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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9〉 일본의 뎃포 전력화(戰力化)는 전략적 ‘아웃소싱’의 산물이었다

글 : 신상목  (주)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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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 16세기 이후 일본인 중심의 해적 집단에서 일본인·중국인·동남아인들이 참여하는 다국적(多國籍) 해상(海商) 집단으로 변모
⊙ 포르투갈-중국의 동아시아 무역에서 중국인 왜구 집단이 연결 고리 역할… 일본에 뎃포(조총) 전한 선박도 중국인 왜구의 배
⊙ 일본 다이묘들, 왜구의 경제적·전략적 이익 주목… 왜구를 통해 초석·목면·철 등 전략물자 입수해 뎃포 전력화에 성공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일본 나가사키에 온 포르투갈 무역선. 일본인들은 ‘남만선(南蠻船)’이라고 불렀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뎃포(鐵砲)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요동치게 하는 일대 요인이 되었다. 뎃포의 등장으로 전국(戰國)시대 패권 양상이 변화하여 통일 일본이 탄생하였고, 나아가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한·중·일(韓中日) 3국간에 대규모 국제전이 발발하였다. 신흥국의 부상(浮上)으로 세력 균형이 깨지면 신흥 강국의 현상타파 의지와 기존 강국의 현상유지 의지가 충돌하여 전쟁이 발발한다는 논리가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es trap)’으로 불리는 고전적 전쟁론이다. 16세기 말 동아시아에서는 조선과 중국이 일본을 신흥 강국으로 여기고 견제하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을 기할 틈도 없었다. 중화문명의 핵심부에 있던 두 나라는 변방국 일본의 침공을 받고 나서야 판도 변화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일본의 전력(戰力) 상승은 전격적이었다.
 
  뎃포의 도입이 이러한 전란을 촉발한 중요한 기술적 요인이 되었다는 것에는 역사가들의 이론(異論)이 없다. 역사적으로 신무기의 등장이 세력 균형의 변동을 초래하고 전쟁으로 귀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16~17세기에 걸쳐 뎃포가 동아시아 각국의 전력에 미친 영향을 이해함에 있어 놓쳐서는 안 될 특기(特記) 사항이 하나 있다. 일본은 당시 뎃포 운용에 필요한 핵심 요소를 완벽하게 내재화하지 못한 ‘반쪽 상태’에서 뎃포의 주(主)전력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화약 제조가 어려운 나라
 
조선의 화포 천자총통. 조선은 화약 원료가 부족해 화포의 전력화(戰力化)가 쉽지 않았다.
  뎃포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제반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뎃포는 ‘화약’의 존재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화약은 인류 3대 발명품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친 기술적 개가(凱歌)의 상징이다. 그만큼 15세기 이전까지 화약 제조 기술은 최중요 전략기밀로 취급되었다. 원(元)나라는 특수 관계의 부마국(駙馬國) 고려에도 그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엄격한 통제를 뚫고 최무선이 원의 상인을 통해 어렵사리 카피한 것이 한반도 화약 역사의 시초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중국의 화약 기술을 흡수한 고려는 당대의 화약 선진국이 되었다. 14세기 말에 이미 완성도 높은 화약을 제조하여 그 폭발력을 인명 살상력으로 전환한 무기를 제조하여 실전에 활용했다. 그를 이어 받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나 조선의 화약 기술은 다른 의미에서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타국(他國) 전파를 우려하기 이전에 중국에 버금가는 화약 기술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괘씸죄로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한반도는 화약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단절된 관계였다. 현대 개념으로 말하면 원이나 명(明)은 고려나 조선이 우방국이 된 다음에도 화약이라는 전략기술을 이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화약은 초석(礎石·saltpeter), 유황(sulfur), 숯(carbon)을 각각 75:10:15의 비율로 혼합하여 제조한다. 이들 중 핵심은 초석이다. 초석은 자연 채취가 아니라 제조(manufacture)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 공정이 꽤 복잡하여 우연적으로 그를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고려나 조선은 화약 제조법을 획득하기는 하였으나, 기술이 있다고 원하는 만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재료의 확보였다. 한반도에는 초석이 부족했다. 보다 정확히는 초석의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을 다량 함유한 염초토(焰硝土)가 부족했다. 동물의 분변(糞便)에 소변의 요소(尿素)가 가해져 장시간 박테리아의 분해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 천연 질산칼륨인데, 한반도는 염초토 생성을 위한 인구나 가축의 수가 부족하였다. 인위적으로 초석 생산을 늘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일본, 무역을 통해 화약 기술 입수
 
