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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자료로 읽는 인물 근대사 〈6〉 안중근(安重根)

“‌권총 여섯 발이 제대로 맞으니 세상에 없는 일이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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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영웅이자 무장투쟁가였지만 〈동양평화론〉을 저술한 평화주의자
⊙ 崔在亨 선생 밑에서 일명 비밀결사 斷指會 결성
⊙ 품에 있던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을 꺼내 3발을 이토에게 명중. 피격 30분 만에 숨져
⊙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자는 이등 公이므로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의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義士)는 살신성인의 애국선열이다. 아무런 보답도 약속되지 못하던 그 시절, 생명을 바쳐 독립운동을 실천한 애국자다. 이토를 처단한 민족의 영웅이자 무장투쟁가였지만 〈동양평화론〉을 저술한 평화주의자였다.
 
  안 의사는 1876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應七)이었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일찍이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는데, 셋째 태훈(安泰勳)이 중근의 아버지였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안태훈은 열 살이 되기 전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 선동(仙童)이라 불렸다. 중년에 과거에 응시해 진사(進士)가 되고 아내 조씨(趙氏)와 결혼해 3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가 중근, 둘째가 정근(定根), 셋째가 공근(恭根)이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학문 대신 사냥을 즐겨 산과 들로 다녀 부모가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그의 가족은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안태훈이 억울한 역모에 몰려 서울의 종현성당(명동성당)으로 피신한 것이 천주교를 믿은 계기였다. 안 의사는 프랑스 선교사 홍(洪)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세례명을 도마(토마스·多)로 정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홍 요셉 신부의 본명은 니콜라스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1860~1938)이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자 빌렘 신부는 뤼순까지 찾아가 그를 면회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피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3창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감생활을 한 감옥 내부 모습이다.
  1905년 을사년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삼천리 강산과 이천만 한국인의 인심(人心)을 흔들어 놓았다. 2년 뒤 이토는 정미 7조약을 맺고 광무(光武) 황제를 폐(廢)했으며 병정들을 해산시켰다.
 
  안중근은 황해도 진남포에서 1906년 봄부터 이듬해 8월 망명할 때까지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중등 야학교인 삼흥학교를 설립해 교육 구국사업을 벌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고, 평양에 미국상과 무연탄 판매회사를 차려 구국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사건, 정미조약, 고종의 폐위, 군대해산 등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자 안중근은 북간도로 망명해 김두성(金斗星),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독립군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직책은 참모중장이었다. 의병과 군기(軍器)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다음 큰일을 도모하였다. 그는 무장투쟁가였지만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19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서 일본 군사와 교전하여 피차간에 죽거나 다치고 혹은 사로잡힌 이가 많았다. 그때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과 장사치들을 불러다가 안중근이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臣民)들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았는가.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 해놓고는, 오늘에 와서 이렇게 다투고 침략하니 이것을 평화독립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적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랬더니 일본인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우리의 본심이 아니오. 이토 히로부미의 허물이다. 그는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 생명을 무수히 죽였다”고 했다.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 안중근 기념 전시관이 1층에 있다.
  이 말을 듣고 안중근은 포로를 석방하며 “돌아가거든 그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쓸어버려라”고 권했다. 포로들이 “군기 총포를 안 가지고 돌아가면 군율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자, 안중근은 총포까지 주며 돌려보냈다. 이 모습을 보고 장교들이 “어째서 사로잡은 적들을 놓아주느냐”고 항의하자 안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만국 공법(국제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어디다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놓아주지 않고 어쩌겠는가?”
 
  안중근의 포로 석방은 의병부대 내에 파문을 불러왔다. 일부 부대원은 불만을 품고 러시아로 돌아갔고 풀어준 일본군이 의병의 위치를 알고 기습해 피해가 더 컸다. 안중근은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의병부대를 떠났다. 대신 1909년 3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崔在亨·1858~1920) 선생 밑에서 일명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때 조선 침략의 원인을 제공한 원흉으로 지목되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대한 암살계획을 세우고, 3년 이내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살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겠다며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써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태극기에다 피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3창(唱)했다.
 
