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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발로 쓴 한국인 年代記 WHO IS WHO 〈1〉

동학농민군 정읍 접주 차치구 4대

“동학 접주는 보천교주를 낳고 독립군을 도운 보천교주의 아들은 국보를 지킨 호국영웅이 되었으며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을 토벌한 장군의 아들은 영혼과 대화하는 法師가 되다”

글 : 문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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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혈남아 차치구와 전봉준의 만남은 水魚之交
⊙ 동학농민군 패퇴한 뒤 끝까지 전봉준 지키다 자기가 살려준 현감에게 사형당해
⊙ 경상도 사람이 만든 동학에 전라도가 열광한 것은 시대의 이면… 미륵에 바라는 것이 달랐다
⊙ “세상 사람은 차(경석)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잡지 《개벽》의 인물평
⊙ 김좌진부터 조만식 선생까지 독립운동 지원의 54% 담당한 보천교
⊙ 차경석의 아들 차일혁은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토벌한 호국영웅
⊙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차길진은 영혼 전도사로 활동… 1년 전 인터뷰서 “차기 대통령은 통일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언
고창읍성은 국내에 산재해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마라”
  - 차치구
 
  이 땅에 기인(奇人), 이사(異士), 술사(術士), 도사(道士)들이 즐겨 찾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충청남도 계룡산과 전라북도 모악산(母岳山)이다. 둘 다 천하명당으로 각종 예언서에 가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고 꼽혀왔는데 차이가 있다. 계룡산의 주인공은 신선(神仙), 단군, 정도령(鄭道令)인데 모악산의 주인공은 단연 미륵부처라 하겠다.
 
  모악산 인근은 정이 반을 낳고 다시 합치는 정반합(正反合) 변증법을 19세기 말 보여줬다. 양반의 폭압이 민중혁명을 낳고 나라가 망해 고된 세월 끝에 민주국가로 재탄생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낭자하다. 전북 정읍시 입압면 대흥리에서 태어난 차치구(車致九·1851~1894)는 빈농 집안이었지만 키가 180cm나 될 만큼 기골이 장대했다.
 
해마다 정읍 일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맨 앞이 녹두장군 전봉준이며 두 번째가 손화중이다.
  이 장한(壯漢)은 성격도 불같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주변 이웃들이 고리대금에 신음할 때면 앞장서 풀어주고 관리들이 묘지를 빼앗아가면 제가 나서 되돌려주고 송사(訟事)가 있으면 피하지 않았다. 이런 차치구가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1854~1895)과 조우한 것은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 할 것이다.
 
  차치구는 정읍두령이었는데 그 부대는 ‘녹두장군’의 직할부대와 같았다. 1차 봉기 때 조병갑의 학정(虐政)의 온상이었던 고부 관아 습격을 모의한 핵심 멤버 스무 명이 있었는데 당연히 차치구도 그중 한 명이었으며 2차 봉기 때 그 휘하에 농민군 5000명이 있었다.
 
  동학혁명군이 점령지에 설치한 게 집강소다. 당시 고창 현감은 윤석진이었는데 배포가 대단했던 것 같다. 농민군 집강소 설치를 한사코 거부한 것도 모자라 동학군 고창접주 고영숙(1871~1894)을 옥에 가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차치구는 한걸음에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으로 달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윤 현감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차치구는 “굳이 죽일 것이야 없지 않으냐”는 고영숙의 만류에 그를 살려주고 만다. 태인전투 패배 후 동학혁명군 지휘부는 뿔뿔이 흩어져 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자기 집에 숨겼지만 1894년 12월 28일 체포되고 만다. 차치구 역시 ‘대역’을 꾀한 죄인을 은닉해 줬다는 혐의로 관군에 체포된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 차치구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목이 베이는 신세가 됐다. 그가 살려줬던 고창군수 윤석진은 ‘차치구’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부득부득 갈아왔던 것이다. 칼로 내려치기 전에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개 패듯이 그를 두들겨 팼는데 차치구는 한마디만 했다고 전한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마라.”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天子가 될 것이다”
  - 차경석
 
고창은 넓은 들로 유명하다. 사진은 청보리로 유명한 학원농장의 전경이다.
이 풍요로운 대지에서 양반들은 민초들을 압박했고 견디다 못한 민초들은 낫과 곡괭이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차치구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다. 순서대로 경석, 윤경, 윤칠, 윤덕이었다. 차경석(車京石·1880~1936)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고 한밤중에 30리 길을 달려갔다.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컸던 그는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아버지가 숨진 지 4년 뒤 차경석이 ‘일’을 냈다.
 
