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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6

玄奘

신세계를 향한 ‘열정’의 리더십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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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漢譯 불경의 한계 깨닫고 산스크리트어 原典 구하러 인도行
⊙ 인도 날란다승원에서 마음의 실체를 탐구하는 유식학 공부
⊙ 손정의, 高校 시절 컴퓨터에 대한 기사 읽고 渡美 유학… 소프트뱅크 설립의 기초 다져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
현장법사. 돈황 막고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현장(玄奘·602~664)법사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602년에 태어나, 11세 때 승려인 형을 따라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가 불경을 익혔다. 13세 때 수계(受戒)를 올리고 화상(和尙)이 되어 ‘현장’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는 불경 공부에 몰두하는 학승으로, 10대를 온통 경전 탐독에 바쳤다.
 
  622년 20세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현장은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가서 더욱 깊이 있는 불경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중국에 들어온 불경만 가지고는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데 부족함이 많다고 판단, 서역(西域)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는 대상(隊商)들을 통해 외국어를 가르쳐줄 이방인을 물색했다. 불경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천축(天竺・인도)으로 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구법행(求法行)에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역인을 통해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통용되는 토하라어를 비롯하여, 천축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이때 현장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불교 경전이 한역(漢譯)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고 불경 원전(原典)을 구하기 위해 천축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특히 그는 천축의 승려 아승가(無着)와 바수반두(世親) 두 형제의 ‘유가종(瑜伽宗)’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의 이치와 본질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하고 싶었던 그는 ‘모든 것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마음이 변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현실을 보는 유식학(唯識學)에 매료되었다. 형체도 없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거듭되던 질문을 하던 끝에, 그는 마침내 천축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현장은 천축을 여행하기 위해 당 태종(太宗)에게 출국(出國)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들이 공무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라도 국경 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쪽에 당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적국이 많았던 것도 승려들의 해외 출국을 꺼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옥문관을 나서다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현장은 끝내 말을 타고 당나라에서 서역으로 가는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을 빠져나갔다. 돈황(敦煌)에서부터 개인적으로 고용해 옥문관까지 길 안내를 맡은 ‘반타’라는 자는, 만약 현장이 국경을 벗어날 경우 죽여버리라고 관리가 밀명을 내린 자객이었다.
 
  마침내 현장이 옥문관에 이르러 태연자약하게 불경을 외는 것을 본 반타는, 현장을 죽이려고 하다가 법력 높은 승려라고 판단하여 도리어 자신이 해를 입을까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버렸다. 그 바람에 그는 무사히 국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627년 홀로 옥문관을 빠져나간 현장은 말을 타고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사막을 무작정 달렸다. 그는 위험이 닥칠 때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면서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마침내 고창국(高唱國)에 도착한 그는, 그 나라 국왕 국문태(麴文泰)를 만났다.
 
  이미 서역 대상들을 통해 고창국에까지 현장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고창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자기 곁에 오래 머물러 불법(佛法)을 가르쳐주길 바랐다. 현장이 그 요청을 거절하자 고창왕은 그를 감금하고 당나라로 귀환조치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현장은 단식을 하면서까지 고창왕과 맞섰다. 나흘째 되는 날 고창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법사의 깊은 불심에 감복한 나머지 그의 서역행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
 
  고창왕은 현장에게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각종 장신구와 함께 황금 100냥, 은전 3만 매, 비단 500필을 선물했다. 이는 천축까지 가는 데 필요한 경비는 물론, 도중에 거치게 될 각국 왕들에게 줄 선물로도 충분한 양이었다.
 
  고창왕은 재물들을 싣고 갈 말 30필과 길 안내를 겸한 졸개들 20명도 붙여주었다. 또한 현장이 여행 도중 방문하게 될 서역 24개 나라에 서한을 써주었다.
 
