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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6〉 힘을 읽는 눈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리분별의 첫걸음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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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天命)은 현실 속의 권력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일을 도모하는 것
⊙ 공자, 권신(權臣)이나 반란세력과 손잡고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 실천할 기회 찾아
⊙ 조광조, 훈구와 사림의 균형 도모했던 중종의 뜻 잘못 읽고 설익은 개혁 강행하다가 좌절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급격한 개혁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조광조.
  《논어(論語)》를 읽다 보면 서로 모순돼 보이는 구절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이런 것이다. ‘위령공(衛靈公)’편에서 공자(孔子)가 말했다.
 
  “사람이 도리를 크게 하는 것이요 도리가 사람을 크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헌문(憲問)’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백료가 계손에게 자로(子路)를 참소하자 자복경백이 공자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대감께서 진실로 공백료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뜻을 갖고 계시니 제 힘으로도 능히 그를 (죽여) 길거리에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리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命)이요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도 명이니, 공백료가 그 명을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서로 상충되는 듯한 이 두 구절을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외척열전(外戚列傳)’에서 이렇게 합쳐 놓고 있다.
 
  “사람이 능히 도리를 크게 할 수 있다지만 그러나 명(命)은 어찌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범위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공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불혹(不惑) 위에 지천명(知天命)이 있다’는 뜻이고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바로 그것이다. 천명은 바꿔 말하면 현실 속의 권력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공자다. 그것이 사리분별이기 때문이다. 《논어》 ‘양화(陽貨)’편은 이런 공자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공자의 현실주의적 처신
 
공자는 권신이나 반란세력과 손잡고서라도 자신의 뜻을 펴고 싶어했다.
  〈양화가 공자가 자신을 찾아와 만나보기를 원하였으나 공자가 만나기를 거부하자 양화가 공자에게 (공자가 없는 틈을 타서)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냈는데 공자도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사례를 하려고 가다가 길에서 만났다.
 
  “이리 오라. 내 그대와 말을 하고 싶다. 훌륭한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소.”
 
  “(공직에) 종사하기를 좋아하면서 자주 때를 놓치는 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소.”
 
  “세월이 흘러가니, 세월은 나를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는다.”
 
  “알겠소. 내 장차 벼슬을 할 것이오.”〉
 
  원래 양화는 노(魯)나라 왕족인 맹씨(孟氏)인데 실력자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 있다가 신분이 상승해 대부(大夫)가 되어 노나라의 국정을 좌우하게 된다. 그 양화가 이때 자신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계환자(季桓子)를 가두어 놓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좌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화는 (벼슬을 주기 위해) 공자를 만나고 싶어했다. 공자는 가능한 한 피하다가 결국은 “알겠소. 내 장차 벼슬을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경우만 보면 공자가 내심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 주자(朱子)도 그런 방향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대부분 공자를 다분히 도덕주의자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잠시 뒤에 이어지는 이 구절은 어떻게 볼 것인가?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비읍(費邑)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서 부르니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한다.
 
  “가실 곳이 없어서 하필이면 공산씨에게 가시려는 겁니까?”
 
  공자는 말했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하릴없이 그러겠느냐?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동쪽의 주(周)나라를 만들어 볼 것이다.”〉
 
  공산불요는 계씨(季氏)의 가신이며 양화와 함께 계환자를 잡아 가두고서 비읍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비읍은 당시 노나라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자의 억지 해석이 무색할 정도로 공자는 권력에 대한 참여의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주자나 자로는 도덕주의의 명분에 사로잡혀 있다. 《논어(論語)》의 편집자는 이 같은 주자나 자로의 반박을 예상이나 한 듯이 다시 한번 공자의 권력의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인용한다.
 
 
  법과 권도
 
  〈필힐(佛肹)이 공자를 부르자 공자는 가려고 하였다. 이에 자로가 말한다.
 
