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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4〉

바다에 던져진 중천왕의 애첩 ‘장발미녀’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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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연나부, 명림답부가 차대왕 시해한 이후 대대로 왕비 배출하며 권력 장악
⊙ 권좌에서 밀려난 관나부, 주통촌 미녀가 산상왕의 왕자 낳은 것 계기로 권토중래 시도
⊙ ‘장발미녀’ 관나부인, 연나부 출신 왕후가 가죽부대에 자기를 넣어 바다에 던지려 한다고 참소하다가 죽임당해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장천 1호분 벽화 속에 있는 고구려 귀부인의 외출 모습.
  역사 이래로 왕의 외척(外戚) 세력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딸을 궁궐에 왕후로 들여보낼 수 있을지를 놓고 자주 암투를 벌였다. 그것이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을 강하게 만들어 국가 기강이 약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외척 세력의 득세를 사전에 막기 위해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를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세종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으면서도 이방원은 사돈인 심온(세종의 장인)까지 죽여서 외척 세력의 등장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척 세력이 득세하여 당파(黨派)싸움으로 비화하는 사례가 적잖았다.
 
 
  연나부의 득세
 
  삼국시대에도 왕의 외척 세력은 늘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5부(部) 중 왕후를 배출하는 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나라 정치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곤 했다. 고구려 역사에서 왕권이 가장 허약한 시기는 연나부(椽那部) 조의(皁衣) 명림답부(明臨答夫)가 7대 차대왕(次大王)을 척살하고 8대 신대왕(新大王)을 왕위에 앉힌 이후 14대 미천왕(美川王)이 등극하기 이전까지라고 볼 수 있다.
 
  신대왕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99세의 혁명가 명림답부의 공을 높이 사서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연나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신대왕의 아들 남무(南武)가 태자에 책봉되고 나서, 태자비 간택 때 연나부 우소(于素)의 딸을 추천한 것도 국상 명림답부였을 것이다.
 
  신대왕이 죽고 태자 남무가 왕위에 올라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 되자, 왕비는 자연스럽게 우씨 왕후가 되었다. 고국천왕이 죽고 나서도 우씨는 10대 산상왕(山上王)의 왕후가 되어 두 번씩 왕후 자리를 차지했다.
 
  산상왕 사후(死後) 소후(小后)에게서 낳은 왕자가 왕위에 올라 11대 동천왕(東川王)이 되었다. 역사 기록에 왕후의 출신이나 성씨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동천왕이 친모(親母)를 놔두고 우씨 왕후를 왕태후로 삼았을 정도이니, 그 세도는 대단했고, 그렇다면 우씨 왕태후가 자신과 같은 연나부 출신의 여인을 동천왕의 왕후로 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천왕이 죽고 나서 태자 연불(然弗)이 왕위를 이어 12대 중천왕(中川王)이 되었다. 왕후는 연씨(椽氏)인데, 성씨로 봐서 연나부 출신임이 틀림없다. 당시 연나부의 대표 성씨는 우씨·명림씨·연씨 등이었기 때문이다.
 
 
  장발미녀 관나부인
 
  중천왕은 국상으로 역시 연나부 출신의 명림어수(明臨於漱)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당시 연나부 세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중천왕의 장자(長子)는 관나(貫那)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왕이 되기 이전부터 관나부인을 만나 아들을 낳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녀는 왕후가 되지 못했다. 연나부의 힘이 강했으므로, 왕후 자리를 연씨에게 빼앗긴 것이다. 관나부인은 장자를 낳았지만 역사 기록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왕후 연씨가 낳은 왕자들의 이름 약로(藥盧)·달가(達賈)·일우(逸友)·소발(素勃) 등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연나부 연씨 왕후에게 밀려난 관나부인 역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그저 ‘장발미녀’로 알려져 있다. 장발미녀는 연나부와 관나부의 세력 다툼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비련(悲戀)의 주인공이다.
 
  중천왕 즉위년에 왕제(王弟)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잠재운 것은 연씨 왕후와 국상을 중심으로 한 연나부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국상 명림어수는 중천왕 재위 3년에 중외(中外)의 병마사(兵馬事)를 겸임하여 병권(兵權)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이처럼 국상이 병권까지 장악했다는 것은 신권이 왕권보다 강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 ‘관나부인 질투 사건’이다. 당시 중천왕은 관나부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을 애첩(愛妾)으로 가까이 두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길이가 9자나 되는 장발인 데다 미모까지 출중한 자태에 반하여 장차 소후로 삼으려 하였다.
 
  중천왕은 연나부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왕후 연씨와 정략결혼을 한 셈이기 때문에, 정작 사랑하는 마음은 왕후보다 관나부인에게로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후 연씨는 왕의 은총을 관나부인이 독차지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이렇게 고하였다.
 
