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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해상실크로드 기행

‘東아시아 지중해’ 黃海의 요충지

구름은 蓬萊山에 걸치고 神仙宮은 멀리에 있으니…

글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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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둥반도는 해상실크로드의 起點
⊙ 진시황, 成山頭에서 不死藥을 구하러 童男童女 3000명 보내
⊙ 赤山 법화원에서는 장보고의 동상, 펑라이 水城 古船박물관에서는 고려 난파선 2척을 만나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웨이하이 청산터우에 있는 진시황像. 서불(오른쪽)이 진시황과 이사(왼쪽)에게 삼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웨이하이(威海)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온다. 황해 바다를 건너는 것이 고작 한 시간이면 족하다는 것을 고대(古代)의 뱃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21세기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몽(中國夢)’ 실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를 위한 실천 방법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개척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는 육상과 해상을 아우르는 중국식 경제벨트의 구축을 의미한다. 한당제국(漢唐帝國) 시절의 번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21세기 신(新)실크로드의 중심에서 다시 한 번 세계를 호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중국이 ‘일대일로’ 중에서도 공을 들이는 것이 ‘일로(一路)’, 즉 바다다. 황해(黃海)와 중국해는 물론 인도양과 대서양을 관통하는 해양벨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 속에는 과거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다짐도 숨어 있다. 이는 19세기 이후의 역사를 통해 바다를 장악하지 못한 제국은 공고(鞏固)한 안녕(安寧)을 유지할 수 없음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21세기 신실크로드 시대를 열기 위해 경제력을 집중하고 있는 해상실크로드는 실크로드에 관심 있는 필자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다. 그래서 웨이하이부터 시작해서 중국의 해상실크로드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중국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漢 武帝가 封禪의식을 하는 모습(위)과 진시황의 순행행렬을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는데, 진시황 쪽이 인기가 높다.
  웨이하이는 산둥반도 북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다. 현재의 지명은 명(明)나라 때에 왜구(倭寇)를 방어하기 위하여 위소(衛所)를 설치한 데에서 비롯됐다. 이곳은 보하이(渤海)만과 랴오둥(遼東)반도를 마주 보는 요충지에 있다. 게다가 항구 앞에 류궁다오(劉公島)라는 천연의 방파제가 있어서 수심(水深)이 언제나 안정적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청(淸)나라 말기에는 베이양(北洋)함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호텔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류궁다오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호텔을 나서자마자 도로변 주위로 해무(海霧)가 짙어온다. 순간, 배를 탈 수 있을까 걱정이 몰려온다.
 
  “잠깐이면 건너가니까 배는 운행할 것”이라는 안내인의 장담이 무색하게 선착장은 짙은 해무로 지척에 있는 섬도 보이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간 뒤여서 그런가. 시작부터가 순조롭지 않으니 조바심이 발동한다. “한낮이 되면 안개도 사라질 테니 그땐 탈 수 있을 것”이라는 안내인의 말에 일정을 조정하여 청산터우(成山頭)로 향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청산터우가 보인다. 이곳 역시도 해무가 날린다.
 
  청산터우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희망봉’이라고도 한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자신의 영토를 순행하곤 했는데 이곳을 두 번 방문했다.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원했던 진시황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에 그 해답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방사(方士) 서불(徐市)이 황제의 믿음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진시황은 서불에게 삼신산에 가서 영약(靈藥)을 찾아올 것을 명했다. 서불은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함께 이곳에서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났다.
 
  해무 사이로 보이는 바닷속 절애(絶崖)에는 ‘천진두(天盡頭)’라 쓰여 있다. 중국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임을 알려준다. 푸른 파도가 절애를 부여잡고 만들어내는 흰 포말은 가히 진시황의 마음을 흔들기에 족했으리라. 이러한 비경(境)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조형물이 우뚝하다. 그 형상은 진시황과 이사(李斯)에게 신선이 사는 동쪽 바다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서불이다. 서불의 말에 푹 빠진 진시황과 솔깃하게 듣고 있는 이사의 모습이 2200년 전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흉노는 한나라를 괴롭힌 유목민족이었다. 한 무제(漢 武帝)는 철천지원수였던 흉노를 고비사막으로 내쫓고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를 뚫었다.
 
