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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의 조경 이야기 〈6〉 왜 조경인(造景人)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글·사진 : 정정수  정정수환경조형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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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조경(造景)’은 ‘경치를 빌려 쓰는 것’ … 마당에 작은 자연을 만들어 놓으려는 일본식 ‘조원(造園)’과 달라
⊙ 가이쓰카 향나무 대신 소나무를 쓰면서도 둥글둥글하게 다듬는 일본식 조원 개념 못 벗어나
⊙ 생태 순환고리 속에서 스스로를 가꾸는 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한국식 조경 지향해야

정정수
홍익대 및 동교육대학원 졸 / 개인전 1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2008 세계조경가대회(IFLA) 최우수상 수상(인도개최), 2008 올해의 신한국인 대상 수상(문화부문) / 기전대학교 예술조경과 교수, 고도원아침편지 명상센터 옹달샘 예술총감독,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예술총감독, 서울시 시민청예술축제 전시총감독, 현 정정수환경조형연구원장
한국의 대표적 정원인 소쇄원이다. 자연이 창조한 것을 최고의 미(美)라고 여기던 선조들은 원래의 지형과 식생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존하는 차원에서 조경을 구현했고, 인간의 접근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엿볼 수 있다.
  조경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석재이다. 석재의 시공 형태는 조경 장소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고궁처럼 정형화한 형태로 가공하여 배치하는 방법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자연석 시공 방법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한다.
 
  조경공간에 이용되는 자연석 중에는 웅천석·마천석 등 어두운 석재와, 밝은 색에 짙은 회색 무늬가 섞여 있는 발파석(일반적으로 온양석이라 불린다)이 있다. 발파석은 가격이 저렴한 편이어서 많이 이용된다. 발파석은 시공이 끝난 직후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지저분해 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어느 광고 카피처럼 명품의 조건은 ‘새것일 때 새것 같지 않고, 오래됐을 때 헌것 같지 않은 것’인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움은 퇴색하고 지저분함만 드러난다면 무엇 때문에 조경에 공을 들이겠는가?
 
  무엇이 시간의 흐름에 속박되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할까?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답은 ‘기본’에 있다. 모든 디자인의 기본은 ‘재료’에 있다. 그 재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품질’이다. 재료의 품질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조경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는 자재의 선택이 명품 조경을 결정하는 0순위 조건인 것이다.
 
  무조건 값비싼 자재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재의 가치를 이해하고 선택하여 조경의 품격을 조금 더 높이자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자재를 쓴다고 해도 가치에 맞게 사용하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될 것이다. 안목 없는 상태에서 값에 맞춰 자재를 선택한다면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조경이 ‘레디메이드’로 전락할 것이다.
 
 
  통일성과 변화
 
사람들이 이 계류를 볼 때마다 ‘원래 흐르던 계류가 아닌지?’ ‘정말 사람이 만든 것이 맞는지?’ 묻는다. 이런 질문에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의 손으로 만들어 낸 듯 ‘자연스럽다’는 뜻에서 나온 질문이기에 디자인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이고 싶다. 규격이 일정한 자재를 사용하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벽초지수목원 2003년 작업)
  조경에 자연석을 사용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정작 자연석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지 못하게 표현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자주 있다. 자연석을 이용할 때에는 반드시 크기의 변화를 변화무쌍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2~3목(돌의 무게 단위. 4목은 사람 4명이 돌에 줄을 매어 목도할 수 있는 나무에 걸은 후, 그 나무를 4명의 어깨에 얹어 옮길 수 있는 크기의 돌을 일컫는다), 4~5목 크기의 돌을 주문하여 시공하기 때문에 변화가 없을뿐더러, 인위적 결과물만 생기게 된다.
 
  미술의 근본은 ‘변화’와 ‘통일’을 그때그때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지점에서 미술적 가치가 매겨진다. 조경현장을 예로 설명하자면, ‘통일’은 계류(溪流)에 쓰이는 자재를 선택할 때 석재라는 자재로 통일시키는 것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석재라는 통일성을 갖추었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변화’를 가미해 밋밋함을 깨뜨려야 한다. 계류를 만들 때 ‘변화’는 석재의 크기를 다양하게 포진시킴으로써 모색할 수 있다. 자재도 크기도 통일되어 있다면 아무리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공염불이 되고 만다.
 
 
  한국의 자연주의 조경
 
강원도 영월 근처에서 찍은 계곡이다. 설계자와 시공자들이 평소에 자연 속 계곡의 모습에 깊이 관심을 가지면 어느새 그 디자인이 자연을 닮아 간다. 다른 사람이 시공해 놓은 수공간을 모방하는 것은 아주 편한 길이지만 자연스러움과 멀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水)공간에서 생명의 풍요로움을 느낀다. 이는 물 안과 밖에 서식하는 다양한 수생동식물 덕분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생명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식물에서 시작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생물이 수생식물을 통해 번식하면서 많은 생명체가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연’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수많은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이 ‘생태’를 공간에서 빠뜨린다면 그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조경이 된다. 그만큼 수공간 조성에 자연 생태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자연 생태 구현을 위해 기본이 되는 수생식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전문가의 역할일 것이다.
 
