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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가난, 경제적 불평등의 인식

대관절 조선사람은 어째서 가난한가?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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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商界는 껍질뿐. 알맹이는 다른 이의 手中”
⊙ 조선인 8할이 농민. 수확은 일본 대지주… 도시·포구 상권도 일본 대자본 소유
일제가 한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 인천 제물포항에 쌓아 둔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근대의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수탈에 병이 깊어 갔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가난과 빈곤을 직시하는 글들이 1930년대 언론과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일제의 농업정책은 조선을 일본의 식량기지 정도로 삼고 민족경제의 자립을 철저히 억눌렀다. 한반도의 대외무역은 일본이 독점하다시피 주도했고 국내 유통 역시 일본인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재래의 수공업자본과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기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 수출품목 대부분은 원료나 식료조제품이었고 수입품은 값비싼 완제품이었다. 무역수지 적자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는 일본의 값싼 원료 및 노동력 공급지 내지 상품시장에 불과했다. (참조 강만길의 《한국현대사》, 1990년 9판)
 
  〈현 조선의 경제계 개관〉, 〈만인 필독할 금일의 경제상식 제2과〉와 〈농촌처녀의 팔려가는 이면〉은 1930년대 경제 현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다. 필자인 신태익(申泰翊)과 서춘(徐椿)은 모두 일제 강점기 언론인이었다. 신태익은 6·25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으나 납북됐다. 현대 표준어에 맞게 문장을 고치되 원문을 살려 표기했다.
 
 
  〈현 조선의 경제계 개관〉
  -조선의 경제계를 좌우하는 원동력과 및 그 현상에 대하야-
  신태익(申泰翊)
 
1930년 10월 잡지 《별건곤》에 실린 〈현 조선의 경제계 개관〉 첫 장이다.
  조선경제계 즉 조선사람의 경제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또 어떠 어떠한 원동력 밑에서 이 경제계가 변천이 되어 가는지 한번 생각할 필요가 절실히 있다. 이것을 말하려 함에 있어서 먼저 차탄(嗟嘆·嗟歎의 오기. 탄식하고 한탄함-편집자)이 앞을 쓴다. 또 붓대가 맘대로 돌지를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맘대로 붓대를 놀린다 하면 경제계의 현상을 말하는 한계를 벗어나 다른 방면으로 달아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될 수 있는 대로 탈선을 경계하면서 쓸 것이다. 그러고 ‘학술적’을 떠나서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통속적’으로 쓰라는 부탁 때문에 더욱 완전을 기치 못하게 된 점을 눌러보아 주기 바란다.
 
  1
 
  이 땅이 조선이며 우리가 조선사람이다. 그런즉 이 땅의 경제가 곧 조선사람의 경제가 돼야만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조선경제계를 큰 눈을 뜨고 아무리 살피고 또 다시 살피어 봐도 조선사람의 경제라고 볼 만한 것이 눈에 잘 안 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경제는 조선사람의 힘으로 좌우(左右)해 나가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조선의 경제가 조선사람의 힘으로 좌우치 못하게 되고 이처럼 새가벌게(판독불가-편집자) 되었는지 하는 그 원인이 여러 가지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이유를 모두 들어 말하려고 않는다. 다만 경제적 입장에서 냉정히 보는 바를 가지고 조선의 경제를 조선사람의 경제력으로 능히 지배를 못하는 원인을 찾는 데 그치랴 한다. (중략)
 
  조선의 무역이 잘되어 가는 것을 보면 조선사람의 경제력이 증대해 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면의 사실은 표면과 전연 배치가 되어 있다. 표면 관(觀)으로는 쌀을 일본에 갖다가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대용의 식량으로 값싸고 분량 많은 만속(滿粟·만주에서 생산된 잡곡을 의미한다. 우리 농촌은 좋은 쌀을 빼앗기고 이들 잡곡으로 연명했다-편집자)이나 외미(外米)를 사들이는 것이 조선사람의 주머니 여재(餘在)가 떨어질 것 같이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아주 딴판이다. 자기가 만들고 또 맛 좋은 쌀을 일본에 갖다 판다 하나 조선사람의 손으로 파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대지주들의 손을 거쳐서 이출(移出)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보아도 오산(誤算)이 없을 줄로 생각된다. 그럼으로 조선사람에게는 쌀을 비싸게 팔고 값싼 좁쌀이나 양쌀을 산다 하여도 그의 주머니는 아무 여재가 없음은 의심할 것 없는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조선의 무역이 잘되어 간다고 하지만 조선사람으로서 받는 그의 혜택이 별로 없는 결과가 되고 만다. 따라서 통계상 숫자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서는 조선의 경제를 가리켜서 참으로 조선사람의 경제라고 말할 용기가 안 나선다.
 
