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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4〉 은진미륵에 얽힌 역사의 실타래를 좇다

“최근 국보(國寶)로 지정된 논산 은진미륵에는 견훤과 광종과 혜명대사의 스토리가 농축돼 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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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변에서 본 ‘견훤왕릉’ 찾아가 보니 초라한 무덤만
⊙ 자기 손으로 세운 후백제를 스스로 무너뜨린 견훤, “완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 달라” 부탁
⊙ 고려 광종, 후백제 유민들이 견훤 무덤 보고 반역 일으킬까 두려워 강력한 왕권 상징하는 미륵상 세워
⊙ 오랑캐 침입을 은진미륵이 맡았다는 설화도 전해져
⊙ 논산부터 충남 서산까지의 ‘미륵 둘레길’은 때묻지 않은 우리 문화의 정수(精髓)
⊙ 가야산 자락 ‘백제의 미소’는 우리 민족의 본모습이었다
관촉사 은진미륵이 최근 국보로 지정됐다. 은진미륵은 거대한 석상으로 한때 가치가 저평가됐다.
  충청남도 논산 부근 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볼 수 있는 것이 ‘견훤왕릉’이라는 표지판이다. 왕릉이 위치한 행정주소는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다. 충남 기념물 제26호인 견훤왕릉 주변에는 아무 시설도 없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 보면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의 봉분 앞에 ‘後百濟甄萱王陵(후백제 견훤왕릉)’이라는 묘석만 서 있다.
 
  이 묘석은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덤이 진짜 견훤왕릉인지가 궁금한데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견훤은 걱정을 심하게 하다가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견훤은 자신의 사후, 무덤을 전주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견훤왕릉의 초라한 모습이다. 무덤에서 보면 전주쪽이 훤히 보인다.
  자신이 일으켜 세웠던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망하게 만든 회한(悔恨)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고려 왕조는 견훤의 소원에 따라 완주군과 김제시 사이 모악산(해발 793m)이 보이는 이곳에 견훤을 묻었다고 하는데 이 무덤에는 ‘전할 전(傳)’ 자가 붙어 있다. 이곳이 견훤의 무덤 같기는 한데 정확한 고증을 할 수 없을 때 보통 ‘전’ 자를 붙인다.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은진현조에 따르면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는 견훤왕릉이다. 견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甄萱·867~936)은 경북 상주 가은현,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867년 태어났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꾼이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장군을 칭했다. 일설에는 견훤이 원래 이씨(李氏)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한다. 견훤이 아기였을 때 어머니가 농사짓는 아자개에게 밥을 갖다주려고 견훤을 나무 아래 뒀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이곤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이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등장한다. ‘새가 와서 견훤을 덮어 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는 것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도 “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 줘 사람들이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니 필경 견훤이 보통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전남 광주 북촌(北村)의 어느 부잣집에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과 동침하고 새벽이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딸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옷에 몰래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거라!”
 
  다음 날 아버지가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 봤다.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남자의 정체가 지렁이였는데 이후 임신한 딸이 낳은 아들이 견훤이라는 것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을 《삼국사기》에 나온 것처럼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본 설화와 연관있는 ‘금하굴(金霞窟)’이란 동굴이 있다.
 
  장성한 견훤은 이후 군인이 됐는데 역시 《삼국사기》는 ‘견훤은 늘 창을 베개 삼아 적을 기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실함을 인정받은 견훤은 비장(裨將)이 된 뒤 세력을 키워 892년, 즉 진성여왕 6년에 후백제를 건국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거병한 지 열흘 만에 5000여 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하니 군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견훤은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를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겸 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겸 상주국 겸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 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다 부르기도 숨이 차는 벼슬로 칭했다.
 
  후백제는 건국한 지 3년 만에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과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가 됐다.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는 뜻인데 내가 주목한 부분은 견훤과 미륵신앙의 관계다. 즉 우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했고 태봉의 왕이 된 궁예가 미륵신앙에 탐닉한 것은 잘 알지만 견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논산과 익산 일대를 취재한 후 견훤도 불교에 의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견훤이 불교 중 관심을 보인 것은 미륵신앙이었다. 학자들은 경상도 출신인 견훤이 광주 일대의 호족(豪族)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은 것을 주목하고 있다. 당시 광주 일대에 유행한 것은 완산에서 태어난 진표(眞表)율사의 미륵사상이다.
 
