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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8〉 노련한 외교술로 對日교역권 확보한 약스 스벡스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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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明과 펑후다오(澎湖島) 전쟁 치른 후 타이완 점령, 식민지 건설
⊙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 타이완 무역 利權 놓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와 충돌
⊙ VOC의 타이완 총독 약스 스벡스, 물의 빚은 네덜란드인 身柄 인도… 도쿠가와 막부의 체면 살려주면서 분쟁 해결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타이완을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을 해결한 VOC의 바타비아 총독 약스 스벡스.
  17세기에 들어서자 대항해 시대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해양진출의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영국은 포르투갈·스페인의 해양로(sea-lane) 패권(覇權)에 거세게 도전했다. 가톨릭 교권(敎權)이 설정한 전통의 기득권(旣得權)은 의미를 상실했다. 이는 권위가 아니라 기술·자본의 우위가 해외 진출을 좌우하는 경쟁 본위 시대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의미했다.
 
  가장 먼저 도전장을 던진 것은 네덜란드였다.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해양로 구축 사정을 파악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향신료 제도(Maluku Islands)를 직접 노렸다. 기존 최대 상품이었던 후추는 독점 붕괴에 따른 공급 증가로 수익성이 폭락하고 있었다. VOC는 수익성이 높은 육두구(nutmeg)·클로브(clove) 확보를 위해 향신료 제도의 암본(Ambon)에 상륙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거점을 확보한다.
 
  암본 사건 이후 VOC와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안의 모잠비크에서 시작하여 동인도·말라카·마카오에 이르기까지 인도 에스타도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동아시아 해양 패권을 건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돌입한다. 포르투갈은 전략적 거점과 천혜의 요새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오랜 독점의 함정에 빠져 군사 시설은 낙후되고 관리자들의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다. VOC는 1619년 자바 섬의 자야카르타(지금의 자카르타)를 점령한 후, 항만과 요새를 건설하여 아시아 공략 거점으로 조성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 바타비아(Batavia)로 명명하였고, 바타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Dutch East Indies)의 수도로 식민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국 진출
 
  VOC에 향신료 제도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네덜란드는 선행회사 시대부터 중국의 문을 두드렸으나, 포르투갈의 견제와 명(明) 조정의 거부감으로 교역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바타비아를 확보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VOC는 중국 진출 교두보 확보에 사활을 건다. VOC가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마카오였다. 마카오를 손에 넣기만 하면 포르투갈 축출과 대(對)중국 교역이라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1622년 6월, 바타비아 총독 쿤(Jan Pieterszoon Coen)의 지시로 13척의 함선에 분승한 1300여 명의 주력 부대가 마카오를 공략한다. 그러나 전력(戰力) 우위를 자만한 VOC 함대는 변변한 장비와 병력도 갖추지 못한 마카오 수비대의 유인 전술에 말려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동아시아 바다에서 유럽 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마카오 확보에 실패한 VOC에는 ‘플랜B’가 있었다. 남은 전력을 추스른 VOC 함대는 7월 푸젠(福建)성과 타이완(臺灣) 사이에 위치한 펑후다오(澎湖島, Pescadores)에 상륙하고는 펑후다오 조차와 통상 개시를 요구한다. 국방 차원에서 일부러 비워 놓은 섬을 무단 점령한 양이(洋夷)의 통상 요구에 응할 명이 아니었다. VOC의 펑후다오 점령을 심각한 위협으로 판단한 푸젠 순무 상주조(商周祚)가 VOC의 요구를 거절하고 즉각 펑후다오에서 퇴거할 것을 명하였지만, VOC는 오히려 요새의 방벽을 강화하고 수십 문의 대포를 설치하는 한편, 바타비아에서 보급품을 실어 나르면서 버티기 채비에 들어간다.
 
