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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8〉 프랑스 프로방스의 보석, 생 레미 드 프로방스를 가다

2km 두고 시대를 초월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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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가 전 유럽 식민지 가운데서 가장 사랑한 곳, 프로방스
⊙ 고흐 대표작의 산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에는 지금도 고흐의 숨결이
⊙ 올리브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터에서 그는 격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 아를에서 발작 후 생 폴 무솔로 옮겨 〈별이 빛나는 밤〉 등 남겨
⊙ 아를의 유명 카페 ‘고흐’는 관광객들의 순례지
⊙ 생 레미 번화가 뒷골목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생가
⊙ 수많은 예언 적중…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호기심 자극
⊙ 1999년 7월 지구 종말설은 지금도 다양한 해석 낳아
고흐가 입원했던 생 폴 무솔 정신병원 입구. 고흐의 동상이 서 있다.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에는 보석(寶石) 같은 마을들이 광활한 대지에 점점이 박혀 빛을 내고 있다. 한국의 50대 이상이 프로방스라는 단어를 접한 것은 국어교과서를 통해서였을 터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은 프로방스 뤼브롱 산맥을 배경으로 한 양치기 소년과 소녀의 섬광(閃光)처럼 짧은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프로방스를 보며 고향 로마를 떠올린 로마인들
 
  프로방스는 라틴어 ‘프로빙키아(Provincia)’에서 나왔다. 속주(續州)라는 뜻이다. 갈리아, 즉 옛 프랑스 땅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은 많은 해외 식민지 중에서 진정한 속주는 프로방스뿐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한복판을 가르는 론강은 지중해로 흘러들어 가며 땅의 젖줄 노릇을 했다. 그 경관에 로마인들은 고향 로마를 떠올렸다.
 
  그래서 개발한 도시가 프로방스와 지중해의 접점(接點)인 마르세유였으며 이어 아를, 아비뇽, 니스, 칸 같은 프로방스의 중심 도시들이 태어나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프로방스에 몸을 의탁한 천재였지만, 삶이 죽을 때까지도 불우했던 예술가가 찾아왔다. 인상파 화가의 대표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였다.
 
  이 ‘태양의 화가’의 일생에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네 장소가 있다.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1853~1886년)와 파리(1886년), 프로방스(1886~1889년), 오베르 쉬르 와즈(1889~1890년)다. 이 네 시기 가운데 고흐의 대표작들은 주로 프로방스의 아를, 생 레미 드 프로방스와 파리에서 30분 거리인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나왔다.
 
  아를(Arles)은 아비뇽, 엑상프로방스는 삼각형의 꼭짓점 같다. 아를은 로마시대 때 개척된 식민도시답게 원형경기장을 비롯한 유적이 많아 ‘작은 로마’로 불린다. 아를에서 고흐가 그린 작품이 〈화가의 침실〉 〈노란 집〉 〈해바라기〉 〈랑글루아 다리〉 〈작가의 초상〉 〈붓꽃이 있는 아를 풍경〉 〈꽃이 핀 과수원〉 〈수확하는 사람〉이다.
 
 
  카페 ‘고흐’의 노란 차양은 지금 고흐의 상징이 됐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 벽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이 걸려 있다.
  고흐가 살았던 노란 집은 소실(燒失)돼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고흐가 즐겨 찾은 카페가 아를의 원형경기장 언덕 아래쪽, 아를의 최고 번화가인 포럼광장 한 귀퉁이에 있다. 이곳은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정작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이들은 없고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고 떠나 화를 삭이는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카페들과 달리 샛노란 차양이며, 벽에 칠한 페인트 색깔이 아침보다는 황혼이 질 무렵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포럼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론강이 있고 론강을 따라가면 고흐가 자주 찾았던 아비뇽이 있다. 그 론강을 밤에 바라보고 그린 것이 고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이다.
 
  아를에 머물던 시기, 고흐는 예술가로서 꽃을 피우지만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다. 함께 아홉 달을 보낸 화가 고갱을 칼로 위협하다 자기 귀를 자른 것이다. 왜 화사한 프로방스의 태양을 보며 그는 정신병을 앓게 된 것일까. 답은 한 가지. 프로방스의 태양을 보면 알게 된다. 너무도 찬란한 빛이 인간의 모든 세포를 일깨우는 것이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 입구를 들어서면 양편에 올리브 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길이 나온다.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자신의 간병인과 함께 아를에서 32km 떨어져 있는 생 레미 드 프로방스로 왔다. 그곳의 생 폴 무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였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은 주위가 고요한 목가적인 작은 마을이었다.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2~3개월씩 이어졌으나 그곳에서 고흐는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가기 시작했다.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도로에서는 ‘빈센트(Vincent)’라고 쓰인 곳을 볼 수 있는데도 정작 정신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을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은데 내비게이션은 엉뚱한 곳으로만 안내했다. 한적한 마을 뒤편 주차장에서 프랑스인 부부에게 묻자 그들은 휴대전화의 지도 기능을 총동원해 그곳의 위치를 알려줬다.
 
