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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5〉 권문해와 초간정원림과 《대동운부군옥》의 탄생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 역사와 역대의 치란 흥망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선 문자가 없던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기는 것은, 제대로 된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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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예천의 초간정원림은 대표적인 선비의 이상향
⊙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의 산실
⊙ 《신라 수이전》 등 지금은 사라진 문헌의 흔적 유일하게 실려 있어
⊙ 치밀하게 세 부 베껴놓은 것 중 한 부만이 전해져
⊙ 권문해가 남긴 《초간일기》는 임진왜란 전 정치·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 수차례 불탄 초간정이 남은 것은 후손들의 헌신 덕분
⊙ 권문해의 집필 자세, 연암 박지원에게까지 이어져
초간정의 마루에 석양이 비치고 있다. 권문해 선생은 이 광경을 보며 《대동운부군옥》을 썼을 것이다.
  경상북도, 그중에서도 내륙지방에 가면 말조심을 해야 한다. 얄팍한 지식을 뽐내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이 일대는 무엇보다 지명(地名)에 붙은 수식어들이 어마어마하다. 안동(安東)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고 영주(榮州)는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임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안동과 영주에 인접한 예천(醴泉)도 만만치 않다. 예천은 특이하게 단술을 뜻하는 예(醴) 자를 쓰고 있는데 지명의 유래가 엇갈린다. 예천군에서는 공식적으로 예천읍 노하리에 있는 주천(酒泉)을 드는데, 문화와 전통의 맥을 이어온 주천이 단술이 샘솟듯 해서 예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혹자는 ‘단술’이 땅과 기슭의 합성어로, 한자어 예는 그냥 차용한 것이라고 하니 뭐가 정설(定說)인지 분간키 힘들다. 이번에 예천에 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전라도 일대의 정자와 원림(園林)을 몇 차례에 걸쳐 일순한 뒤 선비의 고장 경북에도 비슷한 곳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두 번째는 구곡(九曲) 탐방의 일환이었다. 구곡은 서양의 ‘샹그릴라’ ‘유토피아’ ‘아틀란티스’처럼 동양의 이상향(理想鄕) 가운데 하나다. 보통 청산(靑山), 무릉(武陵), 도원(桃源), 동천(洞天)이라는 말에는 풍광 좋고 선비들이 공부에 힘쓸 만한 곳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데 구곡에는 더 깊은 사연이 있다.
 
초간정은 계곡과 기암괴석을 적절히 두고 지어졌다.
  각설하고, 충청북도 괴산에서 시작해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어지는 화양구곡-쌍용구곡-선유구곡의 거대한 구곡 루트를 지나 예천에 이르면 초간정원림(草澗亭園林)이 나타난다. 초간정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된 누정(樓亭)으로, 명승 제51호로 지정됐다.
 
  초간정원림은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1582년에 말년의 생활을 보내고자 조성한 것으로 당시의 이름은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불렀는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 지었다. 초간정원림은 화를 많이 입었다. 그 시발은 임진왜란으로 왜병의 노략질로 불타 버렸다.
 
  이 초간정은 1626년(인조 4)에 권문해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했는데 이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100년이 넘도록 방치되던 이 정자를 1739년(영조 15)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터에 집을 짓고는 바위 위에도 정자 3칸을 세웠는데 그게 지금의 건물과 원림 배치다.
 
  권문해 선생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었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권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퇴계 이황에게 배운 뒤 1560년(명종 1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초간정 인근에는 예천 권씨 종가가 있다. 종가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소재이다.
  권문해 선생은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년)에 사간이 되었으나 음력 6월 23일 사임하고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안동 권씨와 예천 권씨와의 관계다. 예천 권씨(醴泉 權氏)의 유래는 700여 년 전 고려 충목왕(忠穆王)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천 권씨의 원래의 성(姓)은 예천 지방의 3대 토성(土姓) 가운데 하나인 ‘흔(昕)’씨였으며 흔씨 가문은 예천 지방의 호족으로 대대로 호장을 세습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6세 흔섬(昕暹)대에 이르러 고려 29대 충목왕이 등극했다.
 