  여기서 진표스님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가도록 한다. 생몰연도가 미상(未詳)인 진표는 신라 중기에 태어났는데 열한 살 때 개구리를 보고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물속에 넣어뒀는데 다음해 봄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불교의 첫 계율인 무분별한 살생을 반성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12살 때 김제 금산사(金山寺)로 출가한 진표율사는 평생 그곳을 근거지로 포교했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했다고 한다. 금산사는 진표의 미륵신앙 근거지가 됐으며 그가 입적한 후엔 속리산, 강릉, 대구 동화사로 그의 미륵신앙이 퍼졌다. 재미있는 것은 훗날 견훤이 자식들에 의해 유폐된 곳이 금산사였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이로 미루어 금산사가 후백제왕 견훤의 왕실(王室)사찰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견훤은 금산사 중창 때 많은 시주를 했다. 견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또 다른 사찰이 바로 전북 익산의 미륵사다. 견훤은 후백제의 수도를 서기 900년 광주에서 전주로 옮겼는데 922년 익산 미륵사에 탑을 세웠다.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터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백제의 무왕과도 관련돼 있다. 즉 견훤은 광주에서 전주로 수도를 옮기며 미륵사에 정성을 다하면서 자신이 명실상부한 백제의 후예임을 과시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견훤과 무왕이 이렇게도 연결되고 있으니 역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견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묘가 충남 논산에 있는 것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논산에 유명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아들 둔 부모들은 한 번씩 반드시 가 보는 ‘신병훈련소’이고 또 하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미륵불인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이다. 관촉사 은진미륵은 보물 제218호다.
 
은진미륵의 위압적인 모습은 고려왕조의 위엄을 드러내 보인다.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 19년인 서기 968년에 승려 혜명(慧明)이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가 18.12m나 되는 관촉사 은진미륵은 몸에 비해 머리가 너무 큰 가분수 형태다. 이 때문에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다. 두 손은 생동감이 엿보이는 데 비해 얼굴이나 동체는 밋밋한 반면 머리 위에 씌워 놓은 원통형 보관은 너무 높아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이 미륵을 괴석(怪石) 같다고도 한다. 왜 광종은 머나먼 논산 땅에 이토록 커다란 미륵불을 세운 것일까? 학자들은 이것이 견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비록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견훤이 망명한 후 그를 ‘상부’로 대접했다. 하지만 적이었던 그의 무덤을 자신들의 수도인 개경 근처에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견훤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자 한편으로는 환영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견훤에게 향수를 지닌 후백제 잔존세력이 뭉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뭔가 지역민심을 어루만지면서도 고려 왕조의 강력한 힘을 과시할 상징물이 필요했다. 학자들은 그것이 거대한 은진미륵을 만든 이유라고 보고 있다.
 
  더구나 은진미륵을 세운 광종은 고려의 왕 가운데도 가장 개혁적이고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는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노비를 풀어 줬는데 이것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광종이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한 것 역시 명분은 천하의 인재를 얻기 위한 것이라지만 내심 귀족세력 약화에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광종은 과거제 실시 이후 준홍(俊弘)과 왕동(王同) 같은 귀족들을 모반 혐의로 숙청한 것을 시발점으로 호족의 힘을 꺾는 데 전력을 다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준홍과 왕동의 숙청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어질고 충성스런 사람을 모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감옥이 항상 가득 차 있었으므로 임시 감옥을 설치하였으며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뒤 불교에 심취했던 것처럼 광종 역시 호족들을 대거 죽인 뒤 여러 곳에 절을 짓고 방생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혜거(惠居·?~974)를 국사(國師), 탄문(坦文·900~975)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사람을 많이 죽인 죄를 부처님의 힘을 빌려 씻고자 했던 것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관촉사 은진미륵 역시 이 같은 상황의 연장이었다고 보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간다. 은진미륵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절 아래 한 노파가 쑥을 캐러 갔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바위가 솟는 것을 본 것이다. 노파는 이 일을 사위에게 전하고 사위는 관청에 고했으며 관청은 조정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광종이 “돌로 미륵불을 지으라”고 했는데 조성 책임자가 혜명(慧明)대사였다. 혜명이 인부 100명과 함께 공사를 끝내는 데는 38년이 걸렸다. 혜명은 미륵불의 머리와 신체를 나눠 따로 조각해 붙이려 했는데 두 부위가 너무 무거워 세울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차에 마을 앞 시냇가를 걷는데 두 어린이가 탑 쌓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됐다.
 