 
  새하얀 건물 앞에 서 있는 절규하는 표정의 고흐 동상
 
생 폴 무솔 정신병원 안에 있는 작은 정원도 고흐가 즐겨 그림을 그린 장소다.
  고흐가 요동치는 감정을 화폭(畵幅)에 담아낸 생 폴 무솔 정신병원은 지금 웬만한 관광지보다 더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 됐다. 양편으로 늘어선 올리브나무 밭을 지나면 흰색 건물이 나온다. 12세기 수도원으로 시작됐다는데 딱 그런 분위기다. 여기서 고흐는 짧은 외출을 했고 병실로 돌아와 낮의 기억을 그림으로 옮겼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 입구에서 7유로를 내고 들어가면 고흐가 살아왔던 것처럼 울부짖는 듯한,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한 청동 동상이 나온다. 그 뒤로 병원 문을 열면 가운데 사각형 중정(中庭)의 화단(花壇)에 프로방스의 햇살이 내리비쳐 어두컴컴한 회랑(回廊)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2층으로 올라가면 고흐가 묵었던 방들이다.
 
  형 고흐를 위해 동생 테오는 방을 두 개 빌렸다. 2층 방은 침실, 1층의 방은 작업실로 삼았다. 테오는 정신병원장에게 형이 식사 때 꼭 와인 한 잔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편지도 썼다. 당시 정신병원의 원장은 이 네덜란드 출신의 광인(狂人)으로 인해 훗날 병원이 돈방석에 앉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입원 초만 해도 규칙적인 생활이 치료에 도움을 주는 듯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됐다. 병원이 해 준 것이라고는 1주일에 두 번 찬물 목욕뿐이었다. 고흐는 결국 테오에게 부탁해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로 옮기게 됐다. 그곳에는 세잔, 피사로 등 당대의 유명 화가들의 정신상담을 했던 가셰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맥클린의 ‘별이 빛나는 밤’
 
  대표작의 산실이지만 지겨웠던 생 레미 드 프로방스를 떠나 오베르 쉬르 와즈로 갈 날만을 기다리던 고흐는 잠시 행복했을 것이다. 130년 전 그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은 돈 맥클린의 ‘빈센트’라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가사가 시(詩)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 노래를 끝으로 고흐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인연을 마무리해 본다.
 
  Starry,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팔레트를 푸른색과 회색으로 칠해요)
  Look out on a summer’s day(여름날 밖을 내다봐요)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내 영혼의 어둠을 아는 그런 눈으로)
 
  Shadows on the hills(언덕 위의 그림자)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나무와 수선화를 그려요)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산들바람과 겨울의 냉기를)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흰 리넨에 유채색으로 담아요)
 
  Now I understand(이제 나 이해해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자유롭게 해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듣는 법도 몰랐죠)
  Perhaps they’ll listen now.(어쩌면 이제는 들을지 모르겠네요.)
 
  Starry,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밝게 불타오르는 꽃들)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보랏빛으로 흐릿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
  Reflecting vincent’s eyes of China blue.(빈센트의 푸른 눈이 비치네요.)
 
  Colors changing hue(색조가 바뀌네요)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호박색 곡식들로 가득 찬 아침 들판)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고통으로 파인 시든 얼굴)
  Are soothed beneath artist’s loving hand.(화가의 다정한 손이 달래주네요.)
 
  Now I understand(이제 나 이해해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자유롭게 해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듣는 법도 몰랐죠)
  Perhaps they’ll listen now.(어쩌면 이제는 들을지 모르겠네요.)
 
  For they could not love you(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But still your love was true(그래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했죠)
  And when no hope was left in sight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On that starry, starry night.(그 별이 빛나는 밤에.)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흔히 연인들이 그러듯 당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하지만 빈센트, 내가 말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살 곳이 못 됐다는 걸.)
 
  Starry,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에)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빈 방에 초상화들이 걸려 있죠)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이름 없는 벽에 액자도 없이 걸려 있네요)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세상을 바라보고 절대로 잊지 않는 눈으로 말이에요.)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당신이 만난 낯선 사람들처럼)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남루한 옷을 걸친 남루한 사람들)
  The silver thorn of a bloody rose(핏빛 장미의 은색 가시가)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새로 내린 눈 위에 뭉개 부서져 있네요.)
 
