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갑식의 발로 쓴 한국인 年代記 WHO IS WHO 〈2〉

인화와 인내의 기업을 일군 LG그룹 具仁會 4대

“진주 청년은 생필품에서 시작해 전자와 화학산업의 초석을 놓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기업을 세계적으로 키웠으며 손자는 평생 사람을 아끼며 구설수에 한 번 오르지 않았다. 이제 4대가 시작됐다”

글 : 문갑식  부국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구교리댁 장남 구인회의 사업보국
⊙ 포목상에서 화장품–플라스틱–전자산업–석유화학산업까지 ‘한강의 기적’의 큰 물줄기가 되다
⊙ 손해를 봐도 인화를 위해 견디는 리더십이 오늘날 LG그룹의 문화를 만들었다
⊙ 백만장자이면서도 승합차로 출퇴근하고 다방에서 5환까지 꼭 챙겨온 노랑이지만 독립운동 자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내놓은 인물
⊙ 2대 구자경은 교사 지내다 공장생활… 한국 플라스틱 산업의 역사가 그에게서 시작됐다
⊙ 3대 구본무는 경영난에도 해고 안 해… 노사 협력의 모범을 보였다
⊙ LG그룹에서 반도체를 빼앗아간 김대중 정권의 강제 ‘빅딜’ 때 구본무 전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
⊙ 養子 4대 회장 구광모는 어떤 경영스타일 보일까 주목
의령 관문 앞 남강에 있는 솥바위다. 구한말 한 도인(道人)이 이곳을 지나며 솥바위 사방 이십 리에 한국을 대표할 부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삼성그룹, LG그룹, GS그룹, 효성그룹 창업주들이 모두 이 솥바위 근처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라는 곳이 있다. 물을 알고 산을 이긴다는 뜻이니 이름에서부터 명당(明堂) 티가 나는데 눈으로 봐도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방어산(防禦山), 동산(東山), 사브랑덤, 보양재가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은 온통 허씨(許氏) 천지인데 그 복판에 능성 구씨(具氏) 집이 콕 박혀 있다.
 
  승산리는 원래 승내리(勝內里)였다가 이름을 바꾼 것인데 여기 자리한 허씨 집안은 근검과 절약으로 마을을 조선 땅에서 손꼽히는 부촌(富村)으로 일구고 말았다. 이른바 만석꾼이 두 집, 천석꾼이 열두 집을 헤아렸으니 지금의 GS그룹이 바로 여기서 연원(淵源)한 것이요, 삼성그룹-LG그룹-효성그룹이 이 허씨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LG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허만정 선생의 생가다.
  허씨 문중의 만석꾼이 얼마나 돈을 아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짚신을 신었지만 남이 안 보는 데서는 신발이 닳을까 아까워 맨발로 다녔고 담뱃대에 담배를 재우기는 하지만 입에서 연기처럼 내뿜는 것은 입김일 뿐 실제로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고 부채는 혹시 상할까 봐 펴고 있지만 부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LG그룹의 창업주 蓮庵 具仁會.
  앞서 말한 능성 구씨 집안은 원래 구교리댁으로 유명했다.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 공은 어렸을 적부터 예닐곱 문장을 척 봐서 암기할 정도의 천재였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대과에 급제하고 임금 앞에서 경전을 강하는 홍문관 시독(侍讀)까지 승진했을 때 그의 이름은 서부 경남에 자자했고 유림(儒林)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순종 원년에 홍문관이 폐지되자 만회 공은 고려 유신(遺臣)들이 두문동에 들어간 것처럼 낙향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보였다. 벼슬길은 막히고 나라는 망할 지경인 상황에서 만회 공의 유일한 낙은 독자(獨子) 재서가 낳은 장남 정득(丁得)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는데, 정득이 바로 LG그룹의 창업자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1907~1969) 선생이다.
 
