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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17〉 정승(政丞)의 필요충분조건, “사안에 적중하여 오래 유지하라(中庸)”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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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은 그릇이 커서 남을 품을 줄 알고 한쪽으로 편벽되어 있지 않으며 열린 귀를 가진 사람
⊙ 조말생, 태종대부터 지신사·병조판서 등 역임하고도 재상 지내지 못해
⊙ 세종, “정무를 오래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반드시 그가
    사사로운 정실을 행사한다고 의심”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조말생은 태종~세종 시절 최고의 엘리트 관료였음에도 재상을 지내지 못했다.
  ‘더덕’ 정승을 꺾은 ‘김치’ 판서의 힘
 
  한 시대의 정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동시에 그 당시 국왕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수준과 안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실패한 임금 광해군 11년(1619년) 3월 5일 《광해군 일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가사 하나가 실려 있다.
 
  사삼각로권초중(沙參閣老權初重)
  잡채상서세막당(雜菜尙書勢莫當)
 
  우선 뜻을 풀어보면 ‘사삼 각로의 권력이 처음에는 무겁더니 / 잡채 판서의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구나’라는 뜻이다. 각로는 정승, 상서는 판서다. 사삼 각로란 사삼(沙蔘-더덕)으로 밀병을 잘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던 정승 한효순(韓孝純·1543~1621년)을 말하고 잡채 상서란 잡채(雜菜-혹은 김치)를 잘 만들어 광해군의 입맛을 사로잡은 호조판서 이충(李沖·1568~1619년)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더덕 정승과 김치 판서의 권력투쟁에서 김치 판서가 이겼다는 뜻이다.
 
  먼저 한효순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수군 강화에 많은 기여를 했고 선조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당색은 그리 강하지 않아 광해군 때에도 이조판서를 거쳐 광해군 8년(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광해군 9년 북인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소극적으로 관망하며 사직을 청했고 강경 폐모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처벌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효순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폐모론에 가담한 자로 분류돼 관직이 추탈됐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908년에야 겨우 신원됐다. 아마도 이런 엉거주춤한 입장으로 인해 실록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됐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더덕’ 정승은 참으로 그에게는 모욕적이라 여겨진다. 당쟁 격화 시대를 살아야 했던 온건 합리적 성품의 관리라면 흔히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충은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량(李梁)의 손자로 광해군 8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에 올랐는데 그가 죽었을 때 《광해군 일기》는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량의 손자로 사론(士論)에 버림받은 자인데 외척과 혼인을 맺어 궁궐과 결탁했으며 흉악한 무리에게 붙어서 현직에 통망(通望)되어 높은 품계로 뛰어올랐다. 위인이 흉험하고 탐욕스러운 데다 포학하여 사람의 목숨을 한 포기 풀이나 다름없이 여겼는데 일찍이 배에서 갓난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그 아기를 강에다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는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실은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해도 판서의 권세가 정승의 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은 중기 이후부터 당쟁이 자리 잡으며 당파의 실력자가 조정의 품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때였다고 할 것이다.
 