  VOC가 틈틈이 샤먼(夏門)을 비롯한 푸젠 해안에 무장선을 보내 중국 선박과 해안 마을을 약탈하면서 압박을 가하자 그 호전성(好戰性)에 놀란 상주조는 일단 대화를 시도한다. 1623년 2월 명은 VOC가 펑후다오를 떠난다면 (중국 영내가 아니라 제3의 장소에서라도) 통상을 허가할 의향이 있음을 전하고, VOC가 머무를 수 있는 대체지로 타이완을 제시하는 등 유화책에 나선다. 그때까지 중국 왕조들은 타이완을 중국의 영토로 인식한 적이 없었고 완전한 외지로 취급하였다.
 
  VOC는 그 전해에 타이완 남부를 답사한 후, 일본·중국 상선이 드나들어 항구를 독차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펑후다오를 우선적으로 점유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협상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가운데 VOC는 명을 약 올리듯 밀수와 약탈에 나서며 명을 압박했다. 주민 피해도 피해지만, VOC의 난동으로 푸젠-마닐라 간 해상 교역로가 막히고 주요 세입품(稅入品)인 스페인 은(銀) 반입에 지장이 초래되자 명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다. 6월의 태풍으로 요새의 방벽이 허물어지자 VOC는 해안 일대에서 중국 양민을 납치하여 방벽 보수 공사에 동원하고는 이들을 바타비아에 노예로 처분해 버린다.
 
 
  펑후다오 전쟁
 
  VOC의 만행이 베이징에 알려지면서 명 조정의 경각심이 고조된다. 명의 병부(兵部)는 푸젠 순무에 남거익(南居益)을 임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VOC를 중국 해안에서 몰아낼 것을 지시한다.
 
  11월 통상 교섭을 제의하는 척하면서 VOC 사절을 샤먼으로 불러들인 남거익은 이들의 상륙을 유인한 후, 사절단장 크리스티안 프랑스준(Christian Franszoon)을 포함 50여 명의 인신을 구속한다. 생포된 VOC 인원들은 모두 참수(斬首)되었고, 프랑스준은 베이징으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보복에 나선 VOC가 이듬해(1624년) 1월부터 해안 약탈을 재개하자 결전을 각오한 남거익은 2월 푸젠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150여 척의 군선(軍船)을 동원하여 전면적인 펑후다오 봉쇄에 돌입한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명의 군선들은 VOC 포대의 화망(火網)을 뚫지 못했고 함선과 요새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VOC는 명의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된다. 7월 이후 집요한 상륙 작전이 결국 성공하고 이로 인해 요새로 통하는 물길이 차단되는 한편, 8월 이후 명의 군세가 계속 보강되자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몰린 VOC는 패배를 인정하고 강화를 제의한다. VOC는 명이 제시한 조건에 따라 요새를 파괴한 후, 9월 펑후다오를 떠나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7개월 넘게 계속된 무력 대치는 명의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명 입장에서는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명군은 10배가 넘는 양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VOC의 신무기 화력에 큰 희생을 치르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펑후다오 해전은 성채만 한 VOC 함선에 조각배 같은 명 군선 수십 척이 달려들다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싸움이었고, 세상의 중심을 자부하던 명은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남거익은 조정에 올린 상계에서 “홍모인(紅毛人·서양인)의 배는 대단히 크고 그 함포는 10리 밖에서도 중국 군선을 한 방에 조각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이었다고 놀란 심정을 적고 있다.
 
  그러나 기술 문명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이때의 교훈은 중국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실패한다. 1840년 아편전쟁을 겪은 이홍장(李鴻章)은 이렇게 기록한다.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홍모 외적(영국)의 침입은 중국 3000년 역사에 전례 없는 일이다. 이토록 강력한 무력(武力)과 화력(火力)을 지닌 외적은 지난 1000년간 중국이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며, 이들은 중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펑후다오 전투 이후 200년의 세월이 무색한 뒤늦은 한탄이었다.
 