  “제가 들으니 지금 위(魏)나라에서는 천금을 주고 장발(長髮)을 구한다 하옵니다. 전일에 선대왕(東川王)이 위나라에 예의를 갖추지 않은 관계로 마침내 위나라 군대에 화를 입어 사직을 거의 잃을 뻔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위나라에 장발미녀를 바친다면 더 이상의 외침은 없을 것입니다.”
 
  왕후가 말하는 장발미녀는 곧 관나부인을 뜻하였으며, 위나라의 침입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을 점령했던 일을 말한다. 그러나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왕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관나부인의 참소
 
  한편 관나부인은 왕후가 자신을 모함하여 위나라로 보내려고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는 왕후를 계속 놔두었다가는 자신에게 큰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중천왕에게 달려가 참소하였다.
 
  “왕후께서는 저를 만나기만 하면 ‘시골 계집 주제에 언감생심 궁궐에 머물 생각을 하느냐? 다시 네가 살던 시골로 돌아가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곤 합니다. 만약 대왕이 멀리 출타하게 되면 왕후가 저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중천왕은 왕후에게 했던 것처럼 관나부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버렸다. 관나부인의 질투쯤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중천왕은 왕후보다 관나부인을 더 사랑했다. 그러나 연나부 세력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고 있는 왕후가 두려워 그저 모른 척 지나가려 한 것이다.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사랑한 관나부인은 부왕 동천왕의 모친인 주통촌(酒桶村)의 여인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통촌의 여인이 바로 관나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연나부 출신의 우씨 왕후 덕분에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형수를 자신의 왕후로 삼을 만큼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씨 왕후의 배경인 연나부 세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과의 사이에도 자식이 없었고, 산상왕과 잠자리를 같이하고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석녀(石女)였을 가능성이 크다.
 
 
  주통촌 여인
 
  어느 날, 산상왕이 천제를 지낼 때 교시(郊豕・祭天用 돼지)가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에 대하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4 산상왕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년 11월에 교시가 놓여 달아났다. (교시 책임을) 맡은 관리가 그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돼지가) 이리저리 달아나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이 20세쯤 된 여자 한 사람이 곱고 어여쁜 얼굴로 웃으며 앞질러가 잡으니 쫓아가던 자가 (비로소 교시를) 얻게 되었다. 왕이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 여자를 보려고 미행(微行)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시인(侍人)을 시켜 달래보게(수청을 들게) 하였다.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불러보고 가까이하려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을 감히 어길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우씨 왕후는 어디선가 산상왕과 주통촌의 여인이 사통(私通)한 이야기를 들었고, 수하에 부리는 졸개를 보내 그 여인을 죽이려고 했다. 그 소식을 접하자 주통촌의 여인은 남복(男服)을 한 채 몰래 도망치다 결국 붙잡혔다. 이때 여인이 우씨 왕후가 보낸 졸개를 향해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너희가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 함은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나의 배 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실로 왕의 유체(遺體)이다. 내 몸을 해치는 것은 가하거니와 배 속에 왕자까지 또한 죽이려 한다면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졸개는 감히 주통촌 여자에게 덤벼들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가 우씨 왕후에게 고하니, 왕자 아기씨를 잉태했다는 말에는 그녀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했다.
 
  마침내 열 달을 채워 주통촌의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 그 소문이 산상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매우 기뻐하여 말했다.
 
  “이는 하늘이 나에게 사자(嗣子)를 주신 것이다.”
 
  산상왕이 말한 ‘사자’란 왕위를 이을 자식을 뜻하는데, ‘교시’가 달아난 곳인 주통촌 여인에게서 아들을 얻었다고 하여 이름을 ‘교체(郊彘)’라고 지었다. 교(郊) 다음에 붙은 ‘시(豕)’와 ‘체(彘)’는 모두 한자어로 ‘돼지’란 뜻이다. 어렵게 얻은 아들의 이름에 ‘돼지 체’ 자를 붙인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왕은 아무래도 눈엣가시 같은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이 두려운 나머지 일부러 그렇게 촌부(村婦)의 아들이라고 출신을 깎아내려 이름을 촌스럽게 지어 불렀는지도 모른다.
 
 
  권토중래 시도한 관나부
 
  산상왕이 아들을 얻자 우씨 왕후도 다음 왕위를 이을 자식의 필요성을 깊게 인식하고, 주통촌 여인과 교체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주통촌의 여인은 ‘소후(小后)’라 불리게 되었으며, 교체는 다섯 살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 주통촌의 여인이 바로 관나부 출신이다. 관나부는 ‘관노부’로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 중 가장 빠른 것이 태조대왕조에 보인다. 태조대왕이 관나부 패자(沛者・고구려 때 왕을 보좌하는 재상급 벼슬)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해 그 왕을 포로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또한 관나부의 우태 미유(彌儒)가 차대왕의 왕위 계승을 도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패자가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미유는 차대왕 시절 좌보(左輔)로 격상되었으며,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죽임으로써 확고부동한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다.
 
