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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20〉 〈우렁각시〉를 둘러싼 불편한 시선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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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적으로는 곳곳에 성적(性的) 이미지 가득한 에로틱한 판타지
⊙ 우렁각시가 총각을 배불리 먹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풍요를 가져다 주는 ‘화수분’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와 통해
⊙ 고부(姑婦)갈등 코드 내장 … 소아적 욕심이 빚어낸 인간 본연의 비극을 보여줌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현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전래동화로 익숙한 우렁각시 이야기 속에는 성적 판타지 계급갈등, 고부갈등 같은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옛날에 늦게까지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이 노모(老母)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노총각이 논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심하고 서글퍼 탄식을 했다. “이 논을 열심히 매서 누구랑 먹고살지?”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랑 먹지 누구랑 먹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총각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한 번 같은 소리를 해 보았더니, 또 “나랑 먹지 누구랑 먹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잘 살펴보니 논가 질척한 뻘에 커다란 우렁이가 하나 있는데 그 우렁이가 한 소리였다. 그래서 그것을 주워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있는 큰 항아리에 물을 채운 뒤 담가 두었다.
 
  다음 날 총각이 다시 논에 나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글쎄, 집이 말끔히 치워져 있고 정갈하게 맛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무럭무럭 김이 오르는 쌀밥에 따뜻한 국과 그 맛난 꿩을 알맞게 구워서 만든 반찬까지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시장했던 총각은 맛나게 그것을 다 먹었다.
 
  그런데 이런 신기한 일이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상한 마음에 총각이 하루는 일을 나가지 않고 숨어서 부엌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항아리에서 선녀같이 예쁜 처녀가 홀연히 나오더니 여기저기 쓸고 닦고 청소를 한 후에 맛난 반찬을 장만하고 밥을 지었다. 그렇게 다 차려 놓고는 홀연히 항아리로 쏙 들어가 버렸다.
 
  놀란 총각은 다음 날 다시 몰래 숨어 있다가, 항아리에서 나온 처녀에게 달려가 붙잡고는 자신과 살자고 매달렸다.
 
 
  우렁각시의 비극
 
  “서방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어요. 조금만 참아 주세요.”
 
  이야기에 따라 사흘을 참아 달라는 것에서부터 석 달, 삼 년까지 조금씩 다르지만 참아 달라는 간곡한 말은 동일하다. 그러나 어디 총각이 한시라도 참을 수 있겠는가. 처녀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안 된다, 기다릴 수 없다’며 처녀를 졸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엄청나게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았다. 누가 보고 데려갈까 두려워 바깥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매번 남편이 먹을 점심을 지으면 시어머니가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우렁각시 보고 밥을 가져다주라고 시킨다. 그 이유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시어머니가 자신의 욕심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다. 우렁각시가 혼자서 맛난 것을 먹는다고 생각해서, 우렁각시가 들에 나간 후 누룽지를 박박 긁어 먹고 싶어서,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해서 등등 서로 다르지만, 결국 시어머니는 우렁각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음을 드러내고 결국 아들이 말한 것을 어기고 각시를 들로 내놓는다.
 
  우렁각시는 그렇게 점심을 가지고 가던 중 사또의 행차를 만나게 되어 숲에 숨는다. 사또가 보니 숲속에서 뭔가 신비로운 환한 빛이 보였다. 사또가 하인에게 가서 무엇인지 알아보라며 “꽃이면 꺾어 오고, 샘이면 물을 떠오고, 사람이면 데려오라”고 한다.
 
  우렁각시는 난리가 났다. 하인이 보니 어떤 미인이 밥 광주리를 내려놓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인이 가자며 끌어당기자, 우렁각시가 살려달라며 가락지를 빼 줬다.
 
  하인이 그것을 가져다 바쳤지만 사또는 여전히 서기(瑞氣)가 보인다며 재차 가 보라 했고, 그때마다 각시는 옷고름, 옷, 신발을 건네고, 결국 내줄 것이 없게 된 그녀는 잡혀 가고 만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내가 없는 것을 보고 사정을 알고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바닥에 뒹굴며 괴로워한다. 얼마나 울부짖으며 굴렀는지 그만 죽고 만다. 남편은 그렇게 죽어 새가 되어 관가로 날아가 울어댄다. 사또가 시끄럽다며 그 새를 잡아 죽인다. 결국 우렁각시도 죽고 만다.
 
 
  성적(性的) 흥분과 남성 판타지
 
신윤복의 풍속도 〈계변가화〉. 빨래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성의 욕망을 느낄 수 있다.
  〈우렁각시〉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성적 시각에 따른 성적(性的) 판타지이다. 이야기에는 성적 이미지가 가득하고 그 또한 선명하고 노골적이다.
 
