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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大統領)이란?

사회학도의 역사 읽기 〈15〉 헌법에서 ‘자유’ 지우는 것은 ‘대한민국 청산’ 의미

글 : 유광호  자유민주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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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 현충원 참배 후 “건국 100년 준비” 주장
⊙ ‘국가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몬테비데오 협약’에 의하면, 국가는 정부,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갖춰야
⊙ 김구의 감상적 민족주의·통일지상주의는 ‘민족 통일이라면 공산화 통일이라도 좋다’는 관념으로 연결
문재인 대통령은 1월 2일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건국 100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첫날 현충원 참배를 마친 뒤 방명록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 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건국 백 년’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인 내년 2019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 집권 세력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을 수없이 뒤집어엎어 온 지금까지의 행위들의 일환으로 ‘역사 청산’을 하겠다는 것이고 ‘대한민국 청산’을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19년 4월에 행해진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건국헌법, 즉 제헌헌법의 전문(前文) 구절이나 이승만 박사의 ‘민국(民國)’ 연호 사용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건국헌법 전문의 “…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는 1919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1948년에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되지 않고 이미 존재해 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주도로 삽입된 것이다. 이승만이 1948년 8월 건국을 전후하여 한 건국 관련 발언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1948년 8월 15일 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국가가 없었다.
 
  ● 대한민국은 정치적·법률적으로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건국되었다.
 
  ●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념 및 염원의 면에서는 3·1운동에서 선포했으나 임시정부만 수립하고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립의 부활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임정 주석 김구를 포함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인은 ‘건국’ 사업을 하고 있다고 명백하게 인식하고 정치활동을 했다. 게다가 제헌국회에서 국호도 여러 안을 놓고 표결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 건국의 재건이라면 어떻게 이런 과정이 가능했겠는가?
 
 
  국가의 요건
 
  국가 구성의 필수 요소 또는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대우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설명하는 유용한 준거로 ‘국가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의 내용이 보편적으로 이용된다.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는 “국제법의 인격체로서의 국가는 다음의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a)상주하는 인구 (b)명확한 영토 (c)정부, 그리고 (d)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정부(government)’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에 대해 실효적 통제를 할 수 있는, 혹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가 준수할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를 뜻한다.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란 대외적 독립성과 자주외교권, 즉 주권을 뜻한다.
 
  따라서 건국, 즉 국가의 건립이란 이런 네 가지 필수 요소를 갖춘 정치결사가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식민지 시기인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위의 어떤 요소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그 어떤 다른 국가로부터도 국가의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다.
 
  그 ‘임시정부’는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즉 건국운동가들이 독립, 즉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정치결사였다. 이런 준비 단체의 설립을 건국이라고 하겠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비웃음만 받을 뿐이다.
 
 
  좌익에게 이용당하는 김구
 
  현 집권 세력 나아가 좌익 세력은 이런 반(反)사실적, 반과학적 전복 행위들을 예사로 해왔다. 그리고 결국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오늘날 국가권력을 위시해 각 분야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합리한 행위를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70년 가까이 전개해 온 여러 부류의 대한민국 반대투쟁이다. 그 뿌리 깊은 사정을 살펴보자.
 
  6·25 전란기에 한 언론매체의 오보로 인해 광복절이 독립기념일을 의미하던 것에서 광복이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혼선은 있었지만, 언론기관들은 1998년 건국 50주년까지는 특집보도를 하는 관행을 유지해 왔다. 또한 정부와 국민들도 대한민국이 1948년에 독립=건국되었다는 점을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로 수용해 왔다. 이처럼 정부와 시민사회와 모든 국민이 인지했던 대한민국 독립=건국일(1948년 8월 15일)이 일차적으로는 좌익혁명 세력의 반대한민국적 선전투쟁 때문에, 이차적으로는 김구 주석을 추종·숭배하는 광복회와 그 주변에 기생(寄生)하는 한국사연구자들의 왜곡된 민족주의 감정에서 비롯된 궤변 때문에 압도적 다수 국민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임정의 주석이자 한국독립당(한독당)의 당수인 김구의 말년 행보가 남북한의 좌익혁명 세력의 반대한민국적 선전투쟁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에 있어서 김구의 명성이 높았고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은 그 후 지금까지 다수 국민을 오도(誤導)하게 되었다. 그런 김구를 정치인은 물론 국민 다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이것은 국민들 다수가 감상적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든지 좌익혁명 세력의 선전선동에 홀릴 수 있다는 것이다.
 