  그러나 차대왕은 폭정을 일삼다가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에게 척살당했고, 아마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관나부도 정치적으로 권력의 전면에서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태조대왕과 차대왕 시절 권력을 누리던 관나부가 명림답부를 대표로 하는 연나부 세력에게 축출을 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상왕의 소후가 살던 주통촌은 아마도 관나부 세력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관나부 세력은 산상왕의 소후가 낳은 아들 교체가 태자로 봉해지자, 야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산상왕이 죽고 나서 태자 교체가 왕위를 이어 동천왕이 되었을 때까지도 연나부의 세력은 우씨 왕후가 왕태후에 오를 만큼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씨 왕태후가 죽자 관나부에서는 동천왕의 모후(주통촌 여인)를 통해 천하절색의 미녀를 궁궐로 들여보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중천왕의 애첩인 ‘장발미녀’일 가능성이 크다.
 
 
  바다에 던져진 관나부인
 
  중천왕은 태자 시절에 모후를 통해 장발미녀를 소개받았을 것이고,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잠자리를 같이하여 아들을 낳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천왕이 죽고 나서 왕위에 오른 중천왕은 자신의 아들을 낳은 장발미녀를 왕후로 삼을 수 없었다.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한 연나부가 자신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연씨 왕후를 들어앉혔기 때문이다.
 
  사실 중천왕은 연씨 왕후보다 먼저 장자를 낳은 장발미녀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연씨 왕후의 배경인 연나부 세력이 무서워 그저 눈치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삼국사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그와 같은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왕이 기구(箕丘)에 전렵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관나부인이 가죽 부대(革囊)를 가지고 나와 맞으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하기를 “왕후가 나를 여기에 집어넣어 바다에 버리려고 하니 대왕께서 나에게 미명(微命・가는 목숨)을 내리어 집에 돌아가게 하여 주시면 언감히 더 좌우(左右)에서 모시기를 바라겠나이까?” 하였다. 왕이 그 거짓임을 들어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말)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는구나” 하고 사람을 시켜 바다에 던졌다.〉
 
  결국 비련의 여인으로 끝난 장발미녀의 죽음은 관나부와 연나부의 세력 갈등을 표면화해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왕후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한 연나부와 몰락한 귀족인 관나부 간의 세력 다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중천왕은 태자 시절부터 애첩이던 장발미녀를 바다에 던져버리게 했을까? 이는 연씨 왕후의 배후 세력인 연나부가 조작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정말 연나부가 두려워 중천왕은 애첩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실권(實權)을 장악한 연나부의 권력 앞에서 중천왕과 장발미녀는 두 사람 다 희생양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천왕 시절 연씨 왕후와 관나부인의 애정싸움은, 고구려 2대 유리왕 시절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사이에 벌어진 치기 어린 다툼과 흡사한 점이 있다. 화희의 배후에는 권력을 가진 세력이 있었고, 치희는 한(漢)나라 변경의 여인으로서 힘이 없어 결국 자기 고향으로 쫓겨났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유리왕은 변경의 고향으로 돌아간 치희를 찾아가 다시 궁궐로 가자고 하소연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자, 자신의 심정을 ‘황조가(黃鳥歌)’로 지어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권력을 배후에 두고 있는 화희를 나무라지 못했다.
 
  중천왕의 경우 유리왕보다 심했다. 유리왕은 ‘황조가’를 지어 불렀지만, 중천왕은 투기를 하여 거짓말을 고한다며 애첩을 바다에 던져버리게 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표면적으로 연씨 왕후와 관나부인의 암투관계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연나부와 관나부 사이에 세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관나부인이 바다에 던져졌다는 것은 관나부가 연나부의 힘에 밀려 권력 전면에서 퇴출(退出)당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권력다툼의 희생양
 
  그렇다면 중천왕 시대에도 연나부 세력이 너무 강하여 왕이 함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왕후를 중심으로 한 연나부 세력이 무서워 사랑하는 관나부인을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한 허약한 왕의 모습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천왕 7년에 국상 명림어수가 죽고 나자, 왕은 비류나부의 패자 음우(陰友)를 국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재위 9년에는 연나부 명림홀도(明臨笏覩)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그 사위를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부마도위는 임금의 사위에게 주는 벼슬인데, 비류나부에서 국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를 명림홀도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만큼 연나부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중천왕이 죽고 나서 연씨 왕후의 아들 약로가 왕위에 올라 서천왕이 되었다. 중천왕의 장남인 관나부인의 아들을 제치고 차남인 연씨 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서천왕 역시 연나부 출신인 서부 대사자 우수(于潄)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천왕 시절 연나부의 권력이 얼마만큼 강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므로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관나부인을 죽인 것은 연씨 왕후의 배후로 있는 연나부 세력이지 중천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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