  단지회에는 안중근 외에 엄인섭(嚴仁燮), 김태훈(金泰勳), 우덕순(禹德淳·일명 禹連俊),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이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어찌 도망하리오”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가 뤼순커우(旅順口)로부터 창춘(長春)을 지나 콴청쯔(寬城子)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특별차로 하얼빈 정거장에 당도한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앞서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자며 우덕순에게 거사를 제의했다고 한다.) 이때 안중근은 정거장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부어놓고 뜨거운 마음을 녹이면서 모든 정신을 한데 뭉쳐서 어떻게 거사를 행할까를 고민하던 중 열차 소리가 나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품에 있던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을 꺼내 한 발을 “탕” 쏘아 이토의 가슴을 맞혔고 또 한 발을 쏘아 이토의 옆구리, 또 배를 맞춰 이토를 쓰러뜨렸다. 일본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와 비서관 모리(森), 철도총재 다나카(田中) 등도 각기 한 발씩 맞아 거꾸러졌다.
 
  그 뒤 안중근은 총을 러시아 헌병에게 주고 “코레아 우라(러시아 말로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쳤다. 군사들이 달려와 그를 포박하자 “내가 어찌 도망하리오. 만일 도망할 것 같으면 이 죽을 땅에 들어왔으리오” 하고 태연히 말했다고 전한다. 이토는 피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에 숨졌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자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2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본당에서 출발하여 뤼순으로 갔다. 그해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 동안 안중근을 만나 면회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거행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1914년 4월 22일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의 뤼순행에 반대했다. 신부의 고해성사는 신자의 회개가 전제돼야 하는데 안중근이 이토의 저격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렘 신부는 뤼순에 도착한 후, 법원과 감옥의 일본인 관계자들에게 뤼순행 목적이 온전히 종교적인 데에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정치적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빌렘 신부는 항의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교황청에도 항의했지만 결국 1914년 프랑스로 귀국하고 말았다. 훗날 빌렘 신부는 천주교 신자 사형수에게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뤼순 감옥에 갔던 자신의 판단과 행동은 교회의 관점에서 정당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안중근은 신문(訊問) 중에 일본 검찰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또 천만 문(門)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한 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위국헌신군인본분’ 遺墨.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1910년 2월 7일 시작된 재판에서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가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조선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을 포살한 것이라며 전쟁 포로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월 14일 6차 공판에서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고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는데 완성하지는 못했다. 틈틈이 법원과 뤼순 감옥의 관리들에게 부탁받은 글씨도 써야 했다. 순국 때까지 감옥에서 쓴 글씨는 현재 70여 점이 남아 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이 예정된 날에도 한 폭의 글을 썼다. 안중근을 경외한 일본 간수에게 쓴 유묵이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유묵 옆에는 무명지(약지)를 절단한 왼손 손바닥의 수인을 찍었다. 이 휘호는 1979년 소지자인 간수의 질녀가 한국에 반환해 현재는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중근은 3월 26일 오전 10시 모친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교수대 옆 대기실로 가서 눈을 가린 채 교수대에 올라 10시 4분쯤 조용히 형의 집행을 받았다. 감옥의는 10시 15분 절명했다고 보고했다. 밖에는 추적추적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참고=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00년대》 《안중근 의사 자서전‐ 安應七 역사》, 김영권의 ‘안중근 의거와 빌렘 신부’
 
 
  안중근선생전
  이병기(李秉岐)
 
이병기가 쓴 〈안중근선생전〉(《신천지》 1946년 8월호).
  ㄱ. 선생의 어렸을 때
 
  선생은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단기) 4212년(서기 1879년-편집자) 9월에 나셨다. 그 아버지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란 이름을 얻으며 서(書)로써 세상을 올리고 과거를 보아 진사도 하고 기개가 높은 항상 나랏일을 걱정하다 갑오년 동학당이 난리를 일으키매 의병을 모집하여 동학당을 친 일도 있었다.
 
