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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3

아소카

‘빈손’으로 돌아간 정복 군주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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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드라굽타, 알렉산드로스의 영향받아 마우리아제국 건설
⊙ 아소카, 젊어서 정복과 학살을 일삼던 잔인한 군주였으나 마흔 살 이후 불교에 귀의
⊙ 아소카 石柱 세워 德治主義 천명… “가장 고귀한 사람도 가장 비천한 사람도 모두 본분을 다하게 하라”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아소카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강을 눈앞에 두고 휘하 장수들의 말대로 인도 원정을 도중에 포기했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로 하여금 인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당시 젊은 모험가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리더십에서 남다른 감동을 받았다.
 
  후에 찬드라굽타는 펀자브 지역에서 그리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반란군을 이끌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헬라스제국 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그 후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02년 인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2년 후인 기원전 300년에는 셀레우코스와 협정을 맺어 인도의 국경을 힌두쿠시에서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와 발루치스탄 사막에 이르는 지역으로 결정했다. 이때 협정에는 찬드라굽타가 그리스 공주와 결혼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297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빔비사라가 제국을 이끌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빔비사라는 ‘적을 죽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이름값을 하기라도 하듯 남쪽의 소국들을 자주 공격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 이후 왕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종국에는 기원전 268년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가 왕위를 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빔비사라는 못생긴 외모에 피부도 거친 아소카를 매우 미워했다고 한다. 아소카는 부왕(父王)이 죽은 후 약 4년간에 걸쳐 형제간 왕위다툼에서 이겨 이복(異腹)형제 여섯 명을 사형에 처하고 막내 한 명만 살려주었다고 한다. 전설에는 99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하니, 부왕 빔비사라는 많은 여인에게서 수많은 자식을 낳은 모양이다.
 
  찬드라굽타의 구루(스승)던 아지비카라는 성인은 빔비사라의 많은 아들 중에서 아소카가 가장 유능하며, 후에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빔비사라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아소카가 왕이 되어 인도 전역을 통일할 거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러한 전설적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아소카는 부왕 빔비사라의 미움을 받았지만 일찍부터 제왕적 기질을 발휘해 많은 형제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모양이다.
 
 
  정복 군주 아소카의 변신
 
  아소카는 즉위 초기에 쾌락을 즐겨 ‘카마소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욕망을 따르는 자’ ‘바람둥이 아소카’란 뜻이었다. 한때 폭력을 휘두르고 사악한 군주로 군림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잔인한 자’란 뜻의 ‘칸다소카’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불교로 개종해 ‘다마소카’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정의(正義)로운 자’ ‘신성한 법칙을 따르는 자’란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소카에게 많은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젊은 시절 다혈질적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젊은 시절 측근의 여자들이 아소카에게 못생겼다고 하자,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한 신하는 아소카에게 말하기를, “위대한 왕이 되려면 잔인해야 하지만 직접 나설 수 없으므로 고문 대리인을 두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고문 담당관을 두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독창적인 고문 기구들을 만들어 죄인을 잔인하게 다루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소카가 왕위에 오른 것은 30세 전후였는데, 재위 8년째 되던 해에 동남쪽 벵골만해에 위치한 칼링카왕국을 정복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우리아왕국 초기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이웃 나라를 공격해 속국(屬國)으로 만든 것처럼, 아소카는 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해 정복 군주가 되었다.
 
  아소카가 정복 군주로 군림할 당시 마우리아왕조가 다스린 인도의 속국들이 무려 118개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속국 중 가장 강력한 칼링카왕국을 공격하면서 아소카는 적군 10만명을 죽였고, 15만명을 사로잡았다. 또한 포로 중 말을 듣지 않는 자들과 민간인을 포함해 10만명 가까운 사람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이렇게 칼링카왕국을 속국으로 만들면서 아소카는 인도 남단의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 땅을 점령한 인도 역사상 첫 통일제국을 세운 전제(專制)군주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전쟁의 신(神)’처럼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 정복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이때 이미 그의 나이도 40대에 접어들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기였다.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 적군이든 아군이든 민간인이든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살상당한 장면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아수라(阿修羅)와 같은 형상임을 깨달았다.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덟 신 가운데 하나인 아수라는 당시 힌두교의 주신들과 대립하는 악신(惡神)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아수라장’ 하면 싸움이 벌어져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장소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당시 아소카가 느낀 자신의 과거야말로 바로 ‘아수라장’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칼링카왕국을 점령하면서 무참하게 인명을 살상한 아소카가 불교에 귀의(歸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칼링카왕국을 속국으로 삼은 지 2년, 아소카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어느 날 아소카는 순행하던 중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 이르렀다. 여기서 불교 승려인 우파굽타를 만났는데, 아소카는 그에게 문득 자신의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았다. 왕국에 악(惡)이 아닌 선(善)을 심을 수 있는 방법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아소카는 우파굽타를 구루로 삼아 심도 있는 불교 교리를 배웠고,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길 만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그는 마우리아왕조의 개혁 정치를 실현해나갔다.
 
