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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5〉 프랑스 현대시의 異端兒 랭보와 샤를빌과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바람 구두 신은 사내’라는 별명의 랭보의 짧은 삶, 그 자체가 他者로 변신하는 과정이었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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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샤를빌 뫼즈 강변엔 그의 생가와 물방앗간을 개조한 박물관과 그가 다녔던 샤를빌 콜라주 모여 있어
⊙ 조숙한 천재로 8세 때 라틴어 시 발표, 15세 때 콩쿠르 아카데미크 賞 수상
⊙ 부모의 이혼–보불전쟁 발발로 모범생에서 불량소년처럼 변해… 1870년부터 가출 시작, 방랑자의 길로 들어서
⊙ 랭보에게 시 쓰기란 남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고 현실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행위… 이런 그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기독교 등은 조소의 대상으로 보였다
⊙ 프랑스는 형편없는 나라였지만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스테판 말라르메 같은 시인이 있기에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었다
⊙ 그중에서 가장 흠모한 이는 낭만주의에서 시작했으나 그 부조리를 깨닫고 뛰쳐나온 보들레르… 그를 보며 랭보 역시 기꺼이 타락에 빠져들었다
⊙ 시인 베를렌과 동성연애 끝, 성격 안 맞은 베를렌이 권총으로 랭보 쏘면서 결별… 그때 만든 것이 유일한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평생을 ‘나비’처럼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팔랑거리며 다닌 삶 37년 만에 끝나
랭보의 생가부터 동쪽으로 이어지는 샹파뉴의 와인 밭은 끝없이 이어져 탄성을 자아낸다.
  프랑스에 갈 때마다 정말 복(福) 받은 땅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유럽 한복판의 광활한 대지는 대부분 평야다. 농축산물 자급자족에 알맞다. 기묘한 산지(山地)는 꼭 필요한 곳에 보석(寶石)처럼 박혀 있다.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 ‘국립공원’ 팻말을 보면 무조건 들렀는데, 실망을 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영국과 도버해협을 마주 보고 있는 칼레부터 남쪽으로 펼쳐진 ‘코트 알바트르’는 지중해와 닿아 있는 ‘코트 다쥐르’ 못지않은 절경(絶景)이다. ‘해안’이라는 뜻의 ‘코트’와 ‘흰 대리석’이라는 뜻의 ‘알바트르’가 결합한 이곳이 관광지화된 것은 불과 20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살아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정가운데 있는 리옹에서 남쪽으로는 프로방스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햇살과 달리 강렬하기 짝이 없는 광선(光線) 위 하늘은 ‘파랑’이라는 색이 원래 저런 것이었나 싶을 만큼 파랗다. 그 프로방스 여기저기에는 유명 작가들의 터전과 그들이 만든 작품의 무대가 숨어 있다.
 
  프랑스에서 덜 알려진 곳이 우리가 알폰소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알자스 로렌이다. 180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주민 국적(國籍)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 그만큼 복잡한 역사다. 그런 눈으로 보면 국경(國境) 도시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가 짙다.
 
랭스 대성당은 역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다.
  그런데도 랭스(Reims)를 찾은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랭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랭스 대성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성당은 496년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가 대주교 생 레미에게, 이후 샤를 10세까지 프랑스 왕의 대관식(戴冠式)이 열린 장소다. 덤으로 내부에서 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다.
 
  이 일대가 바로 ‘샹파뉴아르덴’인데, 랭스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승용차로 1시간20분쯤 달리면 샤를빌이 나타난다. 이 작은 마을이 고백건대, 랭스로 갔던 진짜 이유다. 샤를빌, 지금은 ‘샤를빌메지에르’로 지명이 바뀐 이곳이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詩人)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랭보 박물관에 걸린 랭보의 초상화다.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1854~1891)를 평론가들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하고 특이한 시인”이라고 평한다. 먼저 마을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뫼즈 강변으로 가본다. 거기 랭보의 생가(生家)가 있다. 평범한 주택가 한쪽이어서 눈여겨 표지를 살펴봐야 한다.
 
