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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14〉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제왕학 《논어》의 첫걸음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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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文)’이란 열렬하게 애쓰는 것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는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익히니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로
    해석해야
⊙ 한 무제는 ‘스승 같은 신하’ 동중서를 만나 나라를 융성케 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한무제에게 ‘스승같은 신하’였던 동중서.
  《논어》를 펼치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공자의 말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구절은 바둑 9단의 고수가 대국에서 둔 첫수와 같다. 그것을 통해 이미 전체적인 대국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가 어느 정도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 대국의 이름은 지도력 함양이다. 《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왕학(帝王學) 혹은 리더십 기르기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도대체 《논어》를 편찬한 미지의 천재 편집자는 왜 이 구절을 맨 앞에 두었는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풀이처럼 대충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식의 오역투성이 번역을 따라가서는 결코 이 질문을 돌파할 수 없다. 시작이 반이라 했건만 시작을 잘못하면 이미 절반은 실패했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번역은 이렇게 된다.
 
  ‘(옛 뛰어난 이들의 애씀이나 애쓰는 법을)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익히니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
 
 
  ‘문(文)’이란 무엇인가?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
  풀이의 실마리는 그것[之]에 있다. 기존의 번역들은 대부분 이것을 놓쳤다. 뭔가를 배우고 그 뭔가를 시간 나는 대로 익혀야 한다는 말이다. 그 뭔가란 곧 보게 되겠지만 문(文)을 배우라는 것이다. 《논어》에서 배운다고 할 때는 십중팔구 문을 배우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네 가지가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문이다.
 
  문(文)만 알면 거의 다 아는 셈이다. 우선 ‘글월 문’이라고 배웠다 해서 문을 글로 옮긴 번역서들이 많다. 공자는 글 선생이 아니다. 《논어》를 가장 크게 왜곡한 주희(朱熹 1130~1200년)는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문(文)을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 등 6경(經)의 글이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공자의 사상을 문이라고 본 듯한데 이는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6경의 글들은 옛 뛰어난 인물들의 열렬히 애썼던 흔적[文]을 모아서 편집해 놓은 것이 분명하지만 문은 그 범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지금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문을 찾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문(文)은 무엇일까?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堯)임금의 자질과 능력을 넉 자로 ‘흠명문사(欽明文思)’라고 표현했다. 이는 중국에서 옛 사람들이 사람을 평하던 넉 자 인물평의 원조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한 자 한 자의 뜻을 정확히 새기는 것이다. 《대학연의(大學衍義)》 (이한우 옮김)라는 제왕학 텍스트를 쓴 송나라 학자이자 정치가 진덕수(眞德秀·1178~1235년)는 이 흠명문사를 다음과 같이 풀어 냈다. 이는 앞으로 《논어》를 제대로 풀어 가는 데도 많은 시사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 꼭 주목해 둬야 한다.
 
  “요임금의 제왕다움[德]을 말하는 것입니다. 흠(欽)이란 삼가지[敬] 않음이 없다는 뜻이고 명(明)이란 환하게 밝히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며, 문(文)이란 (꽃부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을 밖으로 멋지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英華之發見]이고 사(思)는 뜻하고 생각하는 바가 깊고 멀다는 것입니다.”
 
  경어체인 이유는 《대학연의》란 책이 진덕수가 송나라 황제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기 위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인용한 다음 그것을 풀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진덕수에게 《대학(大學)》은 곧 제왕학이다. 다시 본론이다. 여기서 진덕수는 명확하게 ‘문(文)이란 (꽃부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을 밖으로 멋지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英華之發見]’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보다 좋은 말이 있으면 양보하겠지만 현재로서 이를 나타낼 수 있는 적합한 우리말은 내가 볼 때 곧 ‘열렬하게 애쓰는 것’이다.
 
 
  군주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애씀을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익힌다는 말이다. 이로써 그것[之]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고 따라서 학이시습지는 거의 파악됐다. 남은 것은 주어, 즉 누가를 찾아내면 된다. 한마디로 군자(君子), 즉 군주가 주어다. 군주 된 자 혹은 군주가 되고자 하는 자가 바로 학이시습지의 주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불역열호(不亦說乎), 즉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와 연결지어 풀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군주란 그 나라의 규모가 크건 작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교만이다. 이만하면 됐다는 어설픈 만족감이다.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당연히 익히려 하지 않는다. 귀찮고 번거롭고 지겹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길을 인도해 줄 스승과 같은 신하[師臣]가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춰 버린 지도자에게 꼬이는 것은 아첨하는 신하[佞臣]뿐이다. 이 같은 기로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기를 바란다.
 
  ‘(옛 뛰어난 이들의 애씀이나 애쓰는 법을)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익히니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
 
  결론이다. 지도자가 바로 이런 기쁜 마음을 진심으로 가질 때라야 새로운 길을 열어 밝혀 줄 수 있는 스승과 같은 신하가 곁으로 나아올 수 있다. 이 구절의 최종적인 핵심 메시지는 겸손한 마음가짐[謙]이다.
 