  조선의 무역은 이상과 같다 하고 대내적으로 들어가 상공업 기타 각 방면의 형편은 어떠한가?
 
  먼저 공업계를 보자. 이 역시 무역과 같이 통계상으로는 축년(逐年·해마다-편집자) 발전되어 간다. 공장 수가 7년 전에 3499개소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5342개소로 늘고 또 자본금도 7년 전에는 1억7798만5802원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5억4912만2364원으로 격증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늘어갈 형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공업계가 발전이 되어 간다마는 무역과 같이 조선사람의 손으로 되는 공업계가 아니라 대자본을 가지고 있는 일본사람의 거의 독무대가 되어 있다. 오직 조선사람은 공업이 발달됨에 따라서 받는 혜택이라고 할 것은 노동력을 바치고 저렴한 임금을 받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럼으로 일본의 자본이 조선공장 전체에 대하야 독점적 지배적의 지위에 있은 즉, 조선의 공업도 조선사람의 손으로 좌우치 못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제시대 시장 모습.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다는 대구 서문시장이다. 식민지 조선 전체를 통틀어 도시와 포구에서 한국인이 상권을 잡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또 상업계를 보자. 조선을 통하야 각 도시와 포구의 내용을 살피면 어느 곳이나 조선사람이 상권을 잡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이것은 경제조직이 없는 것이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 밖에 차역(此亦·이것도 역시-편집자) 공업과 같이 대자본과 좋은 배경을 가진 일본사람을 당할 수가 없는 것도 상당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경성을 한 예로 잡고 보면 남촌(南村)의 일본사람 상계(商界)와 차촌(此村·이 마을-편집자)의 상계가 서로 대치하여 있는 것으로서는 조선상계의 세력이 다소 있을 것 같이 생각이 들겠으나 참으로 내면을 해부한다면 북촌(北村)의 조선인 상계도 일본사람 측의 일 연장(延長)과 같이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점포주와 식(式)은 조선사람이다마는 거의 모두 속은 남촌에 있는 일본사람의 도매상 혹은 대판(大阪) 등지의 상인에 매달려 있는 때문이다.
 
  그런즉, 조선사람의 상계라는 것은 껍질뿐이요 알맹이는 벌써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간 지가 벌써 오래된 일이다. 이 현상은 경성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모다 그럴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전(全)조선의 회사추세를 보면 사수(社數)(合名, 合資, 株式)는 7년 전에 920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1547(조선에 본점을 둔 것)로 늘었고 또 그의 공칭(公稱) 자본금도 7년 전에 5억4840만9741원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5173만9466원으로 도로 감퇴(減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불경기로 감자(減資) 등의 관계이다. 하여간 150여의 회사 중에 조선사람 경영의 회사는 3년 전에는 사수(社數) 213, 공칭 자본 2478만9424원인데 일본사람 경영회사는 사수 1035, 공칭 자본 1억7814만9140원이다.
 
  다음으로 농업을 보자. 조선사람의 8할이 농민임으로 이곳에서 얼마만큼 조선사람의 손으로 좌우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농민은 조선사람이지만 이 수확은 조선사람의 손으로 가는 것이 많지 못하다. (조선무역에서 말함과 같이) 동척(東拓)이 있고 개인으로도 일본사람의 대지주가 다수에 달한다. 아직 조선사람의 대지주가 있다고 하나 이들의 수는 날로 줄어만 가는 지주들이요 저 사람들은 반대로 늘기만 하는 터인즉, 남은 조선사람의 지주들도 풍전(風前)의 등화(燈火)와 같이 그의 연명이 멀지 않을 것을 헤아릴 수가 있다. 이 밖에도 광업, 어업 기타의 각 방면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조선사람의 손을 떠나가는 것이 오늘의 조선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제상이다. (이하 생략)
 