  한 무제도 천마(天馬)를 타고 날아오르는 신선이 되고 싶었다. 그 역시도 제일 먼저 해가 뜨는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었다. 광장에는 한 무제 일행이 제(祭)를 올리는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로 가득하다. 아래쪽 해변에는 진시황이 마차를 타고 오는 순례 행렬을 표현한 조형물이 놓여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진시황의 마차에만 관심이 많다. 저마다 기꺼이 돈을 내고 사진을 찍는다. 모두가 진시황이 되고픈 것일까.
 
 
  장보고의 자취 서린 법화원
 
법화원 경내에 있는 8m 높이의 장보고 상.
  흐린 하늘임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해무가 걷히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일정을 조정하여 츠산(赤山)에 있는 법화원(法華院)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도착한 법화원은 후덥지근한 비가 내린다. 법화원 입구에는 커다란 부조상이 웅장하다. 장보고(張保皐)의 모습을 중심으로 장군이자 무역상으로서의 그의 업적을 조각해 놓았다. 조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좌우에 대련(對聯)으로 처리했다.
 
  ‘적산포의 신(神)이 도와 온 세상에 복을 주고, 대사는 동아시아 삼국을 이어주며 교역했네.(明神福佑四海 大使締交三邦)’
 
츠산 법화원 입구. 안에는 장보고기념관도 있다.
  한갓진 법화원에 들어서니 빗속에 우뚝 선 장보고 장군상이 기다렸다는 듯 내려다본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한다.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천한 출신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익히 알고 있는 장보고의 영웅적 일대기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 때의 시인 두목(杜牧) 덕분이다. 그가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骨品)제도를 뚫고 각고의 노력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한 시대적 영웅 장보고에 대한 전기(傳記)를 썼다. 그는 장보고에 대하여 평하길, “사사로운 원한은 잊고 국가적인 우환에 목숨까지 바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고 반문했다. 두목이 쓴 전기는 《신당서(新唐書)》 동이전에 기록됐다. 이것을 고려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인용했다.
 
  전시관은 총 5개로 구성됐는데 장보고의 일생을 그림과 역사서, 유물 등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중국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외국인의 기념관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곳에 장보고기념관을 설치하도록 중국 정부가 허락한 것은 왜일까. 이곳 법화원이 고대 동아시아 해상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는 중국이 추진하는 해상실크로드와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해상실크로드는 고대로부터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던바, 츠산의 법화원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라방
 
츠산 법화원 입구의 장보고 부조상. 장보고의 업적을 浮彫와 對聯으로 표현해 놓았다.
  장보고가 활약한 9세기는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왕위쟁탈전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또한 재해와 기근으로 농민층은 피폐했고 도적 떼는 횡행했다. 백성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뿔뿔이 고향을 떠났다. 젊은 장보고도 이러한 시기에 살길을 찾아 당나라로 건너갔다. 철옹성 같은 골품제도 속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출세하기는 틀렸기 때문이었다. 반면, 당나라는 장보고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당나라는 이민족(異民族)의 무장(武將)을 번장(番將)으로 기용하는 개방적인 정치를 펼쳤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해안지대와 가까운 쉬저우(徐州)의 무령군(武寧軍)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중국 해적선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것을 보았다. 이에 분노한 장보고는 신라로 건너와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하고 해적의 소탕을 자청했다. 왕은 1만명의 사졸(士卒)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했다. 장보고는 완도의 청해진에 본부를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황해에서 자행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바다를 안정시키고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장보고 시대의 법화원 풍정을 묘사한 그림. 법화원은 在唐 신라인 네트워크의 중심지였다.
  이는 재당(在唐) 신라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당으로 들어온 신라인들은 대운하와 회하(淮河) 유역에서 염전과 운송사업 등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은 장보고 시대에 중국에 있었다. 그가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소금을 실은 선박이 3~5척씩 연결되어 수십 리를 끊이지 않고 가고 있다”면서, 신라인들은 운송과 교역의 중심지에 신라방(新羅坊)을 구성하고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인 자치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중 적산촌(赤山村)은 산둥반도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중심지였다. 장보고는 이곳에 법화원을 짓고 재당 신라인들의 네트워크 장소로 만들었다. 법화원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상주했고, 매년 500석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도 소유했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해마다 겨울이면 법화경 강회(講會)를 열어 신라인 사회의 결속을 다졌다. 이처럼 법화원은 장보고가 황해와 동중국해를 주름잡으며 해상무역의 왕자로 군림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 곳이다.
 