  연암이 진주에 포목점인 구인회 상점을 낸 것이 1931년, 그로부터 87년이 흐르는 동안 LG그룹은 구자경(具滋暻)-구본무(具本茂) 시대를 거쳐 4대 회장 구광모 시대를 맞게 됐다. 인화(人和)와 인내(忍耐)로 요약할 수 있는 LG그룹의 정신과 행동은 모두 구인회 창업주 시대 때 형성된 것이다. 구씨 4대를 20가지 에피소드로 살펴본다.
 
 
  #1. 부당하게 주지도 부당하게 갖지도 않겠다
 
  일 전짜리 한 닢을 두고 두 소년이 다투고 있었다.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다, 퍼뜩 이거 놔라.” “무신 소리 하고 있노, 네나 내나 똑같은 임자 아이가?”…. 한참 싸우던 중 키 큰 소년이 지친 듯 동전을 포기했다. 동전을 차지한 소년은 그를 데리고 동네 앞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으로 가 성냥 두 갑을 샀다. 그러곤 한 갑씩 나눠 가졌다. 부당하게 주지도 않고 부당하게 갖지도 않겠다는 LG그룹의 정신이 여기서 태동한 것이다.
 
 
  #2. 허씨 가문의 사위가 되다
 
  14세 때 구인회는 바로 담 너머에 사는 천석꾼 허만식(許萬寔)의 장녀 을수(乙壽) 양과 혼례를 올렸다. 신랑보다 두 살 위였다. 만회 공의 3녀가 허만식의 차남 인구(仁九)에게 시집갔다가 얼마 안 돼 사망했으니 양가는 기껏 맺었던 인연이 아까워 다시 인연을 맺어보세 하고 둘을 연결시킨 것이다. 신랑은 나이 많은 신부에게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기껏 ‘임자’ ‘이녁’ 또는 ‘보소’라고 했는데 평생 단 한 번도 ‘자네’ ‘하게’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후 비로소 구인회 창업주는 정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인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 지수보통학교 입학
 
구인회와 이병철이 다녔던 지수초등학교.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도 이 학교를 나왔다.
  신식 바람이 지수면까지 불어닥쳤다. 구인회는 쓰고 다니던 초립을 벗어 던지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곤 지수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수초등학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구인회의 장남 자경이 다닌 학교인데, 교정에 머리를 맞댄 소나무를 두고 사람들은 구씨·허씨의 관계, 구인회와 이병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4.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맞선 동맹휴학
 
  일본인 교장 아들과 정진화라는 학생이 싸움을 벌였다. 선생들은 정진화만 교무실에 불러 꿇어앉히는 벌을 줬다. 다음날 정진화의 아버지 정 진사가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교장이 사는 사택의 유리창을 박살 냈다. 몸을 피한 일본인 교장은 다음날 정진화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구인회를 비롯한 학생 대표 10명은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도지사, 군수, 장학사 등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한 달이 지나자 결국 도에서는 손을 들고 일본인 교장을 산청(山淸)으로 전근 보냈다. 동맹휴학을 주도한 죄로 구인회 등 10명은 나중에 나쁜 성적을 받게 된다. 구인회는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녔고 2학년을 마친 후 학업을 중단했다.
 
 
  #5. 협동조합 결성
 
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주의 생가다. 함안에 있다.
  생활고로 중앙고보를 중퇴했으나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시 지수면의 상권은 눈깔사탕 등을 팔며 사세를 넓힌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것을 본 구인회는 학교에서 배운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조합을 세우고, 전무를 거쳐 이사장까지 오른다.
 
  구인회는 마산, 진주 등에서 석유와 일용품을 사다 놓고 팔기 시작했다. 일본인 문방구상이 쌓아놓은 기반이 싸고 실속 있는 허인회 협동조합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구인회는 주판을 놓기 시작했다. 지출을 분명히 하고 단 한 푼도 틀리지 않게 정리를 하는 버릇이 그때부터 생겼다.
 