  “사람 손으로 만들었음에도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사람이 만들었으되(人爲的)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고(無爲的) 자연 속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사진은 바람직하지 않은 예로 제시하는 것이다. 크기가 비슷한 석재로 시공할 때 이와 같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여기에 줄까지 맞추어 가지런히 놓는다면 부자연스러움에 부자연스러움을 얹는 꼴이 된다. 돌 몇 덩어리가 줄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통일’뿐인 디자인에 ‘변화’를 가미했다고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어졌다.
  필자는 현대적 의미에서 자연주의 조경을 지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원래 자연주의 조경을 제대로 구현했던 이들은 우리 선조들이었다. 한국·중국·일본의 조경을 유럽인들 시선으로 본다면 거의 흡사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3국 조경의 문화적 차이는 한복과 기모노, 치파오만큼이나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 차이는 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뒷산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을 한복 소맷자락으로 가져왔듯, 한국인은 조경에서도 담장 밖의 자연을 최대한 존중하여 담장 안과 연결시키려 노력해 왔다. 이 점이 인간의 기술로 자연을 꾸며 내는 데 중점을 둔 중국, 일본과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일본식 ‘조원’에서 독립하지 못하나
 
일본 최고의 정원이라는 ‘아다치 미술관’ 정원이다. 축소지향적이며, 자연을 통제하려는 일본 조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아다치미술관 제공)
  그런데 왜 한국은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던 전통 조경(造景)을 버리고 일본의 조원(造園)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조원방식을 받아들였고 광복 이후에 우리 것을 되찾으려 노력한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관공서, 학교, 심지어 주택 정원에서도 일본식으로 다듬고 깎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모든 면에서 인위적인 것을 저급하게 여기고 자연의 기본 순리를 존중하는 방식을 지향했다. 반면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말했던 것처럼, 일본의 문화적 정서에는 사람은 물론 자연까지도 통제하려는 욕구가 존재하며,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다듬어 작게 만드는 축소지향적 성격이 깔려 있다.
 
  한국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건축·경관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다른 고유의 문화적 양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조경에서만큼은 여전히 일본의 ‘조원’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가? 왜 조경인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왜 아직도 한국의 조경 관련 전문서적은 일본의 조원기술을 베껴 만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가? 왜 한국인들이 ‘타샤 튜더’의 책에 열광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왜 조경인들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우리 정서에 부응하지 못하는가?
 
 
  향나무에서 소나무로 바뀌긴 했으나 …
 
타샤 튜더의 정원. 대중은 튜더의 정원을 갈망하고 있으나 조경인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일본 조원의 대표격인 가이쓰카 향나무 대신 한국의 상징인 소나무로 그 자리를 채우는 변화가 생기긴 했다. 이 또한 조경인들의 노력 덕분이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정서가 만들어 낸 결과다. 둥글둥글 다듬어 놓은 가이쓰카 향나무 대신 품위 있는 소나무를 원할 만큼 한국인들의 안목이 높아지자 조경인들은 수요의 변화에 맞춰 소나무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우리 정원에 어울리는 소나무 식재(植栽)가 일반화하긴 했으나, 조경인들은 그 소나무의 외형을 습관처럼 향나무 다듬듯 둥글둥글 깎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세계 기능올림픽 조경 분야에서 우승을 휩쓸고 있는 일본 제일의 조원회사가 있다. 그들은 ‘조경기술은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말한다. 몇년 전 이 회사의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그의 야심찬 포부를 듣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중에 일본의 조원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회사로 초대하여 무상으로 숙박시설을 제공하며 기술을 전수해 주고 싶다고 밝혔다. 달리 말하면 한국화 작가들에게 일본화를 가르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있는 것일까? 지식이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을 말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가서 배우고 있는 바보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을 빌려 쓰는 ‘조경’
 
조경은 조원과 달리 사람에 의해 완성되고 가꾸며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자연이 감당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조경과 조원이 크게 구별된다. (2003년 벽초지 작업)
  ‘조경’이란 말에는 ‘경치를 빌려 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는 이 ‘빌려 쓴다’에 방점을 찍고 조경에 접근한다. 하지만 일본이 사용하는 ‘조원’이라는 단어에서는 ‘작은 자연’을 마당에 만들어 놓으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일본의 어느 조경가는 그의 저서에서 ‘조원은 자연에 대한 원초적 반응으로 생긴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에게 원초적 반응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원초적 반응’으로 생겨난 조원 결과물을 보자면, 그것은 그저 자연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은 관리인 없이도 저절로 관리된다. 일본식 조원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100%로 본다면, 필자의 조경공간은 5~10% 정도의 관리만으로도 유지가 가능하다. 조경은 조경 안에 있는 자연에 스스로 관리하도록 일거리를 줌으로써 완성된다고 필자는 믿는다. 깎아 놓은 인형처럼 전시되는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라는 순환고리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스스로를 가꾸는 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 한국식 조경을 구현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조경의 현주소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한국 조경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태도는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조경이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시작될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이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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