  맞은편에 ‘랭보 박물관’이 있다. 물방앗간을 개조한 박물관의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두툼한 외벽이 나온다. 난간에 서서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노라면 어릴 적 미소년이었던 랭보가 습작 시를 써서 훗날 자신의 동성(同性) 연인이 되었다가 비극적으로 결별한 베를렌이 있는 파리로 보내는 장면이 연상된다.
 
  랭보 박물관에는 잘 알려진 ‘모음(母音)들’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모음인 A, E, I, O, U를 절묘하게 짜 맞춘 시를 보면 시인 이상(李箱)이 생각난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 랭보가 아닐까 싶어 검색해 봤으나 딱 부러진 팩트는 없었다.
 
  모음들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 E, 기선과 천막의 순백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김현 옮김)

 
랭보의 생가와 박물관을 가기 전에 나오는 샤를빌 콜라주는 랭보가 다닌 학교다. 그 앞에 불량기 어린 랭보의 동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시내 쪽에서 랭보 생가와 랭보 박물관으로 가기 전에 등장하는 학교 앞에는 랭보의 흉상이 있었다. 랭보가 다녔던 샤를빌 콜라주다. 원래 착실한 모범생이었다가 갑자기 불량소년이 됐다는 랭보의 흉상마저 뫼즈 강변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부조리한 세상을 비웃는 것 같은 불량기 넘치는 모습이라 흥미롭다.
 
  랭보는 1854년 군인인 아버지 프레데리크 랭보와 시골 출신의 어머니 비탈리 퀴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잦은 전쟁 때문에 거의 집을 떠나 있었는데 어머니와 성격도 안 맞아 별거(別居) 상태였다. 자연히 네 아이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졌으니 홀어머니의 성격이 어떠했을지 짐작 간다.
 
  어릴 적 랭보는 공부도 잘하고 8세 때 라틴어로 시를 쓸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첫 작품이 1869년 써 1870년 발표해 콩쿠르 아카데미크에서 상(賞)을 받은 프랑스어 첫 시 ‘고아들의 생일 선물’이다. 순조롭게 성장하는 듯한 랭보의 일생에 이상(異常)이 감지된 것은 그가 열여섯 살 된 1870년 전후다.
 
  그때 그의 낭중지추 같은 재능을 보여주는 시가 ‘감각’이다. 16세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감상해 본다.
 
  감각
  여름 푸른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 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김현 옮김)

 
랭보 박물관은 강 옆에 있던 물방앗간을 개조한 것이다.
  먼저 랭보의 시가 잡지에 게재돼 상을 받던 해,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다. 보불(普佛)전쟁이다. 랭보의 관심은 전쟁에 집중됐다. 랭보는 나폴레옹 3세와 그 숭배자들을 ‘단순 무식한 민족주의자들’이라며 혐오했고 그들의 전쟁 선동에 분노했다. 그 분노를 드러내는 길이 곧 시 쓰기였다.
 
  1870년 5월 24일 랭보는 첫 번째 가출을 한다. 석 달 뒤인 8월 31일 그를 찾아 집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샤를빌 콜라주의 교사 조르주 이장바르다. 랭보는 집에 온 지 열흘 뒤인 10월 7일 2차 가출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걸어서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두에까지 간다. 그 길에서 랭보는 시작(詩作)을 했다.
 
  ‘간교한 여자’ ‘나의 방랑시절’ 등이 그것이다. 소년 랭보의 허름한 행색은 길에서 검문하던 헌병의 눈에 띄었고 헌병의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달려갔다. ‘모범생’ 랭보는 왜 이렇게 변한 걸까. 평론가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차가운 성격과 기독교적 엄격함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때 쓴 시 가운데 하나가 ‘나의 방황-환상’이다.
 
