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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도의 역사 읽기 〈12〉 탄생 100주년 맞는 박정희는 우리에게 누구였나?

속물 근성에 아부하지 않은 국민의 진정한 교육자

글 :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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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혁신형 통치자
⊙ ‘민족’보다 ‘국가’ 우선 … 종족적·집단적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아
⊙ 포퓰리즘 일절 하지 않고 정신적 긴장감 유지한 게 가장 큰 치적

유광호
1958년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 연세대 강사, 이승만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한국자유회의 실행간사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자조와 실용정신을 가르쳤던 국민의 스승이었다.
  2017년 11월 14일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탄신(誕辰) 100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작년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결정돼 있었다. 그런데 올해 정권이 바뀌고 좌경세력이 철회 촉구 데모를 하자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오늘의 세계 10위권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 세계의 경륜 있는 정치가들과 수많은 학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기념우표 하나도 낼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반(反)대한민국 세력은 지속적으로 그를 ‘독재자’, ‘친일파’로 몰아 역사적으로 매장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런 프레임의 허구성과 악의는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짚었기 때문에 여기서 재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열거와 분석도 하지 않겠다. 오늘날 한국이 보여주고 있는 과학·기술·생산능력과 경영능력은 모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눈을 감지 않는 한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사의 기적을 이뤄 낸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근본적이고 망가지고 있는 이 나라 현실에 비추어볼 때 더 의미 있다고 본다. 그의 사회사상, 정치사상, 경제사상을 당대의 사회적 상태에 대비하여 검토해 보자.
 
 
  특권층에 대한 혐오
 
  박정희는 일제 식민지기인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 선산 상모리에서 빈농(貧農)의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부농(富農)의 맏이였으나, 입신출세의 꿈을 좇아 방황하다가 가산을 탕진할까 두려워한 부친으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낙척(落拓)한 신세가 되었다. 어렵게 초등학교를 마친 박정희는 가난한 수재들이 들어가던 대구사범학교를 나와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했다. 거기서 일본인 교사들과 잦은 충돌을 빚던 그는 의무복무 연한을 마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을 거치고 만주군 육군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대한민국 군문(軍門)에 들어가 육군 소장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을 일으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1963년 12월 직선제 선거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무엇보다 특권과 특권계급을 혐오했다. 이는 일제시대의 친일배(親日輩), 조선왕가 등의 특권층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한민족의 뿌리 깊은 가난과 망국에 따른 굴욕의 원인에 대하여 깊은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식민지 상황이지만 근대인으로서 큰 꿈을 펼쳐 보고 싶었다. 만주에서 약동하는 세상을 체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적 자세 때문에 그는 이승만 대통령 시기의 권위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상과 그 특권층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몇 차례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다. 세상을 확 뒤집어 나라를 환골탈태시키고 싶었다. 오로지 그 일념으로 당시 관행이었던 부정부패에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장군이 되고서도 가족은 기아선상의 고생을 했고 대신 그는 청렴한 군인의 표상으로 군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본래 늦게 군문에 들어간 까닭에 나이는 여러 살 위였지만 1955년이면 소장으로서 대한민국 육사 동기 중 선두주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명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현실 생활에는 거의 허무주의적이었다.
 
  이런 혁명가의 정념(passion)과 꿈은 그의 출신 성분과 인생 역정과 잘 어울린다. 박정희는 하층에서 시작해 상류층 바로 밑의 사회적 지위까지 천신만고 끝에 능력 하나로 올라왔다. 역사를 보거나 사회학 이론을 보거나 대개 이런 층에서 혁명가들이 나온다.
 
  이 점은 소년 시절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자신과 동일시했던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유복한 가문 출신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고위 장교로까지 올라가 혁명에 가담하고 대권을 쥐고 세계를 진동시켰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20세기 전반에 청소년들은 야망에 불탔던 시대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우상이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도 일제 시기에 나폴레옹 전기를 책이 헤지도록 읽고 읽으며 웅지를 품곤 했다고 한다.
 
