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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2〉 일과 그 이치를 알아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한명회(韓明澮)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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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을 삼가고 끝도 삼가는 것은 사리분별의 시작과 끝
⊙ 공자, 관중(管仲)이 권세 휘두른 것을 비판하면서도 천하를 안정시킨 공 인정
⊙ “여러 번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었다” (《성종실록》 한명회의 졸기)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鴨鷗亭圖)〉.
압구정은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이자, 그의 호(號)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뒤에 가서는 나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바라건대 그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평범해 보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은 말이다. 이 멋진 말은 뜻밖에도 1487년(성종 18년) 11월 14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풍운아 한명회(韓明澮)가 자신이 임금으로 만들어 올렸고 한때 사위이기도 했던 성종(成宗)에게 남긴 유언이다. 이 유언은 마치 당나라 때 명신(名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에게 올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 중에 있는 다음 두 가지 말을 합쳐 놓은 듯하다.
 
  “처음에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나태하고 게을러질까를 두려울 때는 반드시 일의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삼가야 한다[愼始而敬終·신시이경종)]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도학(道學)에 물든 그 후의 조선 성리학은 한명회를 매도했다. 하지만 예(禮)를 그들처럼 가례(家禮)에 국한하지 않고 일이 되어 가는 이치 혹은 일을 만들어 내는 이치[事理]로 넓혀서 접근할 경우 그의 전혀 새로운 면들을 만나게 된다.
 
 
  경륜과 사업
 
한명회는 여러 차례 사극의 소재가 됐다. 그중 1984년 MBC가 방송한 〈설중매〉에서 배우 정진이 연기한 한명회가 가장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1415년(태종15년)에 세상에 나온 한명회의 할아버지는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다. 그의 동생 한상경(韓尙敬)은 개국공신이다. 따라서 한명회의 집안 자체는 조선 혹은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기(韓起)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었고 일찍 죽어 한명회는 어려서 고아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자 작은할아버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을 찾아가 몸을 맡겼는데 한상덕은 어린 한명회의 남다른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살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스승 유방선(柳方善)을 함께 모셨던 서거정(徐居正)이 쓴 한명회의 묘비명이 전하는 젊은 시절 한명회의 모습이다.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공과는 사생(死生)의 우의(友誼)를 맺어 서로 좋아함이 옛 관중(管仲)과 포숙(鮑叔)보다도 더했는데 권공과는 뜻이 같고 기개가 합하여 살림살이는 경영하지도 않고 산수간(山水間)에 노닐면서 혹 마음에 맞으면 한 해가 다하도록 돌아올 줄을 몰랐으며 명리(名利)에는 담박(淡泊)했다. 일찍이 길창군에게 농담하기를 “문장과 도덕은 내가 자네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경륜(經綸)과 사업(事業)에 있어서는 어찌 많이 모자라겠는가?”라고 했다. 대체로 의론(議論)에 나타나는 것이 고매(高邁)하고 기위(奇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큰 재기(才器)로 지목하였다.〉
 
  권람 또한 유방선의 제자였다. 권람에게 했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한명회의 은근한 포부였다. 그리고 경륜과 사업을 자부했다는 것은 곧 사리(事理)에 그만큼 밝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에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경륜(經綸)과 사업(事業)’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임금이 되거나 임금을 만들어 그 임금을 도와 경륜과 사업을 펼치는 것!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운명적 만남
 
  서거정의 묘비명은 또 한명회가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명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하며 다시 따라가 보자.
 
  〈임신년(壬申年, 1452년 문종 2년) 공의 나이 38세에 경덕궁(敬德宮)의 궁지기[宮直]가 되었는데 그때에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권간(權姦·김종서)이 집권하여 국세(國勢)가 위태로우니 공은 항상 우분(憂憤)하는 심지(心志)를 가졌었다. 하루는 길창군에게 말했다.
 
  “시국이 이 지경에 이르니 안평(安平·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신기(神器-왕위)를 넘보고 은밀히 대신과 결탁하여 후원(後援)을 삼고 많은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나무뿌리 얽히듯 얽혀 화란(禍亂)의 발생이 조석 간에 있는데 그대는 이런 데에 추호도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길창군이 말했다.
 
  “자네의 말이 맞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공이 말했다.
 
  “화란을 평정함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난(亂)을 다스릴 수 있는 군주(君主)가 아니면 할 수 없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활달(豁達)하기가 한 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하기가 당 태종(唐太宗)과 같으니 천명(天命)이 그분에게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네. 지금 자네는 그분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어찌 조용히 건의하여 일찍 결단하게 하지 않는가?”
 
  길창군이 공의 계책으로 세조(世祖)에게 고하고 또 말했다.
 
  “한생(韓生·한명회)은 간국(幹局)이 있고 둘도 없는 국사(國士)로서 지금의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라 할 수 있습니다. 공(公)께서 연릉(延陵-춘추시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의 절조(節操)를 지키시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을 평치(平治)하시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세조가 급히 공을 부르니 공이 폭건(幅巾)을 쓴 채 들어가 알현했다. 세조가 첫눈에 구면(舊面)처럼 대하고 앞으로 나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어찌 진즉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 주상께서는 비록 유충(幼沖)하지만 곁에서 잘 보필하면 수성(守成)은 할 수 있는데, 대신이 간교하여 (안평대군) 이용에게 포섭되어 선조(先朝)께서 충자(沖子·어린 아들)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니 조종(祖宗)의 선령(先靈)이 장차 어디에 의탁하시겠는가?”
 
