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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19〉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는 무슨 뜻인가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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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는 ‘임금에게는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朋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
⊙ 한 무제 때 급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리를 베푸시겠다고 한다”고 직언
⊙ 태종 때 노이, “겉으로만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다 갖춘 양 꾸민다”고 비판…. 태종, “근거 없는 일이 아닌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한 무제의 간신(諫臣) 급암.
임금에게 직간하는 신하의 상징이었다.
  《논어(論語)》 책을 열고서 학이시습(學而時習) 불역열호(不亦說乎)를 어렵사리 넘으면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를 만나게 된다. 강의를 하면서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대부분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한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과연 그럴까? 공자(孔子)가 과연 그런 뜻으로 한 말일까? 그런 정도의 말인데 《논어》라는 책의 서두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다시 물어본다.
 
  “그러면 가까이에서 늘 만나는 벗이 오면 기뻐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가까이에 있는 벗과 멀리서 찾아온 벗을 차별해서 대우하라는 말일까요?”
 
  그때야 상황을 눈치챈 청중은 웅성웅성한다.
 
  먼저 우(友)가 아니라 붕(朋)이다. 붕은 벗 중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벗[同志之友]을 말한다. 그 뜻은 열렬하게 애씀[文]을 배워 그것을 틈날 때마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뜻을 함께하는 벗이 바로 붕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적용해서 말하면 임금으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 바로 붕이다.
 
  그런 붕이 원(遠)에서 온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임금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측근, 근신(近臣), 후궁 그리고 친족들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다. 일반 백성들의 공적인 의견이나 비판적인 견해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바로 이럴 때 그냥 그런 신하[具臣]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붕신(朋臣)이 있어 그가 그런 쓴소리, 비판, 공적인 의견을 듣고 와서 가감 없이 전할 때 성내지 않고 오히려 평소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을 때라야 맘껏 신하들은 그 쉽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임금에게 전달할 수 있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즐거워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 제아무리 신뢰를 받는 신하라도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감히 하기 쉽지 않다.
 
  정리하자면 학이시습 불역열호는 임금에게 스승 같은 신하[師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는 임금에게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朋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둘은 모두 임금의 겸손한 마음[謙]을 요구하고 있다.
 
 
  임금에게 벗은 가능한가?
 
겸재 정선이 그린 함흥본궁. 이성계의 잠저(潛邸)였고, 함흥차사 전설의 무대이다.
  세조 4년 9월 16일(1458년) 의정부에서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를 처벌할 것을 아뢰었다. 이유는 전날 술자리에서 임금인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전에도 과감한 직간(直諫)으로 문제가 된 바 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향해 “너”라고 한 것은 아무리 만취 상태였다 해도 죄를 벗기가 어려웠다. 불경(不敬)은 물론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무군(無君)의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승까지 지낸 훈구(勳舊)공신 정인지를 처벌하기는 힘들었다. 1년 넘게 정인지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결국 이 건은 직첩(職牒)을 회수했다가 다시 돌려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참고로 나이는 정인지가 1396년, 세조가 1417년생이니 정인지가 21세나 많았다. 나이로만 보면 정인지는 세조에게는 벗 같은 신하가 아니라 스승 같은 신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종 말년에 함께 각종 도서 편찬 작업을 하면서 벗과 같은 뜻을 나눈 바 있었기에 우정의 의미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지는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해 여러 차례 목이 날아갈 뻔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성석린(成石璘)이라는 벗과 같은 신하가 있었다. 실록은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로부터 석린을 가장 중히 여기더니, 왕위에 올라서는 대우함이 더욱 높아서 비록 임금의 마음에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석린을 보면 마음이 풀리어 노여움을 그치고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다.〉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다.” 이런 신하가 바로 전형적인 붕신(朋臣)이다. 실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야사집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주인공이 성석린이라고 나온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태조 이성계는 그 일에 분노하여 고향인 함흥 옛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아버지를 모셔오지 못했다.
 
