초선 의원들이 실수한 거예요.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에는 찬성이냐 반대냐를 묻는 가부(可否)만 표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초선 의원들이 ‘정기승’이란 이름을 투표지에 써넣는 바람에 무효표가 되어버린 거죠. 당에서 투표방법을 교육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죠.
정기승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은 외형상 부결(否決)이었지만 사실상은 가결(可決)된 거죠. 그걸 안 노태우 대통령은 ‘야, 이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면서 불쾌해했죠. 정권을 인수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을 연임시키려다가 안 돼 새로 선택한 사람이 정기승이었거든요.”
법조 출입 정보관이 덧붙였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이 지난번 대법원장을 계속 있도록 노태우 대통령과 협의했어요. 대법원장은 떠나가는 대통령에게는 방파제 같은 위치였기 때문이죠. 이면에서 정치적 흥정이 다 됐어요. 야당은 야당 추천 대법관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죠.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몫으로 두 명 정도의 대법관 자리를 내놓기로 했죠. 단 기존 대법원장의 유임에 동의해달라는 거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대해서는 대법원에 계류 중인 당사(黨舍) 반환소송을 해결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정치적 흥정이 왜 깨졌는지는 아시죠? 신문에도 많이 났으니까.”
6共 정권 출범 후 들고일어난 판사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이 법률팀 자료에 스크랩이 되어 있었다. 1988년 6월 15일, 법원 기자실에 한 장의 성명서가 제출됐다. 서울 지역에 근무하는 판사 37명이 주축이 돼 사법부의 일대 쇄신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핵심은 이랬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는 이제 더 이상 방치해둘 수 없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사법부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부분을 국민들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스스로 쟁취해왔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국민의 민주화 열기의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아무런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은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법부의 신뢰가 저하된 것은 지나간 시대의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사법부의 구성은 정치 거래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사법부의 신뢰회복, 나아가 사법권의 독립은 국민의 민주화 의지와도 직결된 문제로서 그 가시적인 방법은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一新)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판사들은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된 대법원장의 퇴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전국의 지방법원 판사들도 서명 열기에 휩싸였다. 전국의 소장(少壯) 법관 335명이 동참했고 고등법원 판사급 이상의 중견 법관 중 상당수가 성명의 취지에 찬성했다. 마침내 전두환·노태우 양자가 합의했던 대법원장 연임에 관한 정치적 묵계가 깨져버린 것이다.
사법부에 호의적이었던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은 사법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죠?”
내가 담당 정보관에게 물었다. 전두환 정권의 사법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법부에 대해 상당한 호의(好意)를 베풀었어요. 전국의 법원 건물이 아주 초라한 건 직접 보셔서 잘 아시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죠. 전두환 대통령이 ‘사법시설 조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도록 한 거 아닙니까? 범칙금이나 몰수품 매각대금을 법원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이었죠. 전두환 대통령은 대법관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하면서 골프를 권장하기도 했어요. 사법부에 대해 많은 요구를 하지도 않았어요.”
“전두환 정권이 그랬다는 게 선뜻 납득이 안 가는데요.”
“전두환 대통령이 엄벌을 요구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욕하고 반대하는 시위였죠.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는 그가 강력히 지시한 과외 금지 조치를 위반한 행위였어요. 전 대통령은 과외 금지를 5공화국의 치적(治績)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는 안보를 위한 간첩죄였죠.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의 분노를 사는 판결 선고가 있었죠. 5공의 치적으로까지 생각한 과외 금지에 대해 이회창 대법관이 무죄를 선고한 거예요. 학문이나 배움에 제약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게 판결 이유였어요. 또 보안사령부에서 간첩죄로 송치한 사건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적이 있어요. 사법부가 대통령의 기본지침을 정면으로 거부한 상황이 발생한 거죠. 청와대는 보수우익 성향이라고 평가되는 판사로 바꾸어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그 사건을 유죄판결로 바꿨죠.”
대법관 후보자의 은밀한 불륜 행각
“전두환 정권 사법부의 수뇌부를 어떻게 보나요?”
내가 정보관에게 물었다.
“1980년 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석 달 만에 초스피드로 1·2심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됨으로써 김대중에게 사형이 확정됐죠. 김재규의 조속한 사형 확정에 협조한 주심(主審)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됐고요. 재야에서 김대중에 대한 100일간의 불법구속 문제를 제기하는데, 법원은 의도적으로 그걸 외면하더라고요. 그때 사법부의 비열함을 목격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느낀 겁니까?”
