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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1〉 구차함이 없는 것[不苟]이 禮, 곧 事理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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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無禮]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공자)
⊙ 漢나라 초기의 朱建, 윗사람에게는 직언하고, 드러내지 않고 신세진 사람에게 은혜 갚아… 죽을 때까지 구차함 보이지 않아
⊙ 조선 성종 때 김여석, 임금과 주변 사람들에게 영합하고 자리를 구해 ‘恭繆’라는 시호 얻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공자는 정치의 요체로 ‘正名’을 강조했다.
  공자(孔子)가 명시적으로 구차함[苟]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자가 생각했던 구차함의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정명(正名)을 이야기하는 대화에서다.
 
  자로가 물었다.
 
  “위(衛)나라 군주가 스승님을 모셔서 정치에 참여시키려고 하니 스승님께서는 정치를 하시게 될 경우 무엇을 우선시하시렵니까?”
 
  공자는 말했다.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正名].”
 
  이에 자로가 말했다.
 
  “이러하시다니! 스승님의 우활(迂闊)하심이여!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정치를) 바로잡으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말했다.
 
  “한심하구나, 유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비워 두고서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고로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 구차히 함[所苟·소구]이 없을 뿐이다.”

 
 
  ‘구차스러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의 제자 子路.
  여기서 보듯이 정명(正名)이란 곧 그 말을 함에 있어 구차스러움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구차스러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공자가 말한 형벌의 문제가 우리에게 시사를 던져 준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그 답이 있다. 공자의 말이다.
 
  “백성을 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법망(法網)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백성을 빼어남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 감화될 것이다.”
 
  그렇다.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無恥]”가 바로 구차스러움이다. 반면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불구(不苟)다. 결국 공자는 구차스러움이 없는 말을 통해 구차스럽지 않은 백성을 길러내는 것이 곧 다움에 의한 정치[德政], 곧 인정(仁政)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태백(泰伯)편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無禮]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임금이 친족들에게 돈독히 하면 곧 백성들 사이에서 어진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또 (새로 등극한) 임금이 옛 친구, 즉 선왕의 옛 신하들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은 구차한 짓을 하지 않는다[不偸=不苟].”
 
  여기서 수고롭고 두렵고 문란해지고 강퍅해지는 것 등이 다 공손, 삼감, 용맹, 곧음이 사리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구차스러움이다. 이렇게 공자가 생각했던 비례(非禮) 혹은 무례(無禮)로서의 구차스러움을 이해할 때 우리는 역사 속 인물들의 행동을 좀 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은 朱建
 
  주건(朱建)은 초(楚)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그는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의 재상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뒤에 다시 포(布)를 섬겼다. 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할 때 건(建)에게 물으니 건은 그것에 반대했다. 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양보후(梁父侯)의 말을 듣고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한(漢)나라는 이미 경포를 죽이고 난 다음 건은 경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간언했다는 것을 듣고서 그를 죽이지 않았고 고조(高祖) 유방은 건에게 평원군(平原君)의 칭호를 내려주고 가족을 장안으로 옮겨 살게 했다.
 
  건은 사람됨이 말재주가 좋고 준엄하고 청렴하며 굳세고 곧아 그의 행실은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고 의리에 벗어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는 행실이 바르지 않았지만 여태후의 총애를 얻고 있었다. 실은 두 사람은 연인 관계였다. 심이기는 건(建)과 사귀고 싶어 했으나 건은 그를 기꺼이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건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집이 가난해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마침 상복과 장례도구를 빌리려 했다. 두 사람과 모두 친했던 육가(陸賈)라는 사람이 이에 벽양후를 찾아가 축하하며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소.”
 
  벽양후가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나에게 축하를 하시오?”
 
  육가가 말했다.
 
  “예전에 그대는 평원군과 사귀려 했지만 평원군이 의리를 지키느라 그대와 사귀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소. (그런데) 지금 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그대가 진실로 후하게 조문(弔問)한다면 그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오.”
 