  헤겔은 “역사상 성취된 위대한 일 중에 정념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문제의 정념이 무의식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구현하는 ‘위대한 사람들’ 내지 ‘창조적 소수’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개인적 정념 - 부, 명예, 영광에 대한 갈증 - 이 없었다면 그들은 역사의 주요 인물이라는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주도한 ‘건국혁명’이 이 땅에 세운 자유민주 체제가 없었다면 박정희는 낭만적 사회주의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한 위에 국가와 민족의 근대적 개조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도모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교수는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박정희의 정신세계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에 기인하는 팽배한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는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 민족의 사대주의 병폐, 자주정신의 결여, 게으름과 명예심의 결여를 증오했으며, 그 결과로 빚어진 민중의 고난과 가난에 분노하였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그의 강렬한 비판의식과 소명감은 그의 모든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변함 없는 기초를 이루었다. 그가 지향한 조국근대화는 단지 경제적 성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와 인간의 근본적인 개조를 추구하였다.”
 
 
  ‘상공’을 존중하는 군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울산석유화학공단을 시찰하는 박정희 의장.
그는 ‘상공’을 중시하는 군인이었다.
  박정희는 “가난이야말로 나의 스승”이라고 했다. 그의 혁명 동지들도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들이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보좌한 인재들도 가난한 농민과 가난한 선비의 후예들로서 어려운 처지에서 각고면려하여 실력을 쌓은 준재들이 태반이었다. 신현확, 김정렴, 오원철씨 등을 비롯해 각계의 이름나지 않은 인재들까지 손에 꼽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박정희는 그야말로 서민 출신 인재들에 의한 국민혁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구래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를 상공농사(商工農士)로 바꾸고자 했다. 그는 ‘상공(商工)을 존중하는 군인’이었다. 그가 숭상하고 독려한 ‘능률과 실질’은 상공(商工)과 군(軍)을 함께 관통하는 공통의 특성이다.
 
  그것은 그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의 의미를 아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홉스의 세계관과 루소파의 세계관의 싸움에서 1960~70년대 세계의 사상을 휩쓸던 루소파의 세계관에 흔들리지 않았던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한국이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포칵(J. G. A. Pocock)은 ‘마키아벨리안 모멘트(Machiavellian Moment)’, 즉 ‘마키아벨리적 계기’라는 개념으로 마키아벨리의 ‘혁신의 정치학’을 정리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혁신자 곧 새로운 통치자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혁신자를 물어뜯으려는 안팎의 도전에 대하여 혁신자 역시 그것을 이겨낼 만한 특출한 역량과 전략을 가져야만 한다. 마키아벨리 정치학이 탈(脫)도덕적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혁신의 목적과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희의 ‘마키아벨리적 계기’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을 ‘박정희 모멘트’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를 국가개조 혁명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혁명’을 원론 민주주의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통치 스타일이 점점 권위주의로 간 것은 어쩌면 불가피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화국을 폐지한 적이 없다. 공화국의 반대는 독재-전체주의다. 박정희의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은 공화국을 수호하고 그것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 ‘박정희 모멘트’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내전(內戰)에서 국가를 수호하고 노예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마키아벨리적 정치술과 비슷하다. 박정희는 북한 반란 집단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며 민족개조와 산업혁명 근대화를 이루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상당히 공화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포칵은 “공화주의는 근대적 조건에서 고대적(古代的) 방법을 전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민군(市民軍)에 기반하는 자유로운 국가가 마키아벨리 이래 서양 공화주의자들의 비전이었다.
 