 
  아소카의 石柱
 
인도 바이살리에 있는 아소카대왕의 석주. 왕의 칙령을 새겨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사진=배진영
  아소카는 불법에 귀의한 이후 무력 정복의 야심을 버리고 덕치주의(德治主義)를 표방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덕치주의에 의한 아소카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생명주의와 비폭력이었다. 당시 인도의 식생활은 육식(肉食) 위주였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될 수 있으면 육식은 자제하고 초식을 하도록 권장하였다. 또한 사형제를 폐지하여 함부로 살상하는 법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덕치주의에 입각한 자신의 정책이나 칙령, 법령 등을 반포하여 왕국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되던 해인 기원전 258년경부터 아소카는 왕국 백성들에게 덕치주의에 입각한 칙령을 내려, 바위에 새겨 오래도록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바위에 새긴 칙령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칙령을 새길 만한 바위는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번화한 거리에 칙령이 새겨진 석주(石柱)를 세우게 하였다. 전국 곳곳 30여 개소에 석주를 세웠는데, 높이가 무려 40~50척(13~16m)이었으며 무게만도 50~60톤이나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석주에 뛰어난 예술 조각을 장식하고 칙령 내용을 글씨로 새겨 넣었다. 석주의 꼭대기엔 우람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자나 코끼리, 소의 머리를 조각한 석상을 얹었다.
 
  아소카는 첫 번째 석주에 ‘폭력이 아니라 법을 통한 정복’을 선언하는 칙령을 새겨 넣었다. 인접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고 설득과 교화를 통해 복종토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살상하지 않고 이웃 나라를 지배하는 전제군주가 되겠다는 정책을 전략적으로 펴나갔던 것이다.
 
  마우리아왕조 제3대 왕인 아소카는 철저한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는데, 국무위원회란 왕의 자문기관을 통해 행정조치를 실행하였다. 전국을 중앙 직할지 외에 지방 총독을 둔 서북·서·동남·남 등 4개 지역으로 분할·통치하게 하였다. 지방의 경우 정기적으로 중앙에서 순찰관을 보내 관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처럼 지방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간, 지방과 지방 간 도로를 정비하여 망상적(網狀的)인 유통체계도 갖추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대규모 관개시설을 만들어 농업을 장려했다.
 
  아소카의 석주에 새겨진 칙령 중에는 “쓸데없이 숲을 파괴해선 안 된다”면서 환경을 보존토록 하여 숲에 사는 동물들을 보호하라는 내용도 있다. 많은 종파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종교가 결국 같은 목표, 즉 자기절제와 순수한 정신을 지향한다”는 문구를 석주에 넣어, 믿음이 서로 다른 백성들을 교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가장 고귀한 사람도 가장 비천한 사람도 모두 본분을 다하게 하라”는 칙령을 내려 전통적인 인도의 신분사회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무절제와 언어폭력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마음에 새겨 삼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노인 공경, 식생활, 가정의례, 여성 도덕 등에 관련된 문구도 석주에 새겨 넣었다.
 
  이처럼 아소카는 일반 백성들의 사소한 생활에 이르기까지 칙령을 공포하였으며, 다른 나라 대상(隊商)들의 내왕을 위해 주요 대로변에 우물을 파고, 망고나무와 보리수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두고 휴게소를 세워 여행자들이 쉴 수 있도록 했다. 도로 곳곳에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둥도 세웠다.
 
  아소카는 70세 전후가 되는 재위 3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부처에게 바치려고 했는데, 자식과 신하들이 욕심을 내어 재산을 빼돌리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그는 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며, 가장 총애한 사원의 승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것은 죽을 때 손에 들고 있던 망고 반 개였다.
 
  마우리아왕조는 아소카가 죽은 뒤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경영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개인적인 욕심이 강하여 제대로 왕조를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웅 리더십
 
  유라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불교 전파
 
  문명 교류를 통하여 흔히 대상(隊商)들에 의한 제품 교역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문화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문화 수출품은 불교를 꼽을 수 있는데, 그 최초의 공헌자는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다.
 
  아소카가 남긴 업적은 대단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북인도 지방에서 믿고 있던 불교를 서방과 동방 양쪽으로 전파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로 격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는 서역 대상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가로수를 심고, 우물을 파서 갈증을 풀도록 했고, 곳곳에 휴식처를 마련해 쉼터를 제공하는 등 동서교역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아소카가 실크로드의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최초로 동서방에 불교를 전파한 공헌자라는 점이다.
 
  세상에 불법을 퍼뜨리겠다는 것이 당시 아소카의 포부였다. 석주의 칙령에도 나와 있지만, 그는 수시로 불교 사절단을 간다라와 카슈미르 등지에 파견하였다. 히말라야는 물론이거니와 바다 건너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에도 사절단을 보내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서역(西域)으로는 당시 마우리아왕국에 머물러 왕실의 행정을 돕던 그리스인을 사절로 선발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보내 불교 전파에 힘쓰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그리스인 출신의 사절을 지중해 지역으로 보내 이집트·시리아·아나톨리아·키레네·에피루스·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인 왕도 만나도록 했다.
 