  선생은 나시며 가슴에 바둑만 한 검은 사마귀가 일곱이 있었음으로 그 조부 안인수는 이걸 북두칠성을 응한 것이라 하고 응칠(應七)이라는 자를 지어주었으며 그 아버지는 매양 서울에 거주함으로 선생은 그 할아버지께 교육을 받으며 신천군 청계동에서 공부를 하던바 총명이 비상하여 경사(經史)를 ○○(판독불가-편집자)하고 무예에 능란하였으며 수렵을 하면 반드시 활과 화살을 끼고 ○○(판독불가-편집자)를 대동하고 말달리기를 익히어 달리는 말 위에서도 나는 새들을 쏘아 곧잘 떨어뜨렸다.
 
  ▲출처= p.170, 《신천지》, 1946년 8월
 
 
  만고의사 안중근전
 
계봉우가 쓴 〈만고의사 안중근전〉(《권업신문》 1914년 8월12일자).
  제4장 대종교가의 안중근
 
  예수교는 평등주의이며 진화(進化)주의며 부강(富强)주의며 단합(團合)주의며 자유주의며 중혼(重魂)주의며 겸선(兼善)주의며 박애주의니라.
 
  그러므로 동서 지구상에 제왕장상(帝王將相)과 영웅호걸이 다 여기서 나오고 여기 눈코를 들지 못하던 미국 백성으로 자유를 누리게 한 워싱턴도 예수교 사람이며, 천년 무덤 속에 백골이 되었던 이단을 살아나게 한 마리올(성모 마리아?-편집자)도 예수교 사람이며, 파리 궁중에 하마터면 사슴이 놀게 되었던 프랑스를 다시 회복한 마리 부인(잔 다르크?-편집자)도 예수교 사람이며, 을사조약에 국권이 없어짐을 분히 여겨 한칼로 복(腹) 찔러 죽은 민영환(閔泳煥)도 예수교 사람이며, 만국평화회의에 붉은 피를 뿌려 모든 세계를 놀래주던 이준(李儁)도 예수교 사람이니라.
 
  하나님께서 가시밭길 가운데서 이스라엘 족속의 인도자 모세를 택하듯, 다마섹(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에서 외방 사람의 구원자 보라(바울 혹은 바오로?-편집자)를 부르듯, 공이 열일곱 살에 천주교에 들어가 홍석구(洪錫九)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모든 가족과 더불어 계명을 정성껏 지켜 진리를 자세히 연구하다가 보호조약이 맺어짐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몸을 희생에 바침은 평등주의니라.
 
  청년자제를 교육하여 지식과 도덕을 기르며 실업을 권면하여 농사짓는 이는 농사하고 장사하는 이는 장사하게 함은 진화주의니라.
 
  평양 군기(軍器)를 앗아 뺏고자 함과 이범윤(李範允)의 군사를 합하여 회령 등지에서 싸움함과 청년을 교육하여 후비병(後備兵)에 채우고자 함은 부강주의니라.
 
  78형제가 모여 동의회를 만들어 유지(有志)동포를 많이 연락함은 단합주의니라. 동지 열두 사람에게 더불어 손가락을 끊고 맹세할 때에 그 피로써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쓴 것은 자유주의니라. (이하 하략)
 
  ▲출처=계봉우(桂奉瑀), 《권업신문》, 1914년 8월 12일 제119호
 
 
  안중근전
  박은식(朴殷植)
 
박은식 선생이 쓴 〈안중근전〉 제14장 ‘안중근이 이토 쏘아 죽이다’의 첫 장.
  제14장 안중근이 이토 쏘아 죽이다
 
  이토는 10월 25일 관성자(寬城子)에 머물렀고 이튿날 새벽 러시아 철도국에서 특별열차를 파견하여 영접하였다.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러시아 군사·경찰 호위병이 수천 명에다 각국 영사단과 관광단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으며 그 밖에도 그를 보러온 사람들이 마치 나무숲 같았다. 군악이 연이어 울려 퍼지고 화포가 연속 울렸다. 이토는 차에서 내려 러시아 대신과 악수하고 군대의 경례를 받은 후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안중근은 양복 차림에 권총을 지니고 러시아군의 뒤에 서서 노리고 있었다. 열 발짝 떨어진 거리로 뛰어들어 총을 빼 들고 첫발에 이토의 가슴을 쏘아 맞혔다. 하지만 화포 소리가 크게 울려 호위병들은 모르고 있었다. 다시 쏘아 이토의 옆갈비를 맞혔다. 이때 군경과 환영단이 알아차리기 시작하여 뿔뿔이 달아나고 안중근이 불쑥 드러났다.
 