  이 모습을 보고 혜명은 깨달음을 얻었다. 두 아이는 하나의 돌을 놓고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두 돌을 포갰다. 혜명대사가 그걸 보고 기뻐 손뼉을 치는 순간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혜명은 그 아이들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현신(顯身)이었다고 믿었다.
 
  은진미륵에 대한 설화는 그것뿐이 아니다. 고려는 오랑캐의 침입을 많이 받았는데 오랑캐를 물리친 것이 은진미륵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랑캐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물의 깊이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한 스님이 나타났다. 스님이 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 오랑캐 장수는 스님을 따라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곳만 유독 물이 깊고 물살이 거세 뒤따르던 수많은 병사들이 익사하고 말았다. 화난 장수는 스님을 붙잡아 오도록 했다. 장수의 명을 받고 오랑캐 병사가 칼로 스님을 내려치는 순간 ‘쩡’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스님은 사라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관촉사 은진미륵이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호국(護國)사상을 바탕으로 한 설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은진미륵이 최근 국보(國寶)로 지정됐다. 독자들께서 견훤왕릉과 전북 익산을 둘러보신다면 충남 서산까지 가 볼 것을 권해 드린다. 충남 가야산은 ‘사도세자와 남연군’, ‘흥선대원군과 육관도사’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이다. 천하명당이 숨어 있다고 해서 풍수가들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석불 가는 길 초입에 있는 건물이다.
  이 가야산 자락에서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까지는 승용차로 약 30분이 걸린다. 그 골짜기로 올라서면 저 유명한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을 볼 수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국보 제84호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상은 가운데의 소탈한 본존불상과, 좌우의 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으로 구성돼 있다.
 
  기존의 삼존불상과 달리 소탈한 미소가 인상적이며 모든 구속으로부터 초탈한 여유를 느끼게 해 주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백제의 미소’라는 말은 고 김원용 박사가 쓴 책 《한국미의 탐구》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한 번 본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정확한 표현이다.
 
서산 마애석불(사진 위)과 가까이서 본 모습이다(사진 아래).
  서산마애삼존불을 중심으로 ‘백제의 미소길’까지 만들어져 한 번쯤은 답사해 볼 만하다. 새벽, 아침, 한낮, 황혼 무렵에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서산마애삼존불의 존재를 우리가 안 것은 불과 50여년 전이라고 한다. 1959년 홍사준 국립부여박물관장의 지시로 답사팀이 현장에 갔는데 원래 서산은 백암사(白菴寺)가 유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불상은커녕 탑도 발견하지 못한 답사팀이 무심코 지나가던 나무꾼에게 “혹시 불상이 근처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무꾼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쪽 바위로 가면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강댕이 미륵이다.
이 일대에는 미륵이 많이 산재해 있어 가히 ‘미륵루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답사팀은 ‘산신령과 두 마누라’의 현장을 찾아봤다. 이렇게 발견된 것이 마애삼존불상이다. 마애삼존불을 보고 내려오면 승용차로 3분 거리 길가에 또다른 미륵불이 서 있다.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로 통하는 길목의 ‘강댕이 미륵불’이다. 강댕이라는 것은 이곳의 예전 지명이었다고 한다. 강댕이 미륵불은 하나의 화강암을 이용해 조각했는데 높이 2.16m, 어깨 폭 65cm, 두께 25cm의 크기다. 역사가들은 이 미륵불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에 건축됐다고 보고 있다.
 
  내가 기나긴 미륵탐방에 나선 것은 혼란한 나라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아마 옛 우리 선조들도 세상이 혼탁할 때면 세상을 구해 주러 온다는 미륵을 기다렸을 것이다. 바라건대 빨리 나라가 안정을 되찾길 전국의 우리 산하(山河)를 버티고 있는 미륵불들에게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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