  해상왕국을 건설한 장보고는 신라 왕실에서 벌어진 왕권쟁탈전에도 개입했다. 하지만 골품제도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결국 장보고는 왕실과 귀족세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청해진과 해상왕국은 붕괴했다. 재당 신라인 사회와 일본을 연결하던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北洋함대가 괴멸한 류궁다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패배해 자결한 北洋함대 鄭世昌의 像.
  법화원 난간에 앉아 1200여 년 전, 풍운아적 삶을 살았던 장보고를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아려온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이 같은 영웅이 언제 또 등장할 것인가. 어느덧 햇살이 비추고 처마의 낙숫물이 잦아든다. 아침에 보지 못한 류궁다오로 돌아갈 시간이다.
 
  출항시각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부랴부랴 도착한 선착장은 아직도 해무가 뿌옇다. 매표소에도 줄을 선 사람들이 없다. 확인해 보니 오늘은 일기 불순으로 마감했다고 한다. 전화로 확인까지 하고 왔건만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류궁다오는 선착장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이곳에는 갑오전쟁박물관이 있는데, 바로 청일전쟁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운(國運)이 기울어져 갔다. 삼정(三政)의 폐단은 극에 달했고 열강들은 호시탐탐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때,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했다. 동학세력은 이내 진압됐고 조선은 청과 일본의 싸움터가 됐다.
 
  아산만 앞바다의 풍도(豊島)에서 시작된 양군의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청나라는 양무(洋務)운동을 거치면서 세계 유수의 해군력을 건설해 놓았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베이양함대는 만연한 부패와 축재로 인하여 허울뿐인 ‘최강 해군’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청의 해군은 연전연패(連戰連敗), 랴오둥 반도와 보하이만까지 내주었다. 베이양함대는 산둥반도 웨이하이에 전력(戰力)을 집결하고 최후의 결전을 치르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륙양면 공격을 받고 류궁다오에 갇힌 청군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류궁다오의 치욕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여, 정화(鄭和)함대의 기상처럼 온 바다를 누비며 ‘중국몽’을 이룩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좀처럼 속내를 밝히지 않는 중국인들의 품성을 닮았음인가. 류궁다오도 오늘따라 치욕의 현장을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일정을 마냥 지체할 수 없으니 류궁다오를 살펴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다음 여정을 위하여 옌타이(烟台)로 향했다.
 
 
  봉래각에서
 
蓬萊 水城. 海霧가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우리에게 고량주로 잘 알려진 옌타이는 포도주가 더 유명하다. 1600만 평에서 재배되는 포도는 이곳이 세계 7대 연해(沿海) 포도주 생산지 중 하나임을 알려주고도 남는다. 저녁 반주 삼아 펑라이(蓬萊) 포도주 맛을 보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던가. 포도주의 보관방법도 그렇고 가격에 비해 품질은 아직 수준 이하다.
 
  아침에 호텔을 나서니 어제의 해무는 모두 사라졌다. 기대를 안고 펑라이로 출발한다. 펑라이는 고대에 등주(登州)였다. 등주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산둥반도 최대의 항구였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보하이만을 따라 고구려와 발해를 갔고,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양만 당은포(唐恩浦)까지 이어진 항로는 신라의 왕성인 경주까지 가는 바닷길이었다.
 