  이토는 그를 가리키며 ‘바가야로’(馬鹿=일본어 욕)라고 욕하였다. 세 번째 탄환도 복부를 맞혀 이토는 곧바로 땅에 쓰러졌다. (조선인이 자신을 쏘았다는 말을 병원에서 전해 듣고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는 일본 관리의 전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국내 학계의 정설이다. 이토의 죽음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기고 위인의 면모를 보이려는 의도에 맞춘 발언이라는 것이다.-편집자)
 
  다시 일인 총영사 천상(川上), 비서관 삼(森), 철도총재 전중(田中) 등 3명을 향하여 쏘아 맞히니 모두 넘어졌다. 권총의 여섯 발 총알이 총알마다 제대로 맞으니 세상에 없는 일이었다. 이는 안중근의 꿋꿋한 기상과 쏘는 기술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수천 명 군대가 죄다 흩어져 달아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으며, 헌병 및 장관들도 검을 잡고 서로 훔쳐볼 뿐이었다. 총알이 떨어지고 총소리가 울리지 않자 여러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안중근의 총을 빼앗아 헌병에게 주었다. 안중근은 즉시 라틴어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결박당하였다. 안중근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왜 달아나겠느냐, 내가 달아나려고 하였다면 아예 죽을 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얼빈의 러시아 재판소에 구금당하였다.
 
  아! 이것이 곧바로 안중근이 세계에 위인으로 된 까닭이다. 이토를 쏘아 죽인 것은 피 끓는 사내대장부가 나라를 아끼는 열정에서 솟구쳐 오른 일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토가 땅에 넘어진 뒤 그가 높이 외친 것과 러시아 병사에게 묶이면서도 크게 웃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당당하고도 도도한 태도를 보라! 그 늠름하고 빼어난 기개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사무치게 울린다.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하는데 한 치의 틈도 없이 맞히고 탄약을 다 쏜 후에야 그만두었다. 천직을 다하였으니 머리를 내민들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그 마음 갈고 닦기를 수십 년 동안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처럼 태연할 수가 없다. 또는 전하기를 안중근의 성격이 방탕하다 하는데 이것을 보면 특히 믿을 바가 못 된다. 이토는 10분을 못 넘기고 즉사하였다. 일인들은 그 주검을 기차에 실어 다롄항으로 보냈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사의 심문에 항변하여 말하기를 “나는 대한국인이다. 이토란 자는 우리 독립을 빼앗고 우리 민족을 잡아 죽였다. 나의 이번 일은 우리나라 독립을 되찾고 우리 민족을 보호하며 철천지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이 널리 퍼지니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며 말하기를 “한국에 사람이 있다. 한국에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러시아 사진사가 안중근이 이토를 쏘는 장면을 찍어 세계의 볼거리(奇觀)라 일컬었다. 일본인들은 6천 금을 내놓고 그것을 사 갔다. 일본인들의 몇몇 신문들은 이번 일이야말로 중근의 개인 불만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모욕하며 천하의 이목을 덮어 감추려 하였지만 그것이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출처=p.55, 박은식, 《안중근전》, 1914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 번역은 《한국인 집필 안중근 전기Ⅰ》 인용
 
 
  공판 최후의 1시간
 
  안중근 일행의 최후의 陳言
 
  (재판장) 피고들에게 말하노니 재판도 진행되어 최후의 진술을 하게 되었는데 두 변호사로부터 상세히 또 그네들에게 유익한 의논을 들었는데 너희들도 이제 무슨 말할 것이 있으면 하여라.
 