  이 서한을 통해 고창왕은 각국 왕들에게 현장의 서역행에 적극 도움을 줄 것과 갈아탈 말도 제공해주도록 부탁했다. 특히 서돌궐 대칸은 불교를 매우 숭상했는데, 고창왕은 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법사가 불교 교리를 설법할 기회를 갖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서돌궐 대칸의 아들은 고창왕의 매부이기도 해서 사돈을 맺은 인척 관계였다.
 
 
  高僧 상가키르티와의 만남
 
  현장은 고창국을 떠나 카라샤르(Karashahr·焉耆)를 거쳐 마침내 톈산산맥(天山山脈)을 넘었다. 톈산산맥 너머에는 이식쿨(Issyk-Kul) 호수가 있었다. 얼어붙지 않는 호수라고 해서 ‘열해(熱海)’로도 불리는 이 호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는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서돌궐의 대칸을 만났다.
 
  서돌궐 대칸 또한 현장의 법력(法力)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고창왕처럼 우격다짐으로 하지 않고 대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지만, 법사의 구법행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대칸도 그의 굳은 결심을 알고 명주 50필과 진홍색 법복 한 벌을 선물로 주었다. 현장은 다시 서쪽으로 출발했다.
 
  현장은 당시 서돌궐 대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사마르칸트(Samarkand·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 입국하여 국왕을 만났다. 사마르칸트는 페르시아 문화권에 속하며, 그곳에서는 이란어족 계열인 소그드어를 쓰고 있었다.
 
  처음에 사마르칸트 왕은 현장을 적국의 첩자로 여겼으나, 불법 강의를 듣고 나서 크게 감화하여 그때부터 아주 잘 대해주었다. 국왕은 법사에게 큰 법회를 열어주어, 많은 백성이 불교에 귀의(歸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현장은 사마르칸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다시 발흐(Balkh)를 경유하여 힌두쿠시산맥을 넘기 전에 오아시스 도시 바미안(Bamiyan)에 이르렀다. 그곳 높은 절벽에는 거대한 마애불(磨崖佛·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됨)이 있어, 그것을 보기 위해 잠시 들렀던 것이다.
 
  현장은 힌두쿠시산맥의 설산(雪山)을 넘어 마침내 천축 땅으로 들어섰다. 인더스강을 건너 탁실라(Taxila)를 경유해 산간에 위치한 카슈미르(Kashmir)에 이르렀다. 카슈미르에는 5000여 명의 승도와 100여 개의 가람이 있었다. 그는 거기서 고승(高僧) 상가키르티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 현장과 불법을 논한 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중국 승려는 지적(知的) 능력이 굉장해, 여기 대중 가운데 따를 자가 없다. 그의 총명함은 가히 아승가와 바수반두 형제의 명성을 이어갈 만하다.”
 
  현장은 카슈미르에서 631년부터 633년까지 2년간 머물러 상가키르티 고승으로부터 유식학을 배웠다.
 
 
  날란다승원에서
 
  633년 봄, 현장은 카슈미르 계곡을 벗어나 북인도 갠지스강이 바라보이는 광활한 평원으로 나갔다가 50여 명의 도둑 떼를 만났다. 현장과 고창국에서부터 같이 따라온 일행은 도둑들에게 모든 짐을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구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행에게 “생명체에게 가장 귀한 것은 목숨이오”라고 한마디했을 뿐이었다.
 
  현장은 그 지역에서 북인도의 왕자를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 북인도 왕자는 출가(出家)한 고승이었는데, 두 사람은 633년부터 634년까지 1년간 같이 생활하였다. 북인도 왕자는 논리학파로 바수반두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논소(論疎)를 집필했을 정도로 불교 경전에 매우 밝았다.
 
  그 이후 현장은 천축의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하면서 불법 공부를 했다. 부처의 출생지인 룸비니를 비롯하여, 부처가 열반한 쿠시나가라까지 곳곳의 불교 유적을 둘러보았다.
 