  말을 마치자 눈물을 흘리니 공도 비분강개하여 반정(反正)의 책략을 남김없이 말했다. 세조가 말했다.
 
  “형세(形勢)는 고단(孤單)하고 세력은 미약하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공이 말했다.
 
  “명공(明公)께서는 종실의 맏이로서 사직(社稷)을 위하여 난적(亂賊)을 치는 것이므로 명분도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으니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 앙화(殃禍)를 입는다’고 하였으니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익히 생각해 보소서.”
 
  세조가 말했다.
 
  “경은 더 말하지 말라. 나의 결심이 섰네.”
 
  이로부터 모든 비계(秘計)와 밀모(密謀)는 공의 지휘에 맡겨졌다. 공이 말했다.
 
  “한 고조가 비록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계모(計謀)를 쓰기는 했지만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썼고, 당 태종이 비록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임용했지만 전벌(戰伐)에는 포공(褒公·단지현(段志玄))과 악공(鄂公·울지경덕(尉遲敬德)의 봉호(封號))을 썼습니다.”
 
  드디어 무신(武臣)으로 용략이 있는 사람 수십 인을 천거했다.〉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를 막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
  이들은 이미 한나라 유방과 당나라 태종을 모범으로 삼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시 계유정난 직전이다. 〈계유년(癸酉年·1453년 단종 원년) 10월에 곧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의심의 단서를 품고 중심(衆心)을 흐리게 하는 몇 사람이 있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번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사람마다 면할 수 없는 일인데 사직(社稷)을 위해 죽으면 그래도 그저 죽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 감히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베겠다.”
 
  마침내 군심(群心)이 진정되었다. 이에 의사(義士)를 초집하여 마침내 원악(元惡)을 제거하고 추종자를 머리에 빗질하듯 싹을 도려내듯 하여 대난(大難)을 평정했다.〉
 
  1455년 (단종 3년) 6월에 세조가 즉위했다. 이듬해 6월 초하루에 세조가 광연루(廣延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등이 이날 큰일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한명회가 글을 올려 광연루는 자리가 좁으니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말 것과 운검(雲劒)의 제장(諸將)도 입시(入侍)하지 못하게 하기를 주청하니 세조가 윤허했다. 이때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운검을 차고 곧장 들어오자 한명회가 꾸짖어 제지했다. 이에 거사에 참여한 이들은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먼저 한명회라도 죽이자고 했는데 성삼문이 제지하며 말했다.
 
  “큰일이 이뤄지지 않았는데 한모(韓某)를 죽인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그 이튿날 일의 전모가 탄로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사육신의 죽음이었다.
 
  이에 대해 서거정은 찬탄하여 말했다.
 
  〈광연루의 잔치에 세자가 참좌(參坐)하지 않은 것과 무신(武臣)을 들이지 않은 그 심모(深謀)와 원려(遠慮)는 사람의 능력 밖에서 나온 것으로서 원악(元惡)이 과연 그 간계(奸計)를 행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비록 조종(祖宗)께서 음(蔭)으로 도와주신 힘이었겠으나 또한 공의 충성이 암묵리(暗默裡)에 하늘에 감응되어 하늘 역시 도와주신 것이리라.〉
 
 
  관중(管仲)에 대한 공자의 평가
 
제 환공을 도와 패업(覇業)을 이루었던 관중.
  관중(管仲)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제나라를 강력한 패권(覇權)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맹자(孟子)를 받드는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관중은 오히려 왕도(王道)정치와는 다른 길로 간 인물로 폄하된다. 그런데 정작 공자(孔子)는 관중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곧 예(禮)를 사리(事理)로 보았던 공자와 가례(家禮)로 좁혀 놓은 주자(朱子)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어떤 사람과 이렇게 대화를 이어 간다.
 
  〈공자는 말했다.
 
  “관중의 그릇은 작았도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관중은 검박했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관중은 삼귀(三歸)를 두었고 가신(家臣)의 일을 통합하여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박했다고 하겠는가?”
 
  그 사람이 또 물었다. “그러면 예(禮)는 잘 알았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나라의 임금만이 병풍으로 문을 가릴 수 있는데 관중도 그렇게 했고 또 나라의 임금이라야 두 임금이 만났을 때 술잔을 되돌려 놓는 자리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데 관중도 그렇게 했으니 만일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하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삼귀란 해석이 크게 두 가지다. 첩들을 두었다는 해석도 있고 높은 대(臺)를 세 개나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쪽이건 권세를 과시했다는 뜻이다. ‘가신의 일을 통합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가신을 많이 두었다는 말로 역시 권세를 과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의 임금에 맞서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명회가 권력을 잡은 후에 보여준 모습들과도 많이 비슷하다.
 
  그러나 헌문(憲問)편에서 보여주는 공자와 제자 자공(子貢)의 대화는 역사적 인물을 보는 공자의 현실주의적 통찰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솔직하고 소박”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함에 있어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이 힘쓴 덕분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仁]만 하겠는가?”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관중은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환공이 공자 규(糾)를 죽였는데도 기꺼이 따라 죽지 못했고 또 환공을 돕기까지 했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헤쳐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작은 신의[諒]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매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굴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
 
  자로(子路)보다는 뛰어난 제자였던 자공 역시 여전히 도덕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역사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의 유혹은 강하다. 그러나 필자는 공자의 시각을 따랐다. 《성종실록》에 실린 한명회 졸기(卒記)의 마지막 문장이다.
 
  〈비록 여러 번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훈명(勳名)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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