 
  劉, 曹, 禹의 진언
 
  (劉東夏)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등(伊藤) 공작에 대해서나 또는 다른 일본사람에 대해서도 모욕되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째서 법정에 끌려 나와 사실 죄도 없는 나에게 대하야 1년 반의 선고를 하였는지 실로 유감됩니다. 이것을 비유로써 말한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는 격입니다.
 
  (曺道先) 나는 하등의 관계도 없습니다만, 이렇게 된 것은 나의 우매한 탓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안(安)한테서 말을 듣고 같이 일을 하여서 오늘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다 내가 어리석어서 그렇게 되었으니 별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禹連俊) 대체 오늘에 와서 별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한두 가지 말씀드리자면 대요(大要)만 이야기합니다만 내가 이번 거사한 것은 즉 일한(日韓) 사이에 장벽이 하나 있다. 이 장벽을 없애기 위하야 한 것이니 금후 일본 천황 폐하의 선전(宣戰) 조칙(詔勅)의 성지(聖旨)를 따라 한국인을 인간과 같이 취급하여주고 또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해주어달라는 것입니다.
 
 
  안중근의 진언
 
《독립운동 선구 안중근 선생 공판기》(1946)에 실린 ‘안중근의 진언’ 대목이다.
  (안중근)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재판장) 그대는 지금까지 중복된 것을 잘 말하는데 순서를 밟아 중복되지 않도록.
 
  (안중근) 다른 말이 아니라 그저께 검사관의 보고가 있어 그것을 대강 들었습니다만 그중에는 검찰관이 심히 오해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중에도 제일 긴요한 것에 대하야 요령만 말하고자 합니다.
 
  한 예를 든다면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취조할 때 내 아들에 대하야 조사하였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일은 그저께 심리한 결과를 들었는데 내 사진을 보이면서 이건 네 아버지 사진이지 하고 물으니 아버지라고 아해가 대답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고향을 떠난 지가 금년이 5년째니 3년 전, 즉 내 아들이 두 살 때입니다. 그 후 전연 만나지 못하였으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일례를 보더라도 심리가 얼마나 소루(疎漏·하는 일 등이 거칠고 엉성함-편집자)하며 얼마나 틀린 것이 많은지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재판 자체에 대하야 말하겠습니다. 대체 나의 이번 흉행은 나 개인의 자격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말하였으니 양해하였을 줄 압니다. 또 국제관계를 심리함에 있어서 재판관을 위시하야 통역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전부 일본인만으로 조직되었지 어데 한국 변호사도 와 있고 나의 동생도 와 있는데 그들에게는 말하라고 하였습니까. 변호사의 변론이나 검찰관의 논고나 다 통역을 시켜서 다만 요지만 들려주었으니 기점(其点)도 나의 견해로서는 대단히 자미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위를 바꾸어 생각하더라도 편벽된 취급이라는 것은 면치 못할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오해가 아님
 
  그런데 앞서 변호사와 검찰관의 논고와 변론의 대요를 들으니 모다 이등(伊藤) 공작의 시정방침은 완전무결한데 거기에 대하야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잘 알지 못한 말입니다. 결코 이등이의 시정방침이 완비한 것이 아니니 어찌 오해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이등이의 시정방침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등이가 한국에 주재하야 대한정책으로 무엇을 할지 자세히는 말하지 않고 기(其) 대요만 말하고자 합니다. 1905년의 5개 조약을 체결한 것은 보호조약인데 한국 황제를 비롯하야 한국의 신민은 누구나 다 보호를 받고저 한 일은 없는데 한국의 희망으로서 제척하였다라고 이등 공(公)이 말하였습니다.
 