“김대중 사형 확정에 협조한 법관 중 한명이 어느 날 권력의 실세를 몰래 찾아가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한 게 우리 안테나에 걸렸어요. 위에서는 그에게 전국구 의원직 대신에 대법관 자리를 추천해주기로 했죠. 그가 대법관이 된 지 몇 달 후였어요. 전두환 정권이 만든 사회정화위원회에 한 장의 투서(投書)가 날아들었어요. 법관 시절 여자관계에 관한 내용이었죠. 우리가 은밀히 내사(內査)했어요. 대법관이 되기 전 두명의 법원 여직원과 불륜관계를 맺어왔더라고요. 법원 여직원이 결혼한 후에도 관계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실을 보고하니까 위에서 그 대법관이 조용히 사표를 쓰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더라고요.
법관 중에도 출세주의자들이 더러 있었어요. 정보기관의 안테나에 걸린 3류 법관들이 많았어요. 법원 내부에서 실력이 없어 무시당하는 판사가 대통령의 동생이나 형을 통해 대법관이 되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일들이 있었죠. 그런 부탁을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불러 밥을 먹는 자리에서 청탁했던 판사를 대법관이 되게 하라고 지시를 한 적도 있어요. ‘서울대 출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대법관을 해봐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였습니다. 법관들 사이에서 비웃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대통령의 측근에 선(線)을 대고 적당한 명분만 만들어내면 대법관이 될 수 있다는 자조적인 말이 법원가(街)에 나돌았죠.”
“그런 판사들이 상당했나 보네요.”
내가 묻자 정보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파격적으로 출세한 판사도 있었어요.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은 대법원장에게 지방법원의 아는 판사를 당장 법원장급으로 승진시켜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파견하라고 명령을 한 적도 있죠. 우리 정보기관에서 배경을 알아보니까 그 판사가 대통령 동생을 통해 미리 작업을 하고 그렇게 명령이 내려가게 한 거죠.”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 같았다.
오성환 판사
“세상은 그렇게 나쁘게 돌아가지만은 않아요. 강직한 법관이 결국 제자리를 찾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건 어떤 경우였죠?”
내가 물었다.
“오성환 판사는 강직하고 정의로운 판사라는 게 법조계 내외(內外)의 평가였어요. 오성환 판사는 일찍부터 대법관 후보에 올랐었죠. 그러나 대법원장이 그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겁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지만 대법원장은 오성환 판사보다 고교 후배인 다른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하는 인사안을 청와대에 올렸어요. 대법원장의 추천과는 달리 청와대에 판사 출신 법률비서관이 있었는데, 그분이 오성환 판사를 대법관으로 적극 밀었어요. 오성환 판사는 그렇게 대법관이 된 걸로 압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들을 법관 재임용 때 잘라버렸죠? 그 상황이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법관 재임용이 있었죠. 우리 안전기획부에서 판사들에 대한 정보를 대법원장에게 줬죠. 문제 법관 70명에 관한 내용들이었어요. 보고서의 내용 중에는 더러 ‘이중인격’이라는 평가도 있었어요. 법정에서의 태도와 집으로 찾아온 변호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때 그런 평가를 내렸죠. 대법원장은 그 명단에 들어 있는 부장판사 한명의 옷을 벗기려고 마음먹고 있더라고요. 대법원장에게 유신(維新) 법관 물러나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우리 정보보고서에 그 부장판사가 골프장을 운영하는 것이 적혀 있었거든요.
청와대 측은 탈락되는 법관의 수가 너무 많을 경우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서 법관의 5% 정도로 하라고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어요. 재임용에서 탈락할 위험성이 있는 판사들이 각자 줄을 대어 구명운동을 하더라고요. 대법원장과 등산을 같이 하는 친한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대통령의 종친회 멤버를 통해 청탁을 하기도 했죠. 표적이 됐던 부장판사도 권력의 실세에게 부탁을 해서 살아났어요. 5공 정권에서는 사법부의 특이한 사건들도 많았죠.”
요정 여주인 외화 밀반출 사건
“어떤 것들 말이죠?”
“1982년경 청와대 근처의 요정(料亭) 여주인이 22만 달러를 밀반출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터졌어요. 시중에서는 그 돈이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소유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 정보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엄히 조사하라고 안기부에 지시했죠. 우리가 알아보니까 담당 변호사들은 검찰의 고위직 출신이고 보석(保釋)으로 요정 여주인을 풀어줬죠. 그러고 집행유예가 선고됐고요.
우리 정보기관의 안테나에 대법원장 비서관이 담당 재판부에 청탁한 사실이 걸렸어요. 대법원장 비서관과 담당 변호사들을 남산의 지하실로 연행했죠. 대법원장과 그 비서관의 행적이 나타났어요. 법원의 일반직 공무원인 대법원장 비서관은 오랫동안 혼자 살고 있던 대법원장을 집사(執事)같이 모셨죠. 더러 외롭고 무료한 대법원장의 술 동무가 되기도 하고 같이 카바레에 가서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서관이 사건청탁을 받고 돈을 받아 챙기기도 했죠. 그런 게 들통이 난 거죠. 대법원장의 비서관을 구속기소 하고 실형(實刑) 선고가 나오게 했죠.