  유럽은 이보다 사정이 나았다. 일단 가축이 많았고 가축의 분변을 고(高)순도 질산칼륨 생성에 유리하도록 처리하는 기술이 있었다. 13세기 이후 아랍에서 건너온 연금술(鍊金術)로 축적된 화학의 기초가 도움이 되었다. 인도와의 직교역로가 열린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더욱 많은 양의 초석을 외부로부터 조달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화약 발명국이라 알려져 있지만, 기록이 없을 뿐 인도가 먼저 가연성, 폭발성이 높은 폭죽을 만들어 축제 때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인도에는 유럽보다 앞선 초석 제조 기술이 있었다. 그것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인도의 초석을 약탈적 무역으로 획득하여 가져갔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역사는 화기(火器)를 사용하는 전쟁으로 점철되는데, 인도에서 공급되는 초석이 없었다면 그 정도의 화기전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화약의 불모지대였다. 대륙과 한반도에서 기술 이전이 차단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기술이 발생할 수가 없었다. 실질적으로 15세기까지 화약이 부재한 지역이었다.
 
  전기(轉機)가 마련된 것은 16세기 중엽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땅에 발을 디디면서 화약을 둘러싼 일본의 상황이 일변한다. 이때는 이미 유럽의 화약 기술이 중국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의 조우를 기화(奇貨)로 단숨에 화약의 실전(實戰) 무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중화(中華)체제하에서 중국으로부터 화약 기술을 정상적으로 입수할 방법이 없었던 일본은 그 체제를 우회하여 서양 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화약 문명 편입의 돌파구를 마련한 셈이다. 중화 체제의 변방에 위치한 덕분에 누리던 자율성의 틈새가 득이 되었다. 틈새의 핵심은 ‘무역’이었다. 일본 스스로의 능동적 노력이 아닌 서양의 접근이 제공한 수동적 기회였지만, 어쨌건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해상 교역의 파일럿, ‘왜구’
 
중국-일본의 공(公)무역은 중국의 인가장을 소지한 주인선(朱印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의 뎃포 전력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가 ‘왜구(倭寇)’이다. 한국에서는 노략질이나 일삼던 일본의 해상 도적떼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왜구의 실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근 서양의 동양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16세기 왜구에 대해 다양한 연구와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해석의 포인트는 왜구의 존재가 서양문물의 동아시아 전파에 있어 ‘길잡이’ 또는 ‘파일럿(pilot)’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같은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5세기 이전의 왜구와 16세기 이후의 왜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전자(前者), 즉 전기(前期) 왜구는 주로 일본 지역에서 발흥한 해적 집단이 주를 이루나, 후기(後記) 왜구는 인적 구성이나 활동 영역과 성격 면에서 완전히 다른 집단이었다.
 
  후기 왜구는 중국인들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들은 오히려 소수(少數)였고, 일부 동남아인들도 섞여 다민족(多民族)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그룹이 있으나, 본거지에 따라 동남아 거점, 남중국 연해 거점, 일본 규슈 거점의 왜구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인들이 다수였음에도 ‘왜(倭)’구라고 부르는 것은 명나라의 사가(史家)들이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명의 사가들은 명의 법도에서 벗어난 불법 집단을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에 기존의 이국 해적에 대한 멸칭(蔑稱)을 사서(史書)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후기 왜구의 발흥은 명의 해금(海禁) 정책에 기인한다. 명은 조공(朝貢)무역 체제 유지를 위해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私貿易)을 규제했다. 심할 때에는 연안 어부들이 아예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출어(出漁)를 금지하고 연안 도서(島嶼)의 무인도화 정책으로 섬 주민을 강제로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이러한 폐쇄 정책은 남중국 연안 주민의 생존권을 크게 위협하였다. 중국의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일대의 연안은 토질이 척박하여 농업만으로는 거주민들의 생계 유지가 어려운 지역이다. 더구나 이곳은 당(唐), 원, 송(宋)에 걸쳐 대대로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누린 경험이 있는 곳이다. 명 조정의 해금 정책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순응하기 어려운 압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왜구의 만남
 