  637년, 현장은 날란다(那爛陀)승원(僧院)에 머물렀다. 이곳은 토하라·티베트 등지에서 온 많은 유학승이 수학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실라바드라(戒賢·Silabhadra) 정법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정법장’은 모두가 존경하는 날란다 최고의 존칭으로, 실라바드라는 당시 106세의 고승이었다. 현장은 실라바드라 정법장에게서 《유가사지론》 강설을 세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현장은 날란다승원을 떠나 그동안 가보지 못한 천축 각지의 불교 성지를 떠돌다 641년 후반에 돌아와 또다시 실라바드라에게서 유식학을 배우는 등 학문에 정진했다. 실라바드라 정법장은 그에게 유학승들을 대상으로 유식계 경전을 강의하도록 할 정도로 신뢰가 매우 깊었다.
 
 
  18년 만의 귀국
 
  643년 4월, 현장은 마침내 귀국길에 올랐다. 북인도의 하르샤왕은 그에게 최고의 코끼리와 여비로 쓸 3000냥의 금과 1만 냥의 은을 하사했다. 코끼리는 금과 은을 다 싣고도 장정을 8명까지 태울 수 있을 만큼 힘이 셌다.
 
  인더스강을 건널 때였다. 돌풍이 부는 바람에 배가 뒤집혀 천축 전역을 돌면서 어렵게 구한 50여 권의 불교 경전을 모두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현장은 다시 잃어버린 경전의 사본(寫本)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천축 각지로 보낸 후 거의 두 달 가까이 카시피왕의 겨울궁전에 머물렀다.
 
  다시 경전을 구하게 되자, 현장은 카시피왕의 도움을 받아 100여 명의 짐꾼들과 함께 코끼리를 타고 힌두쿠시와 파미르고원을 넘었다. 다시 카슈가르에 도착한 그는, 야르칸드(Yarkant)와 허톈(호탄·和闐)을 경유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을 따라 동쪽으로 돈황까지 이어지는 톈산남로를 통해 귀국하였다. 돈황은 톈산 북로와 남로가 만나는 곳이다.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645년이었다. 627년에 구법행을 단행하여 장장 18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가 떠날 때 구법행을 허락하지 않았던 당 태종도 귀국 후에는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황실 재정으로 역경(譯經)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가 천축에서 구해온 불경은 640질이었다.
 
  현장은 23인의 학승을 참여시켜 20여 년간에 걸쳐 1335권(혹은 1338권) 분량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에 관한 경(經)과 론(論) 74부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664년 2월 63세에 입적하였다. 그의 사리는 장안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에 안치되었다.
 
 
  실크로드 수첩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돈황 막고굴에 그려져 있는 〈현장법사취경도(玄奘法師取經圖)〉.
  현장법사의 구법행을 소재로 한 《서유기(西遊記)》는 《삼국지(三國志)》 《수호지(水湖志)》 등과 함께 중국의 3대 고전소설로 손꼽힌다. 《서유기》에서는 현장법사가 삼장법사로 등장하며, 손오공·저팔계·사오정 등의 종자를 거느리고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법사는 당나라를 떠날 당시엔 혈혈단신으로 천축까지 가는 구법 여행을 결행한다. 그의 이 같은 겁 없는 행동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26세의 젊은 혈기라면 만용에 가깝다. 당나라에서 천축까지 가는 길은 죽음의 사막과 험준한 산악이 가로막고 있으며, 열병과 풍토병에 걸릴 우려와 함께 곳곳에서 도적 떼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행할 수 없는 장거리이자 악조건을 가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법행을 결심한 것은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열정(熱情)’을 가만히 앉아서는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정은 죽음을 무릅쓴 간절함으로 인하여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행동력으로 나타난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구법행 구간 곳곳에서 국왕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처음 당나라를 떠날 때는 단독으로 출발하였고, 여행 준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현장법사의 구법행 내용은 《대당서역기》에 자세하게 나온다. 말년에 법사가 구술하고 제자 변기(辯機)가 기록해 편찬한 이 책에는, 그가 직접 답사한 110개 나라와 답방 중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28개 나라 등 총 138개 나라의 역사·지리·물산·농업·상업·풍속·문학예술·언어·문자·화폐·국왕·종교·전설 등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실크로드는 현장법사가 서역으로 가던 톈산북로와 귀국길에 오르던 톈산남로 두 길을 말한다. 주로 사막지대로 중간중간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가기 때문에 ‘오아시스로(路)’라고도 한다. 서역과 중국의 사이에 놓인 이 길을 통하여 고대(古代)에는 많은 비단이 거래되었다.
 