  고대의 등주였던 펑라이는 옛날부터 영주(瀛州), 방장(方丈)과 함께 바닷속 삼신산이 있는 곳이라고 여겨왔다. 또한 여덟 명의 신선이 호리병을 타고 동쪽 바다로 건너갔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매년 봄이면 바다의 신기루가 펼쳐지는 까닭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생긴 것인데, 펑라이 수성(水城)의 비랑(碑廊)에는 이를 본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들이 가득하다.
 
  펑라이 수성은 바다와 붙은 단애(斷崖)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이다.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전설에 어울리게 맑은 날씨임에도 해무가 풀풀 날아오른다. 중국의 4대 명루(名樓) 중 하나인 봉래각에 오르니 해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수성은 신선의 세계로 가는 입구에 왔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중국 해안에서 발견된 고려 난파선
 
펑라이 수성의 古船박물관에 있는 봉래 3호선은 중국 해안에서 난파한 고려의 선박이다.
  수성에는 고선(古船)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고대의 바닷길과 이를 오가던 선박들, 그리고 교역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많은 전시물 중에서도 단연코 중요한 것은 이곳 갯벌에서 건져 올린 두 척의 난파선이다.
 
  봉래 3호와 4호로 명명된 이 난파선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배들이다. 고대 우리나라의 배는 중국의 배와는 달리 밑바닥을 몇 개의 넓은 판재를 이어서 만들었다. 이음매에 사용하는 못도 나무못을 사용했다. 펑라이 앞바다에서 발견된 배들 중 두 척은 이러한 공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그 배에서는 고려청자와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질그릇이 발견됐다.
 
  황해를 횡단하는 바닷길은 연안을 따라가는 항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속도로였다. 이러한 횡단항로의 개척은 항해술과 조선술(造船術)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황해 횡단항로는 삼국시대부터 개척됐고 한반도의 당은포와 중국 산둥의 등주를 오갔다. 이 항로는 중국과의 외교적 목적에 의해 개척됐지만 때로는 침공로가 되기도 했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 것도 이 길을 통해서였다.
 
  이 횡단항로는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널리 활용됐다. 흔히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남쪽 바닷길을 교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중시되어 왔던 등주는 고려시대에도 대(對)중국 외교와 무역에 있어서 변함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봉래 3, 4호선의 발견은 이러한 정황을 알려주는 귀한 단서인 것이다.
 
  펑라이 수성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덩저우박물관은 이곳의 역사와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한편에 정몽주(鄭夢周)의 흉상이 있다. 정몽주가 이곳 박물관에 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고려 말 신흥제국인 명나라는 원(元)나라와의 관계를 절연(絶緣)하지 못하고 있는 고려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때 정몽주는 7차례나 바닷길로 명나라를 오가며 노심초사한 끝에 마침내 양국 관계를 개선시켰다.
 
 
  달 밝은 망망대해에 나그네 옷깃만 서늘하구나
 
덩저우박물관에 있는 정몽주 흉상.
  이처럼 고대의 등주는 황해를 오가는 요충지로써 이용됐다. 하지만 청나라 이후부터 새롭게 발전한 옌타이에 밀려 오늘날의 펑라이는 전설 속의 신선을 만나는 장소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는 명나라 때 ‘봉래(蓬萊)’라고 이름을 고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구한 역사와 이름을 간직한 펑라이 수성을 떠나자니 왠지 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누른다. 630여 년 전의 정몽주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가 남긴 시구를 읊조리며 장쑤성(江蘇省)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구름은 봉래산에 걸치고 신선궁은 멀리에 있으니
  달 밝은 망망대해에 나그네 옷깃만 서늘하구나.
  백 년을 산다 한들 천지간 좁쌀 같은 몸인데
  공명 두 글자를 쫓다가 수염만 희었다네.
  어느 날에야 귀거래사 원 없이 불러볼까
  봉창엔 밤새도록 아린 마음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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