 
  정승감은 칭찬, 판서감은 은근한 욕
 
  정승은 한 글자로 상(相)이다. 정승을 승상(丞相)이라고도 했고 상국(相國)이라고도 했고 재상(宰相)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상을 빼고서는 정승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상은 일차적으로 돕는다는 뜻이다. 글자 자체가 장님에게 눈의 역할을 대신하는 지팡이를 나타낸다. 임금의 도와 길을 열어가는 것이 상, 즉 정승이다. 더불어 상은 살펴본다는 뜻이 있다. 사람을 보는 것을 상인(相人), 땅을 살피는 것을 상지(相地), 말을 알아보는 것을 상마(相馬)라고 한다. 정승은 임금을 도와 인재를 가려서 적재적소에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부터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정승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정승을 고르는 임금이 정상적이고 뛰어날 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왕조 시대에는 “저 사람은 정승감”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지도자감이라고 하는 극찬에 가까웠다. 그릇이 커서 남을 품을 줄 알고 한쪽으로 편벽돼 있지 않으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열린 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저 사람은 판서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정승감이 안 된다는 욕에 가까운 말이다. 즉 강직하되 융통성이 없고 머리는 뛰어나고 학식은 많은데 겸손하지 못해 자기주장만 강한 사람들에게 하던 말이다. 우리 역사 속의 조광조나 이이는 아무리 보아도 정승감보다는 판서감에 가깝다. 판서감이 정승이 됐을 경우에는 아무래도 제명에 살기 어려운데 김종서가 어쩌면 여기에 해당하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도 임금의 지인지감은 어떤 정승을 고르느냐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실은 그때 임금의 고민이 가장 깊은 순간이기도 하다.
 
  한나라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아들로 흔히 한나라의 문경치세(文景治世)를 이룩한 뛰어난 임금이다. 그만큼 인물을 잘 볼 줄 알았던 황제라 할 수 있다. 조정에 승상 자리가 비게 되자 어머니인 두(竇)태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천거했다. 자신의 사촌오빠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런 친척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한서(漢書)》 두영전(竇嬰傳)이 전하는 그의 모습의 일부다.
 
 
  한 경제와 두영
 
사람을 잘 보았던 한(漢)나라 경제.
  장면 1. 효경(孝景-경제)이 즉위하자 (두영은) 첨사(詹事)가 됐다. 제(帝-경제)의 동생 양나라 효왕(孝王)은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에게 사랑을 받았다. 효왕이 조회하니 그 기회에 형제의 만남을 축하하는 주연이 베풀어졌다. 이때 상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기에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은 조용히 효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추(千秋) 만세(萬歲) 후에 (제위(帝位)를) 왕(王)에게 주겠노라.”
 
  태후는 매우 기뻐했다. 이때 영(嬰)이 일어나 술잔을 들어 상에게 올리며 말했다.
 
  “천하란 고조(高祖)의 천하로 부자간에 서로 전하는 것이 한(漢)나라의 약속인데 상께서는 무슨 근거로 양왕에게 전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태후는 이 때문에 영을 미워했다.
 
  장면 2. 효경(孝景) 3년에 오(吳)와 초(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은 종실(宗室)과 여러 두씨(竇氏)들을 살펴보니 영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어 그를 불러 만나보았으나 굳게 사양하면서 병으로 인해 임무를 맡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태후도 역시 부끄러워했다. 이에 상이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위급한데 왕손(王孫)이 어찌 겸양만 부리는가?”
 
  마침내 영을 제배해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황금 1천 근을 내려주었다. 영은 원앙(袁盎), 난포(欒布) 등 여러 명장과 뛰어난 이들 중에서 집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천거해 벼슬에 나아오게 했다. 하사받은 금은 모두 행랑에 진열해 두고 군리(軍吏)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가 알아서 가져다 쓰게 했고 자기 집에는 조금도 가져가지 않았다.
 
  영은 형양(滎陽)을 지키며 제(齊)와 조(趙) 지역의 군사들을 감독했다. 7국의 군대가 이미 격파되자 영을 봉해 위기후(魏其侯)로 삼았다.
 
  장면 3. (효경) 4년에 율(栗)태자를 세우고 영을 부(傅)로 삼았다. 율태자가 폐위될 때 영은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남전(藍田)의 남산(南山) 기슭에서 몇 달간 숨어 지냈다. 여러 두씨와 빈객과 변사(辯士)들이 찾아가 설득했으나 그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양(梁)나라 사람 고수(高遂)가 이에 영을 찾아 말했다.
 