 
  허톈 비단의 전설
 
  《대당서역기》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조에는 현장법사가 귀로에 오를 때 허톈에서 들은 이야기 중 비단과 관련된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140년경 누에고치와 뽕나무 씨가 허톈으로 들어왔다. 중국인 왕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허톈왕은 몰래 사신에게 밀명을 내렸다. 왕녀가 허톈으로 올 때 반드시 누에고치와 뽕나무 씨를 숨겨 가지고 오도록 한 것이다. 왕녀는 황명으로 허톈왕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므로 거부할 수 없었고, 현지에 가서 사랑을 받으려면 그 명을 받아들여야만 신상에 이롭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왕녀는 머리 장식 속에 누에고치와 뽕나무 씨를 숨겨 허톈에 가지고 가서 비단 만드는 법을 현지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때부터 허톈에서는 비로소 비단을 생산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허톈은 옥(玉) 산지로 유명한데, 비단까지 생산하게 되면서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은 고대시대에 비단을 생산해서 서역 대상들을 통해 대진국(大秦國·로마) 등지에 팔았다. 서역 대상들은 이러한 중개무역을 통해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비단옷을 즐겨 입었으며, 서역 대상들이 비단을 가지고 가면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허톈왕은 비단을 비싼 값에 들여오는 것보다 직접 생산하면 더욱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해, 중국 황제에게 정략결혼을 요청하여 왕녀로 하여금 누에고치와 뽕나무 씨를 몰래 가져오도록 한 것이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20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오렐 스타인(Sir Aurel Mark Stein)이 허톈 동북방 약 120km 지점에 있는 단단윌리크 유적의 절터에서 비단을 짜는 그림인 〈견왕녀도(絹王女圖)〉 목각판을 발견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영웅 리더십
 
  일본 최고 갑부가 된 손정의와 ‘열정’의 리더십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 회장.
  2018년 9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재일교포 3세인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회장의 재산이 한화(韓貨)로 약 24조5000억원을 기록해 일본 최고 부자가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2년 연속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손정의가 사업에 성공한 것은 한마디로 활화산 같은 ‘열정’과 강력한 ‘추진력’의 결합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열정과 추진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가 있다.
 
  16세 때 규슈의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다니던 손정의는 어느 날 과학 잡지를 보다가 컴퓨터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인간이 만든 기계인 컴퓨터의 놀라운 기억력에 매료된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사를 읽고 또 읽다가 꼬박 밤을 새웠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잡지에서 오려낸 컴퓨터 사진을 베개 밑에 넣고 잠이 들었다. 그만큼 컴퓨터에 대한 강렬한 충격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손정의는 아버지에게 미국 유학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그는 고2였는데 당장 미국에 가서 컴퓨터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도 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가 만류했지만, 그는 당장 가야 한다고 떼를 썼다. 너무 간절한 요청이었으므로, 그의 부모도 두 손 다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살라몬테고교 2학년에 편입한 손정의는 입교한 지 불과 2주일 만에 대학검정자격 고시에 합격해 2년제인 오클랜드 홀리네임스대학을 거쳐 편입으로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에 들어가 컴퓨터 공부에 매진했다.
 