  (출처=《별건곤》 제5권, 제9호. 1930년 10월)
 
 
  〈만인 필독할 금일의 경제상식 제2과〉
  금일의 문제- 조선사람은 왜 가난해지나
  서춘(徐椿)
 
1931년 4월 《별건곤》에 게재된 〈만인 필독할 금일의 경제상식 제2과〉의 첫 장이다.
  몇몇 부자사람을 제하고 나면 조선사람은 똥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야말로 가랑이가 찢어지려 해도 힘줄이 걸려서 못 찢어진다.
 
  털 난 짐승이라야 쥐밖에 없고 곡식이라야 ‘콩팥’밖에 없고 밭이라야 공주한 밭밖에 없다. … 이 말은 이 근년의 조선사람을 그대로 그리어 놓은 말이다.
 
  장사를 하려 하나 피천 한 푼 없고 농사를 지으려 하나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가 막혀 못 나가고 남쪽으로 가자니 돌아오는 사람이 더 많고 북쪽으로 가자니 호인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어데로 갈꼬? 어떻게 살꼬?
 
  대관절 조선사람은 어째서 가난한가?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고 요전번에 약속한 일도 있으니 다시 동아일보사로 서춘씨를 찾아가 보자.
 
  ××
 
  기자 : 조선사람은 왜 작고 가난만 해가는지 그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서춘 : 이번 문제는 좀 뻐근한 걸요.
 
  기(記) : 가난해 가는 중에 특별히 토지 문제를 가지고 말씀해 주십시오.
 
  서 : 네….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어 가지고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⑴자본이 적은 것=그 때문에
  1.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공업을 하든지 크게 하지를 못하고 그럼으로 물건을 헐하게 만든다든지 판다든지를 못하는 것.
  2. 정치와 결탁을 하지 못하는 것. (이 설명은 자세히 하지 못합니다.)
 
  ⑵지식이 부족한 것=그중에도
  1. 법률지식이 부족해서 남에게 속기가 쉬운 것.
  2. 경제지식이 부족해서 경제계의 물정이 어려워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⑶위에 말한 자본이라고 적고 지식이 부족하야 공업이나 상업 같은 것을 크게 하지 못하는 데다가 가진 것이라고는 논밭밖에 없고 또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사상이 박혀 있기 때문에=
  1. 농사밖에는 짓지 아니하고 그 때문에 자기네가 만드는 농산물과 공업품의 원료는 가장 헐하게 팔고 자기네가 사는 물건은 가장 비싼 값으로 사게 되는 것.
  2. 다만 한 가지인 농산물을 가공(加工)을 하거나 장소를 옮겨서 팔거나 시기를 잘 살펴서 팔거나 이런 것을 하지 못하는 것.
 
  ⑷전통적으로 인색한 것=
  1. 상점의 장식을 잘하려 아니하는 것.
  2. 진열품을 잘 내놓지 아니하는 것.
  3. 광고를 잘 내려 아니하는 것.
 
  ⑸벌어들이는 것은 없고 쓰는 것은 많은 것=전에 세월이 좋을 때에 한 벌에 50~60원씩 하던 양복을 지금도 그 값으로 입고 한 잔에 1원씩이나 하는 양주(洋酒)를 지금도 그대로 먹기 때문에 주머니가 자꾸만 가벼워지는 것.
 
  ⑹토지를 잡히는 것.
  1. 토지를 잡혀 놓고 이자를 무는 것.
  2.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팔았으면 조금이라도 값을 더 받을 터인데 잡히기 때문에 제 값을 다 얻어 쓰지 못하고 땅은 땅대로 떠내려 보내는 것.
 
  이상의 여섯 가지가 조선사람이 점점 가난해 가는 원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기 : 어렴풋이 짐작은 하겠지만 그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요.
 
  서 : 그거야 그렇겠지요. 좀 더 자세한 것은 《혜성》 4월호를 보시면 알 것입니다.
 
  기 : 그러면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토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서 : 네…. 토지문제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요즘 와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가(地價)문제입니다. 이 지가문제는 위에 말한 ‘조선사람이 가난해 가는 6가지 원인의 원인’이 되게 하는 문제입니다.
 