그 시절은 변호사들이 자유롭게 판사실에 출입을 하면서 밥값과 술값을 주곤 했어요. 담당 변호사들이 검사실과 판사실에 들를 때 돈을 줬어요. 그걸 문제 삼아 담당 재판장과 검사가 사표를 내게 했습니다. 그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들은 법률사무소의 문을 닫았죠. 우리 조직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걸 검찰이나 법원에 맡겼으면 사건을 조용히 뭉개지 그렇게 했겠습니까.”
“결국 대법원장도 쫓겨나지 않았나요?”
내가 물었다.
“그건 《법률신문》의 칼럼 사건이 도화선이 된 측면이 있어요. 1985년 9월경 《법률신문》에 서태영 판사가 쓴 작은 칼럼이 있어요. 아직 움직일 때가 되지 않은 판사를 지방으로 유배 보내듯 하는 대법원장의 인사를 군대의 인사에 빗대 비판한 글이었죠. 오전에 그 칼럼을 본 대법원장은 서 판사를 바로 울산지원으로 보내는 인사명령을 내렸죠. 좌천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됐어요. 그걸 보고 법관들이 술렁였죠. 특히 대한변호사협회가 들고일어났어요. 야당이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를 발의했고, 여섯 달 후 대법원장은 스스로 퇴임했죠.”
전두환 ‘전씨 집안이 다 해 먹으면 안 된다’
“그다음 대법원장 인선 배경은 어땠나요?”
내가 물었다.
“일단 정권에서는 법조계의 여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는데 퇴임한 이회창과 오성환 대법관이 법조계의 별이었어요. 이회창은 반(反)정부적 성향에다 소수의견을 내는 법관이라 신망은 있지만 위험하다는 의견이 강했어요. 그래서 인품이 무난한 오성환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하기로 했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오성환은 대법원장 취임을 거절했어요. 이회창씨가 먼저 대법원장을 하면 그다음에 자신이 하겠다고 했어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행동이었죠. 대법원장 자리는 판사들이 일생의 목표로 삼는 영광스러운 자리 아닙니까? 그런 자리를 거부한 거죠.
차기 대법원장을 누구를 시킬까 거론됐죠. 전두환 대통령의 종친회에서는 같은 집안인 전상석 대법관이 대법원장이 되어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전씨 집안이 다 해 먹으면 안 된다’면서 종친회 건의를 거절했어요.
그다음 대법원장 후보로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이 떠올랐죠.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은 이따금 청와대로 불려가 대통령과 식사하기도 한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으니까요. 경북고등학교를 나오고 TK(대구·경북) 출신인 그분은 검사 출신 법률비서관인 박철언과 가까웠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관심은 ‘누가 법원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느냐’였어요. 그리고 기소된 박찬종을 혼내줬으면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아직 40대인 박찬종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장관을 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박찬종이 장관직 제의를 거절하고, 고려대학교 시위에 가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의 호감이 적대감으로 바뀐 거죠. 박찬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어요. 대통령의 그런 뜻이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에게 전해졌어요. 담당 재판장이던 정덕흥 부장판사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죠. 오히려 박찬종 측에서 대법원 항의 방문시위를 하면서 대법원장을 코너로 몰았으니까요.”
건국대 사태 당시 정권과 맞선 한 부장판사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이 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다. 그게 법치주의다. 권력의 입맛대로 재판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의인(義人) 법관에 의해 법치는 유지되는 것 같았다.
“신문에는 나지 않고 우리 정보기관에서도 보고할 수 없지만 진짜 영웅인 법관 한 사람을 말해볼까요?”
정보관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1986년 1000여명의 시위대가 건국대학교에 들어가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죠. 전두환 대통령은 한명도 빠짐없이 농성자 전원을 구속하라고 검찰총장에게 지시했어요. 서울 시내 모든 경찰서의 유치장이 시위자들로 꽉 들어찼죠.
당시 서울지방법원에 영장발부 총 책임자인 부장판사가 있었어요. 그 밑으로 열명의 판사가 건국대 시위 사건의 구속영장을 전담해서 처리하고 있었죠. 검찰총장은 영장 발부의 책임자인 그 부장판사에게 ‘전원 구속이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라고 강하게 못 박았죠. 당시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판사라고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던 때 아닙니까? 그런데 법원은 시위자 중 상당수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했어요.