  Now I think I know(이제 나 알 것 같아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자유롭게 해 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ning still(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듣는 법도 몰랐죠)
  Perhaps they never will.(아마 절대 들으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왜 프랑스 마을 중심부에는 회전목마가 있을까
 
생 폴 무솔 정신병원 내부에 있는 라벤더 밭. 라벤더 향이 정신병자들의 심리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심었다고 한다.
  생 폴 무솔 정신병원에서 2km 지점에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중심가가 나온다. 프랑스 마을의 한복판에는 항상 회전목마가 있다. 왜 회전목마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늘 그렇게 번화가에서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있다. 혹시 에디트 피아프가 부른 ‘나의 회전목마(Mon Manege A Moi)’라는 노래가 그 답의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나를 황홀케 해요. 나의 회전목마.
  당신에게 안기면 나는 언제나 축제 기분. 세계 일주라도 할 수 있어요. 이만큼 빙글빙글 돌지 않을 테니까요.
  지구가 아무리 둥글어도 당신만큼 내 눈을 돌게 하지 못해요. 둘이서 있으면 얼마나 멋질까요. 우리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인생은 근사해요. 우리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 다른 별로 간 것 같아요.
  당신의 심장에 나의 심장이 가까이 다가서면 축제의 떠들썩함이 들려요. 지구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생 폴 무솔 정신병원 밖에는 옛날 수도원의 흔적이라고 전해지는 구조물이 남아 있다.
  여하간 그 회전목마가 도는 거리 뒷골목에 지금도 세계의 운명론자들을 설레게 하는 대 예언가가 태어난 가옥이 있다. 그는 바로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년 12월 14일~1566년 7월 2일)다. 프랑스 역시 우리와 비슷한지 젊은이들은 노스트라다무스를 잘 모른다. 나이 지긋한 이들은 “아!” 하며 알은체를 해 준다.
 
  노스트라다무스 생가에는 프랑스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집단관광을 온 노인들이 해설사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생가는 아이스크림 가게, 기념품 가게 등이 즐비한 번화한 골목 바로 안쪽인데도 왠지 음험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것도 아닐 텐데도 말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본명은 ‘성모(聖母)’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집으로 가는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골목길.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의사이며 예언가인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은 라틴어로 ‘성모(聖母)의 대변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Michel de Nostredame)이다. 우리가 프랑스의 어느 마을이고 가면 볼 수 있는 노트르담 성당에 나오는 그 노트르담(성모)이 노스트라다무스의 본명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1503년 12월 14일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사, 아버지는 세무공무원으로, 유대인 집안이었다. 1522년 명문대학인 몽펠리에 의대에 입학했으며, 흑사병을 잘 치료해 이름을 날렸다. 그는 4형제의 장남이었는데 둘째는 프로방스 지방의회의 의장, 즉 유명 정치인이 됐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재능은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교육은 할아버지인 진이 손수 맡았는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수학과 점성학의 기본을 가르쳤다. 인생의 스승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비뇽으로 갔다.
 
 
  어릴 적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알아
 
노스트라다무스의 집 앞에 있는 안내판.
  그때 이미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성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점성학은 그의 동료 친구들과의 주요 토론주제이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 전기(傳記)에 따르면 그는 이미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갈릴레오보다도 먼저 믿고 있었다고 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9살일 때 그의 가족은 유대교에서 가톨릭교로 종교를 바꿔야만 했다. 그의 부모는 종교를 바꾸는 것에 그리 근심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받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가 그를 1522년 몽펠리에 대학으로 약학을 공부시키기 위해 보낸 것도 그런 우려에서였다고 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집 근처에 있는, 태양을 형상화한 구조물.
  노스트라다무스는 석사학위를 쉽게 땄고 약사 자격증을 받자 시골로 내려가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기로 했다. 페스트 치료에 4년간 전념하다 박사학위를 마무리짓기 위해 몽펠리에 대학으로 돌아왔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치료법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단(異端)으로 비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능력을 의심한 이는 없었고 노스트라다무스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1년간 교수생활을 했지만 새 이론, 즉 주사를 놓은 후 환자를 출혈시키는 것을 금지한다든지 하는 방법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믿었지만 한편으론 ‘유대인’이었던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의 황금기는 툴루즈에서 생활할 때였다. 그는 유럽에서 에라스무스에 버금가는 철학자로 평가받던 줄리우스 시저 스캘리거의 편지를 받고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아겐에 있는 그의 집에서 머물렀고 1534년에 아름다운 소녀와 결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둘 사이에서는 1남1녀가 태어났다.
 
