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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1〉 한국의 조림왕 임종국과 전남 장성 축령산

그가 평생 가꾼 숲은 독일과 스위스의 숲과 비견될 만하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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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김이만·현신규 박사와 함께 ‘국토 녹화에 기여한 4인’
⊙ 중3때 가난한 형편 때문에 학업중단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곡상에 취직
⊙ 성실한 자세로 신임받은 뒤 독립해 정미소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 도와
⊙ 해방 1년 전 대홍수로 장성이 잠기자 산림녹화에 헌신하기로 결심
⊙ 6·25 때 인민군들도 “이렇게 멋진 묘포지(어린 나무를 키우는 밭)를 본 적이 없소”라며 감탄
⊙ 자금난 겪자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들에게 “산림을 분할 매수하라”고 지시… 하필이면 매수해야 할 날이 1979년 10월 26일
⊙ 박 대통령 서거하자 재벌들 태도 바꿔… 1980년 뇌졸중으로 8년간 투병하다 사망
⊙ 임종국의 유언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다”
⊙ 장성 축령산은 편백나무 제품으로 풍요 누려… 김재규는 근대화의 위인뿐 아니라 산림녹화의 위인마저 저격한 것이다
편백나무가 가득 들어찬 축령산에 들어서면 나무가 내뿜는 향기가 코를 찌른다.
  포털사이트에서 ‘축령산’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두 군데가 나온다. 수도권인 경기도 남양주 축령산(祝靈山·해발 886m)과 전라남도 장성 축령산(해발 620m)이 있다. 특이하게도 두 산은 한자(漢字)가 같고 자연휴양림이 조성된 것도 비슷하다.
 
  전남 장성 축령산에 간 것은 동양학자 조용헌씨가 낸 《조용헌의 휴휴명당(休休明堂)》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장성물류IC를 빠져나와 처음 만난 주민에게 묻자 “(조용헌씨의) 그 집은 편백나무숲이라는 간판을 따라가면 나온다”고 했다. 과연 축령산 휴양림은 마을별로 달라 잘못하다가는 헤매기 십상이다. 추암마을 편백나무숲에 도착해서 다시 주민에게 물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한 여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어제 거길 다녀왔는데 찾기가 어렵다”며 스마트폰에서 사진 한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축령산으로 접근하는 길의 안내판이다.
  나는 그에게 “그래서 명당이라고 느끼셨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는 이상하게 기(氣)가 막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수(高手)와 하수(下手)의 차이가 있겠지 …’, 속으로 이렇게 되뇌며 산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세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는커녕 펜션이 즐비했다. 산세를 이곳저곳 살피다 내려오는데 진한 편백(扁栢)의 향기가 풍겨 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히노끼’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최고급 내장재인데 특히 목욕탕 욕조로 많이 쓰인다. 일본과 한국 남부지방에 분포하는 이 노송나무라고 불리는 식물은 다 자랐을 때 높이가 40m, 지름이 2m나 된다. 가지는 수평으로 퍼지며 껍질은 적갈색을 띤다. 그런데 왜 축령산에 편백나무가 그득하게 됐는지를 알게 되면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축령산에는 다양한 걷기 루트가 있다.
  이 웅장한 편백나무 숲이 임종국(林種國·1915~1987)이라는 개인에 의해 조성된 것이며 그가 2001년 4월 ‘20세기 대한민국 국토 녹화에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큰 4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의 국토 녹화 4인 가운데 첫째는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다. 임종국 선생을 제외한 두 분은 김이만(1901~1985) 선생과 현신규(1911~1986) 박사다. 이분들은 어떤 공적이 있는 걸까.
 
  김이만 선생은 ‘나무 할아버지’로 불리며 1922년부터 64년 동안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구석구석 누비면서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종자를 수집하고 품질 기준을 정하는 데 공헌을 한 분이다. 현신규 박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육종학자였다. 그는 1953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임학교육과 소나무·포플러 육종에 정열을 쏟았다. 박 대통령 등 네 분은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직동리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에 모셔졌는데 동판 초상화와 공적사항, 사진·기념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임종국 선생의 삶을 살펴보기에 앞서 나는 그분의 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성은 수풀 임(林), 종은 흔히 이름에 사용하는 쇠북 종(鍾)이 아니라 종자라는 뜻의 종(種), 나라 국(國)자를 쓰니 역시 성함에서 나무로 나라를 빛낼 인물임이 되지 않았겠는가?
 
