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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6〉 김삿갓과 화순과 영월

“불우한 시인은 왜 전남 화순 땅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을까”

글 : 문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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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경래의 난 때 할아버지가 자결 대신 투항 택하며 집안 몰락
⊙ 천재 김병연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쓴 것이 할아버지 비판하는 글
⊙ 강원도 영월로 떠난 김삿갓은 세상을 등지며 세태를 조롱하는 시 남겨
⊙ 비록 생은 불우했지만 월트 휘트먼, 이시가와 다쿠보쿠와 함께 세계의 3대 민중시인으로 꼽혀
⊙ 갈 곳 없는 시인을 따뜻하게 거둔 사람이 화순의 창원 정씨 가문
⊙ 김삿갓의 종명지는 지금도 동물 분뇨 냄새 심한 곳에 위치
⊙ 영월로 돌아온 김삿갓 유해를 발견한 것이 향토사학자 고 박영국 선생
⊙ 김삿갓 살던 곳 주변이 단종 숨진 영월 청령포, 인근은 십승지에 들 만큼 산 높고 물 깊어
화순의 적벽이다. 이 적벽은 30년간 출입이 금지됐다가 작년 초부터 제한적인 관람이 가능해졌다.
  1863년 3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東福面)에서 한 방랑객이 쓸쓸히 삶의 종장(終章)을 찍었다. 살아 있다는 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게 없는 생이었다. 김병연(金炳淵·1807~1863), 세상은 그를 본명보다 김삿갓, 혹은 한문으로 김립(金笠)이라 부르길 즐겼다.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호(號)가 난고(蘭皐)다. 난초 ‘란’ 자에 언덕 ‘고’ 자인데 김병연의 삶을 모르더라도 그 뜻이 새겨볼수록 서글프기 그지없다. ‘고’는 흰 머리뼈와 네발짐승의 주검을 본떠 만든 한자다. 그렇다면 난초 만발한 언덕에 스러진 초라한 주검 정도의 뜻이 되겠다. 그는 왜 이렇게 잔인하기 그지없는 호를 택했을까.
 
  메타세콰이아길을 보기 위해 담양(潭陽)으로 향했다가 김삿갓의 종명지(終命地), 즉 숨을 거둔 곳이 부근 화순(和順)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삿갓이라면 강원도 영월이 유명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화순이라니, 하는 관심이 생겼다. 김삿갓의 묘는 왜 영월에 있는데 최후는 전남 화순에서 맞은 걸까? 이번에는 한국의 시선(詩仙)이라 불린 기인이사(奇人異士)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여정이다.
 
김삿갓이 최후에 머문 화순 정씨 가문의 집이다.
  김병연의 고향은 원래 경기도 양주다. 그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그런 그가 방랑시인이 된 것은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 때문이다. 김병연이 네 살 때인 1811년 평안도 땅에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반란이 일어났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이었다.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되짚다 보면 반드시 꼽힐 정도로 나라 전체를 뿌리째 흔들었다. 당시 평안도는 조선 팔도 중 가장 천대받았다. 재능이 있어도 평안도 출신이라면 기피했다는데 평안도민들 역시 조정(朝廷)을 불신했다. 평안도민들이 반(反)정부 성향을 띤 데는 뿌리 깊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후금의 철기(鐵騎), 즉 기병을 피해 산성(山城)에 웅거하는 전략을 택했다. 후금이 조선의 수도를 최단기에 점령하려면 압록강→의주→선천→곽산→정주→안주→숙천→평양→개성으로 진격해야 했다. 실제로 후금의 철기는 바람처럼 조선 강토를 가르며 수도 한양으로 접근했는데 그 속도가 봉화보다 빨랐다고 한다. 물론 봉화를 늦게 올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나라를 지배했던 인조(仁祖)는 조선 역사상 가장 한심하고도 무능한 왕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이런 대책을 세운 뒤 자기가 앞장서 싸우기보다 강화도로 내뺄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하회(下回)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 될 것이다. 백성을 지킬 군사가 없는 평안도 땅은 무주공산(無主空山), 그야말로 허허벌판이 됐다.
 
