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한우의 事理分別 〈7〉 공자의 탁월한 통찰, “事理의 출발점은 孝”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증자, “부모님의 喪을 삼가서 치르고 먼 조상까지도 잊지 않고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
⊙ 당 숙종, 내시 이보국의 말 듣고 아버지 현종 핍박하는 것 방조… 광해군, 인목대비 폐출
⊙ 禮를 모르는 사람은 제 命에 죽지 못한다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아버지 당 현종과 정치적 갈등을 빚은 숙종.
  지금 우리는 예(禮)를 일의 이치, 그중에서도 사람의 일[人事]의 이치라는 관점에서 풀어 가고 있다. 공자(孔子)는 바로 그 사리를 제대로 알아서 실천하는 출발점으로 효(孝)를 제시했다.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탁견이다. 다만 오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러다 보니 마치 공자는 효나 충(忠)만을 강조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그는 결코 효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위한 출발점이자 방법론임을 간파해야 한다. 공자가 효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디딤돌이나 지렛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리(事理)의 출발점은 효”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실려 있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한다. “우리 당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궁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는 아버지가 훔쳤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공자는 말했다. “우리 당의 정직한 자는 이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 주니 곧음이란 바로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곧음, 즉 직(直)의 뜻을 이해함에 있어 섭공과 공자는 전혀 다르다. 곧은 도리[直道]란 올바른 사리다. 공자는 아버지의 잘못, 자식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 곧음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일로 알고서 감싸는 것이 곧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혈친을 제 몸과 같이 여기는 친친(親親)이 곧은 도리, 즉 일의 이치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효자로 유명했던 공자의 제자 증자. 孝를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이 일화의 바로 앞에는 그 섭공과의 또 다른 대화가 실려 있다.
 
  〈섭공이 정치의 도리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기뻐하게 하여 멀리 있는 자들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
 
  눈 밝은 독자는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공자는 사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의 순서란 마땅히 가까운 데서 먼 데로 차근차근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례를 이해했다면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해하기가 쉽다.
 
  “부모님의 상(喪)을 삼가서 치르고 먼 조상까지도 잊지 않고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
 
  즉 임금이 부모를 잘 모시고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를 잘 치르고 그 후에도 제사를 잘 지내는 지극한 효를 다한다면 절로 백성들도 보고 배워서 백성된 도리를 튼실하게 하게 된다는 말이다.
 
 
  세종의 지극한 효심
 
  먼저 이를 가장 잘 따른 경우로 조선의 세종을 살펴보자. 태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새로운 임금 세종을 위해 외척(外戚) 제거를 결심한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좌의정 박은(朴訔)이다. 세종도 사람이기에 자신의 장인을 죽이고 처가를 멸문시킨 이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다.
 
  그러면 세종은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박은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던 1422년 5월 10일 바로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났다. 박은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과연 좀 더 살았을 경우 세종이 어떻게 처리했을지 참으로 궁금한 인물이지만 단명(短命)하여 그 처리 결과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왕이 세상을 떠난 후 유정현에 대한 처리를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세종이 박은에 대해서까지 어떻게 했을지 어느 정도 미루어 헤아려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세종 8년(1426년) 5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오히려 세종이 “매우 슬퍼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유정현은 ‘조선의 상홍양(桑弘羊)’으로 불릴 만큼 재정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세종이 이런 능력을 쓰기 위해 자신의 원망을 숨긴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세종의 마음은 《논어》 학이(學而)편에 있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통해 미루어 헤아려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을 관찰할 때에는) 그의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그 아들의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그가 하는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보여준 도리를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보여준 도리를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三年 無改於父之道]”이 핵심이다. 그랬기에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충녕대군에 대해 다소 부정적 시각을 보였던 사람들조차 기꺼이 마음을 열고 세종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황희(黃喜)와 이직(李稷)이다. 양녕의 폐세자를 결사반대했던 두 사람은 조정으로 돌아와 황희는 국정 전반, 이직은 특히 법률제도 정비에서 큰 업적을 이뤄 세종의 태평치세의 밑거름이 돼 주었다.
 
 
  당 숙종의 불효
 
《대학연의》의 저자 진덕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당(唐)나라 숙종은 상원(上元) 원년(760년) 양경(兩京·장안과 서안)을 평정하고 상황(上皇·당 현종)을 촉(蜀·사천성)으로부터 맞아들여 경사(京師·수도 장안)에 들어오자 흥경궁(興慶宮)에 거주했다. 숙종은 대명궁(大明宮)에 머물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비밀통로를 통해 서로 오갔다.
 
  숙종을 모시던 내시 이보국(李輔國)은 특별한 공을 세워 총애를 굳힐 속셈으로 숙종에게 말했다.
 
  “상황께서는 흥경궁에 거처하시면서 날마다 외부 사람들과 교통하고 있으며 진현례(陳玄禮·상황을 지키는 시위대장)와 고력사(高力士)(原註·오랫동안 현종을 모셨던 환관)가 폐하께 이롭지 못한 일을 꾀하고 있습니다.”
 