  기 : 네? 그러면 그것이 퍽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려.
 
  서 : 그렇고 말고요.
 
  기 : 그러면 아주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서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내가 논을 3000평을 가졌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값을 한 평에 10전씩이라고 하면 내 재산이 얼마입니까?
 
  기 : 300원이지요.
 
  서 : 300원이지요? 그런데 나는 다른 모든 조선사람들과 한가지로 달리 돈을 가진 것은 없고 그 땅에서 나는 벼만 가지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기 : 벼만 가지고?
 
  서 : 네, 그 땅에서 나는 벼를 가지고 양식도 하지만 자~ 세미(조세로 바치던 쌀-편집자)도 받쳐야지요. 옷도 해 입어야지요. 그 외에 무어나 돈이 쓸 데가 있으면 벼를 팔아야 아니하겠습니까?
 
  기 : 그렇지요.
 
  서 : 그런데 벼를 팔아 가지고도 그것이 모자란다고 하면?
 
  기 : 빚을 지거나.
 
  서 : 또.
 
  기 : 땅을 팔거나.
 
  서 : 그렇지요. 빚을 지거나 땅을 팔거나 그렇지만 빚을 갚자면 결국 가서 땅을 팔아야 아니하겠습니까?
 
  기 : 그렇지요.
 
  서 : 그래서…. 그래서 말입니다. 내가 20년 전부터 해마다 모자라는 것을 메우느라 해마다 3000평의 논을 조금씩 조금씩 팔아먹었습니다. 가령 1년에 100평씩 팔아먹었다고 하더라도 20년 동안이면 2000평을 팔아먹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통 3000평 가졌던 것을 2000평을 팔아먹었으니 1000평밖에 아니 남았지요? 그러니까 자연히 가난해졌을 밖에요.
 
  기 : 그것 참 그럴듯합니다.
 
  서 : 그런데 이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라 조선사람이 다~ 그랬거든요. 그동안 조선사람 치고 가진 땅을 아니 팔아먹은 사람이 있습니까?
 
  기 : 없지요. 우리집에서도 해마다 빚을 져오다가 필경 팔아먹은 걸요.
 
  서 : 거 보십시오.
 
  기 : 그러나…. 가만 계십시오. … 선생이 3000평을 가졌던 중에서 2000평을 팔아버렸다면 전보다 가난해졌을 것이 아닙니까.
 
  서 : 그렇지요.
 
  기 : 그런데 그렇지 아니한데요. 그 전 옛날에는 조선사람의 주머니 속에 돈이 1원이나 2원이 들어 있기가 어렵던 것이 지금은 10원짜리 100원짜리가 들어 있고 옷도 몇 10원짜리 양복을 해 입고서 양술을 먹고 모던 걸, 모던 보이가 되고 2층 양옥을 짓고 서양 구경을 가고… 굉장하지 않나요?
 
  서 : 네, 네. 거깁니다. 옳게 물으셨습니다. 자~ 그걸 이야기할 테니 들어 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내가 가졌던 그 땅이 한 평에 10전밖에 아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재산이 도통 300원이었지요.
 
  기 : 그렇지요.
 
  서 : 그러니까 내가 3000평 가졌던 중에서 2000평을 팔아먹었다고 하더라도 땅값이 올랐기 때문에 나머지 1000평은 한 평에 50전씩이라 하더라도 500원이 아닙니까?
 
  기 : 그렇지요.
 
  서 : 거 보십시오. 땅이 2000평이 줄기는 했으나 땅값이 올랐기 때문에 내 재산은 300원에서 500원으로 늘지 아니했습니까. 그러니까 땅을 가진 양(量)은 줄었다고 하지만 내용으로는 더 부자가 된 셈이지요.
 
  기 : 그것 참 그렇습니다.
 
  서 : 거 보십시오. 요즘 유명한 백선행 여사가 부자가 된 것도, 김성수 민영휘가 부자가 된 것도 모두 땅값이 오른 덕이지 그 사람들이 무슨 큰 공업이나 상업을 해서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기 :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조선사람도 아직 그다지 낙망지경은 아니겠습니다 그려?
 