 
  열강의 각축장이 된 타이완
 
네덜란드는 대만에 무역거점으로 식민지 포르트 젤란디아를 건설했다.
  타이완으로 물러난 VOC는 자의반 타의반 ‘플랜C’로 전환한다. 포르투갈이 포르모사(Formosa)로 부르던 타이완은 사실 VOC가 특별히 마다할 이유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VOC는 즉각 타이완 남부(지금의 타이난[臺南]시)에 제일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를 구축하는 한편, 원주민(原住民)을 교화(敎化)시키고 본토의 한족(漢族)을 입식(入植)시키면서 정력적으로 동아시아 전진기지화 작업을 추진했다.
 
  VOC의 거점 구축은 타이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의 견제와 반발을 유발한다. 당시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공식 교전국이었고, VOC의 타이완 내 거점 확보는 마닐라-푸젠 무역로의 안전에 큰 위협이었다. 대응조치에 나선 필리핀(스페인령)은 1626년 타이완 북부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1629년에는 요새화된 거점(Spanish Formosa)을 구축한다. 지리적·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고(緣故)가 없는 두 외부 세력이 원주민의 의향과 관계없이 남과 북에 자리를 잡은 이때부터 타이완은 이미 열강(列强)의 각축장이었다.
 
  타이완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한 것은 일본(보다 정확히는 타이완을 무역 중계지로 활용하던 규슈[九州]의 영주와 상인들)이었다. VOC가 오기 전부터 일본의 밀무역선이나 주인선(朱印船)들은 타이완에서 명 상인들과 비공식 거래를 하거나 원주민들로부터 사슴뿔과 가죽을 구입하고 있었다. 명 상인들로부터 구입하는 생사(生絲)는 일본에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었고, 사슴뿔과 가죽 역시 사무라이 갑옷 제작에 쓰이는 소재로 값진 수입품이었다.
 
  1625년 타이오완 초대 감독관 마르텐 송크(Maarten Sonck)는 타이오완에 기항하는 일본·중국 무역선에 10%의 관세를 부과한다. 일본이 굴러온 돌의 일방적 조치에 반발하면서 사달이 벌어진다.
 
  1626년 타이완을 주무대로 삼고 있던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 휘하의) 주인선 선장 하마다 야효에(浜田彌兵衛)는 쇼군의 무역허가증인 주인장(朱印狀)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를 근거로 VOC의 관세 부과에 극력 저항한다. VOC가 물러서지 않고 야효에가 구입한 생사의 일부를 압수하자 양측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한다.
 
 
  타이오완 사건
 
하마다 야효에와 네덜란드인들의 충돌을 그린 에도시대의 판화.
  스에쓰구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592년 히데요시의 무역선 주인장 발부 당시 교토나 사카이 등지의 상인들에게도 무역선 1척만이 허용될 때 혼자 2척에 대한 주인장을 발급받을 정도로 규슈의 유력 해상(海商)이었다. 그만큼 타이완 무역 이권(利權)은 그에게 사활적(死活的) 이익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스에쓰구가 막부에 VOC의 횡포를 알리고 제재를 건의하자, 아직 국내 통치 기반이 완성되지 않은 막부는 대외(對外)무역 측면에서 VOC의 이용가치를 고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동아시아 바다에 밀어닥친 유럽 세력의 위협을 재차 실감한다. 1627년 VOC의 타이오완 감독관에 새로이 임명된 피테르 노위츠(Pieter Nuyts)가 외교사절 자격으로 일본을 찾는다. VOC는 무역 이권을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스에쓰구 세력을 누르고 쇼군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스에쓰구는 나름대로 복안이 있었다. 그는 이참에 타이완에서 VOC를 몰아내고 타이완을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고자 했다.
 