  이에 성석린이 오랜 벗이기도 하여 스스로 갈 것을 청해 함흥으로 갔다. 석린은 과객 차림을 하고서 그 인근을 지나는 척했다. 태조가 이를 멀리서 알아보고서는 환관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했다. 태조와 마주한 석린은 한참 동안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가만히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것도 직접 말할 수는 없어 인륜(人倫)의 도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이 바로 태조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유붕자원방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역낙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석린의 방문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낯빛이 변하며 말했다.
 
  “네가 네 임금을 위해 비유를 끌어들여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이냐?”
 
  이에 석린은 자신의 순수성을 믿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만일 과연 그런 의도라면 신의 자손 중에 반드시 눈이 먼 소경이 나올 것입니다.”
 
  이 말에 태조는 화를 가라앉히고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와 부자 화해를 했다. 그런데 《대동기문》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석린의 큰아들 지도(至道)는 소경이 됐고 둘째 아들 발도(發道)는 아들이 없었으며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구수(龜壽) 및 그 아들은 모두 배 속에서 소경이 됐다.”
 
  결국 아무리 오랜 벗이었다고 해도 한 사람은 임금이 되고 한 사람은 신하가 될 경우 계속 벗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는 오히려 언관(言官) 혹은 간관(諫官)의 역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급암과 무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이 주작도위(主爵都尉・왕실에서 순임금의 제사를 주관하고 그 후손들에게 작위를 내리는 일을 맡았던 고위직)가 되어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간언은 황제의 안색을 범할 만큼 직간이었는데 한번은 황상이 글을 하는 유학자들을 초빙하려 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러이러하고자 한다(이 말은 ‘어짊과 의리[仁義]의 정치를 행하고 싶다’는 뜻).”
 
  이에 급암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리를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찌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화가 나서 낯빛까지 바뀌더니 서둘러 조회를 끝내버렸다. 공경(公卿)들은 모두 급암을 걱정했다. 황상은 조정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도 심하구나. 급암의 꽉 막힌 우매함[戇]이여!”
 
  여러 신하가 급암을 책하자[數=責] 급암이 말했다.
 
  “천자께서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두어 보필하는 신하로 삼으셨는데 어찌 아첨하여 천자의 뜻만 따라 하면서 폐하를 옳지 못한 곳에 빠지게 하겠소? 또 그런 지위에 있는 이상 자기 몸을 희생시키더라도 조정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급암이 병에 걸리자 엄조(嚴助)가 급암에게 휴가를 내려줄 것을 황상에게 청했다. 이에 황상이 말했다.
 
  “급암은 어떤 사람인가?”
 
  “급암에게 어떤 책임이나 자리를 맡기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를 보필할 경우 수성(守成)해 낼 것이며 옛날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둘 다 옛날의 힘센 자였다) 같은 자라도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그렇다. 옛날에 사직을 지켜내는 신하[社稷之臣]들이 있었는데 급암이 바로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무제는 급암을 들여 쓰지 못했다.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급암의 곧음[直]을 무제는 사직을 지켜내는 신하에 가깝다고 보았으면서도 결국은 제대로 쓰지 못한 반면 공손홍(公孫弘)의 무리는 끝까지 총애하며 일을 맡겼습니다. 대체로 무제의 마음은 아첨하고 간사한 자[佞邪]를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여겼을 뿐 그들이 결국은 황제의 병을 더 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반대로) 충성스럽고 곧은 자[忠直]를 자신을 배척한다고 여겼을 뿐 그들이 결국은 황제의 황제다움[德]을 이루어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곧게 말하는 것[直言]은 진실로 간관의 직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묻힌 헌릉.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흥미롭게도 무제, 급암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가 우리 역사에도 등장한다. 태종 4년 5월 3일이다.
 