 
  #6. 진주에서 포목점을 연 후, 첫 좌절
 
진주 촉석루 쪽에서 본 남강이다. 아래 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적장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은 논개의 사당이다. 이 강물이 범람해 포목점을 차린 청년 기업인 구인회는 막대한 손실을 봤다.
  당시 진주는 유명한 소비도시였다. 가을이 되면 농사를 마친 일꾼들이 자식들을 혼인시켜 포목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착안, 구인회는 진주에 포목점을 차렸다. 그런데 1936년 저 유명한 병자년 대홍수가 진주를 덮쳤다. 남강이 범람해 구인회 상점의 포목을 모두 젖게 만들었다. 아버지에게 빌리고 땅을 담보 잡아 사들인 포목이 모두 못 쓸 지경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구인회는 돈을 빌려야 했다.
 
  원창약국을 운영하던 원준옥이라는 사람은 돈을 빌려달라는 구인회의 말에 두말없이 큰돈을 내놓았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 구인회는 재기했고 홍수 때 입은 손실을 복구하고도 큰돈을 모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했다. 포목점에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7. 20일 단식
 
  구인회는 위장이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위장을 고치는 데는 단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단식이 위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출발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단식을 시작했다. 나흘째까지 괴롭기 그지없었으나 닷새째가 되자 정신이 맑아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단식은 20일째에 들어 끝이 났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새사람이 됐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구인회가 얻은 소득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고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이 위장을 고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이후 구인회는 진주청과류조합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생선 도매를 시작한 것이다.
 
 
  #8. 독립운동 자금을 대다
 
구인회 창업주의 생가다. 허씨 집성촌 한가운데 있다.
  가게로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의령군 부림면, 지금은 입산리로 이름을 바꿨으며 흔히 설뫼라 불리는 동네에 사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당대의 걸물이었다. 일본인들이 백야 김좌진, 백범 김구와 함께 가장 두려워한다는 삼백(三白)의 1인이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열어 부를 일군 뒤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는 독립운동가가 된 그다.
 
  백산이 구인회에게 말했다. “자네 참으로 오래간만이네.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없고 자네의 안전을 위해 오래 이 자리에 머무를 시간도 없네. 일제의 패망은 이제 시간문제일세. 그만큼 우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는 마지막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네. 그러니 자네도 1만원 정도는 기부해 주어야 하겠네.”
 
  구인회는 결연히 답했다. “선생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고초를 다 겪으시는 선생과 행동은 같이 못 할망정 제힘이 미치는 한 재력으로나마 힘껏 도와드려야지요.” 그 길로 구인회는 은행으로 가 1만원을 찾아 백산에게 건넸다. 백산의 예언은 3년8개월 후 조국의 광복으로 현실이 됐다. 당시 백산이 국내에서 모은 돈은 20여만원이나 됐다.
 
  백산은 1943년 8월 3일 만주 목단강에서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을 거뒀다. 해방 후 귀국한 백범은 제일 먼저 의령의 백산이 살던 집으로 가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한다. 구인회와 백산의 해후는 조국에 바친 최상의 영예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9. 부산 진출과 조선흥업사, 럭키의 탄생
 
  해방 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구인회는 조선흥업사라는 무역업체를 차렸다. 조선흥업사는 목탄을 사들여 팔거나 농기구를 수입하는 일을 했다. 그때 고향의 만석꾼 허만정(許萬正)이 셋째 아들 허준구(許準九)를 데리고 와 “사돈은 사업 역량이 있으니 이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오. 사돈에게 출자(出資)도 좀 하겠소”라며 돈을 내놓았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具哲會)의 사위였다. 구씨와 허씨 가문의 동업이 이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때 조선흥업사는 사업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인회의 아우 구정회(具貞會)가 당구장에서 흥아화학공업사라는 화장품 공장 기술자인 김준환을 만나면서 구인회는 화장품업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처음에 화장품을 도매로 사와서 서울에서 팔던 구인회는 김준환이 흥아화학공업사를 그만두자 피마자기름, 스테아린산, 글리세린 등의 화장품 제조 원료를 대량으로 사들인 뒤 직접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화장품에 붙인 상표가 행운을 뜻하는 ‘럭키’, 그 아이디어를 낸 것은 구정회였다. 한문으로는 樂喜(락희)를 사용하기로 했다.
 