 
  ‘구호로서의 민주’ 비판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미국 학자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는 이런 측면을 가리켜 ‘박정희가 좌파 사회주의적이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박정희는 대기업들을 육성했지만, 그것은 국제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며 그것도 국민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재벌에 포획된 적이 없다. 국민적이어야 하고 애국적이어야 하는 대기업들이 이런 의무에서 벗어날까 봐 항상 주시했다. 공화주의는 대(大)소유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박정희의 공화주의는 대기업이 국민에게 봉사하도록 지도했다. 자유주의의 권리론보다 공화주의의 책임과 의무를 더 강조하여 가르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반에는 원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임무로 여겼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수출주도형의 산업혁명 문제, 유신체제 선포 등 현대사의 몇몇 고비에서 야당·지식인 그룹과 타협 불가능한 노선 싸움을 벌이면서 권위주의 정치로 밀려갔다.
 
  박정희는 ‘구호로서의 민주’는 부정부패와 무능, 명분일 뿐이며 권력을 향한 장식물이자 선전수단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민족을 구원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유린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와 싸워 온 사람들을 진정한 민주주의 실천가로 보았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도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만드는 것, 즉 산업화를 이루는 것도 민주주의라고 했다. 민주주의란 “경제건설과 안정된 국가적 토양 위에서만 피는 꽃”이라고 국민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안 모멘트’에서 나라를 보전하고 중흥시킨 지도자들, 링컨이나 박정희 모두 암살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자유민족주의’
 
  박정희는 근대 번영국가를 지향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북한과 좌경 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우리 민족끼리’나 ‘분단·통일사관’의 위험성과 함정에 대해서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반공주의’로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사상적으로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유민족주의(Liberal Nationalism)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북한과 국내 좌익의 ‘민족주의’는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정복하기 위한 선동수단이다. 그리고 종족적·혈연적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이용되거나 그들을 추종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다.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거나 북한과 ‘체제경쟁을 선포’했다.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가 민족보다 국가를 단연 우위로, 핵심 문제로 보았으며 전체주의의 질료(質料)가 되는 종족적·집단주의적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조국근대화, 산업혁명, 자본주의도 도덕을 필요로 한다. 박정희에게 그런 도덕의 원천은 민족주의 내지 애국주의였다. 국민간의 협동이었다. 박정희는 거기에 개인의 자각, 즉 자조(自助)의 윤리를 병행시켰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시민적(civic), 즉 자유민주적 민족주의를 견지했다. 박정희는 선발국을 추격하기를 원하면서도 선발국이 노출한 사회적 갈등과 계급투쟁은 회피하거나 우회하기를 바랐다.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박정희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사유(思惟)는 깊었다. 전쟁, 즉 인간 실존(實存)의 이치를 아는 선비였다. 책을 많이 읽었지만, 교과서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공시적(共時的) 유행에 구속되지 않았다. ‘자기 준거적(準據的) 리더십’을 갖추게 됐다. 자고로 나라를 다스릴 선비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이상으로 여겼다. 우리의 옛 선비들이 박정희의 경세와 치적을 본다면 이상적인 ‘문무겸전’의 통유(通儒)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포퓰리즘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치적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
  박정희가 당시 국내외 경제학자들의 말을 들었다면 그 후 몰락한 인도나 남미 꼴이 났을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루카스(Robert Lucas)가 박정희의 전략, 즉 박정희 경제학이 옳았음을 이론적으로 1988년에야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정희가 공시적 유행이나 경제학 패러다임을 곧이곧대로 따랐다든지, 포퓰리즘을 했더라면 한국은 일어날 수 없었다. 세상의 이치를 깊게 알았고, 우리 자신의 처지를 허상 없이 파악하고 그 처지에 맞게 일을 짰던 것, 겉멋을 부리지 않았던 것, 포퓰리즘을 일절 하지 않았다는 것, 그 치열한 정신적 긴장과 공변(public)됨이 박정희의 최대 치적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의(義)를 행한 자다. 속물 근성들에 절대 아부하지 않는 진정으로 맑고 고상한 정신, 그런 점에서 진정한 교육자요 국민의 스승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 가르침은 자조와 협동 정신이다.
 
  안보위기를 맞아서는 국민의 정신적 단결이 가장 기본적인 무기다. 박정희 정신을 이해하고 오늘에 되살려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가망이 있을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박정희 혁명’도 여기서 그만 청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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