 
  5개 조는 폭거
 
  그것은 일진회(一進會)를 사칭하여 금전을 주어 운동하게 하고 황제의 옥새도 없고 총리대신의 승낙도 없이 다만 ○○(판독 불가-편집자)로서 만착(瞞着·남의 눈을 속여 넘김-편집자)하야 이등이 5개 조의 조약을 체결한 것이지 결코 한국이 원해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등의 대한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뜻있는 유지들은 분개하야 누차 황제께 상주하야 이등 공의 정책의 개선을 꾀하였습니다. 일로전쟁 때 일본 천황 폐하의 선전 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확고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으므로 한국인은 아주 신뢰하야 일본과 같이 동양에 진출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등 공의 정책이 정당치 않았으므로 폭동이 일어나 하루라도 백성이 안도치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비경(悲境·슬픈 지경-편집자)은 이등 공의 정책 때문인 고로 최익현(崔益鉉)이란 이가 의병을 일으키다 잡히고 그 후 조금도 방침이 개선되지 아니함으로 한국의 신사(紳士)는 때때로 헌책(獻策·일에 대한 꾀를 드림-편집자)하였지만 하등의 배경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이었으므로 전왕(前王)께옵서는 2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셨습니다.
 
  그것은 5개 조 보호조약은 폭력으로 체결한 것이므로 왕의 옥새가 있는 것도 아니요 총리대신이 보증한 것도 아니므로 잘 말하란 뜻으로 평화회의에 내놓았더니 무슨 사정 때문에 성사치 못하였습니다.
 
 
  7개 조는 협박
 
  그리고 이등 공이 또 한국에 와서 궁중에 참내(參內·궁궐에 이름-편집자)하고 검을 빼 임금님을 협박하고 7개 조의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폐하고 일본에 사죄사(使)를 파견할 것도 7개 조의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韓民)은 상하를 불문하고 분개하고 유지는 배를 가르고 순국하고 일본과 싸움을 겨루고 백성은 칼을 가지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병난(兵亂)이 일어났습니다. 기후(其後)도 수십만의 의병이 조선 팔도 도처에 봉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임금께서는 왜놈이 조선을 정복하려던 참으로 국가위급존망지추 정좌(靜座)하야 국사를 수수방관하는 자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라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그로 인하야 더욱더 분개하야 오늘까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10만 한국민의 피살
 
  이러므로 오늘날까지 역살(逆殺)당한 한민은 10만 이상 될 줄 압니다. 즉 10여만 한인은 국가를 위하다 죽었으니 본망(本望)이겠지만 이등 때문에 역살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머리에 쇠사슬을 끼워서 생살하고 사회를 위협하기 위하야 양민에게 그 광경을 보이는 등 참역무도한 짓을 하야 10만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 때문에 의군(義軍)의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하였습니다. 이등의 정책이 그러하니까 한 사람을 죽이면 열 사람이 일어나고 열 사람 죽이면 100명이 차차 더 일어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익은커녕 도리어 해(害)만 되니 이등의 정책방침을 고치지 아니하면 한국의 독립은 될 수 없고 전쟁은 그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등이란 놈은 자기가 영웅인 체하지만 간웅(奸雄)입니다. 그놈은 간지(奸智)가 많아 한국의 보호가 원만하다고 신문에 떠들고 일본 천황 폐하와 그 정부에 대하야 한국의 보호는 원만하야 날로 진전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 그 죄악에 대하야 한국민은 적지 않게 이등을 미워하고 그놈을 없애려는 적개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가 생을 즐기고 죽기를 싫어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국 신민은 다 46시간 중 도탄에서 고생을 안 하는 자 없으니 평화스러이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국내의 원성
 