  스에쓰구는 노위츠가 도착한 지 얼마 뒤 야효에가 타이완에서 데려온 원주민을 사절로 위장해 타이완인들이 통치권을 쇼군에게 헌납하러 왔다는 명목으로 쇼군 알현을 신청한다. 이는 쇼군을 알현해 타이완 도항(渡航) 주인장이 발급되지 않도록 요청코자 하는 노위츠의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스에쓰구의 승리였다. 타이완 원주민들은 쇼군을 알현하고 하사품까지 받았으나, 노위츠는 에도 체재 중 오만한 태도로 일본인들의 반감을 샀고, 쇼군의 눈을 피해 스에쓰구와 결탁하여 주인선 무역 이권에 개입한 막신(幕臣)들의 획책으로 쇼군을 알현하지도 못한 채 굴욕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VOC의 사신이 쇼군을 알현하지 못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빈손으로 귀환한 노이츠는 곧바로 보복에 나선다. 1628년 초여름 타이오완에 입항한 야효에 일행의 상륙을 금지하는 한편, 선박을 억류하고 적재된 무기의 압수를 명한다. 야효에는 수차례에 걸친 출항 요구가 거절되자, 더 이상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 극단적 행동에 나선다. 야효에는 수하들과 함께 노이츠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상대의 방심을 틈타 노이츠와 통역을 인질로 잡고는 VOC 병력과 대치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진행된 협상 결과, 노이츠를 풀어주는 대신 상호 5명씩 인질을 교환해 선박에 승선시킨 후, 나가사키에 입항하면 인질을 석방키로 합의한다. 이때의 인질 사건을 일본에서는 ‘타이오완 사건’이라고 한다. 타이오완(Tayouan)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타이난시 안핑의 항구를 부르던 명칭이다.
 
 
  스에쓰구의 음모
 
  1628년 인질을 태운 야효에의 주인선과 란선(蘭船)이 무사히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타이오완 사건은 큰 탈 없이 종료되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야효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방어 차원에서 인질을 잡은 것이고 나가사키에 도착하면 인질을 풀어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이들을 맞은 스에쓰구는 인질을 석방하기는커녕 다른 VOC 선원들까지 잡아 옥에 가두고 그들이 타고 온 배를 억류하는 한편, 히라도(平戶) 번주를 설득하여 히라도에 개설된 VOC 상관(商館)을 폐쇄해 버린다. 네덜란드 자유상인의 개인 무역은 허용하면서도 VOC 선박·인원의 히라도 활동을 금지하는 VOC 제재 조치였다.
 
  사실 야효에의 선단에는 400명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뎃포(鐵砲·조총)가 적재되어 있었다. 기회를 보아 VOC를 공격하는 것이 당초 임무였으나, 그에 실패하고 인질을 잡아 돌아온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스에쓰구가 입항한 VOC 선박을 억류하고 선원을 구금한 것은 어쩌면 계획 변경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가사키와 히라도의 상황을 보고 받은 바타비아가 대일(對日) 교역 단절의 위기를 맞아 직접 나서면서 타이오완 사건은 전면적인 외교문제로 비화한다. 총독 쿤은 일단 불상사의 책임을 물어 노위츠를 바타비아로 소환하는 한편, 인질 구출 및 무역 재개를 위해 일본에 특사를 파견한다. 쿤은 특사 빌렘 얀센(Willem Janssen)에게 최대한 일본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절대 도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한편, 일본이 타이완의 영유권(領有權)과 무역 독점권을 주장할 경우 총독에게 보고하겠다는 정도로 대응하고 귀환할 것을 지시한다. VOC와 스에쓰구 중 누가 쇼군을 자기편으로 만드느냐의 싸움이었다.
 