  나의 방황-환상
  나는 떠났다. 터진 포켓에 주먹을 찔러넣고
  내 오버코트 역시 아주 꼭 맞는구나.
  나는 하늘 아래서 걸었다. 시신이여 나는 그대의 친구가 되리라.
  오! 라! 라! 얼마나 황홀한 사랑을 나는 꿈꾸었는가, 내가 지닌 단 한 벌의 짧은 바지에는 큰 구멍이 나고
  작은 꼬마 몽상가. 나는 길을 가며 음률의 씨를 뿌린다.
  내 잠자리는 하늘의 큰곰 성좌
  밤하늘의 내 별들은 다정하게 속삭인다. 나는 길가에 앉아 그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 아름다운 9월의 밤, 나는 이슬방울을 느낀다.
  활명수 같은 포도주가 내 이마에 샘같이 솟아나는 것을 환상적인 어두움 속에서 음률을 맞추며
  한 발을 내 가슴에 대고 리라를 켜듯 내 해어진 구두를 잡아당기면서(김현 옮김)

 
랭보 박물관.
  1870년은 가출 외에도 랭보에게 의미 있는 한 해였는데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이자 친구 이장바르를 만난 것이었다. 이장바르는 랭보에게 수사학(修辭學)을 가르쳤다. 그해 랭보는 유명 시인 방빌에게 시 세 편을 보내 등단(登壇)의 꿈을 꿨지만 성사되지 않았으니 이도 가출의 한 원인일 것이다.
 
  방빌은 당시 프랑스 ‘파르나스파(派)’의 중심 인물이었다. ‘파르나스’란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순수예술주의파를 말하는데 불문학자 김화영은 이를 ‘단순 소박하고 차디찬 기하학적 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871년 랭보는 세 번째 가출을 해 파리까지 갔다. 거기서 랭보는 보름을 머물렀다.
 
  파리에서 랭보는 “저는 말합니다. 견자(見者)여야 한다.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로 시작되는 저 유명한 편지를 1871년 5월 시인 폴 드메니에게 보냈다. 견자는 보는 자이니, 곧 예언자일 것이다. 미래로부터 온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그의 일이다. 무릇 예언자는 제 시대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랭보는 시 쓰기란 남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고 현실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행위라 생각했다. 이런 그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기독교 등은 조소의 대상으로 보였다. 랭보가 보기에 프랑스는 형편없는 나라였지만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탁월한 시인이 많았기에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었다.
 
  랭보는 위고, 샤를 보들레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등을 흠모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경도(傾倒)한 시인이 낭만주의에서 시작했으나 그 부조리를 깨닫고 뛰쳐나온 보들레르였다. 모호하고 신비롭게 절망과 죄와 욕망을 그려낸 보들레르를 보며 랭보 역시 고전적 형식에서 벗어나 타락에 자진해 빠졌다.
 
  스승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랭보는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저는 지금 최대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고 싶고, 또 견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략)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통이 극심합니다.”
 
  이 기간이 랭보에게 전환점이 됐다. 랭보는 파르나스 경향을 버리고 그의 독창적 문학 세계를 추구한다. 그는 당시 파리 문학계의 유명인사 폴 베를렌(1844~1896)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의 대표작 ‘취한 배’를 가지고 파리에서 그를 만난다.
 
  취한 배
  도도한 강물을 따라 내려갈 때, 나는
  예인(曳引)자들이 날 인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떠들썩한 인디언들이 그들을 깃발 기둥에 발가벗겨 묶은 뒤 과녁으로 삼아버렸다.
  플랑드르 밀이나 영국 목화를 나르는 나는 선구(船具)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예인자들과 동시에 그 야단법석이 끝나자, 나는 원하는 곳으로 강물 따라 흘러갔다.
  지난겨울, 물결의 성난 찰랑거림 속으로
  어린이의 두뇌보다 더 말 안 듣는 나
  나는 달려갔다! 하여 출범한 반도도 더 기승스러운 혼란을 겪지 않았다.
 
