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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5〉 백제 무왕의 한恨과 전북 익산 쌍릉의 비밀

“100년 전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던 인골이 왜 쌍릉에서 발견됐을까?”

글 : 문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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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보고서에서 쌍릉에 일본학자 보고서에는 없던 인골 존재했던 것 밝혀져
⊙ 무왕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놓고도 이견 있어
⊙ 해동증자로 불릴 만큼 효심 깊다는 설화… 마는 삼이 아니라 고구마와 비슷한 식용식물
⊙ 풍전등화 같은 나라 살리려 익산으로 천도 꿈꿔, 그 흔적이 왕궁리 유적
⊙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에 의존해 국난을 헤쳐나가 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
⊙ 쌍릉에서 가까운 고도리 석불 두 기는 무왕과 선화공주를 상징?
전북 익산 쌍릉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것으로 알려졌다. 명당으로 소문난 탓인지 주변에 분묘가 많다.
  “아니, 이건 인골(人骨)인데?… 1917년 보고서엔 사람 뼈가 있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지난 3월 중순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의 큰 무덤(일명 대왕릉)을 발굴하던 조사단원들은 경악했다. 100여 년 전 처음 이곳을 발굴했던 일본 학자의 보고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사람 뼈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덤 속 방인 현실(玄室) 한가운데에 화강암 재질 관대(棺臺)가 있고 그 위쪽에 있던 나무상자를 열어 보니 두개골 조각 등 인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화재청은 2일 “익산 쌍릉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며 “1917년 발굴 때 유물과 치아를 수습한 뒤 유골은 이 상자에 넣어 다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진행하는 이번 발굴은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8월 시작됐다.
 
  과연 누구의 뼈일까? 쌍릉은 《고려사》 등에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오랫동안 쌍릉 중 ‘대왕릉’은 무왕, ‘소왕릉’은 무왕과 함께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대왕릉에서 출토된 치아를 2년 전 국립전주박물관이 분석한 결과 “20~40세 여성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해 “왕이 아니라 왕비의 무덤일 것”이란 추정이 나왔다. 여기에 유물 중 신라계 토기가 있다는 점을 들어 무릎을 탁 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무덤이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선화공주가 과연 무왕의 왕비였을까?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 발굴 결과, 무왕의 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최대 귀족인 사택씨(砂宅氏)인 것으로 나왔다. 그럼 무덤의 주인공은 사택왕후일까?
 
  - 《조선일보》 4월 3일 자 보도
 
  숱하게 지나치던 호남고속도로 왕궁-삼례IC에 들어선 순간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귀중한 역사의 보고(寶庫)에 그간 무지했구나” 하는 자탄(自嘆)이 가슴을 울렸다. 위대한 백제의 꿈이 서려 있는 도시, 지금은 부여나 공주에 비해 방치되다시피 한 유적, 그렇지만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 유산(遺産)’으로 최근 등재된 전북 익산을 독자들과 함께 걸어보려 한다.
 
 
  무왕이 태어났다는 마룡지 옆은 왕갈비탕집이
 
무왕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는 마룡지의 모습이다.
  익산 변두리에 ‘마룡지’라는 연못이 있다. 지금은 바로 옆에 왕갈비탕집이 들어서 있다. 《삼국유사》엔 이곳의 신비한 전설이 기록돼 있다.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살던 여인이 어느 날 연못 속의 용(龍)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인은 백제 무왕(武王)의 어머니이며 ‘연못 속의 용’은 무왕의 친아버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앞서 《조선일보》 보도대로 그 왕이 누구인지를 놓고는 지금까지 설이 엇갈려 왔다. 《삼국사기》는 무왕의 친부(親父)를 29대 법왕(法王·재위 599〜600)이라 보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북조(北朝)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는 무왕을 27대 위덕왕(威德王·재위 554~598)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위덕왕과 법왕 사이에는 28대 혜왕(惠王·재위 598~599)이 있었지만 법왕과 혜왕의 재위기간은 합쳐도 3년뿐이다. 무왕의 친아버지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존엄의 상징인 ‘용’을 등장시킨 것은 그만큼 무왕의 업적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무왕은 서기 600년부터 641년까지 재위했고 641년 사망했지만 태어난 연도는 역사에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자마자 왕이 됐을 리는 없고 적어도 열 살 내지 스무 살이 돼서야 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친부는 위덕왕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29대 법왕이나 28대 혜왕이라고 추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듯하다.
 