  하필 충목왕의 이름이 흔(昕)이었다. 이에 국명(國命)으로 흔씨는 성을 바꿔야 했다. 흔섬은 어머니가 안동 권씨였는데 어머니의 성이자 흔씨 1세, 3세의 처가 성이기도 한 권(權)을 새로운 성으로 정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권섬(權暹)이라 하고 본관을 예천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예천 권씨는 예천에 터를 잡고 여러 대에 걸쳐 세거(世居)했다. 특히 5세인 권선(權善)대에 이르러 보기 드물게 권오행, 권오기, 권오복, 권오윤, 권오상 등 5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하자 조정에서는 이 가문을 ‘오복문(五福門)’이라 칭했는데 다른 가문들이 모두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이런 권씨에게도 화가 찾아왔다.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예천 권씨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많은 자손이 안동 권씨로 흡수되기도 했다. 무오사화로 인해 중앙관직에서 멀어졌는데 이때 선비의 기개를 다시 보여준 인물이 바로 8세 권문해 선생이다.
 
  권문해 선생은 일찍이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다시 권문(權門)의 명성을 널리 떨쳤는데 그가 저술한 두 가지 중요한 책자가 있다. 하나가 조선시대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으로 조선시대에 간행된 출판물 중 가장 가치 있는 문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대동운부군옥》은 총 20권 20책이다. 이 책은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을 본떠 만들었다. ‘운부군옥’이란 여러 항목을 한자음의 높낮이에 따라 분류했다는 뜻으로, 우리와 중국의 문헌 190종 가운데 우리와 관련된 내용들을 단군부터 선조 때까지 다뤘다.
 
  더 구체적으로 권문해 선생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 역사와 역대의 치란 흥망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선 문자가 없던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기는 것은, 제대로 된 문헌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체계는 앞서 밝힌 것처럼 한자의 상평성(上平聲) 15운, 하평성(下平聲) 15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의 총 106운이며, 다룬 항목은 우리나라의 지리, 인물, 효자, 열녀, 수령, 산천, 초목, 화초, 동물 등 11개 항목에 이른다.
 
  또한 이 책은 《삼국사기》와 《계원필경》 등 조선 서적 172종과 중국 서적 15종을 참고했는데 중국 서적의 내용은 극히 일부이며 주로 조선 서적의 내용을 실었다. 권문해 선생이 인용한 조선 서적 172종 가운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이 40여 종이나 된다. 일례로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은대문집》이 있다.
 
  이것은 《대동운부군옥》이 아니었다면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해서 사라진 많은 고전의 자취를 우리가 영영 찾을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로 인해 《대동운부군옥》은 문화재청에 의해 보물 878호로 지정됐다. 여기서 잠깐 《대동운부군옥》에 실린 《신라수이전》의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수이’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기담(奇談)이라는 뜻인데 주인공은 삼한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이 등장하며 장군과 함께 이야기를 꾸려가는 인물은 ‘죽통미녀(竹筒美女)’다.
 
  김유신이 서주로부터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기이한 나그네가 먼저 가고 있었는데, 머리에 비상한 기운이 있었다. 나그네가 나무 아래에서 쉴 때, 김유신 또한 쉬면서 거짓으로 자는 척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피더니 품속에서 죽통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흔드니 두 미녀가 죽통에서 나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죽통 속으로 들어갔다. 나그네가 품속에 넣고 일어나서 가므로 김유신이 뒤쫓아 가서 그에게 말을 하니 말이 온화하고 고상했다.
 
  함께 경주로 들어가서 김유신이 나그네를 이끌고 남산 소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잔치를 베푸니 두 미녀도 나와서 참가했다. 나그네가 말하기를 “나는 서해에 사는데, 동해에서 아내를 얻었습니다. 지금 아내와 함께 장인·장모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했다. 이내 바람과 구름이 일고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대동운부군옥》에 등장하는 신라 선덕여왕과 관련된 ‘심화요탑(心火繞塔)’, 즉 마음속 불덩이가 탑을 둘렀다는 설화도 소개해 본다.
 