  후금 군사들의 칼 아래 백성들만 애꿎게 죽어 나갔다. 백성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거기서 나온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는,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민초들은 목도했던 것이다. 백성들을 희생시키고도 인조는 강화도로 갈 틈조차 없어 겨우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당시 선봉장으로 후금의 철기를 이끌고 내려온 장수 용골대(龍骨大) 휘하의 병력이 겨우 4000명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40여 년 전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참패를 못 잊고 다시 ‘오랑캐’에게 농락당했다.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백성이 50만명이라고 한다. 후금 군사가 경상·전라·강원·함경·충청도까지 가지 못했으니 대부분 평안도와 한양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백성을 버린 임금, 그것이 그야말로 ‘개피 본’ 평안도 사람들의 민심이었다.
 
  각설하고,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해야 할 선천 방어사(防禦使)였다. 방어사는 종2품의 고위 관직이었다. 그런데 김익순이 선비가 마땅히 택해야 할 불사이군 대신 항복을 하면서 그의 집안은 한순간에 몰락해 버렸다.
 
  김익순의 아들, 즉 김병연의 아버지인 김안근은 연좌제에 얽힐 것을 우려해 자기 집안의 종복이었던 김성수가 살던 황해도 곡산으로 아들 병연과 그의 형 병하 형제를 보냈다. 충성스러웠던 종 김성수는 형제에게 글공부도 시켰다고 한다.
 
  훗날 조정에서는 김익순이 항복만 했을 뿐 반란의 당사자는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멸족(滅族)의 벌까지는 주지 않지만 이미 김병연의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었다. 경기도 여주·가평을 전전하다가 이들 가족이 마지막으로 깃들인 곳이 영월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김병연의 생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의 일은 알지 못한 채 나이 스물 되던 해인 1826년 과거인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 즉 수석 합격했다. 그런데 당시 시험문제가 화근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글의 주제는 ‘가산에 있는 정시의 충절을 기리고 김익순의 죄를 탄(嘆)한다’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일필휘지, 붓을 휘둘러 이렇게 논박했다.
 
  “너의 혼은 죽어서도 저승에도 못 갈 것이며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과 조부를 맹공한 김병연의 실의에 상상이 갈까? 장원급제의 기쁨보다는 조부에 대한 죄송함, 가세의 몰락, 고단한 신세가 연달아 떠올랐을 것이다.
 
  김병연의 가출은 지금으로 치면 자살쯤에 해당됐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김병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그중 욕설의 백미(白眉)가 자신을 모질게 박대한 시골 서당의 훈장을 향해 날린 다음과 같은 시다. 제목이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이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학생제미십(學生諸未十)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

 
  해석하자면, ‘서당을 내 일찌감치 알고 왔는데 방안에는 모두 귀한 물건뿐이네. 학생 수는 채 열 명이 안 되는데 알량한 선생은 나와서 나를 보지 않네….’ 참으로 재치가 넘치지만 입으로 암송하기는 쉽지 않은 시인의 분노가 느껴질 것이다. 이런 김병연이 전라도 땅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1850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훗날 병들고 늙은 그가 정씨 집 사랑채에서 숨을 거뒀을 때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마을 뒤편 ‘똥뫼’라는 곳에 매장했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정씨 집 앞에는 이런 시비(詩碑)가 서 있어 오가는 나그네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다.
 
  ‘절반이나 이지러진 서가(書架)에는
  수 권의 책이 있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 개의 벼루가 있어
  묵향(墨香)에 스스로 깊이 취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려
  미약한 이 몸이
  이밖에 또 무엇을 바랄소냐’

 
김삿갓이 매장된 똥뫼라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문이다.
  똥뫼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행려병자로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묻은 곳을 이르는 것이다. 일종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김삿갓과 관련된 비석이 서 있는데 바로 옆이 소와 돼지 키우는 축사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분뇨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땅에는 인연이 있는지 200년 전 시인이 숨진 곳이 오늘날에도 소와 돼지의 우리가 되어 있었다.
 