  스에쓰구와 주인선 무역 이권에 개입한 막신들은 쇼군 주위에 인(人)의 장막을 쳤고, 이들의 방해로 얀센은 에도에 발을 들이지도 못한다. 기세가 오른 스에쓰구는 얀센에게 바타비아 총독 앞으로 보내는 문서 한 통을 건네면서 출국을 종용한다. 문서에는 타이오완 사태의 책임이 VOC에 있음을 추궁하는 한편, 제일란디아 요새를 일본에 할양(割讓)할 것을 요구하고, 그에 응할 경우 VOC의 일본 무역 독점 양허(讓許)를 고려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630년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바타비아에 귀환한 얀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총독 쿤의 사망 소식이었다.
 
 
  스벡스, 노위츠 身柄 인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벡스에게 내준 교역허가장.
  신임 총독인 약스 스벡스(Jacques Specx)는 1609년 처음 일본에 도착하여 히라도에 VOC 상관을 개설하고 초대 상관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에서 10년 넘게 체류한 일본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스벡스는 얀센이 지참한 서한의 내용이 쇼군의 정책 기조와 다른 것에 주목한다. 그는 쇼군이 다이묘(大名)나 상인의 무역 이권을 위해 외국과의 분쟁을 각오하고 해외 섬의 영유권 문제에 간여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막부의 통치력 강화 방침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스벡스는 자신이 경험한 일본 내 쇼군·막신·다이묘·상인 세력 간 역학(力學)관계에 비추어 그 의미를 간파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외교전에 나선다.
 
  1630년 초여름, 갈등의 당사자 스에쓰구가 돌연 에도로 압송되어 옥중(獄中)에서 변사(變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속설에 의하면 말년에 병환으로 정신이 이상해져 막부 중신들의 무역 이권 연루를 공공연히 떠들다가 입막음을 기도한 자들에 의해 제거된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의 죽음의 진실이 무엇이건, 막부 중신들의 은밀한 무역 이권 속사정을 꿰뚫고 있는 당사자가 사망하자 에도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스벡스의 명으로 다시 일본을 찾은 얀센도 이번에는 문제없이 에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632년 9월, 스벡스는 노위츠의 신병(身柄)을 일본에 인도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1627년 이래 양측 간에 빚어진 갈등을 VOC가 아니라 노위츠 개인의 불찰과 비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리하고, 그 책임을 물어 노위츠의 처분을 일본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쇼군이 이에 만족을 표하자, VOC 인질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히라도 VOC 상관 활동도 재개되었다. 나아가 막부는 1634년 모든 일본 선박의 타이완 도항(渡航)을 금지함으로써 타이완 무역을 둘러싼 VOC와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스벡스의 노련한 외교
 
  이러한 결과는 VOC가 바라던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유일한 양보라고 할 수 있는 노위츠의 신병 인도도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다지 양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노위츠는 타이오완 감독관 재직 중 불법 착복과 원주민 학대 등으로 바타비아에 구금되어 본국 송환과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일본에 인도된 그는 가택 연금(軟禁) 형식으로 머물렀으나, VOC가 부담하는 체재비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4년 뒤인 1636년 석방된다. 일본과 모종의 합의가 있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우였다. VOC는 바타비아로 돌아온 그를 파면하여 본국으로 귀국시켰으나, 노위츠에게 신분상의 불이익이 가해진 것도 없고, 노위츠가 일본 체류로 그다지 잃은 것도 없었다.
 
  이러한 해결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벡스의 외교술이다.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헤이조가 사망함으로써 이 문제가 더 이상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사회 특유의 명예의 문제가 된 것을 꿰뚫어 보았다. 쇼군의 입장에서는 규슈의 상인이건 벽안(碧眼)의 외국인이건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충성하고 이익을 안겨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대신 쇼군도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누구의 체면도 손상시키지 않고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로 보이지 않도록 명예로운 퇴로(graceful exit)를 만드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라면 관건이었다. 스벡스의 노위츠 인도 결정은 당사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과실은 덮음으로써 쇼군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묘안이었다. 이로써 VOC의 일본에서의 무역 이권은 재보장되었고 타이완 영유권도 평화적으로 확보되었다. 잘 훈련된 외교관 한 명이 1000명의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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