공안부 검사들이 영장 발부를 책임지고 있는 그 부장판사의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소리쳤죠. 그 부장판사는 뱃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훗날 역사에서 그런 행위들이 어떻게 평가될지 생각해보라’고 하면서 거꾸로 ‘수고하는 판사들에게 인사하고 가라’고 훈계를 한 겁니다.
그게 씨가 먹히겠습니까? 다시 검찰 총수가 그 부장판사에게 대통령을 들먹이면서 겁을 줬죠. 그 부장판사가 담당판사들에게 영장이 다시 재청구되면 무조건 기각하라고 했어요. 그게 법원의 마지노선이라고 하면서요. 대법원장이 그 사실을 먼저 보고받고 걱정하기도 했죠. 부장판사 한 사람의 뚝심으로 사법부가 제 역할을 하는 걸 봤습니다.”
뚝심과 야성으로 사법부 수호한 이일규 대법원장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개헌이 되고 노태우 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권력 내부의 합의에 의한 사법부 장악은 힘들어 보였다. 법조 담당 정보관이 6공화국의 사법부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정기승씨가 대법원장이 됐어도 반발이 심해서 사법부를 통솔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직에서는 차라리 야성(野性)이 강한 이일규씨가 대법원장으로 적합하다는 보고를 올렸죠. 동요하는 판사들을 다스리면서 사법부를 진정시킬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니까요.
통영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일규씨는 실력이 뛰어났는데도 판사로 빛을 보지 못하고 35년 동안 주로 지방으로 돌았습니다. 성격도 강골(强骨)입니다. 국회에서 한 의원이 구속적부심에서 너무 많이 풀어주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질타했어요. 그랬더니 이일규씨는 그 의원의 질문 자체가 판결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발언이라고 하면서 입을 막아버렸죠.
전두환 대통령 시절 이일규씨는 시국사건에 대해 무죄의견을 내는 반골(反骨)이었어요. 그래서 정치사건은 그에게 배당하지 않았죠. 반골인 이일규씨나 이회창씨는 청와대에 찍혀 있었죠.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사법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시적인 타협책으로 이일규를 추천한 겁니다. 국회의 절대적 다수가 지지하는 것으로 이일규 대법원장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통과됐죠.”
“이일규씨가 대법원장이 되니 어떻습디까?”
“이일규 대법원장은 청와대의 어떤 요청이 있어도 그 사실을 절대로 담당판사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인사도 본인의 소신대로 했고요. 전에는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2배수로 대통령에게 제청해서 낙점받는 형태였죠. 그런데 이일규 대법원장은 대법관 정수(定數)만큼만 추천했죠. 대통령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아 정치권의 영향을 배제한 겁니다. 전에는 관례적으로 대법관에 검사 출신 두명을 넣었습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그런 구성을 깨고 재야에 내려가 있던 이회창, 김덕주, 김상원, 이재성 변호사를 대법관으로 영입했죠. 장애가 있던 김용준 가정법원장은 대법관을 시켰어요. 그리고 전임 대법원장 시절 낙오된 판사들을 구제했어요. 법원행정도 바꾸었죠. 청와대에서 꼭 대법관을 시키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이 반대했어요. 시국사건 때 형사법원장을 한 사람은 국회를 통과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죠. 이일규 대법원장은 적당히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에 의해 사법부의 독립은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대법원장 자리는 법치를 지키는 방파제였다.⊙
소위 시국사범을 재판하는 법정도 이미 법의 권위가 실종된 난장판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서소문에 있던 서울지방법원 법정을 드나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던 퇴락한 청사였다.
5共 시절 어느 판사가 토로한 회의감
법정에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판사들 앞에서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당당하게 얘기했다. 방청석에서는 운동권 가요가 울려 퍼졌다. 재판을 받던 운동권 출신들은 갑자기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 법대 위의 판사들에게 날렸다. 그런 때면 판사들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뒤쪽의 쪽문을 통해 도망가기 바빴다.
나는 난장판이 된 법정의 변호사석에 혼자 서서 ‘이게 뭐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어느 날 한 소장 판사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눌 때였다. 그 판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운동권 재판을 할 때 들어보면 그 말들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법 교과서에만 매달려 공부하느라고 사회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정치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현실의 사법부 조직과 실정법에 매여 있는 몸이죠. 그들이 옳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형(刑)을 선고해야 해요. 그러면서 언제 고무신짝이 날아올지 눈치를 봐야 해요. 모멸감이 들면서 내가 판사가 맞나 하는 회의가 듭니다.”
임관한 지 얼마 안 되는 동기생 판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절대 도망 안 가요. 고무신짝에 맞더라도 법관이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법의 권위를 세우는 마지막 보루(堡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법원장, 대법관 등이 모두 자리에 연연하며 권력에 무릎을 꿇으니까 사법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내가 일선에서 본 전두환 정권의 법원 풍경이었다.