  1946년 2월 북한에서 소련의 지휘하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토지개혁을 하고 군대를 창설하는 등 사실상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박사는 그것에 대응하는 정부를 세울 것을 동포들에게 제기했다. 그것이 당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김구도 1947년 12월 중순까지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하지 않았다. 김구 주석은 1947년 12월 4일 성명을 발표하여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 합의를 보았다. 나도 이 박사를 존경하는 한 사람이므로 양인 간에는 본래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구의 건국노선 일탈
 
1948년 남북협상차 방북했을 때의 김구. 김구는 결국 김일성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반(反)대한민국 건국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력을 지지했던 김구는 12월 하순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당시 미(美)군정의 여당 역할을 하던 한민당과의 불편한 관계 등 때문에 그런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김구의 이 결정은 그가 이끄는 한독당에서 공식적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취해진 것이었다. 한독당은 당수인 김구가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선에 대한 결별선언을 한 후 그것에 협조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김구는 그 다음날 “미·소 양군이 철퇴(撤退)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兩軍)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 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구가 이날 말한 것은 소련이 한국 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을 거부하기 위해 1947년 9월부터 반복해 왔던 제안인 동시에, 김구 자신이 그동안 반복하여 비판해 왔던 제안이다. 남북협상, 즉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회의는 김일성이 이미 1947년 10월부터 제안해 놓고 남한의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인데, 마침내 김구가 이 통일전선전술에 걸려든 것이다.
 
  이에 이승만은 건국노선에서 이탈한 김구를 달래기 위해 간곡하게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오히려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감상적 성명서를 발표하여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비난했다. 성명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인사들을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듯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라고 매도했다. 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건국 반대투쟁에 일조
 
  이 독설과 저주는 대한민국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이 성명이 비판하고 있는 남한 정부 수립은 당시 상황에서는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북한에서는 1947년 2월 인민위원회라는 정식 정부로 전환하여 공산화 추진 작업을 한 단계 더 강화했다. 북한 지역의 공산화를 안정시킨 북한 주둔 소련군과 북한 공산 정권은 1947년 가을부터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 지역 공산화를 위한 정치공작을 강화했다.
 
  이런 때에 김구의 성명에 내포된 감상적 민족주의 및 통일지상주의는 이러한 한반도 상황에서는 자칫하면 ‘민족 통일이라면 공산화 통일이라도 좋다’는 관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구의 성명 내용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용에 더하여 그것이 발표된 시기도 매우 부적절했다. 김구가 그 성명서를 발표한 1948년 2월 10일은 좌익 세력이 남한 선거 반대를 위해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김구의 감상적 성명서는 한창 진행 중인 좌익 세력의 남한 선거 반대를 위한 폭력투쟁, 즉 대한민국 건국 반대투쟁을 성원하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이 2·7구국투쟁은 좌익들의 무장 빨치산 투쟁으로 연결되었고, 그런 현상이 가장 큰 규모로 나타난 것이 제주도에서 발생한 4·3폭동이다.
 
  1948년 3월부터 5월까지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건국 세력은 좌익 세력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에서의 선거를 준비하는 데 전력(全力)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김구는 좌익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남한 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남북협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통일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감상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걸려들면 본의와는 상관없이 공산화 통일을 도와주는 협력자로 이용당하게 마련이다.
 
  김구는 이처럼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한 좌익 세력 및 북한 공산 정권과 연대하여 투쟁하는 과오를 범한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민주화운동’의 실체
 
김구가 남긴 ‘감상적 민족주의’의 유산은 1980년대 주사파의 반미종북(反美從北)운동으로 이어졌다.
  김구의 이런 반대한민국 활동은 좌익혁명 세력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허무는 공작에 이용하는 좋은 재료가 되었다. 김구가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투쟁이 대중에게 가진 명성에 실어서 대한민국을 통일을 반대한 단독정부라고 매도하는 것은 좌익혁명 세력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학생들도 김구를 통해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파에 입문하는 경우가 예부터 적지 않았다. 북한에서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과 갈등을 빚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 사회에서 사회주의 비전을 가진 이들 역시 민족주의적 열망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민중민족주의’의 오랜 흐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일대 낭만적 반동으로 몰아치게 된 것이다.
 
  이런 좌익 민족주의의 대상은 미국이다. 한반도·한민족에 대한 ‘미국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으로 정식화되었다. 이것은 문구 자체부터 북한 당국이 선전선동해 온 대남투쟁노선과 일치했다. 1985년에 혁명운동권에 널리 유포되었던 〈반제 민중 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라는 소책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한국 민중에 대한 파쇼 통치의 핵심 수행자는 미국 제국주의다. 한국에서 보수 관료층, 독점자본주의 세력, 군부는 모두 미국의 하수인일 따름이다. … 우리 투쟁의 주요 적은 미국이 되어야 한다. 모든 여타 적대 세력은 그들이 미국으로부터 명령을 받기에 우리의 적일 뿐이다.”
 
  이런 것이 바로 남한의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실체였다. 이들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누적된 적폐청산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혁명이었다. 수천 년을 왕조국가의 신민으로 살아온 한국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국민국가의 국민이 된 초유의 혁명이었다. 미국 건국이 혁명이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 청산’으로 가나?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을 수호, 보수(保守)한 것은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그 체제 덕분에 ‘기적’을 이뤄냈고, 그로 해서 세계 공산주의 진영은 붕괴했다. 대한민국 건국, 수호, 발전 세력이 세계사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결정지은 것이었다. 그 자유민주주의체제 선택과 발전국가 리더십과 기업가정신이 보편적이고 문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 혁명으로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그 정부가 헌법과 역사교과서에서 ‘자유’를 지우겠다고 한다. 여기에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객관적 사실마저 변조하려는 것은 ‘역사 청산’이요 ‘대한민국 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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