  18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고창 흥덕 관아를 습격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뜻하는 영학계(英學契)의 계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이었다. 이 일로 체포된 차경석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인품에 감동한 한 관리가 몰래 도주할 길을 열어줘 구사일생, 목숨을 보전하게 되고 그것은 반도를 들썩인 종교를 낳았다.
 
  여기서 잠깐 경상도 경주 사람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창시한 동학이 왜 전라도, 그것도 정읍-고부-김제 등 전라북도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동학의 뿌리를 캐들어가다 보면 불교의 미륵신앙이 나온다. 미륵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 뒤에 온다는 미래의 부처다.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때부터 널리 퍼졌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미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한때 경주 사람 5만이 숯불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볼 때 현생(現生)이 행복했다. 그러기에 그들이 미륵에 빈 것은 미륵이 산다는 이상향 ‘도솔천’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패망한 백제가 자리했던 전라도의 사람들에겐 현생이 지옥 같았다. 하루빨리 미륵이 강림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이렇게 희망의 강도(强度)가 달랐기에 전라도 일대에는 미륵신앙의 현장이 경상도보다 많다. 하루아침에 천 개의 미륵불과 천 개의 탑이 세워졌다는 화순 운주사나 미륵신앙의 본산인 김제 금산사가 대표적이다.
 
  동학의 열풍이 일순 꺾인 뒤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증산교(甑山敎)를 창시한 것도 동학이 생겨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강증산을 따랐던 제자들에 의해 증산교는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교단 등 9개 교파로 갈라졌는데 초대 보천교주가 된 차경석이 강일순을 만난 게 1907년 음력 5월 16일이다.
 
  차경석은 강증산 사후 보천교를 만들면서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천자(天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동학이 탄압받고 강증산마저 없는 세상에 차경석의 사자후는 식민지 치하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1920년대 기록에는 보천교 신도가 700만명이라는 얘기도 있다.
 
차경석의 보천교는 독립운동자금의 원천이 됐으나 일제의 간계에 말려 차경석은 분노 속에 숨을 거뒀다.
  1921년 4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000명에 달하며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비밀음모단체로서 주모자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여 특히 산간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이 매우 성대했다.”
 
  2000만 백성 중 700만이면 과장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조선총독부 집계로도 170만명에 달했으니 그 교세를 짐작할 만하다. 여기서 보천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1923년 8월에 발행된 《개벽》 제23호 차경석의 인상기(印象記)를 보면 차경석의 인물 됨됨이의 일단을 어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진주 출신의 필자는 보천교에서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 까닭에 가짜 상투를 달고서 겨우 차경석과 만났다. (그의 외모에 대해)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의복은 순전히 조선에서 난 것만 입고 있으며, 과연 인격이 있어 보여 여럿이 받들 만하다. (중략) 세상 사람은 차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모자란다 할지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의 엄격한 자태와 정중한 말은 능히 사람을 감복게 할 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라 상당한 식견이 있다.”
 
  이런 기사를 낸 잡지 《개벽》은 보천교와 경쟁관계였던 천도교의 기관지였다. 앞서 말했듯 동학과 증산교와 보천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리는 것이 이 기사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보천교는 1920년부터 20년 동안 147번이나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줬는데 이것은 전체 독립운동자금 지원 건수의 절반이 넘는 54%나 됐다.
 