1987년 6월 10일의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사실상 힘을 잃고 항복했다. 헌법 개정이 있었고 직선제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나는 노태우 정권의 직속 기구로 들어가 또 다른 위치에서 현재의 사법부와 과거 정권의 사법부를 보게 됐다. 정보기관은 자체적으로 인식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었다. 안전기획부 청사 내부를 공개하고 언론에 북한 관련 정세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정보관을 보내 언론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던 관행을 과감히 바꾸려는 것 같았다. 법조 출입을 하는 정보관이 이따금씩 내가 있는 지휘부의 특수 부서를 찾아와 법조계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 초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秘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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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승 전 대법원장 후보자. 사진=뉴시스 |
내가 물었다.
“그런데 정기승씨는 결국 국회 인준을 못 받지 않았습니까.”
정보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김대중과 김영삼 쪽이었습니다. 양김(兩金)은 자기 당 소속 의원들이 대법원장 임명 동의를 묻는 기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개별적 찬성을 원천봉쇄한 거죠. 그러자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도 적극적인 지지는 못하고 각 의원들에게 자유의사로 투표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도 통과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봤죠.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표결결과 과반수 148표에서 7표가 모자라 임명동의안이 부결이 되어버린 거죠. 14표의 무효표가 있었는데 그게 무효가 아니라 대법원장 후보 정기승에 대한 찬성표였어요. 초선 의원들이 실수한 거예요.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에는 찬성이냐 반대냐를 묻는 가부(可否)만 표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초선 의원들이 ‘정기승’이란 이름을 투표지에 써넣는 바람에 무효표가 되어버린 거죠. 당에서 투표방법을 교육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죠.
정기승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은 외형상 부결(否決)이었지만 사실상은 가결(可決)된 거죠. 그걸 안 노태우 대통령은 ‘야, 이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면서 불쾌해했죠. 정권을 인수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을 연임시키려다가 안 돼 새로 선택한 사람이 정기승이었거든요.”
법조 출입 정보관이 덧붙였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이 지난번 대법원장을 계속 있도록 노태우 대통령과 협의했어요. 대법원장은 떠나가는 대통령에게는 방파제 같은 위치였기 때문이죠. 이면에서 정치적 흥정이 다 됐어요. 야당은 야당 추천 대법관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죠.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몫으로 두 명 정도의 대법관 자리를 내놓기로 했죠. 단 기존 대법원장의 유임에 동의해달라는 거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대해서는 대법원에 계류 중인 당사(黨舍) 반환소송을 해결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정치적 흥정이 왜 깨졌는지는 아시죠? 신문에도 많이 났으니까.”
6共 정권 출범 후 들고일어난 판사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이 법률팀 자료에 스크랩이 되어 있었다. 1988년 6월 15일, 법원 기자실에 한 장의 성명서가 제출됐다. 서울 지역에 근무하는 판사 37명이 주축이 돼 사법부의 일대 쇄신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핵심은 이랬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는 이제 더 이상 방치해둘 수 없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사법부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부분을 국민들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스스로 쟁취해왔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국민의 민주화 열기의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아무런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은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법부의 신뢰가 저하된 것은 지나간 시대의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사법부의 구성은 정치 거래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사법부의 신뢰회복, 나아가 사법권의 독립은 국민의 민주화 의지와도 직결된 문제로서 그 가시적인 방법은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一新)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판사들은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된 대법원장의 퇴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전국의 지방법원 판사들도 서명 열기에 휩싸였다. 전국의 소장(少壯) 법관 335명이 동참했고 고등법원 판사급 이상의 중견 법관 중 상당수가 성명의 취지에 찬성했다. 마침내 전두환·노태우 양자가 합의했던 대법원장 연임에 관한 정치적 묵계가 깨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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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전 국무총리. 사진=조선DB |
내가 담당 정보관에게 물었다. 전두환 정권의 사법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법부에 대해 상당한 호의(好意)를 베풀었어요. 전국의 법원 건물이 아주 초라한 건 직접 보셔서 잘 아시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죠. 전두환 대통령이 ‘사법시설 조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도록 한 거 아닙니까? 범칙금이나 몰수품 매각대금을 법원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이었죠. 전두환 대통령은 대법관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하면서 골프를 권장하기도 했어요. 사법부에 대해 많은 요구를 하지도 않았어요.”
“전두환 정권이 그랬다는 게 선뜻 납득이 안 가는데요.”