  폭풍우가 내 해상(海上)의 각성을 축복했다.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볍게 나는 춤추었다.
  조난자의 영원한 짐수레꾼이라 불리는 물결 위에서,
  열 밤 동안, 등대의 어리석은 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신 능금 같은 어린이의 살결보다 더 부드럽게
  푸른 바닷물이 내 전나무 선체를 꿰뚫고
  키와 닻을 흩뜨리면서, 나에게서
  푸른 술 자국과 토사물을 씻어냈다…(하략)(김현 옮김)

 
랭보가 살았던 거리는 평소에도 한산하다.
  이후로 유명한 두 사람 사이의 스캔들이 펼쳐지게 된다. 막 결혼해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었고 랭보보다 열 살이나 많았던 베를렌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벨기에를 쏘다니는가 하면 1872년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렇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했고 문학적 성향도 달라 자주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동성연애에서 미소년인 랭보가 ‘남자 역할’을, 대머리에 우락부락한 베를렌이 ‘여자 역할’을 맡았다고 하니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향 샤를빌로 돌아온 랭보는 1873년 그 유명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쓰면서 7월 7일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렌과 재회한다.
 
  사흘 뒤 베를렌이 랭보에게 권총을 쏘면서 베를렌은 감옥, 랭보는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랭보가 쓴 단 한 권의 책이자 그의 유일한 완성본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베를렌과의 ‘괴상한 부부’ 관계가 파탄을 맞은 1873년 여름 쓰여 그해 10월 브뤼셀의 인쇄소에서 출간됐다. 그때 그의 나이가 겨우 열아홉이었다.
 
  랭보에게 베를렌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지옥이었을까? 둘이 함께 경험한 쾌락과 혐오감, 도취와 불안은 떠날 수도 없지만 견딜 수도 없었던 지옥이었다. 그렇지만 랭보는 그 시간이 준 독(毒)을 그다운 방법으로 치료했다. 그는 시 안에서 지옥에 들어갔고, 고통과 황홀함을 겪은 뒤 지옥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예전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에게 맡겨졌다.
  나는 마침내 나의 정신 속에서 인간적 희망을 온통 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사형집행인들을 불러들여,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 개머리판을 물어뜯었다.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길게 쓰러졌다. 나는 범죄의 공기에 몸을 말렸다. 그러고는 광적으로 못된 곡예를 했다.
  그리하여 봄은 나에게 백치의 끔찍한 웃음을 일으켰다.
  그런데, 아주 최근에 하마터면 마지막 불협화음을 낼 뻔했을 때, 나는 옛 축제의 열쇠를 찾으려고 마음먹었다. 거기에서라면 아마 욕구가 다시 생겨날 것이다.
  자비가 그 열쇠이다. 이런 발상을 하다니, 나는 꿈꾸어 왔나 보다.
  ‘너는 언제까지나 하이에나이리라, 등등….’, 그토록 멋진 양귀비꽃으로 나에게 화관을 씌워준 악마가 소리 지른다. “나의 모든 욕구, 너의 이기심, 그리고 너의 큰 죄업들로 죽음을 얻어라.”
  아! 나는 그것들을 실컷 맞이했다. 하지만, 친애하는 사탄이여, 간청하노니, 눈동자에서 화를 거두시라! 하여 나는 뒤늦게 몇몇 하찮은 비열한 짓을 기다리면서, 글쟁이에게서 묘사하거나 훈계하는 역량의 부재를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내 악마에 들린 자의 수첩에서 이 흉측스러운 몇 장을 뜯어내 덧붙인다.
  (김현 옮김)

 
랭보 박물관 맞은편에 랭보의 생가가 있다. 생가 내부가 어두침침해 랭보의 우울이 여기서 생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도 랭보는 여전히 방랑한다. 연표로 정리해 본다.
 
  1874년 랭보는 1년간 런던에 머물며 《채색판화집》에 나온 시의 대부분을 썼다.
 
  1875년 랭보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교사로 짧게 일한다. 그해 5월 걸어서 이탈리아까지 가 밀라노에서 머문다. 그러곤 가을에 샤를빌로 귀향했다.
 
  1876년 랭보는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바타비아에서 버려져 프랑스로 돌아온다.
 
