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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4〉 포르투갈 독점 시대의 종언을 고한 리프데호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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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 표착…,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 중용
⊙ ‘파란 눈의 사무라이’ 애덤스, 도쿠가와의 命으로 서양식 갤리온선 건조
⊙ 도쿠가와 이에야스, 國富 증진하려 스페인·멕시코와의 교역 시도했으나, 스페인의 거부로 무산
일본에 온 최초의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
  1600년 4월 서양의 배가 규슈의 분고(豊後·지금의 오이타[大分]현)에 표착한다. 이미 포르투갈 상선이 정기적으로 일본을 내왕하고 있었다. 서양 배의 표착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닌 시대였지만, 이 배의 일본 표착은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다네가시마에 발을 내디딘 것만큼이나 일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의미가 있다.
 
  배의 이름은 ‘리프데’(Liefde). 네덜란드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배는 네덜란드 회사 소속의 무역 개척선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을 내왕한 배들은 포르투갈 선박이었다. 토르데시아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동아시아 진출 및 교역권은 포르투갈만이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프데호의 일본 표착은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 독점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리프데호는 1598년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네덜란드를 떠났다. 출항 당시에는 총 5척으로 구성된 선단(船團)이었다. 이들은 서진(西進) 루트, 즉 남미(南美)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코스로 아시아에 도달하고자 했다. 리프데호를 제외한 다른 선박들은 2년이 넘는 항해 과정에서 악천후와 스페인 군함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고,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것은 리프데호뿐이었다.
 
 
  후추무역
 
  당시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스페인의 쇠퇴 기미가 뚜렷해졌고,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구교(舊敎)와 신교(新敎)의 갈등이 왕실 간의 이해관계와 얽히면서 유럽 전역을 혼란과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그러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1568년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와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무력 항쟁을 개시한 네덜란드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마침내 1581년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70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나서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스페인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스페인과 전쟁을 감행하여 이권을 챙기는 등 스페인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리며 유럽의 세력 판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조금 특별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상품은 아시아에서 수입되는 향신료, 그중에서도 후추였다. 암스테르담·로테르담 등지에 기반을 둔 네덜란드 상인들은 후추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1580년 스페인 왕실은 동군연합(同君聯合) 형태로 포르투갈을 병합하면서 포르투갈의 대아시아 교역 독점권을 접수하고는, 1585년 아시아 무역선들의 후추 반입지를 기존의 앤트워프에서 리스본으로 변경한다. 이는 스페인과 적대 관계에 있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후추 유통망 접근에 불안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스페인 왕실은 오래 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의 푸거(Fugger) 가문에게 채무 변제 대신 유럽 내 후추 유통에 관여할 것을 종용한다. 푸거 가문은 후추 유통망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내륙 유통을 위한 집산지로 함부르크를 이용하였다. 함부르크의 부상은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는 더욱 큰 위기였다.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점점 후추 유통망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맞아 동아시아 교역에 직접 나섬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이(異)대륙 교역에는 막대한 재원(財源)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기술 수준으로 무역선이 수년이 소요되는 항해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성공하면 ‘대박’을 칠 수 있으나, 실패하면 한 푼의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 ‘쪽박’을 찰 수도 있다.
 
  당시 아시아에 무역선을 보낸다는 것은 ‘하이퍼 리스크, 하이퍼 리턴’의 세계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무역 선단 조직을 후원할 수 있는 절대 왕권이 부재하였던 네덜란드는 상인들이 ‘회사’(compagnia)를 결성하여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안을 고안한다. 투자가를 모집하여 재원을 마련한 후, 사업을 수행하고 수익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소수의 다액 투자가들이 이사가 되어 사업을 관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의 소액 투자가를 모아 모자라는 재원을 보충하기도 했다. 회사의 존속은 일회성이었다. 항해를 마치고 수익을 분배하면 회사는 해산된다.
 
 
  네덜란드의 아시아항로 개척
 
리프데호 선단. 2년여에 걸쳐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한 끝에 리프데호만이 일본에 도착했다.
  1595년 ‘원거리회사’(Compagnie van Verre)로 명명된 최초의 네덜란드 동아시아 무역 회사 소속 선단 4척이 암스테르담을 출항한다. 당시 아시아 항로를 독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스페인은 항해 루트를 국가 기밀로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다. 주요 기항지를 확보한 채 허가를 받지 않은 선박을 발견하면 즉시 공격하여 나포하거나 침몰시켰다. 항행 루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도 불리한 환경에서 항로를 개척해야 했던 원거리회사의 선단은 출항한 지 2년 만인 1597년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한다. 도중에 한 척이 손실되고 선원도 3분의 1밖에 생존하지 못하는 악전고투의 항해였으나, 포르투갈의 독점을 뚫고 아시아 항로를 열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인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네덜란드에는 유사한 형태의 동아시아 무역회사 설립 열풍이 분다. 최초의 회사가 결성된 1595년부터 난립하던 회사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로 단일화되는 1602년까지 7년 동안 8개의 회사가 결성되었고 이들에 의해 15개의 선단이 조직되어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의 회사들을, 제도화된 본격적 회사 출범 이전의 초기 형태 회사라는 의미로 ‘선행회사’(voor compagnie)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프데호는 로테르담에 기반을 둔 상인들이 설립한 회사에 소속된 선박이었다.
 