  차경석의 도움을 받은 독립운동가 중에는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선 고당 조만식(曺晩植·1883~1950)까지 다양했으며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던 《시대일보》를 인수한 것도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은 1936년 사망했는데 강증산은 생전에 차경석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너는 집을 크게 짓지 마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된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려는 듯 차경석은 1925년 1월부터 보천교의 중심교당 십일전(十一殿) 건설에 나섰다. 당시 민간에는 《정감록》 등의 비결과 예언서가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특히 《정감록》 《징비록》에 실린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의 구절은 기사년(己巳年·1929년)에 일어날 일로 믿어졌다. 진사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십일전 신축과 맞물려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에 새로 지은 궁전에서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소문이 날개를 단 듯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만여 평(33만m2)의 부지에 건평 350평(1155m2), 높이 99척(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러 패망한 조선왕조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그 건물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제가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된 후 건물 사용을 불허했던 것이다.
 
  1936년 3월 10일 차경석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홉 살로 임종을 지켜본 3남 차봉룡은 한 언론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일제가 교를 억압하고 눈앞에 교당을 다 지어놓고도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수족을 잘라 조선이 망할 때와 똑같은 형국이었습니다. 화를 삭이지 못해 병이 들더니 별 말씀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 차일혁
 
지리산 화엄사의 중심 건물인 각황전이다. 각황전 오른편이 그 유명한 홍매화다. 하도 붉어 흑매(黑梅)라고도 불린다. 이 귀중한 문화유산이 6·25 때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불타 없어질 뻔했으나 호국영웅 차일혁의 기지로 살아남았으니 그것도 인연일 것이다.
  홍매화 보러 들른 전남 구례 화엄사에 한 경찰관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사연은 1951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8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의 군경합동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에 차일혁(車一赫, 호적상 이름 차갑수, 족보상 이름 차용철·1920~1958)이 있었다. 당시 그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 소속이었다.
 
  경찰 측 대표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이었으며 군 대표는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우려를 표했다. 명령을 받은 8사단 예하 18대대장은 방득윤이었으며 차일혁은 그의 관할하에 있었다. 차일혁이 고민하는 상관에게 꾀를 냈다.
 
화엄사 경내에 있는 차일혁 경무관의 일화를 알리는 안내문이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 태우자”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이 명령은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이니 문짝만 뜯어내 태워도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했다. 이에 방득윤이 동의해 화엄사는 소실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때 차일혁이 한 말이 남아 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차일혁 경무관이 화엄사 일주문 앞에 서 있다.
  차일혁 덕분에 살아난 절은 또 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문화유산을 살린 대가로 ‘명령 불이행’에 따른 감봉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이런 차일혁이 차경석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치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악명 높던 일본 경찰 간부가 그때까지도 ‘미군정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귀국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고 1945년 11월 2일 원남동 네거리에서 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일본 경찰 간부 사이가(齊加七)가 임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돼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했다. 70명의 병력으로 2000명의 빨치산을 격퇴한 정읍 칠보발전소 전투, 1953년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6~1953) 사살 등,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이현상 토벌에 투입된 부하들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정작 지휘관인 그는 제외됐다.
 
  이현상을 사살한 뒤 그의 시신을 화장해 하동 섬진강에 뿌린 게 윗사람들에게 밉보인 것이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록 적이지만 죽은 뒤에 빨갱이가 어디 있고 좌익이 어디 있느냐.” 그는 1954년 충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도솔산 선운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도들이 비결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선운사가 미군의 폭격을 받을 뻔했으나 역시 차일혁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됐다.
  차일혁은 충남 공주서장으로 발령받은 뒤인 1958년 금강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했는데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보는 상부에 실망해 자살을 택했다는 설(說)도 있다. 2008년 문화재청은 차일혁에게 감사장을 추서했고 경찰청은 2011년 8월 총경이었던 그에게 경무관을 추서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했으며 2013년 전쟁기념사업회는 차일혁 경무관을 고려시대 최무선 장군을 비롯한 62명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호국의 인물에 경찰이 포함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016년 국립대전현충원은 ‘9월의 현충인물’로 6·25전쟁에서 칠보발전소를 사수하고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섬멸 전투를 지휘한 차일혁 경무관을 선정했다.
 
