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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40〉 마침내 유네스코 문화유산 된 한국의 書院

“세계가 최치원부터 퇴계, 서애 선생을 우러르게 됐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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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것은 寺刹, 書院, 鄕校
⊙ 우리 서원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못지않아
⊙ 2016년 실패 후 3년 만에 유네스코 문화유산 인정받아
⊙ 김종직·조광조·이이 등도 추가돼야
⊙ 학맥–성리학의 계보도 들쭉날쭉한 것 바로잡아야
⊙ 지역별로 안배한 듯한 인상은 지울 수 없어
남계서원의 정문인 풍영루다.
  단언컨대 세계에 내놓을 대한민국 문화유산은 사찰과 서원과 향교다. 우리가 우리 것을 비하하는 전형적 자학사관(自虐史觀)일 뿐 지금 보존된 한국 서원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문화유산이다. 서원은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는 ‘아카데미아’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훨씬 크고 역사도 깊다. 한때 1000개를 넘은 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일거에 철폐됐다.
 
  그 때문에 그 많던 서원이 47곳만 남는 위기를 맞았지만, 최근 복원되고 있다. 여기에 초등교육기관 격인 향교(鄕校)를 합친다면 한민족의 뛰어난 교육열을 설명할 수 있다. 서원은 공립학교인 향교와 달리 지방 지식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다. 성리학 가치에 부합하는 지식인을 양성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를 사표(師表)로 삼아 배향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된 서원은 9곳이다. 조선 첫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으로 16~17세기에 건립됐다. 이곳은 대원군도 손대지 않았고, 2009년 이전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원형을 잘 유지했다고 한다.
 
  병산서원과 옥산서원은 2010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에도 포함돼 세계유산 2관왕을 이뤘다.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자 안향을 모시며, 도산서원은 퇴계의 넋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무성서원은 한민족사의 천재이자 기인인 고산 최치원을 모시며, 병산서원은 임진왜란을 한 몸으로 막아낸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고 있다.
 
  2016년 당시 위 서원을 방문한 린 디 스테파노 홍콩대 교수는 “아홉 곳의 서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고 서원 건축물뿐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이 서로 관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단지 이 말만 했는지, 다른 구체적 사유도 밝혔는데 우리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고려시대 관리로 일한 안향(安珦·1243~1306)이 주희가 남긴 《주자전서》를 처음 접한 것이 1286년(충렬왕 12년) 무렵이다. 그는 정동행성의 좌우사 낭중(左右司郎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갔다가 수도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를 보게 됐다고 한다.
 
  그는 기쁜 나머지 《주자전서》를 베끼고 공자(孔子)·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그려 돌아온 뒤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으니 주자 사후 86년 만에 주자학이 고려에 전래한 것이다. 그는 얼마나 주자를 흠모했는지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號) 회암(晦庵)과 비슷한 회헌(晦軒)으로 지었다.
 
  그 후로 안향은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도산서원에는 성리학의 계보도가 나온다. 안향-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는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리는데, 포은과 야은의 고향이 각각 경북 영천과 구미라는 사실이다.
 
우리 서원의 시초인 소수서원이다.
  성리학의 개척자들이 경북 영주(안향)·영천(정몽주)·구미(길재)를 기반으로 하면서 이후 영남(嶺南)은 성리학의 중심지가 된다. 이제 소수서원이 생긴 연혁을 알아본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으로 1541년 풍기군수가 된 주세붕이 이곳 출신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白雲洞)서원을 세웠는데,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운동이라는 말은 중국의 백록동(白鹿洞)서원에서 유래한다. 백록동서원은 장쑤성 여산오로봉 밑에 있는데, 당나라 때 이발(李渤)이 은거해 백색 사슴을 기르며 독서에 몰두했다는 곳이다. 백록동서원을 재건한 이가 주자로, 그는 스스로 백록동서원의 원장이 돼 ‘삼강오륜’과 ‘중용’을 강의하며 천하제일 학교로 만들었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唐)나라 현종 때 설치된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과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학문을 사랑한 조선 세종이 천하의 인재를 모으기 위해 설치한 집현전 역시 당 현종의 여정전서원을 본받은 것이다.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나라를 망친 인물이지만 초기에는 명군으로 꼽혔다.
 