“전두환 대통령이 엄벌을 요구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욕하고 반대하는 시위였죠.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는 그가 강력히 지시한 과외 금지 조치를 위반한 행위였어요. 전 대통령은 과외 금지를 5공화국의 치적(治績)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는 안보를 위한 간첩죄였죠.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의 분노를 사는 판결 선고가 있었죠. 5공의 치적으로까지 생각한 과외 금지에 대해 이회창 대법관이 무죄를 선고한 거예요. 학문이나 배움에 제약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게 판결 이유였어요. 또 보안사령부에서 간첩죄로 송치한 사건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적이 있어요. 사법부가 대통령의 기본지침을 정면으로 거부한 상황이 발생한 거죠. 청와대는 보수우익 성향이라고 평가되는 판사로 바꾸어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그 사건을 유죄판결로 바꿨죠.”
대법관 후보자의 은밀한 불륜 행각
“전두환 정권 사법부의 수뇌부를 어떻게 보나요?”
내가 정보관에게 물었다.
“1980년 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석 달 만에 초스피드로 1·2심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됨으로써 김대중에게 사형이 확정됐죠. 김재규의 조속한 사형 확정에 협조한 주심(主審)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됐고요. 재야에서 김대중에 대한 100일간의 불법구속 문제를 제기하는데, 법원은 의도적으로 그걸 외면하더라고요. 그때 사법부의 비열함을 목격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느낀 겁니까?”
“김대중 사형 확정에 협조한 법관 중 한명이 어느 날 권력의 실세를 몰래 찾아가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한 게 우리 안테나에 걸렸어요. 위에서는 그에게 전국구 의원직 대신에 대법관 자리를 추천해주기로 했죠. 그가 대법관이 된 지 몇 달 후였어요. 전두환 정권이 만든 사회정화위원회에 한 장의 투서(投書)가 날아들었어요. 법관 시절 여자관계에 관한 내용이었죠. 우리가 은밀히 내사(內査)했어요. 대법관이 되기 전 두명의 법원 여직원과 불륜관계를 맺어왔더라고요. 법원 여직원이 결혼한 후에도 관계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실을 보고하니까 위에서 그 대법관이 조용히 사표를 쓰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더라고요.
법관 중에도 출세주의자들이 더러 있었어요. 정보기관의 안테나에 걸린 3류 법관들이 많았어요. 법원 내부에서 실력이 없어 무시당하는 판사가 대통령의 동생이나 형을 통해 대법관이 되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일들이 있었죠. 그런 부탁을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불러 밥을 먹는 자리에서 청탁했던 판사를 대법관이 되게 하라고 지시를 한 적도 있어요. ‘서울대 출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대법관을 해봐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였습니다. 법관들 사이에서 비웃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대통령의 측근에 선(線)을 대고 적당한 명분만 만들어내면 대법관이 될 수 있다는 자조적인 말이 법원가(街)에 나돌았죠.”
“그런 판사들이 상당했나 보네요.”
내가 묻자 정보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파격적으로 출세한 판사도 있었어요.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은 대법원장에게 지방법원의 아는 판사를 당장 법원장급으로 승진시켜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파견하라고 명령을 한 적도 있죠. 우리 정보기관에서 배경을 알아보니까 그 판사가 대통령 동생을 통해 미리 작업을 하고 그렇게 명령이 내려가게 한 거죠.”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 같았다.
오성환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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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환 판사가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사실을 전한 1982년 3월11일자 《조선일보》. “과묵한 고시 8회의 ‘선두’”라는 제목으로 오성환 판사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그건 어떤 경우였죠?”
내가 물었다.
“오성환 판사는 강직하고 정의로운 판사라는 게 법조계 내외(內外)의 평가였어요. 오성환 판사는 일찍부터 대법관 후보에 올랐었죠. 그러나 대법원장이 그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겁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지만 대법원장은 오성환 판사보다 고교 후배인 다른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하는 인사안을 청와대에 올렸어요. 대법원장의 추천과는 달리 청와대에 판사 출신 법률비서관이 있었는데, 그분이 오성환 판사를 대법관으로 적극 밀었어요. 오성환 판사는 그렇게 대법관이 된 걸로 압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들을 법관 재임용 때 잘라버렸죠? 그 상황이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법관 재임용이 있었죠. 우리 안전기획부에서 판사들에 대한 정보를 대법원장에게 줬죠. 문제 법관 70명에 관한 내용들이었어요. 보고서의 내용 중에는 더러 ‘이중인격’이라는 평가도 있었어요. 법정에서의 태도와 집으로 찾아온 변호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때 그런 평가를 내렸죠. 대법원장은 그 명단에 들어 있는 부장판사 한명의 옷을 벗기려고 마음먹고 있더라고요. 대법원장에게 유신(維新) 법관 물러나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우리 정보보고서에 그 부장판사가 골프장을 운영하는 것이 적혀 있었거든요.