  16세기 들어 명 조정의 통치력 약화를 틈타 밀어(密漁)와 밀무역(smuggling)에 나서는 주민들이 생겨났다. 변경 지역에서 무역(trade)을 억제하면 밀무역이 성행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현상이다. 특히 해안 지역은 그러한 속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바다는 드넓은 곳이다. 쾌속정이 단속을 하는 현대에도 바다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 옛날 무동력선으로 관리들이 바다를 엄격히 통제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무역 통제가 심할수록 밀무역의 이익은 커진다. 상인 기질이 뛰어난 광둥, 푸젠, 저장의 주민들은 점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밀무역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러한 중국 쪽 밀무역 상인들의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포르투갈의 등장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Goa)를 기점으로 15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진출을 모색한다. 말라카, 자바, 시암, 참파 등에 무역 포스트가 만들어지고 1540년대 들어서는 드디어 동중국해에 진입한다.
 
  포르투갈은 명과의 무역을 희망했지만, 전술(前述)한 대로 명 조정은 조공무역 외의 사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중국 밀무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동남아 일대의 무역 포스트에서 거래를 트기 시작한 두 세력은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 동중국해 일대에서 이인삼각(二人三脚)의 무역 파트너십을 형성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과 동남아에서 운반해 온 물자를 중국 상인들에게 넘기면 중국 상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밀무역 유통망을 가동하여 처분하고, 그 대가로 얻은 이익을 포르투갈 상인들과 나누는 일종의 대리무역이 성행하였다.
 
  1543년 이러한 활동에 종사하던 중국인 왜구 왕지(王直, Wang Zhi)의 정크선이 태풍의 영향으로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한다. 바로 그 배에 일본에 조총을 전한 포르투갈인들이 타고 있었다. 유럽과 일본의 만남 자체가 왜구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일본 다이묘들, 왜구를 체제 내로 편입
 
왜구와 명나라 군대의 전투. 16세기 이후 왜구는 해적 집단에서 해상(海商) 집단으로 변모한다.
  후기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다. 처음부터 도적 집단인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중국 왜구들은 그저 생계를 위해 밀무역에 종사하다가 관헌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복귀 시 처벌을 면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신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상업적 거래와 무력적 약탈을 병행하는 불법 집단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이들의 해상 본거지에는 일본인들과 류큐인들이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고 동남아인들이 합류하기도 하는 등 다국적 또는 무국적 변경인(邊境人)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본계 왜구와 중국계 왜구의 처지를 가른 것은 이들에 대한 출신국의 태도였다. 중국인들은 중국에 돌아가면 모두 범죄자로 처벌받는 신세였다.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은 왜구의 이용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협력을 모색했다.
 
  16세기 들어 동중국해에서 왜구들에 의한 밀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과 명 사이의 공무역인 ‘감합(勘合)무역’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이다. 중앙 통치력이 부재한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생존을 건 부국강병을 추진해야 했던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왜구를 비호함으로써 공무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제적 이익을 올릴 수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포르투갈이 밀무역의 한 축으로 등장하자 왜구의 가치가 일본 다이묘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기존의 생사(生絲)나 도자기 등 사치성 소비재를 넘어 조총, 화약 등 전략물자 조달 중개자로서 왜구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아르케부스(뎃포)와 불랑기포 등의 총포류로 촉발된 화약 수요는 남중국과 일본 간에 상호 비교우위 품목의 교역 확대 유인(誘因)을 제공하였다. 공무역이 제한된 환경 속에서 왜구들에 의한 사무역 또는 밀무역은 그 이익 실현을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유력 왜구 집단을 가신화하면서 능력 본위로 경제적·신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이들의 해상 활동을 후원하였다.
 