  ‘우렁’은 여성 성기의 상징이며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기능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비(口碑)설화의 속성상 디테일은 생략되거나 변이(變異)되기 마련이다. “우렁이가 질퍽한 뻘에 파묻혀 있다”는 상황은 대부분의 〈우렁각시〉 이야기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또 일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말할 때, ‘밭에서 일한다’는 서술이 일반적인데, 이 이야기만큼은 노총각이 ‘논에서 일하는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우렁이가 논의 질퍽한 뻘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구비문학대계(口碑文學大系)》의 〈우렁각시〉 각편에 〈조개각시〉가 있다는 점도 그렇다. ‘조개’가 분명한 여성 성기(性器)의 상징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우렁각시’에는 여성적 이미지와 성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가 강조된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과 주요 갈등에도 선정적인 성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논에 남편의 밥을 가져다주다 사또의 행차를 만나게 되어 수풀에 숨은 이후 장면도 그렇다. 그녀가 있는 곳에 서기가 비치자, 사또가 하는 “꽃이면 꺾어 오고, 물이면 떠 오고, 사람이면 데려오라”는 명령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잡으러 온 하인에게 우렁각시가 차례로 내주는 것이 ‘가락지’, ‘옷고름’, ‘옷’, ‘신발’인데, 이들 역시 성관계와 성적 착취를 연상시키는 소품들이다. ‘가락지를 빼 주는 행위’나 ‘옷고름을 풀어 잘라 주고’, ‘옷을 벗어 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고, ‘자신이 신던 신발을 벗어 주는’ 행위도 역시 그렇다. 우렁각시의 신발은 신데렐라가 왕자의 무도회에 갔다가 시간이 임박해서 도망치듯 사라지다가 벗어 놓은 유리구두가 발휘하는 성적 광휘와 동일하다.
 
 
  〈선녀와 나무꾼〉과 〈우렁각시〉
 
  아무튼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우렁각시와 늙수그레한 총각의 결합은 성적 이미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101번째 프로포즈〉나 〈미녀와 야수〉처럼, 둘의 결합은 ‘고귀한 것의 짓밟힘’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충실한 감정을 격발시키기 때문이다. 남성 입장에서는 정말 근사한 판타지인 것이다.
 
  이런 에로틱한 판타지는 천상의 선녀와 결연한 지상의 나무꾼 이야기인 〈선녀와 나무꾼〉 정도인데, 〈선녀와 나무꾼〉은 〈우렁각시〉와 차원이 다르다. 선녀는 나무꾼과 억지로 결혼했기 때문이다. 나무꾼이 날개옷을 훔쳐 감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와 사는 거였다. 나무꾼에게는 끝내주는 미녀를 얻는 신나는 모험담이지만 선녀 입장에선 끔찍한 납치 강간극이다. 이는 선녀가 날개옷을 되찾자마자 하늘로 가 버린 것만 봐도 분명하다. 너무 빤한 소리지만, 선녀는 나무꾼을 사랑했을 리 없다.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강요이고 억압이었기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렁각시는 다르다. 그녀가 총각의 부름에 “나랑 같이 먹지”라며 긍정적으로 호응해서 나섰기 때문이다. 어떤 억지도 억압도 없다. 각시는 총각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결국 〈우렁각시〉 이야기는 농촌의 떠꺼머리 늙은 총각에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저절로 홀로 사는 노총각에게 느닷없이 미녀가 나타나 결연(結緣)한다는 내용은 곳곳에 성적 흥분이 가득한 남성 판타지로 읽히기 쉽다.
 
  물론 이런 독법(讀法)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가장 원초적인 시각일 뿐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화수분과 ‘풍요의 뿔’
 
  “나도 우렁각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 말을 듣고 꽤 놀랐는데, 말을 한 당사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보통 남성들이 우렁각시를 두고 떠올리는 이미지가 엄청나게 고혹적이고 섹시한 여성이기 때문에, ‘여자가 무슨 여성을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성은 ‘각시’가 아니라 ‘가정부’가 필요하단 소리를 한 거였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려 피곤에 찌든 몸으로 귀가하는 여성들의 마음속 바람은 충분히 짐작된다. 누군가 집을 말끔히 청소해 놓고 근사한 찌개에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나중에 설거지까지 해 주면 금상첨화이고 말이다.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우렁각시를 원하는 거였다. 사실 이는 여성들만의 시각이 아니다. 먹고살 것이 부족한 가난하고 척박한 삶을 사는 모두의 소망이다.
 
