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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5〉

설화적 인물로 각색된 선덕왕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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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품제 덕분에 즉위, 여성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知幾三事’ 설화 만들어져
⊙ ‘향기로운 임금의 절’ 芬皇寺…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198호)은 여왕의 따뜻한 매력 보여주는 듯
⊙ 여성이라는 이유로 국내외에서 얕잡아 보여… 즉위 앞두고는 칠숙·석품의 난, 죽기 전에는 비담·염종의 난 겪어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제27대 선덕왕(善德王)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역사 기록에 보면 선덕왕은 다른 왕들에 비하여 유독 설화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설화는 크게 신화·전설·민담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신화는 건국신화나 시조신화(씨족신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수호신 등에 관한 마을신화나 무속신화 등을 일컫는다. 선덕왕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신화보다는 전설이나 민담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다양한 설화들이 사실에다 의도된 색깔을 입혀 각색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다른 왕들에 비하여 유독 선덕왕에 대한 설화가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기 때문에 설화 형식으로 꾸며질 때 이야기를 전하는 후대의 많은 이가 애써 신비스럽게 그려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선덕왕조에 보면, ‘덕만(德曼)의 성품은 관인(寬仁)하고 명민(明敏)하였으며, 왕(眞平王)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號)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전왕(前王·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온 모란꽃의 그림과 종자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네 어찌 그걸 아느냐?”고 물으니, “이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 여자로서 국색(國色)이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으로서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라다니는 까닭인데, 이 꽃은 매우 곱기는 하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종자를 심어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의 선견(先見)이 이러하였다.〉
 
  ‘국색이면 남자가 따른다’는 것을 비유로 들어 꽃과 벌, 나비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때 덕만공주의 나이가 결코 어리지는 않고 이팔청춘은 넘었을 듯싶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벌, 나비가 날아들 정도로 향기가 있는 매우 아름다운 꽃이다. 모란꽃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꽃으로, 본래 모란꽃에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는 당대의 화풍(畵風)이 있었다고 한다.
 
  짤막한 일화지만, 모란꽃 이야기는 왕위에 오른 선덕왕의 영특함을 애써 보여주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각색한 흔적이 역력하다. 김부식(金富軾)도 선덕왕조의 첫머리에 ‘성품이 관인하고 명민하다’는 대목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 ‘모란꽃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모란꽃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에도 똑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지기삼사’, 즉 선덕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안 사건 중에서, 모란꽃에 얽힌 선덕왕의 설화는 첫 번째에 해당한다.
 
 
  칠숙·석품의 반란
 
  진평왕 재위 53년(631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함께 모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역모를 진압하고 두 사람을 붙잡아 구족(九族)을 멸하였지만, 다음 해 정월에 왕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덕만공주가 선덕왕이 되었다.
 
  칠숙과 석품의 모반 사건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의 골품제에 대한 항거이며, 동시에 다음 대를 여자가 잇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선덕왕의 즉위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름은 덕만이며, 아버지는 진평왕,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다. 성골(聖骨) 가운데 남자가 없었으므로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다.〉
 
  이 기사를 통하여 신라에서 최초로 여왕이 탄생한 것은 ‘골품제(骨品制)’의 전통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성골 가운데 남자가 없었으므로’ 선덕왕은 여성의 신분으로 당당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骨制)로 성골과 진골(眞骨)이 있고,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頭品制)가 있다. 이 중에서 성골은 김씨 왕족 가운데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으로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진골은 부모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왕족이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러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사료에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므로, 정확한 근거를 내세우기는 쉽지 않다.
 
  아무튼 선덕왕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로, 부왕인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성골 출신의 남자가 없어 여자이면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진평왕 말년에 다음 왕위 자리를 놓고 신라 조정에서는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자가 과연 왕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장녀인 덕만공주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라의 조정에서는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진골 출신의 귀족일 경우 성골 출신 남자가 없다면 자신에게도 왕위 자리가 주어질 수 있다고 욕심을 낼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골품제가 중요하다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여자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에 속했을 것이다. 당연히 골품제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인 칠숙과 석품이 모반을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선덕왕조 첫머리에서 왕의 명민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란꽃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도 당시 신라 사회의 반발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나온 설화의 각색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이지만 충분히 나라를 다스릴 만한 그릇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신라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 선덕왕의 명민함을 인식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 분명하다.
 
 
  女根谷과 玉門谷 설화
 
  두 번째로 선덕왕이 미리 안 일은 《삼국유사》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1000명씩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또 후원병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에도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 ‘여근곡’이라고 나오는 지명을 《삼국사기》에서는 ‘옥문곡(玉門谷)’으로 표기된 것만 다를 뿐이다. 여근곡은 너무 직접적으로 여성의 육체를 상징화한 지명이고, 옥문곡은 조금 점잖은 표현에 속한다.
 
  이러한 얘기가 두 책에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는 것은 백제의 침공을 물리친 사건이 사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선덕왕이 미리 알았다는 대목은 설화 형식으로 각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왕이지만 지혜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지금도 ‘옥문곡’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 사실의 확실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에는 ‘여근곡 사건’을 미리 안 것에 대해 신하들이 선덕왕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陰部)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희다.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따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선덕왕의 답변을 통하여 당시 신라시대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명의 특성과 지리적 특색을 이용해 후세 사람들이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각색한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
 
 
  도리천과 사천왕사 설화
 
분황사 석탑.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다. 사진=조선DB
  세 번째로 선덕왕이 미리 안 일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물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의 남쪽이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과연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불경은 말한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한 절이다. 선덕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이 절을 세웠는데, 674년에 명랑법사(明朗法師)는 당(唐)나라의 50만 대병을 막기 위해서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지어 부처의 힘으로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그 후 5년 만에 사천왕사는 완공을 보았다.
 