  리프데호에는 500정의 소총, 19문의 대포, 5000발의 포탄, 2.5톤의 화약 그리고 철제 갑옷 등 막대한 양의 서양 무기가 적재되어 있었다. 리프데호의 표착과 적재 물품은 당시 최고 실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관심을 끌었다. 오사카성에 머물고 있던 이에야스는 리프데호를 규슈에서 오사카로 옮길 것을 명한다. 이에야스는 리프데호의 무기를 몰수하는 한편, 직접 탑승자 취조에 나선다.
 
  리프데호에는 영국 출신의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가 항해사로 탑승하고 있었다. 후에 파란 눈의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 된 인물로, 일본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임스 클라벨의 베스트셀러 소설 《쇼군》의 모티브로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애덤스를 불러들인 이에야스는 유럽의 정세와 리프데호의 여정 등 자신의 관심사를 물었다. 애덤스는 소년 시절부터 조선소에서 일하고 체계적으로 항해술을 습득한 프로페셔널 항해사였고, 프란시스 드레이크 휘하의 해군에 소속되어 스페인과의 아르마다 해전에 참전하기도 한 베테랑이었다. 애덤스를 취조한 이에야스는 애덤스가 전하는 서양의 정세, 각종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 조선술(造船術)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파란 눈의 사무라이’ 윌리엄 애덤스
 
리프데호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
  사실 애덤스가 이에야스를 만나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에야스보다 먼저 리프데호 선원들을 취조한 예수회 신부들은 이들이 네덜란드 회사 소속의 신교도임을 알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신교 탄압에 반발하여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영국은 그러한 네덜란드의 가장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프데호가 해적선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선원들을 모두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야스는 애덤스와 대화를 나눈 후, 애덤스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님을 확신하고 선교사들의 권고를 무시한다. 이에야스가 모든 서양 정보를 독점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애덤스의 가치를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애덤스를 가까이 두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에야스의 진의가 무엇이건, 리프데호의 표착으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갈등과 왕실 간 세력 다툼이 일본에서 축소판으로 재현되었고, 이에야스는 그 구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셈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실리주의와 정세를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은 이에야스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일본에서는 역사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에야스가 리프데호에 실려 있던 무기를 이용해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스토리가 종종 등장한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과 결전을 벌인 세기가하라 전투(ヶ原合)에서 애덤스를 비롯한 리프데호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신형 대포를 사용했다거나, 뎃포의 탄환을 튕겨내는 서양의 철제 갑옷을 착용한 이에야스가 전선(戰線) 전면에 직접 나와 진두지휘를 함으로써 장기전이 되리란 예상을 깨고 초단기전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들은 세키가하라 전투만 놓고 본다면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가설에 불과하다. 다만 1615년 오사카성 전투에서 서양식 대포가 사용되고 17세기 초반부터 서양식 갑옷과 전통 일본 갑옷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갑옷(이를 남만동구족·南蠻胴具足이라고 한다)이 만들어져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뎃포의 전래 이래로 일본의 병기 체계가 서양의 영향을 흡수하며 발전하는 양상의 연장선상에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서양식 갤리온선을 만들다
 
  리프데호가 일본 역사에 갖는 의미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이에야스의 외교 구상과 관련이 있다. 이에야스는 전문 항해사 출신의 애덤스를 총애했다. 에도성에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쇼군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고문의 지위에 앉혔다. 이에야스는 첫 만남부터 애덤스의 해박한 해양지식에 반한 터였다.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휘하의 수군 무장(武將)인 무카이쇼겐(向井將監)과 협력하여 남만선, 즉 서양식 선박을 건조할 것을 명한다. 애덤스는 일급 항해사이기는 했지만, 직접 배를 만드는 과정을 다 꿰고 있지는 못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1604년 당시 유럽의 주력 선박인 갤리온(galleon)선을 본뜬 배가 완성된다. 기존의 일본식 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배가 무사히 항해에 성공한 것에 만족한 이에야스는 두 번째 선박 건조를 명한다. 1607년 120톤급의 갤리온선이 완성되었다. 당시 대서양 횡단에 투입되는 유럽의 갤리온선이 150~300톤급이었으니, 유럽 기준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배다.
 