  당시 불교 사절단은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을 수행하였다. 갠지스 평원에서 지중해까지는 왕복 약 600요자(약 8000km)였다. ‘요자’는 왕이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데, 약 11.3km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거리도 문제지만, 바다와 사막과 곳곳에서 만나는 도적떼 등으로 인해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로와 다름없었다. 어느 땐가는 아소카가 지중해로 불교 사절단 여덟 명을 파견했는데, 돌아온 사람은 단지 3명뿐이고 나머지는 험하고 먼 여행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소카는 스리랑카 불교 사절단으로 두 차례에 걸쳐 왕자 마헨드라(Mahendra)와 공주 산가미트라(Sanghamitra)를 파견해 포교에 성공한 적도 있다.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파견 여정에 아들과 딸을 보내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들이 포교에 성공해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소승불교)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미얀마·태국·수마트라·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소승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아소카는 우리나라에서 아육왕(阿育王)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유사》 제4 탑상편 ‘요동성의 아육왕탑’ 기사에 나온다. 일연은 중국 문헌인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옮겨왔다고 하는데, 기사를 보면 고구려 요동성 옆에 아육왕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 요동성에 이르던 때였다. 갑자기 오색구름이 땅을 덮고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어느 순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자리를 파보자 석편으로 된 명(銘)이 나왔다. 그 글자가 범어(梵語)로 되어 있어, 그곳에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우고 ‘아육왕탑’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의 성왕은 시기적으로 보나 요동성을 고구려 국경으로 삼은 것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일 것으로 여겨진다.
 
  아소카가 불교 사절단을 동서방으로 보낼 때는 불교가 대승이나 소승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이후 서역을 통해 중국과 우리나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동북아시아에는 대승불교가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까지 꽤나 오랜 기간이 걸렸지만, 그 시초를 열어준 것이 바로 아소카의 업적임을, 전설로 전해지는 ‘아육왕탑’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동국제강 창업자 장경호의 ‘빈손 철학’
 
장경호 동국제강 창립자. 사진=동국제강 홈페이지
  호(號)가 ‘대원(大圓)’인 동국제강(東國製鋼) 창업자 장경호(張敬浩)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여덟 살 때 모친을 따라 통도사(通道寺)에 갔다가 불교를 믿기 시작해 평생 불심(佛心)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장경호는 1920년 부산시 초량동에 대궁양행을 열고 가마니 매매업을 하면서 사업에 눈을 떴다. 당시 가마니는 가을 추수철에는 수요가 많지만, 봄부터 여름까지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보관을 잘못해 비가 와서 젖으면 쉽게 썩는 게 문제였다. 또한 추수철이 되면 가마니가 부족해 농부들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장경호는 농부들에게서 가마니가 필요 없는 봄과 여름에 싸게 사서 잘 보관해두었다가 추수철에 내다 파는 일을 하여 돈을 벌었다. 그는 가마니 공장 외에도 정미소 경영, 양철로 석유깡통을 만드는 제조업에도 손을 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장경호는 재일교포가 경영하던 공장의 신선기(伸線機)를 인수해 철강업을 본격적으로 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땅에 떨어진 못 대가리 하나까지 손수 주워 철강 재료로 쓸 정도로 검약과 성실함, 부지런함으로 기업을 일구어나갔다. 그리고 1954년에는 동국제강을 설립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강회사로 키워내는 제1세대 경영자가 되었다.
 
  장경호는 기업인으로 철강회사를 이끌어가는 한편, 1970년 장학재단 대원정사(大圓精舍)를 설립해 불교 대중화에도 힘썼다. 1973년에는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에 대원불교회관을 건립하였으며, 불교방송과 불교병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 장경호는 1975년 자식들에게 재산을 고루 분배해준 뒤 자신에게 남아 있던 개인 소유의 재산을 현금으로 만들어 불교 중흥을 위해 좋은 곳에 써달라는 서신과 함께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보냈다. 개인 소유 재산을 남겨두고 죽을 경우 자식들 사이에 불화가 생길 것을 염려해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6년 장경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지은 대원정사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참선하다 세상을 떠났다. 사전에 자식과 측근에게 절대 음식을 방으로 들이거나 의식불명 상태가 왔을 때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이른 후 참선에 들어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다.
 
  장경호가 마지막 남긴 것은 빈손이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 것이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한 개인 소유 재산 30억원은 호국불교 중흥사업에 쓰였다.
 
  한편 장경호의 2남 장상문(張相文)은 1989년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사재 10억원을 투자해 대원사 출판사를 세웠다. 그는 본격적으로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빛깔 있는 책들’이라는 시리즈를 펴냈는데, 주로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고 기간이 오래 걸리는 책을 출간하여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다. 현재 ‘빛깔 있는 책들’ 시리즈는 282권 《고인돌》까지 나왔으며, 500권을 출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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