  서 :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 세음까지는 조선의 땅이 일본의 땅과 값이 같아지느라고 늘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얼마간 팔아먹어도 도리어 전보다 돈으로 따지면 만 한 세음이 됐는데 재작년 즉, 1929년까지에 땅값은 더 올라가지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더 올라가지 아니할 뿐 아니라 유명한 세계공황의 영향 때문에 도리어 땅값이 근 절반이나 떨어지게 됐습니다.
 
  기 : 네…. 그것 참 그렇군요.
 
  서 : 그래서 아까 말한 내가 다 팔아먹고 남은 100평의 땅도 재작년까지는 500원 가격이나 되었던 것이요, 지금 와서는 300원 값밖에 아니 되었으니 어떻습니까.
 
  기 : 그러면 앞으로는 어찌 될까요?
 
  서 : 나는 그 나머지 1000평에서 더 떼어 팔아먹어야 하겠는데 땅값은 전과 달라 오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떨어지니 그것이나마 둥둥 떠나가고 말지요.
 
  기 : …!
 
  서 : …!
 
  (출처=《별건곤》제6권 제4호, 1931년 4월)
 
 
  〈농촌처녀의 팔려가는 이면〉
  애춘루(愛春樓) 주인
 
1931년 10월 《실생활》에 실린 〈농촌처녀의 팔려가는 이면〉.
  농촌여자가 어찌 하야 팔려 가는가? 이것은 조선사회 문제 중의 하나이다. 조선에서는 일찍이 사람을 매매하는 것은 일 노예에 한하였을 뿐이요, 일반으로 아 자식을 팔아먹는 일은 극히 적었었다. 그러나 누가 말하였더냐. 문명은 추악(醜惡)과 분망(奔忙)이라고. 사실상 조선에는 새 문명이 들어온 후로 더욱 못살게 되었다. 경상남도 부산으로부터 평안북도 의주까지 2000리와 함경북도 상삼봉까지 300리 등 4000여 리의 철도에 아침 저녁으로 기차가 몽몽한 연기를 토하고 지나가는 반면에 농촌은 여지없이 결딴나게 된다. 부모는 쪽박을 차고 정든 산천을 떠나게 되고 순결하고 어여쁜 처녀는 몇 십 원 돈에 팔리어 갈보가 되어 나가게 된다. 이와 같이 팔려 가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살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자식을 파는 경제적(經濟的) 원인이요, 둘째는 철도 연선을 따라다니며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그 부모를 꼬이는 협잡배의 성행이요, 셋째는 기차의 몽몽한 연기는 시골의 처녀로 하여금 공연히 마음이 들쑤셔서 도회를 향하야 전등불을 향하야 어떠한 간절한 희망을 붙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 경상도 대구 부근 어느 농촌에서 생긴 일인데 두 부모 사이에는 아들 몇과 딸 하나를 두었었다. 이전부터 일본 가서 무슨 큰 벌이를 한다는 소문이 있던 이웃집 젊은 자가 돌아와서 그 딸 둔 부모를 찾아보고 그 전보다도 더욱 없는 정이 있는 듯이 하니 순직한 시골 농촌의 부모이라 그자의 정다웁게 하는 것을 보고 단순히 친한 처지에 오래간만에 만났으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정다웁게 이야기를 하고 세상이 점점 살 수 없고 여러 식솔이 아침 저녁으로 밥 끓여 먹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 그 젊은 자는 짐짓 놀래고 동정하는 체하며 그러면 댁 따님을 일본 어느 집에 수양녀로 주면 그 집의 덕을 볼 뿐 아니라 따님도 그 집에서 공부를 시키어 장래 여학생이 되면 좋은 학생 남편을 얻게 된다고 사탕발림을 하여 꼬이었었다. 그리고 장래 큰 덕을 볼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선 어려우신데 내 돈 몇 십 원을 쓰라고 돈 40원을 내놓았다. 부모는 너무 기뻐서 치사의 말을 하면서 헌 옷을 입었던 어린 딸에게 새 옷을 하여 입히고 어머니 된 이는 세상이 모다 자기네들이 사는 세상인 것 같이 알고 행여나 자기 딸이 남의 집 수양녀로 가서 남우세나 하고 천대나 받을까 하여 부인네다운 세심(細心)한 주의로 “몸 매무새는 어떻게 가지어라”, “어른이 시키는 대로 일 잘하여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거라” 하는 잔 사설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자애 깊은 농촌의 어머니는 당초의 자기 딸이 마굴로 끌려 들어가는 줄은 꿈에도 꾸지 아니하였었다. 처녀 되는 당자는 철모르니 만큼 자기가 마굴로 들어갈 줄은 꿈에도 꾸지 아니하고 오직 부잣집 수양녀가 되어 귀여움 받기를 기대하였었다.
 