  숙종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성황(聖皇·아버지 현종)께서는 자애롭고 어지신데 어찌 그 같은 일들을 받아들이시겠는가?”
 
  이보국이 말했다.
 
  “상황께서야 진실로 그 같은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주변의 여러 소인배들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마땅히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을 세우시어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때 난을 제거해야지 어찌 필부들의 효도만을 붙잡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흥경궁의 담은 얕고 다 드러나 있어 지존(상황 현종)께서 마땅히 머무실 곳은 아닙니다. 이곳 대궐은 깊고 경계도 삼엄하니 맞아들여서 이곳에 머물게 하신다면 지금 흥경궁에 계시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하시면) 소인배들이 상황의 성청(聖聽)을 헷갈리게 하는 것을 막고 끊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만일 이렇게만 하신다면 상황께서는 만세의 평안함을 누리게 되고 폐하께도 삼조(三朝·하루 세 번 문안드린다는 뜻으로 주나라 문왕이 세자 시절 아버지 왕계에게 하루 세 번 문안드린 데서 나온 말이다. 지극한 효도를 의미한다)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으니 무슨 해로울 일이 있겠습니까?”
 
  이 무렵 상황은 이미 고력사에게 이런 걱정을 털어놓았다. “내 아이(숙종)가 보국이에게 현혹되어 끝까지 효도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이보국은 결국 육군(六軍·경호를 받은 금위군)을 통해 상황을 압박하고 또 황명이라고 속여서 상황을 대명궁 서쪽으로 맞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장군들을 이끌고 가서 숙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했다. 그러나 숙종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여러 장수들에게 압박을 당해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경들은 소인배들이 (나를) 미혹시키는 것을 걱정해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고력사는 무주(巫州·호남성)로 유배됐고 진현례는 황명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났다. 상황은 이후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고기를 들지 않고 곡기마저 끊으니 결국 병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상황이 붕(崩)했다. 숙종 또한 아버지가 죽은 해에 이보국이 자기 마음대로 황후를 죽이고 태자를 옹립하자 놀람과 두려움 속에 죽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해인 762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예를 모르는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한다[不知禮者 非命橫死]고 했던 그대로다.
 
  이 사건에 대해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런 촌평을 남겼다.
 
  “대체로 간신들은 골육지친들을 서로 이간질하여 그들로 하여금 (친족의 의리를 버리고) 이해관계를 따르도록 만들고, 자신의 임금을 미혹시켜 의심을 품게 만들어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임금은 자신을 지키기에만 급급해서 간신들이 파 놓은 비밀스런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숙종의 죄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니, 아!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광해군 실패의 출발점, 인목대비 폐출
 
  진덕수의 촌평은 지금 보게 될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廢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버지 현종이 잘못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아들 숙종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일찍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중에 위신이 땅에 떨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광해군은 왕자로서 전쟁 수행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당의 숙종과 여러 모로 비슷하다. 그러나 의심이 문제였다. 광해군의 ‘의심’ 문제는 명지대 한명기 교수도 저서 《광해군》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광해군 초기 정국은 불안정했다. 연이은 역모 사건 발생이 그 징표였다. 이에 대북(大北)파의 이이첨(李爾瞻)은 광해군 4년(1612년) 선조 말기에 광해군 즉위를 막으려 했다 하여 즉위하자마자 이미 죽인 아버지 선조 때의 재상 유영경(柳永慶)의 시신을 파내 다시 목을 칠 것을 요구했다. 이이첨의 생각을 한 교수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유영경의 전하에 대한 견제를 막아내면서 전하를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하의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숙종의 마음을 이보국이 흔들었다면 조선 광해군의 마음은 이이첨이 흔들었다. 이어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어린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런 연장선에서 광해군 5년(1613년) 5월 23일 대북파 이위경(李偉卿)이 “인목대비는 저주 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됐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습니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는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효(孝)의 문제가 국정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장장 5년의 논란 끝에 폐비는 시키지 못했으나 1617년 서궁(西宮)에 대비를 유폐시켰다. 대북파는 이어서 폐비를 관철시키려 여론몰이에 나섰고 당시 이에 가장 크게 반발한 세력은 바로 주자학에 철저했던 서인(西人)이었다. 1617년 폐모론이 거의 결정되려 할 즈음 병중에 있던 서인의 이항복(李恒福)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들며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습니까? 요순(堯舜)의 일이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훈계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사나운 아버지와 미련한 어머니가 항상 순(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치게 하고서 입구를 막아 버렸고,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 하고서 밑에서 불을 지르는 등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도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을 뿐, 부모가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정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불효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효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이 장차 차츰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임금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의 도(道)는 순의 덕을 본받아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이듬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정확히 5년 만인 1623년에 그의 제자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반정의 정당성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광해군의 불효와 폐출의 인과성은 사리(事理)로 볼 때 분명해 보인다. 이 또한 ‘예를 모르는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한다’의 전형적 사례다. 다만 그 명(命)이 당나라 숙종의 생물학적 생명과 달리 정치적 생명이라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겠다. 광해는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 천수(天壽)는 누리고 67살에 세상을 떠났다.⊙
조회 : 206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