  흔히 김삿갓을 두고 사람들은 세계의 3대 민중시인이라고 한다. 나머지 둘이 누군가 보니 미국의 월트 휘트먼(1819~1892)이 꼽혔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휘트먼은 목수(木手)로 일하며 민중의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이 일본의 대 시인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다.
 
  이시가와 다쿠보쿠의 최종 학력은 모리오카 중학교 중퇴였다. 그는 사회주의적 계몽운동을 펴다 26세로 요절했다. 세 민중 시인을 비교해 보면 나이로는 김삿갓이 가장 연장자가 되고 일본의 이시가와 다쿠보쿠가 가장 어리다.
 
김삿갓의 동상이다.
  비슷한 시기에 3대 민중 시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19세기가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얼마나 백성들이 살기 힘든 시대였는지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김삿갓은 이곳으로 온 것일까? 지금 구암마을에는 김삿갓이 숨진 옛 집이 잘 보존돼 있다. 마당에는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우물에는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이 집은 백인당(百忍堂) 정치업 선생이 1728년 터를 잡은 곳이다. 그 후손들이 290년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데 백인당은 ‘백 번을 참는다’는 당호(堂號)처럼 집을 찾는 식객(食客)을 후히 대접하고 쉬도록 하는 게 가풍이었다. 그의 6세손 정시룡(丁時龍) 선생 대에 김삿갓이 찾아오자 그는 오랜 기간 사랑채를 비워 주고 1863년 김병연이 죽자 장제(葬祭)를 치렀으며 3년 뒤 김병연의 후손이 찾아오자 유골을 넘겨줬다고 한다.
 
  참으로 후덕한 인품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그의 집 앞쪽에는 작은 정자가 서 있으며 그 앞에는 죽장(竹杖)에 삿갓을 쓴 김삿갓의 동상이 서 있다. 김삿갓은 정씨 가문의 후덕함 때문인지 세 차례 이 마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의 족적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맨 처음이 1841년으로 화순적벽(赤壁)을 보고 이런 시를 읊었다.
 
  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
  적벽강심사상류(赤壁江深沙上流)

 
  ‘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위로 흐르는구나’의 뜻이다. 두 번째가 1850년으로 협선루라는 누각에서 시상(詩想)을 얻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약경심홍선(藥經深紅鮮)
  산창만취휘(山窓滿翠徽)
  선군하화취(羨君下花醉)
  호접몽중비(胡蝶夢中飛)

 
  해석하자면, ‘약 캐러 가는 길가엔 붉은 이끼가 깊고 산을 향해 난 창문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그대 꽃 아래 취해 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 있는데’ 정도가 될 것이다. 세 번째가 1857년으로, 그때부터 김삿갓은 평생을 짚고 다니던 죽장을 내던지고 정씨 집에 6년을 머물다 숨을 거둔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후손이 그의 시신을 인수해 간 다음에도 그의 묘가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김삿갓의 유해를 영월로 옮긴 것은 그의 아들 익균으로, 지금의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근처였다. 이후 그의 묘가 ‘김삿갓의 것이었다’고 알려지기까지는 116년이 걸렸다. 여기에는 고 박영국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공무원이자 향토사학자인 박 선생은 ‘영월에 김삿갓의 묘가 있다’는 말을 듣고 1970년대 초부터 탐문을 벌였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의 무덤이다.
  1982년 8월 공직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증언이나 구전(口傳) 같은 단서를 찾았다. 그러던 중 영월 창절서원 원장이던 김영배 옹으로부터 “노루목에 김삿갓 묘가 있다”는 증언을 듣게 됐는데 여기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한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김영배 옹의 증조부였던 현성부판관 김성봉 선생이 와석리로 낙향한 것이다.
 