  떠날 날이 되니까 부친과 모친은 각각 멀리 떠나보내는 것을 애석히 알았었으나 이것이 모두 자기 딸의 부귀영화하는 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데리고 가는 젊은 자에게 칠만 번이나 당부를 하면서 잘 데리고 가서 잘 지도하여 주기를 간권하였었다. 동구밖을 지나갈 때에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큰 기대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이 뻐근하며 눈물이 흘렀었다. 이렇게 나온 딸은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멀리 부산까지 왔다. 부산서는 이름도 못 듣고 생전에 처음 보는 기선에 앉아 망망한 대해(大海) 현해탄(玄海灘)을 건넜다. 현해탄을 건너니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서투른 것뿐이라. 더욱 더욱 이웃에서부터 데리고 가던 그 젊은 자에게 믿고 의뢰하게 되었다. 처녀를 데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에 들어서자 벌써 가슴을 선뜻하게 하는 것이 많았다. 다다미칸 방마다 술 먹다 내버린 자리가 어지러이 있고 분을 횟박(회를 덮어쓴 바가지-편집자)같이 뒤집어쓴 계집애들이 몇이 있었다. 타향에서 조선사람을 만나니 응당 한이 없이 반가우련만은 어쩐 일인지 선뜻하고 무서운 생각부터 나게 되었다. 무슨 말이든지 못하는 말을 대답도 잘 못하고 주는 밥을 한 술 먹고 그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어디서 그렇게 오는지 노동자들이 수십 명씩 와서 다 각각 한 방에 몇씩 몰려 앉아 계집을 하나씩 끼고 별별 괴악한 음담패설을 다하고 껴안고 입 맞추며 희롱하였다. 농촌에서 간 처녀는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기절할 듯이 놀래기도 하고 슬피 통곡도 하여 보았으나 모다 아무 소용이 없고 그자들의 하는 대로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밤이 깊은 후에 그중의 몇 명은 떨어져 있어 모다 계집을 하나씩 안고 방에 들어가서 눕는데 그 농촌 처녀도 역시 어떠한 자에게 안기어 들어가 버리었다. 물론 애걸도 하여 보고 죽기 한하고 반항도 하여 보았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결국 수욕에 눈이 어두운 남성을 더욱 충동시키어 놓는 데 지나지 않았다. 필경 처녀를 깨뜨리고 그 후로부터는 매일 밤마다 그 집에서 그 광경을 당하는데 원래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을 당하는 것이라. 날마다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러는 중에 화류 병까지 옮기어 필경은 몸의 파멸을 당하고 너무도 몸이 고달피어 오는 남성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는 주인의 독한 매가 몸에 더하였다.
 
  그리하다가 어느 날 감금한 자의 눈을 피하야 처녀 둘이 도망하여 나와 죽기 기를 쓰고 파출소로 나와 순사에게 세세한 사정을 고발하여 경찰의 보호로 다시 파멸당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제야 그들의 부모도 속은 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얼마 전에 모 인문(모 신문?-편집자)에 소개되었던 사실이다. 이외에 부모의 병을 구원하기 위하야 몸을 창루에 판 딸도 수없이 많고 또 속아서 팔려 가는 것도 많다. 또는 시집갔던 여자가 독한 시집살이에 견딜 수 없이 뛰어나와서 갈 바를 모르고 길거리에 방황하다가 주사 청루에 떨어지는 일도 많다. 그러나 이 원인의 대부분은 빈궁(貧窮)과 무지(無智)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피지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비참한 일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출처=《실생활》제1권 제3호, 193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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