 
  “이번 대통령은 통일 대통령 될 것”
  - 차길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다. 바로 뒤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차길진(車吉辰·1947년생)이 아버지의 죽음(익사)을 목격한 것은 12세 때였다. 그 이후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영혼을 보거나 대화하고 미래를 예지(豫知)하는 것이었다. ‘생명치료사’ ‘영혼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글을 쓰고 오페라를 만들고 심지어 프로야구단 구단주로도 활동했다.
 
  그가 도통한 인물인지 아닌지 단언할 수는 없다. 2006년 동양학자 조용헌은 《조선일보》에 차길진 집안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은 “요즘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인가?’이다. 무슨 일이든지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 수요에 대한 공급 방법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로 시작된다.
 
  “… 첫째는 여론조사다. 선거를 하기 전에 여론조사 해보면 누가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치분석가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언가들이다.
 
  요즘 국내 언론에서 가장 활발히 소개되는 예언가는 차길진 법사다. 큰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중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내년 대선에 대해서는 ‘홀연히 상서로운 빛이 무궁화 동산에 비치고, 밝은 달에 학이 날아올라 부를 날을 맞이하네’라는 알 듯 말 듯한 예언을 하였다. 필자는 차 법사를 보면서, ‘이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차 법사는 어떻게 하다가 이처럼 독특한 직업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차 법사는 뿌리 깊은 예언가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빨치산 토벌대장을 지낸 차일혁이지만, 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은 그 유명한 보천교(普天敎) 교주인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고, 차경석의 부친은 전봉준의 핵심 참모였던 차치구(車致九)였다.
 
  전북 정읍의 입암산(笠岩山) 아래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종교 단체였다는 것이 보천교 전문가인 안후상씨의 주장이다. 한때는 신도가 300만명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면서 호남 지역에서는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던 호남 인심을 다독거리면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차경석이었다.
 
  경상도에서도 많은 사람이 입암산 아래로 이사를 왔고, 독립운동가들도 비밀리에 보천교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근래에 독립훈장을 추서 받은 탄허(呑虛) 스님의 부친 김홍규는 원래 보천교의 5대 요직 가운데 하나인 목방주(木方主)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차경석은 본인을 ‘천자(天子)’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일제의 조직적인 감시와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마자 보천교는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 본부 건물이던 십일전(十一殿)이 해체되어 서울의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 되었던 것이다. 차 법사의 인생 행보를 보면서 집안 내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길진은 2017년 1월 “차기 대통령은 통일대통령이 될 것이며 통일이 무르익었다”고 예언했다.
  차길진은 2017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년 반 전의 예언인데 요즘의 정치상황과 연관시켜 읽으면 좋을 것이다.
 
  “통일의 기운은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서 다시 백두대간의 기운을 따라 올라가는 중이다. 평창 올림픽이 그냥 열리는 게 아니다. 국운의 기운이 그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기운을 받은 사람이 큰 인물이 되며, 통일을 이룰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통일 대통령이다. 통일 대통령은 후천개벽 ‘수(水)의 시대’와 맞아떨어진다. 수의 시대는 음(陰)의 시대다. 후천개벽 이전의 세상이 ‘불(火)의 시대’이자 ‘양(陽)의 시대’이며, 그 대립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말이다.
 
  YS는 거제도, DJ는 하의도, 노무현은 진영・김해, 이명박은 포항 등으로 전부 물과 관련이 있다. 수의 시대의 상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자로서 음이다. 수와 음의 기운이 맞아떨어지는 형국이다.
 
  수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파문과 같다. 이른바 인터넷 세상과 같다. 조그만 파문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수의 세계는 순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이 음인 것은 음양오행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의 기운은 산(山)의 기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산수가 항상 같이 가기 때문이다. 음양이 같이 간다는 이론과 같은 맥락이다. 큰 인물은 반드시 산의 기운을 받아야 가능하다.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백두대간의 기운이 지리산까지 미쳤다가 다시 북으로 상승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받은 기운은 한국의 삼성・금성・효성과 같은 3개 거대 기업을 낳게 했다. 실제로 이들 창업주의 고향은 모두 지리산 언저리에 있다. 대권을 거머쥘 인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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