  임종국 선생은 1913년 1월 19일 전북 내장산 아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영규, 어머니는 김안나씨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였다. 그의 부친은 아들 교육에 힘썼다. 어려서부터 서당(書堂)에 데려가 한문교육을 했고 일곱 살이 되던 1920년 보습학교, 즉 지금의 유치원 같은 곳에 보냈으며 여덟살 때 복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1927년 그는 순창농업중학교에 입학해 3학년이 됐을 때 학업을 중단했다. 어린 세 동생에 대한 걱정과 함께 농사만으로는 일제 치하에서 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가 “더는 공부만 할 수 없습니다. 동생들을 봐서라도 집안에 보탬 되는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부친은 망설이다 자퇴를 허락했다고 한다.
 
  임종국은 학업을 중단한 뒤 군산(群山)으로 갔다. 지금은 약간 쇠락했지만 일본 강점기 군산은 전국에서 실려 온 쌀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항구로 대단히 번성했다. 거기서 임종국은 군산 제일의 미곡상으로 갔다. 그러곤 외쳤다. “혹시 여기 사람 구하지 않습니까?”
 
  밀짚모자 쓴 사람이 나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임종국은 “일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그 사람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미곡상 안으로 들어가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러곤 상점 앞을 깨끗하게 비질했다. 밀짚모자 쓴 이는 미곡상 주인 스기다. 그가 놀란 것은 말끔해진 상점 앞이 아니라 임종국의 손바닥이었다. 임종국은 상점 앞에 떨어져 있던 작은 쌀알들을 한 주먹이나 주워 모은 것이었다. 주인인 스기다마저 신경 쓰지 못한 것을 소년이 한 것이다.
 
  그날부터 임종국은 모르는 것은 메모하고 외우는 등 밤을 새워 가며 일을 배웠다. 그렇게 성실하게 여섯 달을 일하자 스키다는 소년에게 서기(書記) 일을 맡겼다. 얼마나 신임했는지 한 달 뒤엔 은행에 돈을 입금하는 일까지 담당하게 됐다. 그는 장부(帳簿)를 속이자는 유혹이나 협박을 많이 받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선 안 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빼앗은 일본인의 것이라고 해도 그는 정도(正道)를 지켰다.
 


임종국 선생이 축령산 조림사업을 할 당시의 여러가지 모습이 담겨 있다.
  여기서 혹시 “일본인들은 속여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일화를 들려 드릴까 한다. 《백범일지》에 보면 김구 선생은 자신을 잡아들인 뒤 자백을 받기 위해 며칠밤을 새우는 일본 경찰들을 보며 스스로 반성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아! 일본놈들은 비록 나쁜 짓이지만 제 나라를 위해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한 번도 밤을 새워 일한 적이 있는가” 하는 탄식이었다. 비록 악당(惡黨)이지만 열심히 하는 자세만은 원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1934년 어느덧 스기다 미곡상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 된 임종국은 스기다에게 소금을 사들일 것을 권했다. 값이 오를 것을 예측한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스기다는 막대한 돈을 벌었다. 스기다는 그를 진남포 출장소장으로 발령냈다. 이때 군산에서 진남포(鎭南浦)까지 가며 그는 처음으로 헐벗은 우리 산하(山河)의 속살을 보게 됐다. 일본의 보리, 만주의 기장과 조가 들어오며 쌀과 콩을 일본에 내다 주는 우리 처지를 보면서 “몇 년 지나면 조선에는 소나무 몇 그루만 남겠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자각(自覺)이 있은 지 얼마 후 그는 모은 돈을 가지고 정미소(精米所)를 차렸다. 그는 현미를 세 번 찧는 다른 정미소와 달리 두 번만 찧었다. 그렇게 하면 기계 밑에 떨어진 등겨가 늘 석 되쯤 됐는데 그는 그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줬다. 당시 다른 정미소들이 등겨를 돈을 받고 팔 때였다. 먹을 만한 것이 없던 그 시절, 우리 민족은 등겨에 삶은 쑥과 우거지를 넣고 콩비지국을 끓이듯 겨죽을 끓여 먹고 연명했다. 그즈음 임종국은 평생의 배필이 될 장성 출신 아내 김영금과 결혼했다.
 