  위정자의 역할은 기재(奇才)들을 모아 나라의 동량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종이 집현전서원과 여정전서원을 만든 후 중국 역대 황제들도 이름을 내려 서원 설립을 장려했다. 이것이 사액(賜額), 즉 현판을 내린다는 뜻이다. 사액서원이 되면 세금이 면제되고 재정지원이 뒤따른다. 중국에 있던 수양·석고·백록동·악록 서원이 대표적 사액서원이다.
 
  서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가졌다. 1차적으로는 공부하는 곳이다. 서원의 구조를 보면 정문 격인 누각(樓閣)이 있고, 그 뒤 중심에 전체 스승과 제자들이 모여 강론하는 강당(講堂)이 있다. 누각과 강당 사이에는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동재와 서재는 낮에는 공부, 밤에는 학생들의 숙소로 보통 사용됐다.
 
  그렇다면 무슨 공부를 한 것인가. 서원은 주자학의 융성과 깊은 관계가 있어 기본적인 공부 목표는 법성현(法聖賢), 즉 공자·맹자·주자 같은 인물의 저술을 익히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리(養吏), 즉 벼슬아치를 배출하게 되었다. 지금의 고시(高試) 합격자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서원의 2차 기능은 선현(先賢)을 모시는 것이다. 배향(配享)이란, 어떤 임금이 살아 있는 시절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 있는 신하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거나 학덕이 있는 이를 문묘(文廟)나 서원에 부제하는 것을 말한다. 서원도 문묘처럼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추앙하는 현인을 중심에 놓고 그 핵심 후계자들을 곁에 모셨다.
 
  백운동서원이 생긴 지 9년 뒤인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서원의 격을 높이려 임금에게 송(宋)대의 예를 언급하며 서원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扁額)과 많은 책, 노비를 하사했다.
 
  ‘소수’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나온 말이다. 소수서원 자리는 숙수사(宿水寺)라는 큰 절이 있던 터라고 한다. 숙수사는 부근 부석사(浮石寺) 못지않은 규모였다는데, 소수서원 입구 울창한 소나무숲과 함께 절에서만 볼 수 있는 당간지주가 잘 보존돼 있다.
 
  소수서원은 내부 건축물보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주변을 흐르는 죽계천의 암벽에는 ‘백운동’ ‘경(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은 유학자들이 심성을 수양할 때 지표로 삼는 경구(警句)다. 소수서원 출신은 4000명이 넘는데 그중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 좌의정이던 정탁도 있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가는 길 왼쪽에 그 유명한 도산매가 보인다.
  조선 중기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이 문묘에 배향되는지가 서원의 관심사였다. 문묘에 배향되느냐에 따라 서원의 흥망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배향 자체가 학맥과 가문의 영예였으며, 후손에게는 무시험으로 벼슬을 받는 문음(門陰) 등 특전이 주어졌다.
 
  법성현과 양리, 선현을 모시는 것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서원의 기능이 있다. 바로 도서관 역할이다. 서원들은 하나같이 강당 영역에 장경각(藏經閣) 혹은 장판각이라는 부속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도서나 중국에서 들여온 책이나 문서, 서원 자체에서 출판한 문서 등이 보관돼왔다.
 
  일례로 경북 경주의 옥산서원은 866종 4111책을, 경북 안동 도산서원은 907종 4338책을, 부근 병산서원은 1071종 3039책을, 전남 장성 필암서원은 132종 595책을, 대구 달성 도동서원은 95종 529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명 서원들은 귀중한 도서와 문서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암암리에 경쟁했을 것이다.
 