  지귀는 신라 활리역 사람이다.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해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리다 그 모습이 초췌해졌다. 선덕여왕이 절에 거둥해 향을 피울 때 소문을 듣고는 그를 불렀다. 부름을 받은 지귀가 절의 탑 아래에 가 왕의 행차를 기다리다 홀연 깊은 잠에 빠졌는데 선덕여왕은 팔찌를 풀어 지귀의 가슴에 놓고 궁으로 돌아갔다.
 
  지귀가 그런 뒤에야 잠에서 깨어서는 한참이나 번민하고 절통해하더니 마음속에서 불덩이가 나와 탑을 두르고는 곧 변하여 불귀신이 되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이 술사(術士)를 시켜 다음과 같이 주문(呪文)을 짓게 했다.
 
  ‘지귀 마음속 불이
  몸을 태우더니 변하여 불귀신이 되었네
  창해 밖으로 옮겨가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라’
 
  당시 풍속에 이 주문을 문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내친김에 고려시대 박인량의 《수이전》에 ‘호원(虎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김현감호(金現感虎)’의 줄거리도 살펴본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 8일로부터 15일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들은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펼쳤다.
 
  원성왕 때에 김현(金現)이 밤 깊도록 홀로 탑을 돌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며 따라 돌았다. 서로 정이 통한 남녀는 구석진 곳에서 관계했다. 돌아가는 처녀를 김현이 억지로 따라가니 서산 기슭 한 초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늙은 할미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늙은 할미가 말했다. “좋은 일이지만 안 한 것보다 못하다. 이미 저지른 일이니 구석진 곳에 숨겨 두어라. 네 형제가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조금 뒤에 세 마리의 범이 오더니 사람의 말을 했다.
 
  “집안에서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깃거리로다.”
 
  늙은 할미와 처녀는 꾸짖었다. “무슨 미친 소리냐?”
 
  그때 하늘에서 외쳤다. “너희는 너무 자주 생명을 해쳤다. 한 놈을 죽여 징계하겠다.” 범들이 모두 근심하자 처녀가 말했다. “세 분 오빠가 멀리 피해 가시면 제가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범들은 기뻐하며 도망쳤다.
 
  처녀가 김현에게 말했다.
 
  “이제 감히 진심을 말하겠습니다. 저와 낭군은 같은 유는 아니지만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세 오빠를 하늘이 미워하시니 우리 집안의 재앙을 제가 혼자 당하려 하는데,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에 들어가 심히 사람들을 해치면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나를 잡게 할 것입니다. 낭군은 나를 쫓아 성 북쪽의 숲속까지 오십시오.”
 
  김현이 말했다.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벼슬과 바꾸겠소?”
 
  처녀가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일찍 죽음은 하늘의 명령이며 제 소원입니다. 낭군의 경사요, 우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제가 한 번 죽음으로써 다섯 가지 이익이 갖추어지는데, 어찌 그것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지어 주십시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서 사람들을 해치니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영을 내렸다.
 
  “범을 잡는 사람은 2급의 벼슬을 주겠다.”
 
  김현이 대궐로 가 아뢰었다.
 
  “소신이 해보겠습니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가 되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처녀는 김현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말했다.
 
  “내가 지금 범을 잡았다.”
 
  이후 김현은 서천(西川)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범망경(梵網經)을 강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했다. 김현은 죽을 때가 돼서야 이 기록을 남겼다.

 
초간정에서 본 좌우의 풍경들은 한 폭의 정물화다.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에서 ‘신라 기록에는 신선이 놀던 기록이 많다. 이런 괴이한 것을 말하는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이름을 밝힌다’며 신선이 놀던 곳들의 이름을 적고 중국과 함께 신라와 고려의 연호도 적었다. 우리의 것을 기록하면서 중국을 존중하는 사대부 문화를 거스르지 않게 묘안을 낸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가 주체 의식을 가지면서도 유교의 틀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권문해 선생의 집필 방식은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같은 이들도 《열하일기(熱河日記)》 같은 책을 쓸 때 이 방식을 이었는데 이후 박지원과 북학파는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린다.
 