  성적 상징과 흥분 때문에 우리가 놓친 중요한 본질은 우렁각시가 총각을 배불리 해 주었다는 점이다. 꿩을 잡아다 굽고 따뜻한 밥을 차려 주었다는 것이 우렁각시의 섹시한 이미지와 성관계보다 더 본질적이다. 게다가 우렁각시의 밥상은 무한정 매일같이 반복된다. 세상에 … 도깨비방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무한정 먹을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총각이 우렁각시와 살겠다고 치맛자락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총각은 늙어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가뭄이 들어 곡식농사가 망해도, 남들이 다 굶주려 죽어도, 총각만은 우렁각시의 은총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요에 대한 환상과 소망은 동서고금 어디든 공통적이다.
 
  동양에는 끝없이 값진 재물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보물단지 ‘화수분’이 있고, 서양에는 무엇이든 담아 두면 그것이 계속 새끼를 쳐서 물건이 넘쳐 흐른다는 ‘풍요의 뿔’이 있다. 그것이 후대적 변이를 거쳐 현실화한 것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우렁각시’ 같은 것이다. 무제한의 먹거리를 무한정 제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판타지이다.
 
 
  〈우렁각시〉 속의 계급갈등
 
신윤복의 풍속도 〈청금상련〉. 여성을 노리개로 삼은 조선시대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우렁각시를 권력자인 사또가 빼앗아 간다. 성적 이미지로만 읽으면 힘없는 약자의 기본적 삶인 성적 행복을 가로채는 것으로만 보인다. 서양 중세시대 영주의 초야권(初夜權)처럼 성적 착취로만 읽으면, 〈우렁각시〉를 잘못 읽는 것이다. 사또가 빼앗아 간 것은 성적인 아리따운 여성만이 아니라, 백성의 풍족한 삶을 박탈했다는 점이다.
 
  들판에서 각시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뺏긴다. 하나하나 줄 것을 모두 다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게 된 각시가 끝내는 사또에게 잡혀간다. 끝없이 당하고 착취당하다가 마지막엔 몸뚱이까지 완벽하게 구속되어 버리는 거다. 실제로 계급사회에서 지배자인 권력자가 약자(弱者)의 여성을 뺏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성 판타지로 읽는 시선에선 주인공이 ‘총각’이었다면, 이런 강자와 약자의 계급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주인공은 가해자인 ‘사또’이다. 그리고 이런 독법은 약자와 강자의 계급적 갈등과 모순을 읽어 낸다. 없는 자의 작은 밥상마저 앗아 가는 가진 자의 횡포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다면 본질을 놓치고 만다. 우렁각시가 잡혀가는 비극의 근본 원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사또가 우렁각시를 데려감으로써 그는 크게 두 가지를 부정했다. ‘인간 본연의 성적 욕망’과 ‘배불리 먹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자 삶의 이유이고 동시에 과정인 본질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짓밟힌 기저를 살짝 들춰 보면 그 안에서 고약한 욕심과 교묘한 술수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곧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모든 파괴와 훼손이 바로 각시의 시어머니, 즉 총각의 모친의 불편한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직접 파괴한 외적 기제는 사또지만 본질은 바로 모친에게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왜 밥을 안 해 줬나?
 
  여기서 우리는 잠시 이야기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총각은 논을 매면서 탄식한다. 이 많은 논을 매서 대체 누구랑 같이 행복하게 먹고살 것이냐는 탄식의 소리를 잘 들어 보자.
 
  모든 각편이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탄식 소리는 “이따위 논을 매서 뭘 대체 먹는단 말이냐”가 아니라, “이 논을 매서 누구랑 먹고 살까”였다. 즉, 총각의 최대 고민과 괴로움은 논을 매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억압적 사회구조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에 대한 탄식이었단 점이다.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내가 없는 괴로움, 서글픔, 답답함. 그것이 바로 총각의 최대 고민이었다.
 
  그 탄식은 우렁각시의 주체적 호응에 따라 해소되었다. 매일같이 항아리에서 나온 우렁각시가 맛난 밥과 반찬을 마련해 주었으니 말이다.
 
  아니 아니, 잠깐! 뭔가 조금 이상하다. 잠시만 차분히 따져 보자. 총각이 밖에 나가서 일하다 돌아오면 우렁각시가 밥을 차려 놓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이 말은 꼭 우렁각시가 차려 놓기 전에는 아무도 밥을 차려 놓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밥을 차려 주지 않아 일로 허기진 총각이 집에 돌아와 찬밥을 물에 말아 먹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지점이다. 왜냐하면 이 집에는 우렁각시 이전에도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각의 어머니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시장한 아들을 위해 밥도 마련해 주지 않는단 말인가?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밥을 안 차려 주었다고 난리냐!”
 