  이 마룡지 주변에 서동생가터라는 곳이 있다. 서동은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부근에서 백제 기와가 발견됐기에 ‘서동대왕모축실처(薯童大王母築實處)’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 어머니가 지은 집터라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1.2km쯤 외곽으로 가면 길가에 주꾸미 음식점이 보이는데 그쪽으로 들어가면 봉분 두 기가 나란히 있다. 무왕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가 잠든 곳이라고 하는데 최근 무왕의 것으로 추정됐던 큰 봉분에서 여자의 흔적이 나왔다는 발표가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용하는 ‘김기사’라는 내비게이션에는 ‘익산쌍릉’ ‘서동생가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물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 조성된 서동공원은 볼 것이 없는데도 내비게이션에 등장하니 선후가 바뀐 느낌이 들었다.
 
  많지 않은 사서와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늘 마(麻)를 캐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해 사람들이 맛동이(서동·薯童)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구절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마’가 삼(麻)이 아니고, 맛과의 덩굴풀 뿌리를 말하는 이야기도 있다. 마는 고구마가 전래되기 전에 식용으로 사용하던 것이라는 얘기다.
 
 
  설화는 무왕의 어머니가 왕과 야합했음을 암시
 
왕궁리에 서 있는 석탑은 백제 탑의 간결함을 잘 보여주는 명품이다.
  왕자인데도 가난했다는 것은 무왕의 친부와 어머니가 야합했음을 상징한다. 사서에서 ‘용과 관계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닐 때 사용한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도 ‘해동증자’로 불린 것을 보면 효심만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었던 것 같다.
 
  익산토성이 있는 오금산에는 서동이 어린 시절 마를 캐다 금덩이를 다섯 개 얻었다는 설화가 있다. 실제로 오금산에서는 야생 마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란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서동은 선화공주가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로 가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친해진 뒤 다음과 같은 노래를 유행시켰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두고 서동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이 노래의 여파는 컸다. 장안에 이 노래가 퍼진 것을 알게 된 진평왕은 크게 화를 내면서 선화공주를 귀양보내는데 거기서 서동은 선화공주의 마음을 얻고 그녀를 아내로 맞는다.
 
  서기 600년 제29대 법왕의 뒤를 이어 서동이 무왕으로 취임했을 때 백제의 사정은 풍전등화 같았다. 위로는 강성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신라가 들불 일어나듯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왕은 난관을 타개하려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다. 그 별궁(別宮)이 익산 왕궁리 유적이다.
 
  이 유적을 두고는 한동안 설이 엇갈렸다. 무왕이 세운 것이다, 보덕국의 안승이 세운 것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세운 것이다 라는 설이 난무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무왕대에 조성된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조사 결과 전각(殿閣)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정원시설 등이 드러났고 유리-금제품-토기-수부(首府)라는 글씨가 적힌 기와 등 1만여 점의 유물도 출토됐다. 익산과 전주를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보면 왕궁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허허벌판 왕궁리에서 눈길을 끄는 구조물이 있다.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유적 한복판에 우뚝한 오층석탑은 건축연대가 불확실하지만 주변에서 대관관사(大官官寺), 관궁사(官宮寺), 왕궁사(王宮寺)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됐다.
 
 
  백제 미(美)의 절정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5층 석탑은 주변이 고즈넉해 언제 보아도 좋지만 일출 때나 석양 때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기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이 기와가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망하기 전) 9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나와 그 너비가 5보나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의자왕대에 멸망하기 전 기이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머리 잘린 닭이 한참을 걸어 다니는가 하면 우물에서 귀신이 나와 ‘백제는 망했다’고 울부짖었다는 등의 해괴한 사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로 미뤄 무왕대에 별궁으로 쓰이던 왕궁리 유적은 의자왕 때 사비성(부여)을 수도로 고수하면서 사찰로 변했고 왕궁리 오층석탑의 명칭 역시 대관관사 혹은 대관사, 왕궁사로 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금마리란 익산의 옛 지명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지금까지 본 여러 석탑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명품이다. 완벽한 자태에 군더더기 없는 형상이 백제 미의 정화(精華)라 할 만하다. 새벽녘이나 황혼 무렵 벌판에 홀로 선 오층석탑을 보면 사라진 왕국의 정서, 혹은 한(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은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며 무슨 꿈을 꾼 것일까? 그 목적을 잘 나타내는 곳이 왕궁리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륵사지다. 미륵사지는 무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삼국유사》 무왕 조에 남아 있다.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 등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는 창건설화와 관련된 기록이다. 여기서 용화산은 지금의 미륵산을 말한다. 그런데 용화(龍華)나 미륵은 사실상 같은 뜻이다. 불교에서 용화는 미륵불이 사는 정토(淨土)를 말한다.
 