  문체반정이란 정조(正祖)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참신한 문장을 ‘소품 소설이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서 나온 잡문체’라 규정한 뒤 정통적 고문(古文)인 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 등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정조는 이 방침을 실행하기 위해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잡서(雜書)의 수입을 금하며 주자(朱子)의 시문(詩文)을 비롯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과 《오경발초(五經拔抄)》, 시인 두보(杜甫)의 《육유시(陸游詩)》를 발간케 했다.
 
  학자 군주로 알려진 정조의 이 같은 반동, 혹은 문장에 대한 관권(官權) 개입은 모처럼 싹트려 하던 우리 문학의 발전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 문학은 낮은 수준으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했으니 지금 전해지는 정조의 명성과는 사뭇 다른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문해 선생은 《대동운부군옥》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 민족자존의 입장을 고려해 방언, 속명 등 우리 고유의 것들을 그대로 기록한다. 둘째, 원본에 충실하도록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원 사료의 것을 그대로 기록한다. 셋째, 자료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수집한다. 넷째, 후대의 감계(鑑戒)가 되도록 권장할 만한 것들은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섯째, 유학을 존숭(尊崇)한다.
 
예천 권씨 종가의 이 창고에 바로 《대동운부군옥》이 보관돼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선조 22년(1589년)에 완성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펴내지 못하고 후손 권진락(權進洛)이 순조 12년(1812년)에야 간행하기 시작해 헌종 2년(1836년)에야 완간했다. 이 책은 특히 16세기 한글의 모습을 알 수 있어 국어학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대동운부군옥》이 발간된 내역을 보면 천운(天運)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책의 저자 권문해는 대구부사로 있던 1589년에 20권 20책으로 집필을 완료했는데 훗날에 대비해 세 질을 미리 베껴두었다. 1591년에 학봉 김성일이 이 책을 간행하려 했으나 임진왜란이 터졌다.
 
  결국 학봉이 빌려 간 책은 소실(燒失)됐으며 한강 정구 선생이 두 번째 책을 빌려 갔는데 이번에는 잃어버렸다. 마지막 한 질이 권문해 선생의 아들 권별에게 넘어갔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한 질을 더 필사해 두었다. 마침내 이 책은 1812년 간행 작업이 시작돼 1836년에 판각이 완료됐다.
 
  《대동운부군옥》은 1913년 육당 최남선이 재간행을 시도하다 중단됐으며 1950년 정양사(正陽社)에서 영인됐고 1977년과 1990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다시 영인됐다. 2003년 국역이 시작돼 2007년 20권으로 완간됐으니 책이 나온 지 400년도 훨씬 더 지난 뒤의 일이다.
 
  권문해 선생이 남긴 또 다른 책이 《초간일기》다. 《초간일기》는 전 3책으로 《선조일록》 117장, 《초간일기》 90장, 《신란일기》 34장으로 구성돼 있다. 임진왜란 전 벼슬아치가 쓴 일기로는 《초간일기》 외에 권벌의 《충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가 있다.
 
  이 일기는 저자인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적고 있어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중앙의 관료직과 지방관을 지냈기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 지방 관아의 기능과 관리들의 생활, 당쟁 관련 인물 및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지리 등을 살필 수 있다.
 
  현재의 초간정은 1739년에 지은 건물인데 주변의 원림에 기대 담장을 둘러놓았다. 초간정 앞을 흐르는 개울이 금곡천(金谷川)인데, 초간정은 금곡천을 바라보는 경관을 확보하기 위해 높이 4m 남짓한 절벽 위에 바짝 붙여 지었다. 때문에 북쪽과 서쪽은 담장이 없이 개울에 바로 붙어 있다.
 