  1609년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탑승한 산 프란체스코호가 멕시코로 향하다가 폭풍우에 난파되어 지바에 표착한다. 일본 땅에 발이 묶인 비베로 일행을 막부는 환대한다. 이에야스는 비베로 일행에게 스페인(및 멕시코)과의 교역에 관심이 있음을 전하고 본국 귀환 시 그 성사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애덤스가 건조한 두 번째 선박을 귀국용으로 대여한다. 스페인인들은 이 배를 ‘산 부에나 벤튜라’(San Buena Ventura)라고 불렀다. 1610년 8월 일본의 우라가를 출발한 벤튜라호는 같은 해 10월 무사히 멕시코에 도착하였고, 이후 벤튜라호는 멕시코에 의해 몰수되어 멕시코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항로에 투입되었다.
 
  서양식 선박 조선술은 중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614년 센다이번의 다테 마사무네는 독자적인 서양선박 건조에 나선다. 일본에서는 다테마루(伊達丸)로 알려진 ‘산 후앙 바티스타’(San Juan Bautista)호이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파견된 스페인 사절 비스카이노()의 협력을 얻어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 바티스타호는 500톤급 스페니시 갤리온선으로 대양 횡단을 너끈히 해내는 수준급 선박이었다.
 
  바티스타호에 대해서는 45일의 단기간에 대형 선박을 건조했다는 기록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들어 손상된 스페인 선박을 수리하여 출항시킨 것인데 스페인인들이 이름을 바꿔 부르는 바람에 이명동선(異名同船)의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 건조 주장자들은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각 부위의 치수와 동원된 인력에 대한 기록이 있어 실제 건조했음이 틀림없다고 반론한다. 현재 일본 미야기(宮城)현의 이시노마키(石) 시에는 바티스타호를 복원한 레플리카가 전시되어 있다.
 
  바티스타호는 1613년, 1616년 총 2회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하여 멕시코와 일본을 오간다. 첫 번째 항해 시에는 막부의 위임을 받은 센다이 번사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가 멕시코와의 통상관계 수립 교섭 임무를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하세쿠라는 멕시코 서안에 도착, 육로로 동안으로 이동한 다음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1615년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여 에스파냐 국왕 필리페 3세, 이어 로마로 이동하여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알현하고, 쇼군의 친서를 전한 뒤 로마에서 직접 세례를 받고 멕시코, 필리핀을 거쳐 1620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일본의 외교사절인 셈이다.
 
 
  도쿠가와의 通商외교 구상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근의 연구는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총애하며 서양식 선박 건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배경에 그의 원대한 외교 구상이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강경외교로 인해 주변국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필리핀·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에 선린관계 수복을 원하는 친서를 발송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이에야스는 특히 필리핀을 비롯한 멕시코 및 스페인 본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를 위한 방편으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첨단 선박 건조 기술과 스페인의 발달된 은(銀) 추출법(아말감법)을 입수하여 자신이 확보한 영토 내 은광(銀鑛)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이를 교역에 활용해 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에도와 가까운 우라가(浦賀·지금의 지바[千葉]현)를 스페인 선박의 입항지로 지정하여 나가사키에 버금가는 무역항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구상도 병행되었다.
 
  그는 필리핀 총독의 사절로 일본을 내왕하는 헤수수 신부를 통해 이러한 의향을 반복적으로 전달하였으나, 스페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조선술과 항해술을 국가 기밀로 취급하는 스페인으로서는 이에야스의 요청을 처음부터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다만 일본 인근의 해적으로부터 마닐라 항로의 안전과 자국 선박 난파 시 기항지를 확보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보장받고 신교 세력인 네덜란드를 일본에서 축출하기 위해 적당한 통상관계를 제의하는 선에서 이에야스의 요청을 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무성의한 태도에 실망한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활용해 서양식 범선 건조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한편, 스페인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에 나섬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외교적 협상력을 높이고자 했다는 것이 이러한 해석의 요지이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亂) 등 기독교 포교(布敎)의 체제 위협 속성이 부각되면서 막부의 쇄국정책이 공고화되고, 그에 따라 대양 항해를 위한 대형 선박의 조선 기술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하지만 400년 전에 당시 유럽의 정세가 일본의 정세에 투영되고 일본의 권력자가 그 흐름을 읽어내며 교류와 견제를 적절히 배합하는 외교적 방책을 구사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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