  “옛날에 제가 스승님께 듣기를 ‘직접 그 몸에 불선을 한 자일 경우 군자는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필힐은 지금 중모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스승님께서 가려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 이런 말이 있다.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찌 뒤웅박과 같아서 한 곳에만 매달려 있어 먹지(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겠는가?”〉
 
  필힐은 진(晉)나라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의 땅 중모(中牟)를 다스리는 읍재(邑宰)다. 우리로 치면 군수에 해당하는 지방관리이다. 그 필힐이 공자를 부르고 공자는 가려고 한다. 앞에서 공산불요가 부르자 가려 했던 것과 상황이 똑같다. 일종의 반란세력인데 그가 부르려 함에도 공자는 가려 했다. 그러나 결국 공자는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상의 이 세 가지가 보여주는 공자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송(南宋)의 학자 장경부(張敬夫)의 풀이가 핵심을 찌른다.
 
  “자로가 예전에 들었던 것은 군자가 몸을 지키는 떳떳한 법(法)이요, 공자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은 성인(聖人)이 도리를 몸소 행하는 큰 권도(權道)이다. 그러나 공자께서 공산(공산불요)과 필힐의 부름에도 모두 가려고 하셨던 것은 ‘천하에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며, 끝내 가시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을 끝내 변화시킬 수 없고 그 일을 끝내 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니, 하나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인(仁)이고 하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知人之鑑]이다.”
 
 
  미덕도 상황을 무시하면 병폐만 드러난다
 
  도리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리를 행함에 있어 상황, 즉 현실 권력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 더욱 본질적인 것임을 공자는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편집자는 필힐의 사례 바로 다음에 공자의 예론(禮論)을 싣고 있는데 이때의 예는 다름 아닌 사리분별(事理分別)로 파악할 때 명확하게 이해된다. 공자가 말해 주는 대상도 다름 아닌 ‘도덕주의자’ 자로다.
 
  〈공자는 말했다.
 
  “유(由·자로)야, 너는 여섯 가지 좋은 말[六言]과 그에 따른 여섯 가지 폐단[六蔽]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이에 자로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말했다.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해 주마. 어짊[仁]을 좋아하기만 하고 (그에 필요한) 배움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어리석게 된다[愚]는 것이다. 사람을 평하고 논하기[知=知人]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쓸데없는 데 시간과 노력을 탕진하는 것[蕩]이 된다. 신의[信]라고 하여 하나만 잡고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잔인해진다[賊=殘]는 것이다. 곧은 것[直]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너무 급해진다[絞]는 것이다. 용맹[勇]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러워진다[亂]는 것이다. 강한 것[剛]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경솔하게 된다[狂]는 것이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禮)를 배운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풀어 보자. 어짊을 좋아하기만 하고 그에 따른 예, 즉 사리분별을 배우지 않을 경우 상황판단을 하지 못해 결국은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뜻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도 똑같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실패 원인으로 ‘학문의 부족’을 꼽았다.
  조광조(趙光祖)에 대해서는 지금도 양극단의 평가가 존재한다. ‘불운한 혁명가’니 ‘실패한 개혁자’니 하는 것은 그의 뜻을 존중하는 평가다. 현실에서는 실패했지만 그의 뜻만은 높이 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숙함, 편가르기와 패거리주의, 경박함, 현실정치력의 부재(不在) 등은 주로 기성세력을 존중하는 쪽에서 조광조를 비판하는 메뉴들이다. 어느 하나의 평가가 실상에 적중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일이나 사람에게는 언제나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보다 냉철하게 중종 시대의 좌절한 청년개혁가 조광조의 면모를 살피기 위해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퇴계는 조광조를 이렇게 평했다.
 
  “정암(靜庵·조광조의 호)은 타고난 성질이 신실(信實)하고 아름다우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치에서) 시행한 것이 사리에 지나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일이 실패하는데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학문이 충실하고 덕성과 재능이 성취된 뒤에 나아가서 정사(政事)를 담당하였더라면 어디까지 나아갔을지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퇴계보다는 젊은 세대인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계에 나선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舊)세력의 바람도 막지 못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을 실천하려고 왕에게 왕도(王道)를 이행하도록 간청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경계로 삼는다.”
 