  또 나는 지금까지 여러 계급의 일본사람과도 많이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본 적이 많습니다. 먼저 군인과 만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其) 군인은 수비대로 온 군인인데 그에게 “당신은 이렇게 해외에 와 있지만 아마 고향엔 부모처자가 있으리라고 믿는데 밤엔 밤잠이 오지 않겠구려” 하고 물으니 그 군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부모처자도 있는데 국가의 명령으로 수비대가 되어 파견받았으니 그리운 정은 이루 말할 수 없소” 하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동양이 평화하고 일한 양국이 무사하면 이런 슬픈 일이 없지 않겠소” 하고 물으니 그 군인은 “자기는 전쟁하는 것은 싫으나 수비대가 되어 와 있는 이상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될 때는 싸워야 할 테니 고국에 돌아가려니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일본 정부에는 간신이 너무 많아서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동양의 평화를 교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는 마음도 없는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테니 그런 놈은 잡아 죽여야 하리라고 생각을 먹고 있으나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서는 죽일 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일본 농부의 말을 들었습니다. 기(其) 농부의 말에 의하면 “조선은 농업이 성한 나라라고 듣고 왔더니 소문과는 달라서 도처에 폭도가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본국에로 돌아가자니 이전에는 농업국이어서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을 하였기 때문에 재원을 모으기에만 급급하야 농민에게 아주 과혹(過酷·지나치게 참혹함-편집자)한 소득세를 부과하고 토지는 점점 좋아지고 조세는 높아가기만 하니 도저히 본국에로 돌아가서 농업은 지을 수 없소. 그런데 한국은 폭도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기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울다시피 하였습니다. 이것도 일본의 대한정책이 변경되기까지는 몸 둘 곳이 없다고 아주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엔 도덕가도 만났습니다. 그는 야소교(耶蘇敎·예수교-편집자)의 전도사였는데 내가 먼저 “무행(無幸)한 백성을 매일같이 역살하는 그 일본사람이 전도사가 다 무엇이냐”고 하였더니 그 전도사 말이 “그와 같이 대역무도한 일을 하는 사람은 가련도 하고 미움직도 할 것이다. 그들의 개과천선할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힘을 입을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불쌍하다고 할 것이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한국민
 
  그러므로 오늘 말씀드린 일본의 여러 계급 사람들에게 말해보아도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은 대개 알 줄 압니다. 그와 동시에 간신 이등 공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 정도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한국인으로서는 자기의 친척지기가 역살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이등을 죽였다는 것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의병의 중장이라는 자격으로 한 것이지 결코 자객(刺客)으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일한 양국의 친밀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자는 이등 공이므로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희망은 일본 천황 폐하의 어취지(御趣旨)와 같이 동양평화를 위함이요 5대주에게도 모범을 보이려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잘못하야 범죄하였다고 하지만 결코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 그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나는 포로입니다
 
《독립운동 선구 안중근 선생 공판기》(1946)에 실린 안중근의 사형 이유서.
  (안중근) 또 조금 더 있습니다. 나는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이번 사건은 결코 잘못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 이등 공이 대한정책상에 있어서 방침이 틀렸다는 것을 일본의 천황 폐하가 안다 하면 충신이라고 가상(嘉賞)할 것입니다. 이등 공을 죽인 자객이라고 대우하지 아니 할 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방침이 개정되어 일본 천황 폐하의 뜻대로 일한 양국뿐만 아니라 동양평화가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를 희망합니다. 더욱 한마디 이야기할 것은 두 변호사의 설(說)에 의하면 광무3년 청한통상조약에 의하야 한국인은 청국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어 또 청국은 일본에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죄를 범하면 하등의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무죄라는 설은 심히 부당한 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모다가 법률 아래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하등의 제재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병으로서 한 것이니까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으로 믿고 있으므로 나의 생각으로서는 나를 처분하려면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의하야 처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재판장) 더 말할 것은 없느냐.
 
  (안중근)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판장) 그러면 이것으로서 본건의 심문은 ○○(판독불가)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10시에 언도한다. (園木 통역생 통역함) (때는 오후 4시15분)
 
  판결: 한국 평안도 진남포 무직 안응칠 事
 
  안중근 32세
 
  (중략)
 
  우(右) 4명에 대한 살인 피고 사건에 대하야 본원은 심리를 끝막고 다음과 같이 결함.
 
  주문: 피고 안중근은 사형에 처함.
 
  이유: 피고 안중근은 명치(明治) 42년 10월 26일 오전 9시 지나 노국(露國) 동청(東淸)철도 하얼빈 정거장 내에서 추밀원 의장 공작 이등박문과 기수행원을 살해할 의사를 가지고 이를 겨누어 그 소유한 권총을 연사하야 그 3탄은 공작에 맞혀 저를 죽이고 또 수행원인 하얼빈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궁내 대신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전중청차랑(田中淸次郞)에는 각 1탄 명중하야 기(其) 수족과 흉부에 총창(銃創)을 주었으나 3명에 대하야는 피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출처=p.171~179, 《독립운동 선구 안중근 선생 공판기》, 서울 경향잡지사,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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