  뎃포 전력화의 핵심인 화약의 경우, 일본 규슈 지역에서는 고품질의 유황이 생산되었으나, 일본인들은 초석 생산 능력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에서는 초석이 생산되었지만, 그곳의 화약 제조업자들은 질 좋은 유황 확보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 공무역 체제하에서는 양자 간의 거래가 성립될 수 없었으나, 왜구는 그 체제를 우회하여 거래를 성사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규슈 및 세토 내해(內海) 일대의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해상 전력 집단으로 포섭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무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각 다이묘 관할 운송선의 경비(警備)와 안전 확보를 담당하는 일종의 해군 또는 해안경비대 역할이 부여되고 그에 상응하는 가신화(家臣化)가 진행된 것이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왜구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고 공적 영역으로 흡수하였지만, 명 조정은 끝까지 왜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역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일본, 무역을 통해 전략물자 입수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들. 일본은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전략물자를 확보했다.
  비단 화약뿐만 아니라, 일본의 뎃포 생태계 자체가 기본적으로 포르투갈-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은 뎃포의 몸통 생산을 위해 남만철(南蠻鐵)로 불리는 주조철(鑄造鐵)을 수입했다. 기존에 도검류 제작에 사용되는 일본산 철은 사철(沙鐵)이라 불리는 단조용(鍛造用) 연철(軟鐵)로 주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만철도 화약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상인과 연계된 왜구를 매개로 하여 남중국에서 입수되었다.
 
  뎃포는 ‘화승총(火繩銃)’이라고도 한다. 불을 붙이는 심지라는 의미의 화승은 한자로만 보면 짚으로 꼰 새끼(繩)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목면(木棉)을 꼬아 만든 심지를 사용하였다. 뎃포의 등장으로 면은 소비성 직물을 넘어 전략물자가 되었다. 일본은 16세기 말에 면화 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면포의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그 전까지는 면도 (조선과의 왜관무역 등 공무역도 있었지만) 밀무역을 통해 조달되었다.
 
  일본은 이처럼 무역에 있어서 자율적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전략물자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이용 가치가 있다면 왜구이건 포르투갈인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조선이 많은 공을 들여 기술을 습득하고 민간에 폐를 끼쳐 가며 전국토를 훑어도 전략물자 확보에 애를 먹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특기사항은 무역의 결제수단이다. 당시 국제 결제수단은 중국이 선호하는 은(銀)이었다. 무역의 길이 열리더라도 결제수단이 부족하면 그림의 떡이다. 일본은 은광석이 풍부하였지만, 제련 기술의 미발달로 은 보유고가 높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던 일본이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세계 유수의 은 생산국이 되었다. 1530년대에 조선으로부터 잠상(潛商·밀무역상)을 통해 회취법(灰吹法)이라는 은연(銀鉛)분리법이 도입되어 고순도 은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무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 뜬 일본으로서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 ‘잭팟’이었다.
 
 
  신문물에 대한 개방성
 
  이처럼 일본은 16세기 중반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공식 해상무역망에 한 꼭지로 편입되면서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전략물자를 무역을 통해 입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한다.
 
  일본의 뎃포 전력화는 그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전략적 ‘아웃소싱’의 결과물이다. 외부와의 통교(通交)를 통해 가용한 자원을 결합하여 즉각적 전력화를 기하는 한편, 기술의 흡수와 내재화를 꾸준히 병행한 것이 기존의 폐쇄 체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와 효율성으로 달성한 부국강병의 비결이었다. 신문물을 이념으로 배제하지 않고 이용 가치로 평가하고 개방적 태도로 수용한 실리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유럽 세력의 진출과 함께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기술과 물자가 정치적 권위에 의한 배분이 아니라 상업 논리로 거래되는 환경의 변화를 맞아, 고유의 문물이 얼마나 우수한가가 아니라 타자(他者)의 문물을 어떻게 유입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느냐가 국력의 척도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이 이후 동아시아 3국의 번영 또는 쇠퇴의 길을 갈랐다. 제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해도 좋을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무풍(無風)지대로 남아 있었다. 축복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저주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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