 
  #10. 플라스틱 시대를 열다
 
  화장품 장사로 재미를 보았지만 구인회의 열정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그것이 그의 기업신조였다. 플라스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장품 뚜껑이 자주 깨지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안 깨지는 화장품 뚜껑을 만들려고 백방으로 뛰다 보니 미군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인회는 즉각 미국에서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계와 원료를 도입하기로 했다. 기계는 들여오자마자 형형색색의 빗과 화장품 뚜껑, 비눗갑과 칫솔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예쁜 제품을 먼저 구하려고 상인들이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범일동 아파트 공장이 좁아 부전동으로 공장을 옮겨 증설했다.
 
 
  #11. 국내 최초로 치약을 만들고 다시 비누로
 
  6·25전쟁 중 구인회의 집안은 화를 입지 않았다. 공장도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터라 오히려 부(富)는 늘어만 갔다. 당시 사람들은 가루치약을 사용했고 돈깨나 있는 집안에선 미제 콜게이트 치약을 썼다. 구인회는 치약 생산하는 임무를 동생 구평회에게 맡겼다. 구평회는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청년상공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미국에 들렀다.
 
  그에게 형이 내린 명령은 세 가지였다. 첫째, 콜게이트 치약의 제조법을 알아와라. 둘째, 원료를 중간상인 거치지 않고 직접 구입하는 길을 알아봐라. 셋째, 미국에서 최근의 조류가 어떤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구평회는 정보요원처럼 콜게이트 치약의 원료와 배합비율을 알아냈다. 말이 정보원이지 실제론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럭키치약을 만들어낸 구인회는 다시 비누 생산으로 관심을 돌렸다.
 
 
  #12. 전자공업에 눈을 뜨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지수면의 전경이다. 뒤로 방어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구인회가 전자공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스카우트한 부하 박승찬이 LP레코드를 듣는 전축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를 내는 재래의 전축과 달리 하이파이 전축을 틀면 소리가 웅장하고 마치 눈앞에서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구인회는 “그게 전자공업인가” 하고 묻더니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손을 안 댔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산업에서 선두가 된 구인회는 내부 기기만 만들면 라디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라디오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金星社)다. 금성사는 라디오를 필두로, 전화기, 선풍기, 세탁기, 텔레비전을 쏟아냈고 그에 따라 전선(電線)과 세제(洗劑)도 만들기 시작했다.
 
  때맞춰 혁명정부가 들어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농촌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라디오를 들으려면 전지(電池)가 필요했다. 필요는 생산을 낳는 법이다. 한때 라디오가 팔리지 않아 문을 닫을 위기까지 맞았던 금성사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기사회생의 전기를 잡았다.
 
 
  #13.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사장, 같은 보신탕집 3일 내리 찾은 사장
 
  당시 구인회의 숙소는 창신동에 있는 동생 구태회의 집이었다. 당시 신설동에 살던 김계홍 상무가 승합차로 출근하는데 동대문에서 구 사장이 차에 오르는 것이었다.
 
  “아니 사장님, 택시를 이용하시든지 하시지 왜 이걸 타십니까?”
 
  “나는 왜 이걸 탈 자격이 없는가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노랑이라 할 것이오. 그렇지만 생각해 보소. 내 자식 있고, 아우 있고…. 그것도 한두 명이오? 내가 앞장설 수밖에 더 있겠소? 내가 이러면 무언(無言)의 교도(敎導)가 안 되겠소.”
 