  김성봉 선생은 같은 안동 김씨 출신인 김병기로부터 “양백지간인 영월과 영춘 어간에 김삿갓의 묘소가 있는데 잘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말이 후손인 김영배 옹에게까지 전해진 것을 김옹이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박영국씨는 김옹과 함께 1982년 10월 17일 이십 리 산길을 걸어 와석리에서 3대를 산 이상기씨를 만났고 그로부터 김삿갓의 묘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일제시대에도 일인들이 김삿갓의 묘를 수소문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우려되는 것은 혹시나 이 글로 인해 화순과 영월 사이에 ‘김삿갓 논쟁’이 일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명인의 고향이 어디냐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지방자치단체가 한두 곳이 아니기에 드리는 말이다. 내친김에 화순에 김삿갓의 동상이 두 군데 있는 사연을 소개할까 한다.
 
전남 화순에 있는 물염정이다.
화순과 담양은 가히 정자의 고장이라 할 만큼 빼어난 정자가 산재해 있다.
  구암마을과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다. 물염정은 중종과 명종 대에 성균관 전서와 구례·풍기군수 등을 지냈던 물염 송정순(宋庭筍) 선생이 지은 정자다. 자신의 호를 땄는데 말 그대로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선비의 다짐이 살아 있다. 송정순은 사화(士禍)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담양으로 가던 중 이곳 경치에 반해 정자를 지었는데 김삿갓 역시 풍광에 매료되고 말았다.
 
  물염정 맞은편에는 기암괴석이 붉게 빛나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화순의 4대 적벽인 물염적벽이다. 훗날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물염적벽은 그 모양이 옹기를 닮았다는 옹성산의 절벽이 동복천에 비친 경치를 말하는 것이다.
 
  화순에는 물염적벽 외에 창랑적벽·노루목적벽(혹은 이서적벽)·보산리적벽 등 4대 적벽이 있다. 중국 양쯔강 상류에 있는,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조조의 백만대군을 화공(火攻)으로 격파한 그 적벽과 비슷해서 붙은 이름이다.
 
  나는 저승의 김삿갓이 비록 고단한 삶을 살다 갔지만 창원 정씨와 박영국 선생 같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가 한심한 역사로 점철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버티는 게 바로 창원 정씨 일가 같은 부자들의 베풂과 뜻 있는 이들의 정성 때문이 아닐까?
 
  나는 창원 정씨 일가가 과거 어느 정도 잘살았고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재산의 과다(寡多)와 관계없이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김삿갓 같은 이들에게 행한 바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한민족의 그런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있었음을 김삿갓의 일생을 통해 배우면서 그런 것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정신이 황폐해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느꼈다.
 
난고 김병연 선생 유허비다. 영월에 있다.
  마지막으로, 김삿갓이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았던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근처에 포도가 한창일 무렵 가 봤다. 이곳은 강원도의 거의 끝부분으로 길 건너편이 경상북도 봉화군이다.
 
  김삿갓이 살았다는 곳에는 기념물과 후손이 지은 관리사무소 비슷한 건물이 있고 후손들이 사는 곳은 한참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곳을 다녀온 탐방객에게 물었더니 매우 가파르다는 것이었다.
 
  시인의 안타까운 삶을 추적하면서도 마음속에선 차를 몰고 가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꾀가 났다. 승용차를 끌고 그 좁은 바위투성이 길로 진입하는 순간 후회가 밀려 왔다. 도무지 차를 돌릴 공간조차 없는 외길이 끝없이 연속돼 진땀이 주르르 하고 이마를 적셨다.
 
  몇 킬로미터를 갔을까 겨우 다리 하나가 보여서 차를 돌리고 다시 그 돌투성이 길을 내려왔다. 김삿갓이 살던 곳이 지금도 이 지경이니 조선시대에는 야생동물 아니면 가지 못했을 곳에 위치했던 것이다. 그 탓인지 그때 몰았던 차를 최근 폐차했는데, 돌이켜 보니 김삿갓 생거지에 갔던 게 무리를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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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독자    (2018-07-05)     수정   삭제 찬성 : 7   반대 : 5
김삿갓이 과거시험에 자기 조부를 비난하는 글을 쓰고 장원이 되었다가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세속과 인연을 끊었다는 말은 후세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보기위해서는 친가든 외가든 윗대로 최소 4대 조상까지 신상명세를 반드시 적어 제출하도록 하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절대적으로 불가한 일입니다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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