  이에 벽양후는 조문을 가서 수의(壽衣)를 만드는 데 100금을 내니 열후(列侯)와 귀인들도 벽양후가 하는 것을 보고서 평원군을 찾아가 부의를 냈는데 모두 500금에 이르렀다.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벽양후를 헐뜯자 혜제(惠帝)가 크게 노해 옥리에게 넘겨 벽양후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태후는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 없었다. 벽양후와의 은밀한 관계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대부분 벽양후의 행실을 미워했기 때문에 끝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벽양후는 사태가 급박해지자 사람을 보내 건을 만나려고 했다. 건이 사양하며 말했다.
 
  “재판이 임박해 있어 감히 그대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은 따로 은밀하게 효혜(孝惠·효혜제=혜제)의 총신(寵臣) 굉적유(閎籍孺)를 찾아가 설득하며 말했다.
 
 
  事理를 아는 사람
 
  “당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런데 지금 벽양후가 태후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형리에게 넘겨졌고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중상(中傷)해서 그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소. 지금 벽양후가 죽음을 당한다면 일단은 태후께서 분노를 감추시겠지만 결국에는 역시 당신을 죽일 것이오. 그런데 어찌해 당신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 놓고 벽양후를 위해 제(帝)께 용서를 부탁하지 않는 것이오? 만일 제께서 당신의 청을 듣고 벽양후를 풀어 준다면 태후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제와 태후 두 분께서 모두 당신을 총애할 것이니 당신은 부귀가 더욱 늘어날 것이오.”
 
  모친상 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계책을 따라 제에게 진언하니 제는 과연 벽양후를 풀어 주었다. 벽양후는 감옥에 끌려갈 때 건을 만나려 했으나 건이 만나 주지 않자 자기를 배반한 것으로 여기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건이 계책을 성공시켜 나오게 해 주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여태후가 붕(崩)하자 대신들은 여러 여씨 일족을 죽였는데 벽양후는 여러 여씨들과 지극히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살되지 않았다. 계책을 세워 몸을 보전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다 평원군의 힘 덕분이었다.
 
  여후의 뒤를 이은 효문제 때 회남(淮南)의 여왕(厲王)이 벽양후를 죽였는데 이는 여러 여씨들과 당여(黨與)를 맺은 때문이었다. 효문제(孝文帝)는 벽양후의 빈객인 평원군이 그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옥리에게 평원군을 체포하게 해 그 죄를 다스리려고 했다. 옥리가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건은 자살하려고 했다. 이에 여러 아들들이 모두 말했다.
 
  “일을 아직 알 수 없는데 어찌해서 자살하려 하십니까?”
 
  건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재앙이 끊어져 화가 너희들 몸에까지 미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나는 건을 죽일 뜻이 없었다.”
 
  실제로 문제는 건의 자식들에게 벼슬을 내려주었다. 건의 구차스럽지 않은 처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건은 사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불명예 시호’ 恭繆
 
  김여석(金礪石)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승정원 도승지, 이조참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고 형조판서에 올랐다가 성종 24년(1493년)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외형적으로 보자면 이른바 출세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조정에서 시호를 내렸는데 공무(恭繆)였다. 공(恭)은 그렇다 쳐도 무(繆)는 그 자체로 대단히 부정적이다. 시호법에 따르면 ‘부지런히 지위를 구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이름과 실상이 다른 것을 무(繆)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의 49년 삶을 이 두 글자로 요약한 이유는 뭘까?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성종 22년(1491년) 2월 11일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김여석은 뜬금없이 성종에게 전문(箋文)을 올렸다. 전문이란 왕실에 길흉사(吉凶事)가 있을 때 위로 차원에서 올리는 글이다. 글의 일부다.
 