  중일(中日)전쟁이 일어나면서 임종국은 정미소 문을 닫았다. 미곡통제령으로 곡식 거래하는 일마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처분하고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잠업(蠶業)을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장성으로 옮기는데 사연이 있다. 잠업을 할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 차에 아내의 고향인 장성에서 한 일본인이 농원(農園)을 내놨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임종국 선생 부부가 잠들어 있는 나무다.
  그는 빚을 내어 이 농원을 사들인 뒤 1년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타고난 근면함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누에 키우는 방 둘레에 생석회를 바르고 숯으로 소독했으며 창호지까지 발랐다. 사람 사는 것보다 더 깨끗하게 소독을 한 것이다. 그 후론 아예 누에와 함께 살았다. 누에농사에 성공하자 그는 고구마 재배를 시작해 이것도 성공시켰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7월, 전남 장성에는 홍수가 났다. 비가 많이 온 탓도 있지만 워낙 산림이 헐벗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논밭이 다 망가지고 장성역까지 물에 잠겨 기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됐다. 그때 그는 조림(造林)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임 선생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심고 돌봤다. 일꾼들에게 늘 하는 말이 “그저 내 집 일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6·25가 터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피란 갔지만, 그는 농부(農夫)의 생명인 땅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농지를 몰수한다” “부녀자를 욕보인다” “장정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끌고 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위원회 소속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다짜고짜 끌고 가더니 유치장에 가뒀다. 하루 동안 먹을 것도 주지 않더니 그들은 “가지고 있는 현금을 모두 내놓아라”고 협박했다. 땅과 집과 농장은 모두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산당은 그를 방면했다. 아무리 뒷조사를 해 봐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덧붙이는 것이었다. “동무, 이렇게 멋진 묘포지를 본 적이 없소.” 묘포지란 어린나무를 키우는 밭을 말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이는 것이다. 서슬 퍼런 공산당도 땅과 산에 정성을 다하는 농부를 어찌할 순 없었다.
 
조용헌씨의 휴휴산방이다.
  1955년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숲을 가꾸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수군댔지만 축령산에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000평의 땅에 삼나무 6000그루를 심었는데 그의 식재(植栽)에는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나무를 빽빽하게 심지 않고 어린나무들 사이의 거리를 넓게 잡았으며 묘포지 둘레에는 도랑을 만들어 배수(排水)가 잘 되도록 한 것이다. 어린나무를 심은 뒤에는 1주일에 한 번씩 겉흙을 긁어내고 새 흙을 생석회와 섞어 뿌렸다. 병에 시달린 나무는 30cm 정도 흙을 파낸 뒤 짚과 재를 섞어 묵힌 흙을 옮겨 뿌렸다. 이렇게 하자 임종국의 숲은 병충해에 아주 강한 숲이 됐다.
 
  1959년은 우리 국민들에겐 잊을 수 없는 해다. ‘사라’라는 사상 초유의 태풍이 몰아쳐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난 것이다. 그는 비바람을 뚫고 일꾼들과 함께 미친 듯이 숲을 누볐다. 제아무리 강한 태풍도 인간의 이기려는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선택한 것일까? 빨리 자라고 훗날 값어치가 나간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여기엔 젊었을 적에 본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성군 덕진리 야산에서 받은 감동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시 인촌(仁村)의 야산에 쭉쭉 뻗어 가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본 그는 ‘아! 우리 강산에도 이런 나무가 성장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오늘날 그는 한국 조림(造林)의 시조로 불린다. 그가 가꾼 편백나무숲은 1헥타르당 700~2500그루가 분포해 있으며 나무의 평균 높이는 18m나 된다. 수령(樹齡)은 대부분 30년을 넘는다. 축령산은 천연림과 인공림의 비율이 75대 25인데 입목축적은 천연림이 101m², 인공림이 250m²이다. 인공림이 그만큼 잘 보존돼 있다는 뜻이다.
 