청와대 측은 탈락되는 법관의 수가 너무 많을 경우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서 법관의 5% 정도로 하라고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어요. 재임용에서 탈락할 위험성이 있는 판사들이 각자 줄을 대어 구명운동을 하더라고요. 대법원장과 등산을 같이 하는 친한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대통령의 종친회 멤버를 통해 청탁을 하기도 했죠. 표적이 됐던 부장판사도 권력의 실세에게 부탁을 해서 살아났어요. 5공 정권에서는 사법부의 특이한 사건들도 많았죠.”
“어떤 것들 말이죠?”
“1982년경 청와대 근처의 요정(料亭) 여주인이 22만 달러를 밀반출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터졌어요. 시중에서는 그 돈이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소유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 정보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엄히 조사하라고 안기부에 지시했죠. 우리가 알아보니까 담당 변호사들은 검찰의 고위직 출신이고 보석(保釋)으로 요정 여주인을 풀어줬죠. 그러고 집행유예가 선고됐고요.
우리 정보기관의 안테나에 대법원장 비서관이 담당 재판부에 청탁한 사실이 걸렸어요. 대법원장 비서관과 담당 변호사들을 남산의 지하실로 연행했죠. 대법원장과 그 비서관의 행적이 나타났어요. 법원의 일반직 공무원인 대법원장 비서관은 오랫동안 혼자 살고 있던 대법원장을 집사(執事)같이 모셨죠. 더러 외롭고 무료한 대법원장의 술 동무가 되기도 하고 같이 카바레에 가서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서관이 사건청탁을 받고 돈을 받아 챙기기도 했죠. 그런 게 들통이 난 거죠. 대법원장의 비서관을 구속기소 하고 실형(實刑) 선고가 나오게 했죠.
그 시절은 변호사들이 자유롭게 판사실에 출입을 하면서 밥값과 술값을 주곤 했어요. 담당 변호사들이 검사실과 판사실에 들를 때 돈을 줬어요. 그걸 문제 삼아 담당 재판장과 검사가 사표를 내게 했습니다. 그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들은 법률사무소의 문을 닫았죠. 우리 조직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걸 검찰이나 법원에 맡겼으면 사건을 조용히 뭉개지 그렇게 했겠습니까.”
“결국 대법원장도 쫓겨나지 않았나요?”
내가 물었다.
“그건 《법률신문》의 칼럼 사건이 도화선이 된 측면이 있어요. 1985년 9월경 《법률신문》에 서태영 판사가 쓴 작은 칼럼이 있어요. 아직 움직일 때가 되지 않은 판사를 지방으로 유배 보내듯 하는 대법원장의 인사를 군대의 인사에 빗대 비판한 글이었죠. 오전에 그 칼럼을 본 대법원장은 서 판사를 바로 울산지원으로 보내는 인사명령을 내렸죠. 좌천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됐어요. 그걸 보고 법관들이 술렁였죠. 특히 대한변호사협회가 들고일어났어요. 야당이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를 발의했고, 여섯 달 후 대법원장은 스스로 퇴임했죠.”
전두환 ‘전씨 집안이 다 해 먹으면 안 된다’
“그다음 대법원장 인선 배경은 어땠나요?”
내가 물었다.
“일단 정권에서는 법조계의 여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는데 퇴임한 이회창과 오성환 대법관이 법조계의 별이었어요. 이회창은 반(反)정부적 성향에다 소수의견을 내는 법관이라 신망은 있지만 위험하다는 의견이 강했어요. 그래서 인품이 무난한 오성환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하기로 했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오성환은 대법원장 취임을 거절했어요. 이회창씨가 먼저 대법원장을 하면 그다음에 자신이 하겠다고 했어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행동이었죠. 대법원장 자리는 판사들이 일생의 목표로 삼는 영광스러운 자리 아닙니까? 그런 자리를 거부한 거죠.
차기 대법원장을 누구를 시킬까 거론됐죠. 전두환 대통령의 종친회에서는 같은 집안인 전상석 대법관이 대법원장이 되어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전씨 집안이 다 해 먹으면 안 된다’면서 종친회 건의를 거절했어요.
그다음 대법원장 후보로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이 떠올랐죠.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은 이따금 청와대로 불려가 대통령과 식사하기도 한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으니까요. 경북고등학교를 나오고 TK(대구·경북) 출신인 그분은 검사 출신 법률비서관인 박철언과 가까웠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관심은 ‘누가 법원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느냐’였어요. 그리고 기소된 박찬종을 혼내줬으면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아직 40대인 박찬종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장관을 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박찬종이 장관직 제의를 거절하고, 고려대학교 시위에 가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의 호감이 적대감으로 바뀐 거죠. 박찬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어요. 대통령의 그런 뜻이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에게 전해졌어요. 담당 재판장이던 정덕흥 부장판사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죠. 오히려 박찬종 측에서 대법원 항의 방문시위를 하면서 대법원장을 코너로 몰았으니까요.”