 
이언적 선생을 기리는 옥산서원 옆은 천혜의 절경이다.


  다시 성리학의 계보로 돌아가본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성리학의 계보는 안향-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김숙자(金叔滋·1389~1456)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김숙자는 구미시에 통합된 경북 선산 출신으로 길재의 제자다. 그는 1456년 처가가 있는 경남 밀양에서 죽었다.
 
  김숙자는 길재 제자들 가운데 처음 입지(立地)를 세운, 즉 중앙 정계에 진출했기에 길재의 적통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길재에게 받은 성리학의 계통을 아들 종직에게 전했는데, 이 때문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에서 나왔다.”
 
  김종직이 사림파(士林派)의 중시조로 꼽히는 것은 그가 세조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쳤을 뿐 아니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의 제자를 뒀기 때문이다. 김굉필의 제자가 정암 조광조였으니 김종직과 조광조는 손제자 관계가 된다. 그런 김종직은 훗날 글 하나 때문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중용됐지만 내심 수양대군 시절 조카 단종을 폐위한 데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은 게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김종직은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초(楚)의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방의 한(漢)과 항우의 초(楚),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초한쟁패기 이전 항우는 조카를 살해하고 왕이 됐다.
 
  ‘조의제문’의 원문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정축(1457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7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에서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장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그런데 이 글을 보고 단종과 세조를 연결시킨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워낙 글이 난해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마저 “어찌 이 글이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단종)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라고 되물을 정도였다. 여기서 ‘7장(七章)의 의복’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7장이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입은 제복(祭服)을 말한다. ‘장’은 옷을 장식하는 해·달 등의 문양을, ‘7’은 문양의 수를 말하는데 신분 서열에 따라 무늬의 수가 달랐다(고려 때 임금은 9장, 신하는 7장·5장·3장·1장 사용). 조선과 중국에선 왕이 칠장복을 입었으니 꿈속의 회왕이 임금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스승의 글이 사림파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해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 사초가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됐다. 반면 사후 부관참시가 됨으로써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라는 이름을 후대에 남기게 됐으니 역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밀양에서 숨졌다. 아버지 사후 김종직은 밀양에서 자랐고,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안동에 버금간다며 스스로를 ‘소안동(笑安東)’이라고 불렀다. 즉 ‘안동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이는 함양 사람들이 일두 정여창으로 인해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돈암서원의 정문 격인 산앙루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예학의 대가였다.
  조선의 서원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유학(儒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유학은 공자(孔子·기원전 551~479)가 체계화한 사상을 말한다. 공자가 탄생하기 전부터 중국에는 수많은 사상가가 있었지만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는 유학의 적통계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논어》, 증자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가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임이 그것을 입증한다. 사서와 함께 《시경》 《서경》 《역경》의 삼경을 일컬어 ‘사서삼경’이라 했고, 훗날 《예기》 《춘추》가 추가돼 ‘사서오경’이라 불렸다. 그렇다면 유학의 골간(骨幹)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유학은 신분이 존비(尊卑: 계급제)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이것은 유학이 종교라기보다는 정치학·윤리학·사회학에 가까운 학문임을 보여준다.
 
  공자는 존비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함으로써 자신이 존경해오던 ‘선왕(先王)의 도’에 이른다고 믿었다. 여기서 선왕의 도는 중국인이 리더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주공(周公)을 이른다. 앞서 말한 유학은 크게 보면 정치학이기에 유교(儒敎)라고 불리기에는 종교성이 매우 약한 게 사실이었다.
 