  구 사장은 보신탕을 좋아했다. 그것도 허름한 집만 골라 다녔다. 김 상무는 3일 내리 점심시간 직전에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개장 먹으러 안 갈라요? 어제 그 집 맛있지요?” 그러나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법, 3일째 되던 날 김 상무가 사장에게 한마디 했다. “사장님 좋아하셔서 그런 데 가시는 줄은 알지만 그런 데는 저희가 가서 먹는 데지 사장님이 가실 데는 못 됩니다.” 이때 구 사장이 내놓은 답이 있다. “왜요? 무엇이 어때서? 몇천원짜리 한정식보다도 스테이크보다도 싸고 맛있는데 그것을 안 먹고 뭘 먹어요? 쓸데없는 걱정 마소.”
 
 
  #14. 거스름돈 5환을 기다리는 재벌
 
  구인회는 고향 어른들을 자주 챙겼다. 그렇지만 결코 돈을 풍성풍성 뿌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한번은 고향 어른들과 다방에 들렀을 때였다. 계산을 하자 여종업원이 “5환을 거슬러드려야 하는데 잔돈이 없어서 아래 가서 바꿔가지고 와야겠십니더”라고 했다. 구 사장은 묵묵히 5환이 올 때까지 기다렸고, 그 모습에 고향 어른들은 놀랐다.
 
  “백만장자가 5환 가지고 너무하지 않느냐. 5백환 팁을 놓고 가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래서 부자가 안 됐나? 우리한테 교훈을 준 기라. 푼돈을 아끼라고”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기생집을 가서도 남보다 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팁을 줬다고 한다. “이거면 됐제?”라는 말과 함께.
 
 
  #15. 신의를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이병철 회장 생가 뒤편에 있는 바위다. 마치 쌀가마니를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구인회 사장은 평생 세 번 삼성그룹에 속았다. 처음에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원당 수입을 동업으로 하자고 할 때 거절했던 것이다. 훗날 원당은 큰 문제를 일으켜 구 사장도 곤욕을 치를 뻔했다. 두 번째는 삼성과 라디오서울, 동양TV를 합작할 때였다. 성격이 다른 두 기업은 번번이 부딪쳤다. 처음에는 삼성이 라디오서울, 럭키가 동양TV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는데 삼성이 출자금 인수를 거절한 것이다.
 
  이때 구인회는 동경에서 이병철과 담판을 지었다. 다음은 그들이 나눈 대화다.
 
  “호암 이래서는 안 되겠네. 결손이 큰 TV국만 이쪽에 넘겨주려면 라디오서울의 청산차액을 빨리 인수해 주게. 양가(兩家)의 불화설이 장안에 퍼지고 있으니 창피하고 모처럼 손을 댄 방송사업이 저 모양이니 또한 창피하네. TV국까지 할 생각에서라면 마저 인수하게. 양가에서 태어난 우리 손자의 장래를 생각해서일세.”
 
  묵묵부답이던 이병철은 이렇게 나왔다. “그대로 같이 해보지?”
 
  구인회가 답했다. “자네가 같이하자는 제안은 내가 거절하겠네. 자네가 다하게. 자네 생각대로 말일세.”
 
  말이 없던 이병철은 현관까지 구인회를 배웅하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결정해 주어 고맙네.” 이후 삼성은 금성사에 이어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금성사의 핵심 기술자들을 빼내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구인회는 인내했다. 인화를 위한 인내였다.
 
 
  #16. 정유업에 도전하다
 
  1967년 2월 20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여수공장 기공식이 있었다.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과 구인회가 나눈 대화다.
 
  “영남분(구인회)이 오셔서 호남을 개발하게 되셨군요.”
 
  “이렇게 됐으니 아예 호남 사람이 돼버리겠습니다. 앞으로 경전선(慶全線)이 개통되면 영남이고 호남이고가 있겠습니까, 어데.”
 