  사간원에서 다시 노이(盧異)를 탄핵하니 명하여 전리(田里-고향)로 내쫓았다. (사간원에서) 이(異)에게 상(上)을 향해 공손치 못한 말을 하고 그것을 바깥사람들에게 떠들어 말한 까닭을 물으니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말한 것이 불손한 것이 아니라 곧게 말하는 것[直言]은 진실로 간관의 직무다. 또 밖에 떠들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동료들과 그것을 말한 것뿐이다.”
 
  휴(休-조휴) 등이 소를 올려 말했다.
 
  “좌정언 노이가 지존을 향해 함부로 고분고분하지 못한 말을 지어내었고 밖에다 대고 사람들에게 떠들었으니 청컨대 직첩을 거두고 저 해외(海外・먼 바닷가)로 물리쳐야 합니다. 우정언 신효도 이를 거들어 말하였으니 마땅히 함께 죄를 주어야 합니다.”
 
  상이 이를 듣고서 이를 불러 물어보니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소신(小臣)이 사관일 때 해주(海州)에 어가를 따라가서 어리석은 속마음[衷]을 우러러 올렸더니 곧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여 주심을 입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항상 남몰래 생각하기를 만일 언관이 되어 말해야 할 것이 있으면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남김없이 다 말해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지난번에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께서 실질적인 다움(을 닦는 것)에는 힘쓰지 않으시고 겉으로만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다 갖춘 양 꾸미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신(李伸), 김보해(金寶海) 등이 여색(女色)을 바쳐 전하를 속였는데도 일찍이 죄를 받지 않아 죄를 청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썩은 참외의 비유와 남의 처첩을 빼앗았다는 말은 신이 한 발언이 아닙니다. 효(曉)의 경우에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들은 자가 잘못 들은 것일 뿐입니다.”
 
 
  “너는 분명 백이·숙제와 같은 뜻”
 
  그러고는 드디어 (이번 일의) 본말(本末)을 끝까지 다 말하니 상이 말했다.
 
  “네가 이와 같이 할 말이 있었으면 어찌하여 날 찾아와 전달하지 않고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했느냐?”
 
  이가 대답했다.
 
  “신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동료들과 더불어 원의(圓議・대간(臺諫)이 비밀리에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일이나 탄핵에 관계되는 일 또는 배직(拜職)한 사람의 서경(署景)을 의논하는 것. 완의(完議)라고도 한다)에서 말했을 뿐입니다.”
 
  상이 말했다.
 
  “옛날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주(周)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너는 분명 백이・숙제와 같은 뜻을 갖고 있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지금 마땅히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태종의 말은 노이가 처음부터 자신의 즉위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가 말했다.
 
  “신의 죄는 주살에 해당되건만 전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니 은택이 지극히 두텁습니다. 그러나 신이 백이・숙제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마땅히 일찍이 물러났지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간관이 되어서 한 번도 미미한 충성[微忠]이나마 바치지 못하고 갑자기 전리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상이 말했다.
 
  “너의 이런 말을 들으니 나 또한 슬프구나. 눈앞에서 오랫동안 일을 맡겼던 사람을 하루에 내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효는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고 그 소(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고 (해당 부서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좌헌납 박초(朴礎)가 대궐에 나아와 말씀을 올렸다.
 
  “노이는 죄가 무거운데 벌이 가볍고 효는 이와 죄가 같은데 벌이 다릅니다.”
 
 
  태종, “급암과 같은 신하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
 
  상이 말했다.
 
  “이가 말한 바는 근거 없는 일이 아닌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다만 이가 사관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에서 나를 모신 지가 이미 오래인데 나에 대해 평하기를 ‘겉으로는 옳은 척하고 속은 그르다[外是而內非]’고 했으니 내가 이를 가려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내가 (실제로) 다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급암이 한무제(漢武帝)에게 ‘안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로움을 베푸는 척한다’고 했는데 무제의 웅대한 재주[雄才]와 큰 계략[大略]은 내가 미칠 바는 못 되나 그렇지만 진정 급암과 같은 신하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이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벼슬살이를 하지도 못했다. 벗과 같은 신하[朋臣]는 그만큼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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