  불경에는 도리천이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나온다. 서라벌 가운데 있는 낭산 남쪽 아래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며, 선덕왕릉은 낭산 남쪽 봉우리 정상에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선덕왕을 신령스런 대왕으로 떠받들었다.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왕 재위 3년(634년)에 창건되었다. 남동신 박사(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분황사의 재조명》이란 저서에서, ‘분황사’란 절 이름이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절 이름에 향기 분(芬) 자가 들어가는 것은, 당시 여성이 왕이 된 것을 비판하는 일부 신라 귀족 세력들에게 선덕왕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분황사 건립 12년 후인 선덕왕 재위 15년(646년)에 완성한 황룡사구층목탑도 외적[九夷]들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또한 여왕이라 하여 국내외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선덕왕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신라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성스러운 조상, 큰 할머니’
 
황룡사9층목탑 디지털 복원도. 제공=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김기흥 박사(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천년의 왕국 신라》란 저서를 통해 선덕왕에 대하여 과연 ‘향기 나는 여왕, 매력 있는 여자였을까?’란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문적인 규명은 어려운 일이지만 신라시대의 유물 하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유물은 경주 남산 기슭의 부처골에 있는 보물 198호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이다. 자연의 바위를 깎아 움푹 들어가게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셔 흔히 ‘감실 석불좌상’이라고도 한다.
 
  〈감실 부처는 《삼국사기》 선덕왕 본기에 기술된 여왕의 성품처럼 인자함과 명석함, 그리고 덕스러움을 담은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듯하다. 감실 부처가 보여주는 여왕의 고고하면서도 따뜻한 매력이야말로 그녀를 버텨준 가장 확실한 힘의 하나로서 많은 이의 지지를 얻어내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36쪽)
 
  분황사와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운 선덕왕은 불국정토를 꿈꾼 여왕으로서 죽어서도 도리천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도리천은 불교 우주관의 하나로, 세계 중심에 있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고 한다. 낭산 꼭대기의 정상에 선덕왕릉이 있는데, 그 아래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건립함으로써 왕릉이 있는 낭산 정상은 비로소 도리천이 된 것이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선덕왕을 기리기 위하여 도리천에 왕릉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여왕을 닮은 부처를 새겨 이른바 ‘성조황고(聖祖皇姑)’의 덕을 기렸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선덕왕조에 왕이 즉위할 때 나라 사람이 지어주었다는 ‘성조황고’는, 한문의 뜻 그대로 풀이하면 ‘성스러운 조상, 큰 할머니’란 뜻이다. 여왕을 닮은 ‘감실 석불좌상’은 도리천으로 올라간 성조황고 선덕왕을 기리는 간절함과 당시 신라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자라고 선덕왕을 무시한 唐태종
 
당 태종.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왕은 신라에서만 강한 거부감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나라 태종도 대놓고 선덕왕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삼국사기》 선덕왕 재위 12년 기사에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므로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당태종은 세 가지 방책을 사신 앞에 열거하였다.
 
  첫째는 당나라가 변방의 군사를 보내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고구려 땅 요동을 친다면, 신라는 저절로 자유로워지게 되므로 1년 동안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수천의 붉은 옷과 붉은 기를 주어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가 신라를 공격할 때 그것을 세워 벌려놓으면, 적군은 당나라 군사들인 줄 알고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다.
 
  이러한 방책을 설명한 연후, 당태종은 세 번째 대안(代案)으로, 선덕왕을 거론하면서 신라 사신 앞에서 다음과 같은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대 나라는 임금이 부인(婦人)이어서 이웃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할 날이 없다. 내가 나의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고, 자연 혼자서 갈 수는 없으므로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安靖)함을 기다려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하려고 하니, 이것이 셋째의 방책이다.”
 
  이처럼 당대 신라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선덕왕을 얕잡아보고 비웃었다. 그래서 더욱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허약하다고 생각해 공격을 일삼았던 것이다.
 
  설화에도 있듯이 선덕왕은 당당하게 백제의 기습을 지혜로 물리쳤으며,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워 불심으로 구이를 물리치고 나라의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신라에는 3가지 보물이 있었는데, 주변국들은 ‘신라삼보(新羅三寶)’ 때문에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세 가지 보물이란, 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천사옥대(天賜玉帶)·황룡사구층목탑이다. 상징적이지만 황룡사구층목탑을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했으므로, 그것을 세운 선덕왕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비담과 염종의 亂
 
  그러나 선덕왕 재위 16년(647년)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은, 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도 선덕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으로 성골 출신의 승만(勝曼)공주를 예정해놓고 있었는데, 신라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것이다. 승만공주는 진평왕의 동모제(同母弟)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로 선덕왕과는 사촌간이었다.
 
  진평왕 재위 마지막 해에 여왕이 제위에 오르는 것에 불만을 갖고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묘하게도 선덕왕 재위 마지막 해에도 비담과 염종이 모반을 획책한 것은 당시 남성 중심주의 사상에 물든 신라 사회에서 여왕의 등극을 불신한 사건으로 특히 주목된다. 선덕왕은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비담과 염종의 무리를 척결하였으나, 그 직후 세상을 떠났다.
 
  선덕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신라 제28대 왕위에 오른 진덕왕은 원년 정월에 김유신이 사로잡은 비담 등 30명을 죽이고 구족을 멸하였다. 김유신이 비담과 염종 등 반란의 무리를 제압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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