 
  ‘5분 명상’으로 아이디어 개발
 
  버클리대학 시절 손정의는 노트 한 권을 사서 매일 뇌수가 터질 듯한 ‘5분 명상’을 하며 컴퓨터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하나씩 떠올려 기록했다고 한다. 그 노트엔 250여 개의 아이디어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겨울방학 때 그는 사업 가능한 아이디어를 고르기 위해 노트에 적힌 것을 점검하면서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거의 공상에 가까운 아이디어라 실현 가능한 사업 분야는 극히 적었다. 그중 단 하나 골라낸 것은 ‘일어·영어 자동번역기’였다.
 
  손정의는 학교 게시판에 자신의 컴퓨터 사업 관련 내용이 담긴 글을 올려 연구자를 모집했다. 당시 ‘일어·영어 자동번역기’의 아이디어는 참신했고, 실현 가능하다고 판단한 학생들과 심지어 강사들까지 참여하였다. 모두가 컴퓨터에 능하다고 자부하는 전문가들이었다.
 
  대학 4학년을 마칠 무렵, 손정의와 컴퓨터 사업에 동참한 멤버들은 ‘일어·영어 자동번역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소프트웨어를 일본 기업에 팔겠다고 선언하고, 그 이득의 절반은 아이디어를 낸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멤버 각자에게 n분의 1로 나누어주기로 약속했다.
 
  겨울방학 때 손정의는 일본으로 돌아와 전자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소프트웨어를 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전자회사들이 코웃음부터 쳤다. 대학생 주제에 그런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느냐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손정의가 샤프전자를 방문해 소프트웨어를 내놓았을 때, 담당 상무는 깜짝 놀라 일단 직원들에게 검증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샤프전자에서도 ‘일어·영어 자동번역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팀을 구성하고 있던 참이었다.
 
  손정의가 가지고 온 소프트웨어를 점검해본 샤프전자는 100%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기술적 보완을 거치면 몇 년 안에 완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0년을 내다보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던 샤프전자는 투자비와 인력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샤프전자는 손정의가 가지고 온 소프트웨어를 1억 엔에 샀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같이 연구에 참여한 멤버들에게 5000만 엔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 학생들이었던 그들은 각자 배분된 금액만으로도 매우 큰돈이라 탄성을 질렀다.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멤버들에게 주고 남은 5000만 엔에 다시 5000만 엔을 보태 1억 엔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직원 2명을 데리고 고향 근처인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이자 IT 투자기업인 소프트뱅크사를 설립한 것이다.
 
 
  창업하면서 60대까지의 기업 확장 전망 마련
 
  손정의는 창업할 당시 이미 60대까지 단계별로 기업을 확장해나가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20대에는 비즈니스계에 데뷔하는 것, 30대에는 사업자금 1000억 엔을 확보하는 것, 40대에는 승부의 시기, 50대에는 사업을 완성하는 단계, 그리고 60대에는 그때까지 축적한 것을 새로운 세대로 사업을 계승시켜나간다는 것이었다.
 
  창업하자마자 손정의는 이러한 단계별 계획을 직원 2명에게 매일 아침 웅변하듯 교육시켰다.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나가자, 처음 들어온 직원 2명은 그것을 ‘허풍’으로 여기고 참지 못한 나머지 퇴사(退社)해버렸다.
 
  손정의가 웅변적으로 설파한 ‘열정’의 리더십을 직원 2명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단계별로 계획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직원들 앞에서 열변을 토해냄으로써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을 했던 것이다. 그는 정말 사업을 단계별로 50대까지 실천에 옮겨 계획대로 실현시켰다. 그리고 지금 6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그는 아직 새로운 세대에게 사업을 계승시키는 일은 보류해두고 있는 입장이다. 소프트뱅크의 회장인 그는 아직 현역으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열정’의 리더십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한다. 현장법사의 구법행이나 손정의의 미국 유학은 신세계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 활화산 같은 열정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며, 그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바로 ‘열정’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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