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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16〉 공신(功臣)은 영광이 큰 만큼 위험도 크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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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먼저 그 사람이 행하는 바[所以=所行]를 잘 보고[視], 이어 그렇게 하는 까닭이나
    이유[所由]를 잘 살피며[觀], 그 사람이 편안해 하는 것[所安]을 꼼꼼히 들여다본다[察]”
⊙ 유방의 공신 소하는 장량보다 소안(所安)에서 뒤졌지만, 남의 충고를 잘 경청해서 화를 면해
⊙ 태종, “하륜은 사람됨이 남의 잘하는 것을 되도록 돕고 남의 잘못하는 것은 되지 아니하도록
    말렸다”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장량은 소안을 잘해 유방의 의심을 피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알고 싶을 경우) 먼저 그 사람이 행하는 바[所以=所行]를 잘 보고[視], 이어 그렇게 하는 까닭이나 이유[所由]를 잘 살피며[觀], 그 사람이 편안해 하는 것[所安]을 꼼꼼히 들여다본다면[察] 사람들이 어찌 그 자신을 숨기겠는가? 사람들이 어찌 그 자신을 숨기겠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앞서 군주의 입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되는 신하, 그중에서도 공신(功臣)의 처신을 통해 다시 점검해 보려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시(視), 관(觀), 찰(察)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제시한 사람을 살피는[觀人=知人] 3단계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그의 행동을 잘 보아야 한다[視]. 그것은 사람 보는 법의 출발이다. 이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아야 한다[觀]. 그리고 끝으로 그런 행동이 정말 편안한 상태에서 우러나와서 했는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노리고서 연출을 한 것인지를 면밀하게 통찰해야 한다[察]. 물론 여기서 어떤 판단이 들면 더 이상 들여다보는 것을 멈춰야 한다. 여기서 공자가 두 번에 걸쳐 “사람들이 어찌 그 자신을 숨기겠는가?”라고 반복한 것도 실은 더 이상 들여다보지 말고 그 사람을 믿으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더 나아가게 되면 우리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단계[疑]로 접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이 구절에 대해 송나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대개 사람이 행하는 바는 다 뜻하지 않게 좋은 것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그 사람이 의리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觀] 합니다. 만약 그 본마음이 실제로 의리에 있었다면 그 좋음은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본마음이 실제로 이익에 있었다면 그 (뜻하지 않은) 좋음은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어찌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따르는 바[所從=所由]가 좋다고 해도 그 마음이 편안해 하는 바[所安]가 아니라면 진실로 아직은 능히 ‘편안해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안 그런 것 같지만) 부귀를 갖게 될 경우 황음(荒淫)에 빠질 수 있고 빈천해질 경우 나쁜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당당한 듯 해 보이지만) 위압과 무력 앞에서 굴종할 수도 있으니 늘 변하지 않는 마음을 계속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편안해 한다[安]’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물의 차가움이나 불의 뜨거움처럼 스스로 그러해서[自然] 바꿀 수 없어야 하며 음식(을 안 먹었을 때)의 배고픔이나 물(을 안 마셨을 때)의 갈증처럼 반드시 그러해서 내버릴 수 없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런 연후라야 그것을 일러 ‘편안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전선으로 보낸 소하
 
유방의 공신 소하는 주위의 충고를 잘 받아들여 명예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소하(蕭何)는 유방과 마찬가지로 패(沛) 사람이다. 법조문을 갖고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패현의 주리(主吏)의 연(掾)(주리는 군(郡) 소속 관리이고 연은 하급관리다)이 됐다. 고조(高祖-유방)가 벼슬하지 않았던[布衣] 시절에 여러 차례 직무상의 일로 고조를 지켜주었다. 고조가 정장(亭長)이 되었을 때도 늘 그를 도왔다. 《한서(漢書)》 소하전(蕭何傳)에 나오는 그의 모습 중 하나다.
 
  “고조가 봉기해 패공(沛公)이 되자 하는 일찍이 그의 승(丞)이 되어 제반 일을 감독했다. 패공이 함양(咸陽)에 이르렀을 때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금과 비단과 재물이 있는 창고[府]로 달려가 그것들을 나누어 가졌지만 하만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진나라 승상부와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들을 거두어 그것을 감추었다. 패공이 천하의 험준한 요새, 인구의 많고 적음, 지역의 강점과 약점,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고통받는바 등을 다 갖추어 알게 된 것은 하가 진나라의 도서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고조는 초나라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하며 한나라를 세웠다. 이제 남은 것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이다. 유방은 소하의 공로가 가장 성대하다고 여겨 가장 먼저 봉하여 찬후(鄼侯)로 삼았고 식읍은 8000호였다. 당시 전장을 누볐던 장수들이 후방에서 편안하게 지낸 소하가 1등 공신이 될 수 없다 반대하자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냥할 때 사냥감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그대들은 그저 짐승을 뒤쫓아가서 잡았을 뿐이니 사냥개의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소하의 경우에는 사냥개를 풀어 사냥감이 있는 곳을 가리켰으니 사람의 공을 세운 것이다. 또 그대들은 혼자의 몸으로 나를 따랐거나 많아야 두세 사람이었지만 소하는 집안의 수십 명을 모두 내게 딸려 보냈으니 그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유방의 마지막 말이다. 시간을 2년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직 항우와의 싸움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유방은 항우와 경현(京縣)과 삭성(索城) 땅 사이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후방에 있던 승상 소하의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이때 포생(鮑生)이라는 한 식견 있는 선비가 소하에게 조언했다.
 
  “지금 왕께서 햇볕에 그을리고 벌판에서 이슬을 맞고 지내면서도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당신을 위로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위해 계책을 생각해 보니 당신의 자손과 형제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뽑아 모두 상(上)이 있는 군영으로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상은 당신을 더욱 신임할 것입니다.”
 