  이 수치는 놀라운 것이다. 산림학자들에 따르면 선진국의 평균 입목축적은 캐나다가 120m², 미국이 136m², 일본이 145m², 독일이 268m², 스위스가 337m²다. 지금도 전쟁 준비에 눈이 멀어 세계를 향해 협박을 일삼고 있는 북한은 41m²이다. 한마디로 헐벗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임종국 선생의 숲이 독일과 스위스에 버금간다는 뜻이다.
 
축령산의 나무에는 한 인간의 집념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의 손길이 거쳐 간 곳은 앞서 말한 대로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서삼면 모암리, 북하면 월성리 등이다. 아직도 이 지역에선 가뭄 때면 물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던 임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물지게를 지니 마을 주민이 하나둘씩, 나중엔 거의 모두가 물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한다. 그의 장남 임지택씨가 한 언론을 통해 남긴 아버지의 증언이 있다.
 
  “초기엔 투자비용이 많아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 썼습니다. 60년대 이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원으로 조림·조경산업이 날로 번창했습니다. 정부에 납품되던 물량이 때때로 줄거나 없어지면 자금순환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박 전 대통령이 재벌 몇 명을 불러 산림보전을 위해 조림지 일부를 매입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재벌 몇 명이 장성 축령산 일대를 직접 현지답사한 것은 그런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이 끝나고 청와대에 가서 보고하고 계약서만 받아오는 작업을 남겨뒀을 때 박 전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재벌들의 조림지 매입 계획은 없던 일이 돼 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1979년 떠나시고 1년 후인 1980년 아버지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7년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병원비가 상당했을 뿐 아니라 채권자들의 빚 독촉도 심했습니다. 작업장의 십장들 중에도 병원과 집에 나타나 돈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축령산 아래 장성호의 모습이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조림왕을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가 지금은 민주화의 영웅처럼 취급되고 있으니 이런 민족성을 가진 한민족이 5000년 동안 고초를 면치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잽싸게 태도를 바꾼 재벌들의 행태도 씁쓸하기만 하다. 쓰러진 조림왕을 위문하기는커녕 소란을 피운 일부 주민들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임 선생은 보람없이 막대한 빚만 남긴 채 생을 마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남 장성 일대에는 편백나무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값비싼 일본제와 비교해 품질에 손색이 없으면서도 가격은 저렴하다. 베개부터 도마, 가구까지 수준이 상당히 높아 보여서 나도 도마며 발판 등을 샀다. 아마 임 선생 덕분에 편백나무 상품을 만들어 파는 주민들이며, 축령산 편백나무와 삼나무와 낙엽송이 이룬 숲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생계를 잇는 주민이 얼마나 될까? 위대한 인물은 그 존재만으로 여러 명을 먹여살린다는 말을 임 선생의 삶을 보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를 보며 실감하게 되었다.
 
  임 선생의 후손들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얼마 전 그의 후손들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임 선생 슬하의 6남3녀 가운데 딸 순갑씨와 아들 관택씨, 손자 채윤씨가 임업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손자 채윤씨는 산림청 부여 국유림관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렸을 적 축령산에 갈 때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한 보도가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 국민에게 휴식과 여가의 장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며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는데 정말 자랑스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축령산 편백나무숲 정상 근처에는 임 선생이 공적비와 함께 잠들어 있다. 나무를 사랑한 이답게 그는 수목장을 택한 것이다. 그의 아내 김영금 여사 역시 남편 근처에 잠들어 있다. 이 숲은 전국에서 힐링을 원하는 시민과 아픈 몸을 치유하기 위한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아마 그 광경을 나무로 환생한 부부는 즐겁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숲 곳곳에는 등산객들이 쉬어갈 만한 공간들이 있었다. 이곳의 한 숲 해설가는 이런 말은 했다. “고 임종국 선생께서 수목장한 곳이 지관(地官)들이 명당으로 손꼽은 곳이며 기념비가 있는 곳도 그 혈맥이 내려오다 맺힌 좋은 지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인심 사나운 사람들은 위인(偉人)을 망각해도 자연은 그에게 좋은 안식처를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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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박리    (2018-05-05)     수정   삭제 찬성 : 7   반대 : 3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임종국 선생도 훌륭하고 우리나라 산천 어디를 가나 박정희 대통령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구나 하는 인식도 하였습니다.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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