건국대 사태 당시 정권과 맞선 한 부장판사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이 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다. 그게 법치주의다. 권력의 입맛대로 재판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의인(義人) 법관에 의해 법치는 유지되는 것 같았다.
“신문에는 나지 않고 우리 정보기관에서도 보고할 수 없지만 진짜 영웅인 법관 한 사람을 말해볼까요?”
정보관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1986년 1000여명의 시위대가 건국대학교에 들어가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죠. 전두환 대통령은 한명도 빠짐없이 농성자 전원을 구속하라고 검찰총장에게 지시했어요. 서울 시내 모든 경찰서의 유치장이 시위자들로 꽉 들어찼죠.
당시 서울지방법원에 영장발부 총 책임자인 부장판사가 있었어요. 그 밑으로 열명의 판사가 건국대 시위 사건의 구속영장을 전담해서 처리하고 있었죠. 검찰총장은 영장 발부의 책임자인 그 부장판사에게 ‘전원 구속이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라고 강하게 못 박았죠. 당시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판사라고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던 때 아닙니까? 그런데 법원은 시위자 중 상당수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했어요.
공안부 검사들이 영장 발부를 책임지고 있는 그 부장판사의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소리쳤죠. 그 부장판사는 뱃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훗날 역사에서 그런 행위들이 어떻게 평가될지 생각해보라’고 하면서 거꾸로 ‘수고하는 판사들에게 인사하고 가라’고 훈계를 한 겁니다.
그게 씨가 먹히겠습니까? 다시 검찰 총수가 그 부장판사에게 대통령을 들먹이면서 겁을 줬죠. 그 부장판사가 담당판사들에게 영장이 다시 재청구되면 무조건 기각하라고 했어요. 그게 법원의 마지노선이라고 하면서요. 대법원장이 그 사실을 먼저 보고받고 걱정하기도 했죠. 부장판사 한 사람의 뚝심으로 사법부가 제 역할을 하는 걸 봤습니다.”
뚝심과 야성으로 사법부 수호한 이일규 대법원장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개헌이 되고 노태우 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권력 내부의 합의에 의한 사법부 장악은 힘들어 보였다. 법조 담당 정보관이 6공화국의 사법부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정기승씨가 대법원장이 됐어도 반발이 심해서 사법부를 통솔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직에서는 차라리 야성(野性)이 강한 이일규씨가 대법원장으로 적합하다는 보고를 올렸죠. 동요하는 판사들을 다스리면서 사법부를 진정시킬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니까요.
통영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일규씨는 실력이 뛰어났는데도 판사로 빛을 보지 못하고 35년 동안 주로 지방으로 돌았습니다. 성격도 강골(强骨)입니다. 국회에서 한 의원이 구속적부심에서 너무 많이 풀어주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질타했어요. 그랬더니 이일규씨는 그 의원의 질문 자체가 판결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발언이라고 하면서 입을 막아버렸죠.
전두환 대통령 시절 이일규씨는 시국사건에 대해 무죄의견을 내는 반골(反骨)이었어요. 그래서 정치사건은 그에게 배당하지 않았죠. 반골인 이일규씨나 이회창씨는 청와대에 찍혀 있었죠.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사법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시적인 타협책으로 이일규를 추천한 겁니다. 국회의 절대적 다수가 지지하는 것으로 이일규 대법원장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통과됐죠.”
“이일규씨가 대법원장이 되니 어떻습디까?”
“이일규 대법원장은 청와대의 어떤 요청이 있어도 그 사실을 절대로 담당판사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인사도 본인의 소신대로 했고요. 전에는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2배수로 대통령에게 제청해서 낙점받는 형태였죠. 그런데 이일규 대법원장은 대법관 정수(定數)만큼만 추천했죠. 대통령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아 정치권의 영향을 배제한 겁니다. 전에는 관례적으로 대법관에 검사 출신 두명을 넣었습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그런 구성을 깨고 재야에 내려가 있던 이회창, 김덕주, 김상원, 이재성 변호사를 대법관으로 영입했죠. 장애가 있던 김용준 가정법원장은 대법관을 시켰어요. 그리고 전임 대법원장 시절 낙오된 판사들을 구제했어요. 법원행정도 바꾸었죠. 청와대에서 꼭 대법관을 시키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이 반대했어요. 시국사건 때 형사법원장을 한 사람은 국회를 통과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죠. 이일규 대법원장은 적당히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일규 대법원장에 의해 사법부의 독립은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대법원장 자리는 법치를 지키는 방파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