 
  페스트로 명성 얻고 페스트로 가족 잃어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단체 관광객들.
왼쪽으로 돌아서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집이 나온다.
  짧은 행복을 중단시킨 것은 페스트였다.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가 아겐으로 번졌고 당시로선 불치였던 페스트는 그에게서 아내와 두 아이를 앗아갔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존경했던 스캘리거와의 우정도 깨졌으며 재혼도 결혼지참금 문제 때문에 고소로 번졌는데 그것은 불행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1538년, 그는 이교도로 몰렸다. 동상을 만드는 한 조각가를 노스트라다무스가 “악마를 만들었다”고 한 게 문제가 된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단지 조각의 미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려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힘이 강대했던 시기에 그가 할 일은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 노스트라다무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예언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54년 이후부터 예언을 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던 것이다. 그는 예언을 할 때면 살롱 드 프로방스에 있는 집의 다락방에 올라가 책을 붙들고 공부했는데 그 책이 바로 《이집트의 신비》였다.
 
  1555년,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당시부터 세계의 종말까지를 담은 그의 예언서 중 첫 번째 파트를 마무리지었다. 흔히 우리는 그가 사용한 세기(世紀)라는 단어를 100년이라고 오해하지만 그가 쓴 책에는 모두 1000여 편의 4행시가 담겨 있어 그렇게 불린 것일 뿐이다.
 
  그의 시구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프랑스어, 프로방스 방언,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섞어 써 더욱 난해해 보였다. 그는 예언을 할 때 교회가 기피하는 마법사로 오해받는 것을 피하려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를 혼란스럽게 기술해 그 사건이 진짜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1555년에 그가 쓴 예언서가 화제가 되자 프랑스 왕비 메디치 캐더린까지 관심을 가졌다. 왕비는 1556년 노스트라다무스를 불러 2시간 동안 대화했는데 주된 질문은 왕의 죽음에 관한 4행시였고 그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만족했다고 한다. 실제로 왕은 1559년 사망했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했다.
 
  왕비는 2주 뒤 다시 그를 불러 자신의 일곱 아이에 대해 물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언서에 썼지만 캐더린에게는 그녀의 아이들이 모두 왕이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승승장구하던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해 교회가 “파리의 정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비판하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살롱 드 프로방스로 급히 돌아왔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죽는 날까지 예언 남기다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중심가.
나무 뒤로 프랑스 마을 중심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전목마가 보인다.
  이때부터 그는 통풍과 관절염을 앓았으며 찾아온 많은 저명인사들에게 예언을 해 준 것과 예언서를 마무리지은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66년 6월 17일에 유언장을 만들고 많은 재산을 남겼다. 이 시기에 그는 기타 재산들을 제외하고도 3444개의 금화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죽을 때도 화제를 남겼다.
 
  세상을 뜨기 전 노스트라다무스는 마지막 의식을 행하러 그 지역 수도원장에게 갔고 수도원장이 그날 밤 돌아가려 하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원장님은 다시는 살아있는 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예언대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시체는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됐다. 그는 살롱 드 프로방스 교회의 벽에 똑바로 선 채로 묻혔다.
 
  생 레미 드 프로방스와 가까운 살롱 드 프로방스는 한때 ‘미래를 비추는 거울 같은 도시’라고 불렸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여기 머물면서 한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 세계 2차대전, 아돌프 히틀러, 달 착륙, 9·11 테러 사태까지 포함됐다는데 다 믿기는 어렵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99년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999년 공포가 확산됐는데 나토가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 학살에 대해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한 코소보전쟁이 터지자 이것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일치한다는 해석이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1999년 7월에 온다던 세상의 종말(終末)이 오지 않자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를 허황된 사기꾼처럼 여기는 경향도 있었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에는 ‘1999년 7월’이라고 적힌 게 아니라 지구 종말 예언은 ‘1900, 90의 9년, 7의 달’이라고만 표현돼 있다.
 
  ‘쿼티렌’이라 불리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록은 1955년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일례로 앞서 말한 1999년 7월 지구 멸망설은 지금도 3997년 혹은 7000년으로 해석이 다르다. 사람들은 역사의 많은 사건들을 오히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 대입시켜 위안으로 삼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두드러졌는데 일례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 ‘HISTER’라는 글자가 있으며 이를 순서만 바꾸면 철자 하나만 틀린 히틀러(Hitler)가 된다는 것이나 ‘치욕스런 왕이 세워지면 황금시대가 막을 내린다’라는 4행시가 히틀러를 예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9·11 테러를 예언했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있다. 역시 ‘1999년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는 내용인데 현대 달력과 달리 노스트라다무스 시대의 율리력은 일곱 번째 달이 9월이 된다는 것이다. 1999도 순서를 바꾸면 9-11-1이 되고 ‘공포의 대왕’도 오사마 빈 라덴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베일에 숨겨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저자 피터 르미서리어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회의적이다. 그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시는 어떤 의미로든 해석이 가능하다.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궁금증은 미래에 대해 미리 알기를 원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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