  천심(天心)은 인애(仁愛)하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조짐이 있으며, 성덕(聖德)이 환하게 밝아서 감응하는 것이 간격이 없습니다. 도리는 진실로 아래 위에서 나타나므로 이치는 아주 적은 것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위(位)를 지키는 것을 인(仁)이라 하니 상제(上帝)의 법칙에 순응하고 양의(兩儀·음과 양)에 참여해 만물을 양육했으며, 도리는 생성(生成)하는 데 흡족하므로 칠정(七政·해와 달과 다섯 행성)을 가지런히 해 농사짓는 절후를 잃지 않게 하셨으니 공로는 (천지의) 조화(造化)와 짝할 만합니다. 지난번 성문(星文·별자리)이 연속해서 견책을 보이므로 인사(人事)에 혹시라도 차질이 있는가 깊이 근심하시어 책임을 지고 자신을 나무라시는 것이 번번이 조서에 나타났으며,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해 깊은 연못가에 다다른 듯 얇은 얼음 위를 건너는 듯 조심하셨으며, 칙명(勅命)은 기틀을 생각했으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기를 정밀하게 했고 하늘에 순응하기를 성실로써 하되 모든 신하들이 수양하고 보필하도록 경계했으며, 종일토록 조심하시니 그 정성은 마음속에서 우러났으며 날로 임감(臨監)하여 여기에 계시니 재앙은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사람이 함께하는 것을 증험하였고, 조정과 민간에서 같이 기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글이 올라오자 성종은 처음에는 “경계하도록 진술한 뜻이 참으로 가상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즉각 김여석을 국문(鞠問)할 것을 청했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여석이 올린 전문(箋文)은 오로지 아첨하는 말만 늘어놓아 구차스럽게 성상의 뜻만 즐겁게 하고, 한마디도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民間)의 병 되고 고달픈 데 대해서 언급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망령된 말을 만약 가상하게 여기고 포상한다면 일식(日蝕) 월식(月蝕)과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더라도 중앙이나 지방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전문을 올려 하례(賀禮)할 것입니다. 그 실정을 추국해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성상(聖上)께서 아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환하게 알도록 하소서.
 
 
  “卒하자 門에 弔客이 없었다”
 
  이때도 성종은 김여석을 거들었다. 어느새 성종은 아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재상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재상들은 성종 편을 들었다. 그러나 그날 자 사관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여석은 과장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며 은혜 베풀기를 힘쓰고 정도(正道)를 어겨 가며 명예를 구하는 것을 날로 일삼았다. 그가 올린 전문은 하례(賀禮)하는 듯하기도 하고 경계하는 듯하기도 해 임금의 총명으로 하여금 자기 성명(姓名)을 기억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대간(臺諫)이 아첨을 바쳤다는 것으로 탄핵한 것이 당연하다.
 
  결국 성종이 귀 밝고 눈 밝은[聰明] 임금인지의 여부는 그후 김여석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따라 갈린다. 같은 해 12월 김여석은 대사헌에 오른다. 명백한 승진이다. 이 점에서 성종은 총명한 임금은 아니었다. 구차스러움이 통하는 세상은 분명 밝은 세상이 아니다. 김여석이 죽었을 때 사관의 평은 그래서 신랄하다.
 
  김여석은 젊어서부터 총혜(聰慧)해 사후(伺候·윗사람을 살펴 섬기기)를 잘하고 청탁하기를 좋아했으며, 세상의 명예를 곡진히 꾀해 승낙한 일의 시행을 지체하지 않았다. 일찍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었을 때에는 남의 뜻을 따르기를 힘써 얼른 들어주지 않는 일이 없었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칭찬했다. 드디어 재능이 있다는 이름이 있어 화요(華要)한 벼슬을 지내고 고현(高顯)한 지위에 갑자기 올랐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간사하고 아첨을 잘했으며, 임금의 뜻을 잘 헤아려 알아서 이리저리 잘 적응해 은우(恩遇)를 바랐다. 늘 서간을 쓰되 나는 듯이 붓을 휘둘러 잠시 사이에 수십 장을 써서 사리(私利)를 꾀했다. 남의 질병이나 상조(喪弔)를 당하면 반드시 다 친히 갔으므로 붙좇는 자가 많았다. 무릇 남에게 요구했다가 응하지 않으면 곧장 화를 냈다. 집이 대대로 가난하고 검소했으나 갑자기 부유(富裕)해졌다. 평소에는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으나 졸(卒)하자 문에 조객(弔客)이 없었다.
 
  구차함이 통하는 시대를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따라서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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