  “능히 장군을 부귀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황제이고, 능히 장군을 친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태후이십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태자의 스승으로 태자가 폐위될 때 제대로 쟁론을 벌이지 못했고 (쟁론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또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고서 스스로 병을 핑계로 조나라 미인을 옆에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 나와 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원망과 분노를 더해가며 온 천하에 나타내고 있으니 이는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양궁(兩宮-황제와 태후-)께서 장군에게 화가 나시게 되면 (장군의) 처자식 중에 살아남을 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영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몸을 일으켜 예전처럼 조회에 참석했다.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반듯하다. 그런데 태후의 요청에 엄정한 성품의 경제는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어찌 신(臣)이 위기(魏其)를 승상에 쓰는 것을 아까워서 그런다고 여기십니까? 위기는 경박하고 자만하여 쉽게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승상으로서 막중한 위엄을 지키기에 어렵습니다.”
 
  경박, 자만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판서감은 될지언정 정승감은 아니었던 것이다.
 
 
  8년간 병조판서 지낸 조말생
 
세종.
  조말생(趙末生·1370~1447년)은 태종 초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과 세종 시대를 살았던 최고의 엘리트 관료다. 이미 태종 때 비서실장 격인 지신사(知申事)를 지냈고 세종이 즉위할 때 형조 및 병조판서를 지냈다. 따라서 세종의 재위기간 중에 잠시라도 3정승 중에 가장 낮은 우의정이라도 지냈어야 하는데 그의 이력에 정승은 없다. 대신 일종의 상원 격인 중추원의 동지사, 지사, 판사, 영사만 지냈다. 한마디로 실권이 없는 한직이다. 조말생은 세종 8년에 뇌물죄에 걸려 좌천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세종실록》 조말생 졸기(卒記)는 그가 정승에 오르지 못한 까닭을 뇌물죄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말생(末生)은 기개와 풍도가 넓고 컸으며[氣度恢洪] 일을 처리함에 너그럽고 두터워[處事寬厚] 태종이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뇌물죄-가 신상에 오점(汚點)이 되어 끝끝내 국무대신이 되지 못했다.”
 
  국무대신, 즉 정승이 되지 못한 점이 조말생에게 천추의 한이 됨을 졸기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됨에 있어 “넓고[恢] 크며[洪=弘] 일 처리가 너그럽고[寬] 두터웠다[厚]”면 그것이야말로 타고난 정승감이다.
 
  사실 이 질문, 즉 “왜 세종은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는 “왜 태조는 정도전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만큼이나 흥미로운 문제 제기다. 게다가 태종에서 세종으로 권력 이양기에 줄곧 병조판서를 맡아 병권을 쥐었던 인물이 바로 조말생이다. 사실 조말생은 아버지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다음 두 구절을 명심했기에 8년 내내 조말생을 병조판서에 그대로 두었다.
 
  첫째는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둘째는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말로 주공(周公)이 아들 노공(魯公)에게 유언을 한 것인데 특히 세종이 깊이 마음에 새겼던 내용이다.
 
  “참된 군주는 그 친척을 버리지 않으며, 대신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며, 선대왕의 옛 신하들이 큰 문제가 없는 한 버리지 않으며, 아랫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종이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은 이유
 
  그런데 왜 세종은 결국 조말생을 정승의 자리에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 해답은 세종 8년 3월 7일 자에 담겨 있다.
 
  “옛날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대체로 모든 관원을 임명함에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무를 맡은 대신에게 이를 맡기는 것이요, 대신이 사람을 쓰는 것은 반드시 과거부터 알던 사람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무를 오래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반드시 그가 사사로운 정실을 행사한다고 의심할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지신사로부터 병조판서까지 10여 년간이나 오랫동안 정무를 잡은 사람으로는 조말생처럼 오래된 사람이 없더니 과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단순 뇌물죄로 본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자기 권력을 행사했다고 본 것이다. 정승은 임금을 돕는 자일 뿐 임금을 대신할 수 없다. 최고 통치권자의 역린(逆鱗)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조말생은 적중하는 데는[中] 성공했으나 오래 유지하는 데는[庸]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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