최치원 선생을 모시는 무성서원의 마루에 앉으면 여름을 잊는다.
  불교 등의 종교와 비교할 때 사생관, 사후세계, 우주관이 빈약했다. 이런 유학의 약점을 크게 보완한 사람이 주희(朱熹·1130~1200)였다. 주자(朱子)로 불리게 된 주희는 송대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며 이름 높은 선비를 찾아 공맹(孔孟)의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보다 시대가 앞선 주돈이, 정호, 정이 등 쟁쟁한 유학 거장들의 학문을 섭렵한 뒤 이를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유학이 불교와 도교에 비해 약한 우주론적·인간론적 형이상학의 체계를 만들었다. 주자 이후 유학은 유교로 불릴 만한 위치에 올랐는데, 주자의 학문은 ‘성리학’ ‘주자학’이라 불릴 만큼 독보적이었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 ‘이(理)’와 형이하학적 ‘기(氣)’로 구성됐다고 본다. 이는 순(純), 기는 불순(不純)이니 양자의 작동에 따라 만물의 운동이 달라지는데, 이와 기의 작동 원리가 ‘태극’이다. 이는 주자가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程頣)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호남의 거유 김인후 선생을 모시는 필암서원이다.
  조선시대 서원에 모신 인물은 퇴계가 31곳으로 압도적 1위다. 송시열(26곳), 이이(21곳), 주자(20곳), 조광조·이언적(각각 16곳), 정구(14곳), 정몽주·김굉필(각 13곳), 김장생(12곳), 정여창·조헌·민정중(9곳) 등의 순이었다. 이것만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략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 누가 추앙받고 영향력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조선시대 건립된 서원 수는 모두 378곳이었다. 이것은 조정에서 파악한 수일 뿐 사우(祠宇)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다. 그러던 서원이 187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47곳만 남기고 모조리 훼절됐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선비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가 있다.
 
  일례로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곳인데 훗날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화양서원은 자의로 ‘화양묵패’라는 것을 만들었다. 남의 재산을 평가하고 세금 고지서를 묵패와 함께 보내면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논밭을 팔아 돈을 바쳐야 할 정도였다. 불응하면 서원으로 붙잡혀 가 형을 당하기도 했다. 경남 밀양에는 김종직의 생가 터와 김종직을 기리는 예림서원이 있다. 그런데 예림서원은 왜 이번 유네스코에 제출한 9개 서원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그가 성리학의 중시조이며 동방5현 혹은 동국 18현에 포함된 많은 이름난 선비들의 스승인데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한우 전 《조선일보》 기자(전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교수)의 말이다. “그는 벼슬을 오래한데다 이렇다 할 행적을 생전에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퇴계가 동방5현을 선정할 때도 제외됐다.”
 
  또 다른 이들은 이런 설명을 한다. “그의 사후 저작이나 문서가 다 사라져 그의 공적을 기릴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 교수가 쓴 《왕의 하루: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묘배향은 예송논쟁과 더불어 서인과 남인 간 이데올로기 논쟁의 핵심 쟁점이었다. 이이(李珥)의 문묘배향은 인조반정 한 달여 만에 제기됐다. 반정세력은 그전부터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의해온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이와 성혼의 직간접적인 문인들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서인은 이이를 이황과 대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동방5현이니 동국18현이니 하는 문묘배향 인물을 선정하는 데 그 학파의 세력이 어느 정도냐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책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현종대는 서인들의 힘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예송논쟁에서도 서인들이 압승을 거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송시열과 송준길은 이이와 성혼의 저작들을 현종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하는 방식으로 문묘배향을 압박해 들어갔다. (…) 이이와 성혼의 문묘배향은 뜻밖에도 숙종 때에 와서 이뤄졌다. 경신환국이 있고 나서 서인들이 집권하자 서인 계통의 관리와 유생들은 전방위로 숙종을 압박해 들어갔다. 숙종은 마침내 1681년 9월 ‘이이와 성혼의 문묘배향 요청을 윤허한다’고 명한다. 인조반정 이후 무려 4대 58년에 걸친 논란 끝에 문묘배향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이와 성혼에 이어 서인의 실질적인 지도자 김장생에 대한 문묘배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1631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 장유가 김장생의 시호를 청했지만 인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들의 움직임은 집요했고 1658년 마침내 문원(文元)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신호탄일 뿐 궁극적인 목표는 문묘배향이었다. 숙종대 말인 1712년 유생 1000여 명이 상소해 청하면서 김장생의 문묘배향 운동이 시작됐다. 결국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717년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묘의 동무에 배향됐다. 동무란 문묘의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을 말한다. 왼쪽보다 더 권위 있는 자리다.”
 