  “맞습니다. 우리나라 이 좁은 땅에서 지역 가려서 뭘 합니까. 일일생활권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놔야죠.”
 
  “각하께서 그래 안 하고 계십니까.”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구인회 사장을 꼭 ‘선배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 나는 경영자 자격이 없지 않나
 
  1968년 구인회 총수가 산하 회사의 사장과 중역을 모아놓고 고려대 경영학과 조익순 교수를 불러 세미나를 열었다. 조 교수는 “독창력이 없으면 기업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구 총수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지금 럭키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도 내 아이디어 가지고 해본 적이 없는데요? 크림통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자고 한 것은 내 동생 태회의 생각이고 금성사를 세워서 전자공업을 해야 됩니다, 한 것은 저기 앉아 있는 윤욱현 상무의 아이디어고, 석유시대가 올 것이니 호남정유를 세우자고 한 것도 내 동생 평회가 끌어온 이야기니 나는 아무것도 독창한 것이 없으니까 기업가 될 자격이 없는 셈 아닙니까?”
 
  이에 조 교수가 말했다. “그 말씀은 그럴싸합니다만 참모들의 아이디어를 정확하게 받아들여서 즉각 실천에 옮겼다는 것도 사실인즉 창작이며 독창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구 회장께서는 과히 실망 마시고 계속 분투해 주시기 바랍니다.”
 
 
  #18. 거인의 퇴장과 長子 승계의 확립
 
  구인회 총수는 1969년 12월 30일 뇌관종양으로 사망했다. 그룹 총수 자리가 비자 세간에서는 승계를 둘러싸고 잡음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 총수가 사망하기 직전,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정이 나오자 첫째 동생 철회가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형의 큰아들 자경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19. 공장을 집으로 삼다
 
  2대 회장 구자경은 원래 교사를 하다 가업에 뛰어들게 된다. 부산 범일동의 아파트 공장 시절, 공장을 밤낮으로 지킨 두 사람이 있다. 구자경 회장과 허준구의 형인 허학구(許學九)였다. 두 사람은 공장에서 자고 공장에서 일하며 자나 깨나 공장 생활이 전부였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플라스틱 인젝션에 누구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익히고 기술을 몸에 배게 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다다미방에서 미군 군용 슬리핑 백에서 지내며 하루걸러 숙직을 했다.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아버지 구인회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누구 왔나” “배당대로 줬나” “누구는 어떻더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까다롭다는 사람이 나오면 구인회는 말했다. “그 꽤 까다롭다는 사람, 푸대접 말아라. 머지않아 우리 상품을 많이 소화할 사람이다.”
 
 
  #20. 구자경 회장과 구본무 회장의 업적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故 구본무 회장. 구자경 명예회장은 아들에게 LG그룹을 물려준 후 천안 수향농장으로 낙향했다.
  한국경제사학회는 2대 회장 구자경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둘째, 기업을 공개하고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셋째, 석유화학공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1925년생인 구 회장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그 뒤를 이은 3대 구본무 회장이 최근 아까운 나이로 별세했다. 그와 관련된 보도는 많았지만 인간 구본무를 보여주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故) 구본무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지만 겸손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을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선대 회장들처럼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았다. 10년 전 금융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를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 번 없었다.
 
  아직도 생존해 있는 구자경 회장과 고 구본무 회장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이 고 김대중 대통령이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기던 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痛飮)했다고 한다. 이런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거쳐 구광모 4대 회장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조회 : 946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syseo77    (2018-06-27)     수정   삭제 찬성 : 14   반대 : 14
LG 그룹에서 반도체를 빼앗아 다른 기업에 넘긴 결과는 LG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삼성에 뒤지게 된 요인중의 하나가 되고, 반도체 시장에서 영원히 힘을 못쓰게 만든 김대중 정권의 똘만이들을 적폐청산 해야 하는데...왜 노무현, 김대중 정권시절은 적폐청산 안하는 거야?

2018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