  내친김에 미륵불은 어떤 부처님인지 알고 넘어가겠다. 미륵은 원래 석가모니의 제자였다고 한다.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하는 미륵은 성(姓)이며, 이름은 ‘아지타(Ajita·阿逸多)’이다. 흔히 우리가 자씨(慈氏)보살이라고 부르는 이가 바로 미륵불이다.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는데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솔천’은 지나친 욕심이나 번뇌·망상으로 인한 방황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석탑에 어린 사라진 무왕의 꿈
 
미륵사지 석탑은 완전히 해체해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석재들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께서 입멸한 뒤 56억7000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미륵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이 있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예수가 세상이 멸망할 때 재림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다. 그래서 미륵불은 구세주와 같다. 그때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지상낙원인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고 부르는데 사시사철 기후가 화창해 사람들은 병을 앓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하고 사이좋게 사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의 얼굴은 복숭아꽃처럼 곱고 금은보석이 땅에 지천으로 널렸어도 욕심내는 사람이 없으니 수명은 극히 길어진다. 미륵은 6만 살을 살고 미륵의 법 역시 6만 년이 지속되니 그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지상낙원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미륵불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미륵신앙으로 이어져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서 태어나기를 바라고, 말세를 구제하기 위해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특히 힘없는 민중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미륵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백제 성왕 4년(526)에 사문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를 지었을 때를 기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위덕왕 때 미륵석상(彌勒石像)을 일본에 전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보면 무왕 때 건설한 익산 미륵사와 미륵탑은 백제가 미륵불교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무왕이 집권했을 때 백제는 꺼져가는 촛불과 비슷한 신세였다. 갑자기 군사력을 키울 수도, 고구려나 신라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고립무원 상태였다. 그랬기에 백제의 권력자와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미륵의 출현을 바라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사실 미륵 사상은 신라에서도 널리 퍼졌다.
 
미륵사지에는 동원 9층 석탑도 있었다고 하나 실물은 없어 모형을 세워놓았다.
  신라 법흥왕 14년(527) 흥륜사(興輪寺)에 미륵존상을 모셨고 혜공왕(惠恭王) 2년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를 중건하면서 미륵장육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미륵불 사상의 대표적 유물로 꼽힌다. 심지어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시대가 시작됐을 때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역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上帝)임과 동시에 미륵불이라 칭하기도 했다.
 
  1980년대 본격적으로 발굴된 미륵사지에서는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것을 근거로 사가(史家)들은 미륵사지를 동양 최대이자 최고의 국가사찰이며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을 목적으로 한 절이었다고 본다.
 
  이 미륵사는 17세기 무렵 폐사됐다. 미륵사지에는 볼 만한 유물들이 많은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미륵사지 당간지주다.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幢), 즉 불화(佛畵)를 그린 깃발을 거는 장대를 말한다. 미륵사지엔 두 기의 당간지주가 있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지금 해체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지금 미륵사 석탑 주변에는 공장과 같은 형태의 가설물이 세워졌고 그 안에서는 석공들이 미륵사지 석탑을 일일이 쪼며 옛 모습을 찾는 데 땀을 흘리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가 무려 14m나 되며 탑신의 1층 네 면에는 문을 만들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내부의 중앙에는 사방 99cm의 거대한 사각형 심주를 세웠고 옥개석들은 끄트머리를 살짝 치켜드는 기법으로 목탑에서 보이는 수법을 차용했다.
 
  익산에는 무왕 탄생설화지(마룡지와 생가터), 쌍릉, 왕궁리-미륵사지 외에도 볼 것이 많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제석사지 역시 무왕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45호)은 7세기 초의 작품이다.
 