  초간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받침 위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고서 네모난 기둥을 세운 다음 5개의 도리로 꾸몄다. 처마 남쪽에 초간정사, 북쪽에 초간정(草澗亭), 동쪽에 석조헌(夕釣軒)이라고 쓴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가운데 ‘초간정사’라고 쓴 편액은 권문해가 처음으로 초간정사를 지을 때 박승임이 쓴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권문해 선생은 《대동운부군옥》과 《초간일기》라는 후세에 남을 대작을 완성하는데, 초간정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은 데는 후손들의 알려지지 않은 노력이 담겨 있다.
 
초간정 가는 길에 본 병암정이다. 멋들어진 겉과 달리 안은 관리가 안 돼 박쥐들의 세상이었다.
  초간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병암정(屛巖亭)이 있다. 예천의 대표적 사적인 용문사를 찾아가는 용문면 일대는 조선 말기 유행했던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풍기 금계리와 쌍벽을 이루는 금당실 마을과 지척이다. 산과 계곡과 들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척 봐도 명당 터다.
 
  이 병암정에 대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이라는 책은 “예천 권씨 일가의 대표적인 정자인 초간정의 모습이 권씨 종가의 웅장함과 어울리는 품격을 보여준다면 병암정의 모습은 신선의 영역을 보는 느낌이다”라고 적고 있다.
 
  병암정은 밖에는 연못이 있고 높은 위치에 정자가 서 있으며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장이었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곳곳에 소주병과 과자봉지가 널려 있고 정자 안은 쥐똥 같은 것들이 그득했다. 물어보니 박쥐들이 밤이면 날아와 쏟아낸 배설물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예천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권원하(權元河) 선생과 관련이 있는 이 병암정은 1898년에 건립됐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2010년 작고한 예천 출신 코미디언 이대성씨와도 관련됐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연은 알 길이 없고 관리가 부실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초간정을 관리하는 후손이다. 권영기 선생이 손수 빗자루를 들고 정자 곳곳을 청소하고 있다.
  반면 이른 아침 초간정을 방문했을 때 웬 노인께서 손수 빗자루를 들고 정자 곳곳을 정갈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그는 객(客)들에게 정자 위로 올라올 것을 권하며 초간정의 유래며 숨은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놓았는데 그가 바로 권문해 선생의 후손이며 예천군 군의원인 권영기 선생이었다.
 
  권 선생은 국민건강관리공단에서 일한 뒤 정년퇴직하고 초간정 옆으로 이사와 하루도 빠짐없이 초간정을 관리해 왔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문화재의 중요성을 몰라 함부로 건물을 대하고 여기저기 쓰레기를 버려 한때 초간정원림에 대한 관광객의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자비를 들여 담장을 치고 관리에 힘쓰자 예천군수가 찾아와 개방을 간청했는데 개방의 조건으로 권 선생이 내세운 것은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과 주차장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남 담양 소쇄원처럼 입장료를 받지 그러느냐”고 권하자 권 선생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권 선생에 따르면 지금의 초간정도 원래 모습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원래 금곡천의 깊이는 지금보다 훨씬 깊고 수량도 풍부해 권 선생이 어렸을 적만 해도 초간정에서 다이빙해 수영을 즐길 정도였는데 인근에 정부에서 건물을 지으며 물을 빼 가 지금처럼 수위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쇄원이 인근에 지은 무슨 교육청 연수원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잃은 것과 똑같다. 물이 빠지자 초간정 주변의 모습도 변했다. 원래 초간정 뒤편, 즉 사람이 출입하는 곳에도 금곡천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왔고 가운데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지금은 휑한 마당처럼 보인다.
 
  만일 수량(水量)이 유지됐다면 초간정은 앞뒤 사방으로 금곡천이 흐르고 사람은 회랑(回廊)을 통해 이곳에 드나들면서 지금 마당처럼 변한 입구 쪽의 자연 호수 속 석가산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나마 지금 같은 모습을 지키는 것은 권 선생 같은 후손들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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