 
  유방의 계속되는 의심
 
한 고조 유방.
  포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소하는 1등 공신에 오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유방은 소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한나라가 세워진 후에 한신(韓信)이 관중에서 반란을 모의했다. 한신은 소하가 유방에게 천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유방은 진희(陳豨)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부인 여후(呂后)가 소하의 계책을 써서 한신을 주살했다. 유방은 한신이 이미 주살됐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자를 보내 (하를) 승상에 제배(除拜)해 상국으로 삼고 5000호를 더 봉해주었으며 병졸 500명과 1명의 도위를 보내 상국의 호위병으로 삼았다. 이때 여러 제후들이 다 축하했는데 소평(召平)이라는 사람만이 홀로 소하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재앙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상은 밖에서 햇볕에 노출되고 이슬을 맞았는데 그대는 안에서 궁궐을 지켰고 화살이나 돌을 맞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도 봉읍은 더해지고 호위부대까지 두게 되었으니 지금 회음후가 안에서 막 반란을 일으킨 점을 볼 때 그대의 마음을 (상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무릇 호위부대를 두어 그대를 호위하는 것은 그대를 총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봉읍을 사양하여 결코 받지 마시고 그대의 재산을 모두 군대에 내놓으십시오.”
 
  즉 소하가 혹시라도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유방은 그에게 호위부대를 붙여주었다는 말이다. 그 즉시 소평의 말을 따랐고 이에 유방은 의심을 거뒀다.
 
 
  소안(所安)에서 앞섰던 장량
 
  장량(張良)은 자(字)가 자방(子房)이고 그 선조는 한(韓)나라 사람이다. 한나라가 망했을 때 장량의 집에는 노비가 300명이었는데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도 치르지 않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털어 진왕(秦王-진시황)을 찌를 자객을 구해서 한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유방을 만났다. 그의 유방에 대한 첫인상이다.
 
  “패공은 거의[殆=近]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그래서 드디어 패공을 따르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병법에 밝았던 장량은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조언을 통해 마침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연히 장량도 소하와 더불어 1등 공신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처신이 소하와는 달랐다. 공신을 정하면서 유방이 말했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부려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로다. 스스로 제(齊)나라 3만 호를 고르라!”
 
  이에 장량이 말했다.
 
  “처음에 신(臣)이 하비(下邳)에서 일어나 상과 유(留-현)에서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히 때에 들어맞았습니다[時中]. 신은 바라건대 유(留)에 봉해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감히 3만 호는 맡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장량을 유후(留侯)에 봉했다. 그리고 소하를 상국(相國)에 천거한 주인공도 장량이다. 결국 소안(所安-그 사람이 편안해 하는 것)에 있어 장량은 소하를 훨씬 앞질렀다. 그렇기 때문에 장량전(張良傳)에는 유방이 장량을 의심했다는 일화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소안에서는 뒤졌던 소하도 귀 밝음[聰]이 있었기에 주변의 좋은 조언을 즉각 받아들여 천수와 명예를 함께 누릴 수 있었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평
 
  하륜(河崙)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태종 이방원의 공신 중의 공신이고 이무(李茂)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남은이 정안공 이방원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주어 이방원이 선제공격을 하게 만든 주인공으로 이때 2등 공신이 됐고 2차 왕자의 난 때는 군사를 책임진 삼군부 판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이방간 세력을 제압해 1등 공신이 됐다. 그래서 태종 정권 내내 정승 자리를 지켰던 막강한 실력자였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시각은 이랬다. 세종 2년(1420년) 5월 8일 상왕 태종은 세종과 술자리를 하며 천수와 영예를 다 누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하륜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 정승은 사람됨이 남의 잘하는 것을 되도록 돕고 남의 잘못하는 것은 되지 아니하도록 말리어 충직하기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 보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자부한 태종이 하륜의 소안을 인정해 주는 대목이다. 반면에 정승 자리에 10년 가까이 두었던 이무에 대한 태종의 인식은 극도로 부정적이다. 태종 9년(1409년) 10월 1일 태종은 인정전(仁政殿)으로 의정부 관리와 삼공신(개국공신, 좌명공신, 정사공신)을 불러 진선문 앞에 이무를 세워두고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무(李茂)의 죽음
 
이무가 권근·김사형·이회 등과 함께 태종 2년(1402년)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내가 정권을 잡은 뒤에 그를 공신 1등으로 정하자 한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무가 무슨 공이 있느냐?’고 했으나 내가 그 체력과 풍채가 볼 만하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뒤에 또한 나타난 큰 허물이 없기 때문에 드디어 정승에 이르렀다. 임오년(1402년)에 내가 종기가 나서 매우 위독하니 민씨 네 형제와 신극례가 민씨의 사가(私家)에 모여 어린 자식을 세우자고 의논하였는데 그 꾀가 실상은 이무에게서 나왔다.”
 
  이로써 이무의 죽음은 정해졌다. 이무를 다시 옥에 가둔 태종은 공신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 고조는 공신을 보전하지 못하고 광무는 능히 보전했다. 나는 어떻게든 공신들을 보전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고조는 유방이고 광무란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를 가리킨다. 이날 실록에는 “하륜이 본래 민씨(태종의 장인 민제)와 사귀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이무를 비호하는 듯했다”고만 적혀 있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하륜은 어떻게든 이무를 살리려 했다. 이에 태종은 하륜에게 경고를 한다. 그럼에도 하륜은 두려워 땀만 뻘뻘 흘리면서도 다시 한 번 이무를 죽이지 말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무의 소안을 좋게 보지 않았던 태종은 끝내 말이 없었다.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이무는 결국 창원으로 유배됐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10월 5일 사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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