  이렇게 발끈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글쎄 남편 밥을 안 차려 주는 부인들은 많이 봤어도 아들 밥을 안 차려 주는 어머니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밖에 나가 일하느라 시장한 아들에게 밥 한 끼 차려 주지 않는 노모라 …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병들어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우렁각시가 온 이후 노모는 점심을 들고 아들에게 간 적도 있으니 아픈 것도 아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어떻든 이 모친은 아들의 밥을 차려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들이 뭘 먹고 사는지 상관을 하지 않았다. 밥을 차려 준다는 것은 맛난 반찬을 장만하고 따뜻한 밥을 마련한다는 말이 아니라, 집안의 안살림을 하고 있느냐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결국 분명한 것은 총각의 모친은 집안 살림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우렁각시가 이 집에 오기 전에도 말이다.
 
 
  불편한 진실 - 시어머니의 욕심
 
아말시아에게 ‘풍요의 뿔(코르누코피아)’를 선물하는 님프. 노엘 코이펠 작.
  이제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들과 며느리, 즉 총각과 우렁각시의 행복한 삶을 파탄나게 한 원인이 시어머니의 욕심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시어머니의 오해일 수도 있다. ‘며느리가 혼자 맛난 것을 먹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며느리를 들로 내보낸 후 가마솥의 누룽지를 긁어 먹을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떻든 총각의 모친은 아들이 그토록 신신당부한 것을 무시하고 며느리를 들로 내보내고, 결국 비극이 일어나게 한다.
 
  “아니 그럼, 젊은 것이 밥을 날라야지 늙은 시어머니를 시키는 것이 옳단 말이냐?”
 
  이런 지적은 어느 정도 옳다. 당시나 지금이나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우렁각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우렁각시가 단순히 일을 척척 잘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한도 끝도 없이 퍼내 오는 풍요로움을 익히 맛보고 알았을 테니 말이다. 우렁각시는 ‘풍요의 뿔’이자 화수분이었고 도깨비방망이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친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다. 자신의 욕심에 가려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여긴다. 매일같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앞에 놓고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욕심을 부린 것은, 황금알을 낳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모친이 문제의 원흉이란 것은 논에서 돌아온 총각이 어머니를 원망하며 땅에 구르다가 죽어 버리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거의 모든 각편이 원망을 하고 아들은 죽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새가 된 총각은 각시가 잡혀간 관아로 가서 이렇게 울부짖는다.
 
  “닌들 닌들 니 탓이냐 낸들 낸들 내 탓이냐. 울 엄니 탓이로다.”
 
  이 노랫말이 〈우렁각시〉의 모든 비극을 극명하게 담고 있다. 그렇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버린 모친은 그래서 결국 우렁각시도 아들도 잃고 만다.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밥은 먹고 살았을까? 아들 대신 논에 나가 일을 했을까? 알 수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관심도 없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쯤 되면 비로소 이런 고약한 질문이 떠오른다.
 
  “대체 왜 총각은 장가를 들지 못했던 걸까? 총각은 왜 그렇게 ‘누구랑 먹고 사느냐’는 한탄의 푸념을 했던 걸까?”
 
  글쎄 답은 알 수 없다. 총각이 못생겨서, 총각의 성격이 나빠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시어머니가 될 모친의 성격과 욕심이 한몫 단단히 했을 거란 의심이다.
 
  총각의 모친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총각을 장가 보내지 않았는지, 눈이 너무 높아 주변 처자들을 다 퇴짜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온 각시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각시가 아름답고 일도 잘하고 풍성하게 식탁을 마련하는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각시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배필이란 점만으로도 그녀를 존중했어야 했다.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갑자기 나타난 며느리에게 아들을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운함과 아쉬움, 야속함이 북받칠 수도 있다. 그래서 온 몸이 무기력하고 시큰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그 느낌에 따라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말 우렁각시 혼자서 맛난 것을 냠냠 먹을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아들놈을 독차지해서 자신을 소외감이 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경험이 많고 아는 것이 많은, 그리고 이미 세상을 꽤 살아 온 자기가 보기에 ‘어린 것’들은 무척이나 어설플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인정해 주고 지켜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앞선 세대가 해야 할 아름다움이다.
 
  아들은 배필이 있어야 했다. 모친 눈에 차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총각이 혼자 살아야 한단 말인가. 논에서 한스러운 탄식을 하며 김을 매야 한단 말인가. 그건 결코 행복이 아니고, 그런 아들을 보는 모친의 행복도 아니다.
 
  모친은 모친의 삶이 있고 아들은 아들의 삶이 있고 우렁각시는 우렁각시의 삶이 있다. 내 삶과 비록 달라도 남도 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아들을 낳은 이유이고 며느리를 맞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렁각시〉는 소아적 욕심이 빚어낸 인간 본연의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이야기이다. 눈 맑고 귀 밝은 분들은 성적 판타지와 풍요의 판타지에 현혹되지 않고 그 본질을 잘 찾아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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