  두 사람의 공통된 지적은 곧 ‘학문의 부족’이다. 그것은 배움이 부족했다는 것이고 그 배움이란 다름 아닌 예(禮)에 대한 공부라는 점에서 사리분별의 훈련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조광조는 성종13년(1482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사실 이때는 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루던 때였다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성종의 무난한 정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성종시대에는 이렇다 할 업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에 큰 화(禍)를 부른 정쟁(政爭)도 없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태평성대’였다.
 
  성종의 치세는 그가 12살이던 1494년 끝나고 연산군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에 눈을 뜨게 될 나이에 폭정(暴政)의 단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광조는 태생적으로 불운을 안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조광조의 좌절
 
  조광조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2년 윤1월 26일 모종의 사건에 연루돼 문초를 당할 때였다. 한양에 올라왔을 때 뜻밖에도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신진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때 친구들과 어울려 시국을 논하고 “요즘 유생들은 과거에만 몰두하느라 성리학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가 일종의 역모(逆謀)로 몰릴 뻔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무관함이 밝혀져 3년 후인 중종5년(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안당 등의 후원에 힘입어 이미 한양 지식인 사회에서는 ‘사성십철(四聖十哲)’이니 하여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도학정치를 꿈꾸는 젊은 유학자들이 속속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원래 ‘사성십철’이란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안자, 증자, 자사와 함께 맹자를 포함시켜 ‘사성’이라고 했고 그 밖에 뛰어난 제자 10명을 일컬어 ‘십철’이라고 했다. 아마도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이 호기를 부려 그 같은 별명을 스스로에게 붙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당시에는 성리학 본연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 흐름이 강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독선과 교만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1519년 새해를 종2품 대사헌으로서 맞았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대사헌이란 자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대사헌 조광조가 칼을 뽑았다.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위훈(僞勳)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박원종·성희안·류순정 등 ‘반정 3훈(反正三勳’은 세상을 떠났지만 정국공신(靖國功臣) 명단에 올랐던 가짜 공신들이 중앙권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국공신 1등에 올랐던 홍경주는 살아 있었다.
 
  중종은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지 모른다. 조광조는 이 점을 과소평가했다. 내친김에 훈구의 뿌리를 통째 뽑아 버리려 했다. 훈구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광조는 11월 일곱 차례의 주청을 통해 위훈삭제를 관철했다. 2, 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원이 훈작(勳爵)을 삭탈당했다. 전체의 4분의 3에 달하는 76인의 훈작이 날아갔다. 당위(當爲)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반동(反動)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훈구의 전횡도 싫었지만 사림의 독선에도 중종은 넌덜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훈삭제가 이뤄진 지 불과 4일 만에 훈구파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중종의 생각이 반(反)사림으로 돌고 있음을 간파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남곤과 심정이 그들이다.
 
  결국 중종은 당파를 형성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광조 일파를 잡아들인다. 처음에는 국문(鞠問)도 않고 죽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 등을 옥에 가두었다. 그후 조광조와 김정·김구·김식 등은 사형을 시키기로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이 눈물로 호소하여 일단 능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올라 유배 가 있던 조광조 일파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중종을 설득했다. 결국 한 달 후인 12월 20일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왔다.
 
 
  필부의 용기, 아녀자의 어짊
 
공자가 ‘큰 어짊’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한 관중.
  조광조에게 꼭 전하고 싶은 공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논어》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관중은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기꺼이 따라죽지 못했고 또 환공을 돕기까지 했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나(우리)는 머리를 헤쳐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들이 작은 신의[諒]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매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굴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
 
  마지막 문장은 다름 아닌 필부의 용기[匹夫之勇]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아녀자의 어짊[婦人之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사리분별의 출발은 필부의 용기, 아녀자의 어짊을 넘어서는 데서 출발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공자의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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