  주변에는 평지인 익산을 보호하려는 듯 익산토성(해발 125m)-미륵산성(해발 430m)-낭산산성(해발 162m)-금마도토성(해발 87m) 등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이 가운데 미륵산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건설했다고 해 ‘기준성’이라고도 불린다.
 
 
  쌍릉은 명당으로 소문나 주변에 무덤들이 많다
 
무왕과 선화공주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익산 서동공원에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꿈꾼 미륵세계가 훗날에도 이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 익산에 또 있다. 왕궁리 유적지 맞은편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가운데 옥룡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바로 그곳에 200m 거리를 두고 미륵불 두 기가 있다. 우리가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이라고 부르는 이 미륵불에는 전설이 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서쪽)와 여자(동쪽)인데, 평소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 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생각났다. 또한 석불입상이 떨어져 있는 거리가 200m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쌍릉의 거리와 비슷한 것이 예삿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그것을 계산한 뒤 세웠다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선 철종 9년(1858)에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쓰러져 방치된 석불입상을 지금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때 쓴 《석불중건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 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혔는데 남쪽만은 터져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을 끄는 마부(馬夫)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고도리 미륵은 200m 거리를 두고 2기가 마주보고 있다.
마치 무왕과 선화공주를 상징하는 듯하다.
  고도리 석불입상은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 짧은 코, 웃음기를 담은 작은 입 등이 마치 장승과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볼수록 듬직하고 소박해 눈길을 더욱 끌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보물 46호인 고도리 석불입상의 관리 상태다.
 
  석불입상 주변은 온통 지저분한 비닐하우스 천지인데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개 한 마리가 객(客)들을 향해 으르렁대며 사납게 짖어대 접근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 석불입상 주변에는 ‘무왕 길’이라는 산책로도 조성돼 있었는데 조금 더 정비하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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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숭철    (2018-05-09)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7
이 지방에서 자라면서 듣고, 그 후에 알게된 점에 대해서 독후감을 대신하고저 한다.
1. 미륵산성은 고조선 준왕이 건설했기에 기준성이라고 한다는데, 내가 어른들로 부터 들은(70여년 전)바로는 이 왕릉이 기자왕릉이라는 전설이 있었고, 기자조선이 망할 때에 피난을 직산(천안 부근), 또는 익산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직산에는 이런 묘가 없기 때문에 익산에 있는 능이 기자묘일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글을 읽고, 본인이 직산에도 직접 답사도 해보았으나 그런 묘가 없음을 확인한 적이 있음. 기자왕능일 가능성도 있을것인데 필자는 백제왕능으로 단정함에는 조급한 면이 있다고 생각됨.
2 .1917년 발굴당시에는 인골이 있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이 번에 유골이 있음이 확인되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에 한반도 기를 제거하겠다고 여러군데에 철심을 박은 점 등일 생각하면 이 유골도 일본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됨.
3. 미륵탑을 세울 때에 저수지를 메웠다는 내용은 우리가 어렸을 때에 미륵탑 밑에는 큰 저수지가 있고 스님들이 식기로 만든 큰 배를 타고 다닌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이번 해체 작업시에 호박돌로 기초를 하였음이 확인되었고, , 몇 년전에 KBS에서도 방영했듯이 그 지역에 강 물이 흘렀었다는 것을 확인한 바가 있었음.
또한 호남이라는 어원에는 옛날 지도에는 전라북도의 절반정도의 큰 호수가 있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 (현재는 내륙임에도) 어곳리, 내곳리, 강변마을, 춘포, 새마을 등 물과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있고, 전라북도 북부(금강 이남 산맥)에서 익산을 배로 왕래했었다는 어른(110세 이상)들로 부터 들었음.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920년 경에 매립을 하지 않았나(?) 생각 됨.( 호남의 어원을 정리하자면서 나도 무료로 봉사를 하겠다고 정부에 건의하였더니 정부에서는 전라북도로 이첩, 전라북도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채택을 할 수가 없다는 회신이 오고 끝났음). 010-9284-0248
  이박리    (2018-05-05)     수정   삭제 찬성 : 8   반대 : 2
학교에서 배운 백제 무왕의 얘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외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살아갈 수 있는 자주와 외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비운의 무왕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에 얽힌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란 사실에 마음에 신산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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