  1878년 랭보는 키프로스로 갔다가 홍해(紅海)의 모든 항구를 전전하며 일자리를 찾는다. 11월 예멘의 아덴에서 하라르로 가 1881년까지 장사와 탐험을 한다.
 
  1886년 시집 《채색판화집》이 발표된다.
 
  1891년 유럽 전역은 물론, 중동, 자바 등지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용병, 건축 감독 등으로 일하던 랭보는 마지막에 아프리카에서 무기 거래를 하며 상인으로 일하다 병이 나 프랑스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다시 예멘의 아덴에서 한 달여간 체류하다 마르세유 수태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베를렌이 지어준 랭보의 별명이 ‘바람 구두 신은 사내’다. 별명답게 랭보는 어릴 적부터 방랑자였다. 고향에서 틈만 나면 친구와 함께 산과 들을 쏘다녔고 가출을 일삼았으며 수시로 국경을 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시 세계도 운율 시에서 산문으로, 베르길리우스와 위고와 보들레르를 넘나들었다.
 
  랭보는 “‘나’란 하나의 타자(他者)입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실제로 랭보의 삶은 타자들로 변신하는 과정이었다.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랭보는 그 짧은 삶 동안 팔랑대며 일생을 쏘다녔다. 그것을 랭보는 시 ‘감각’의 한 구절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 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요절한 시인들은 대개 천재다. 랭보 역시 삶은 짧았지만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 천재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유년기로의 회복이다.
 
  ‐ 시인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완전한 그 자신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아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을 시험하고 음미해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영혼을 배우자마자, 그는 그의 영혼을 갈아 엎어서 경작해야 한다!
 
  ‐ 나는 시인은 투시자(견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그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투시해야 한다. 시인은 멀고 긴 세계를 통과하여 세계를 투시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하며, 모든 감각의 교란을 이성에 맞게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인은 모든 사랑의 고통, 광기까지도 그는 이성에 맞게 논리적인 감각으로 생각해야 한다.
 
  ‐ 시인은 그 스스로를 찾아야 한다. 그는 오직 본질만을 갖기 위해서, 그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독을 다 쏟아내야 한다. 모든 그의 신념을 필요로 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고통, 모든 그의 초인적인 지성, 시인은 위대한 인내로써 모든 평범한 범인 사이에 있어야 한다. 훌륭한 대죄인으로서, 위대하며 저주받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최고의 학자로서! 시인은 미지의 세계의 탐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시인은 현실의 불의 도둑이기 때문이다!
 
  ‐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헐뜯지 않는다.
 
  ‐ 오직 신성한 사랑만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열쇠를 수여한다.
 
  ‐ 나는 내가 지옥에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나는 내가 아닌 또 하나의 사람이다.
 
  ‐ 나는 모든 인간이 행복에 의해 파멸을 맞는 것을 보아왔다. 행동하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러나 소모성의 얼마간의 힘의 길은 원기 상실이다. 도덕에 의존하는 것은 지능이 낮음을 나타낸다.
 
  ‐ 인생은 모든 사람이 연기해야 할 익살 광대극이다.
 
  ‐ 도덕에 의존하는 것은 지성의 수준이 낮음을 나타낸다.
 
  ‐ 불운은 나의 신(神)이었다.
 
  ‐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왕이다, 인간이 신이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이란 사랑을 말한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실된 삶이 다른 장소에 있다니. 이 세계 말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랭보가 다닌 학교의 정문에도 랭보의 얼굴이 걸려 있다. 후배들이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랭보의 고향을 뒤로한 채 독일과의 접경과 나란히 동진(東進)했다. 샤를빌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푸른 포도밭이 사방에 보였다. 저 유명한 샹파뉴의 대(大) 와이너리다. 화이트 와인과 로제 와인의 주산지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라는 듯 포도밭 연도에는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와이너리가 이어졌다.
 
  목이 마르면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고 새파란 포도 몇 송이를 먹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CCTV로 지켜보고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장대한 풍광 앞에서 프랑스 북부가 다른 곳만 못하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보는 것이 짧으면 생각도 짧다. 랭보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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