  김종직의 제자는 정여창·김굉필·김일손인데, 이 중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김굉필과 정여창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김굉필의 서원이 있다. 도동서원이다. 스승 김종직이 영남 사학을 크게 일으켜 많은 학자를 배출한 교육자였다면, 김굉필은 학문의 내적 기반을 공고히 한 도학(道學)의 창시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도동서원의 2층 누각에서 보면 낙동강이 훤히 보인다.
  도학이란 성리학을 수양하는 인물들을 말한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도동서원은 선조가 즉위한 1568년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서원 재건에 나선 인물이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다. 김굉필의 제자가 조광조다.
 
  조광조는 김굉필이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돼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갔을 때 그 먼곳까지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평생 소학(小學)을 읽고 실천해 ‘소학 동자’로 불린 김굉필은 가는 곳마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다음 시를 보면 그가 오직 지성(至誠)으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공부를 해어도 기본을 몰랐는데
  소학을 읽고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어라
  이제부터 정성껏 자식 구실 하려 하니
  구구하게 어떻게 야멸차길 바라리오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병산서원이다. 정문을 지나면 만대루다.

  동방5현에 포함되는 이언적은 김굉필의 제자던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학문을 배워 김굉필 계보로 분류되지만, 퇴계 이황은 별다른 계보가 없다. 반면 이황의 라이벌 이이는 학문적으론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 분류된다. 그의 스승 백인걸과 성수침(성혼의 아버지)이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이언적·이황은 동방5현에 포함되고 이이와 우계 성혼은 동국 18현에만 그쳤을까. 왜 이언적·이황의 도동서원과 도산서원은 이번 유네스코 등재 신청 9개 서원에 포함됐는데 이이의 자운서원과 성혼의 파산서원은 제외된 것일까.
 
  더 궁금한 것은 동방5현에 당당히 포함된 조광조의 서원은 왜 유네스코 등재 신청 서원 목록에서 탈락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파괴됐다가 다른 9개 서원에 비해 규모가 작고 허름하게 복원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볼 뿐이다.
 
  이황과 이이 이후 사림파는 영남학파와 기호(幾湖)학파로 분화된다. 영남학파의 기둥인 안동의 도산서원은 절경이다. 이곳에 서원이 생긴 것은 1574년인데, 퇴계는 이보다 앞선 1557년부터 여기 터전을 마련했다. 그가 안동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서원의 토대를 마련한 이유는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산에서 하회마을로 오면 그 유명한 병산서원이 있다. 병산은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의 산이 병풍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뒤편은 안동의 진산인 화산이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신다. 서애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었지만 역시 동방5현, 동국18현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만대루는 200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다.
  병산서원의 으뜸은 단연 만대루(晩對樓)다. 우리 누각 중 멋지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만대루는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에서 따왔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라는 뜻이다.
 
  유네스코 등재 신청 목록에 포함된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 일두 정여창의 남계서원, 사계 김장생의 돈암서원도 품격 있기로 유명한 서원이다. 하지만 의문도 있다. 일례로 신라 말기 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治遠·857~?)의 무성서원이 특히 그렇다. 최치원의 서원은 나머지 8개 서원과 비교하면 시설이 이질적이며 전라북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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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onard    (2019-08-12) 찬성 : 0   반대 : 0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를 믿어온 나라임. 일제(일본) 강점기때문에, 왜곡되었지만, 해방후 다시 유교국가로 복귀된 나라임. 하느님 모르는 패전국 불교원숭이 일본의 종교정책으로 오도된것일뿐임.

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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