 
  배우려는 마음은 겸손함에서 나온다
 
  옛 사람들이 배움[學]을 곧 겸손과 연결했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태종실록 태종1년(1401년) 1월 14일 조선 초의 대표적인 유학자 권근(權近)은 태종 이방원이 배움에 소홀히 하자 글을 올렸는데 그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특출나고 밝으시며[英明] 배우고 묻는 바가 정밀하면서 넓으시니[精博] 유학을 공부한 신하가 진강(進講)하는 것이 어찌 능히 제대로 더 일깨워 주고 밝혀 주는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경연에 나오시어 정신을 한데 모아[凝神] (옛 경전들을) 깊이 읽고 끝까지 파고드신다면 마음속에 의로움과 이치[義理]가 밝게 드러나 반드시 편안히 거처하시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실 때나 정사를 듣느라 바쁜 일이 많으실 때와는 반드시 다른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왕의 배움이 어찌 이로 말미암아 더욱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또 진강하는 신하들이 비록 모두 용렬한 유자[庸儒]이지만 전하께서 배움이 있다고 일컫는 자들이니 윤번(輪番)으로 교대하여 나아와 (전하께서) 나아와 머무시는 것을 기다리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어 물러간 것이 여러 번이오니 유자를 높이고 배움을 향하는 뜻이 너무 가볍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부열(傅說·은나라 고종 때의 뛰어난 재상)은 고종(高宗)에게 아뢰기를 ‘생각건대 배움은 뜻을 공손히 하는 것입니다[遜志]’라고 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하늘이 내려준 자질의 밝음[天資之明]만 믿지 마시고 유신(儒臣)들이 고루하다고 말하지 마시고 날마다 경연에 나오시어 마음을 비우고 뜻을 공손히 하여 힘써 깊이 읽고 밝히시어 감히 하루라도 혹 빠트리지 마시고 혹시 다른 연유가 있어 정강해야 하는 날에도 마땅히 강관(講官)을 불러 보시고 얼굴을 마주하여 일깨워 주신 다음에 끝내도록 하소서.〉
 
  이것은 고스란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 대한 풀이임과 동시에 조선의 옛 학자나 군주들은 고전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한 무제와 동중서
 
한 문제에게 《치안책》을 건의했던 가의.
  동중서(董仲舒)는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스승과 같은 신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경제(景帝)를 이어 기원전 14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어려서부터 명민했고 포부가 남달랐던 무제는 보위에 오른 이듬해인 기원전 140년 현량(賢良)을 천거하라는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치국 청사진을 제시하고서 여러 사대부들에게 당대의 문제점을 기탄없이 진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6년 후인 기원전 134년에 다시 현량을 천거하라는 회의를 연다.
 
  무제가 즉위했을 때는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기점으로 혜제(惠帝) 여후(呂后) 문제(文帝) 경제(景帝)를 거치며 60년쯤 지났을 때였다. 조선의 경우 성종(成宗)이 이와 비슷한 때에 14살의 나이로 즉위했던 것과 비교가 된다. 성종은 기득권층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조선의 쇠퇴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무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70년을 바라보는 우리가 무제의 치국(治國) 대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제는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태평시대를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서 치국책을 널리 구했다. 사실 그에 앞서 문제(文帝)도 좋은 정치를 펴기는 했지만 가의(賈誼)가 보다 적극적으로 천하를 구제할 수 있는 정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을 때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본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같은 내치의 성공이 있었기에 무제의 보다 적극적인 문화융성 및 대외확장 정책이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통치자가 지혜로운 신하의 도움을 빌려 그것을 제대로 구현할 때 가능한 일이다.
 
  동중서가 이 회의에서 “백가(百家) 사상을 퇴출시키고 오직 유학만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며 대책(對策)을 내놓았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숭유(崇儒)를 구체화하기 위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다. 특히 2차 회의에서는 공손홍(公孫弘)이란 인물이 무제의 신임을 얻어 평민의 신분에서 관리로 뽑혔고 훗날 승상의 자리에 올라 후(侯)에 봉해졌다. 이것은 최초의 일이다. 유학에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흙수저가 금수저가 됐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파격이었다. 그로 인해 너도 나도 출세를 위해 유학 공부에 뛰어들어 유학 열풍이 불게 됐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유학은 국가의 지도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고 국립대학이 설립돼 오경의 학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국가 관료 집단이 형성됐다. 신분이 아니라 학문 수련이 출세의 밑받침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나라의 역동성은 크게 제고됐다.
 
 
  스승 같은 신하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나라를 융성케 한 무제.
  유학자로서 동중서의 가장 특색 있는 이론은 흔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불린다. 보는 입장에 따라 황제의 권위를 하늘을 빌려 정당화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하늘의 권위를 빌려 황제의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제한하려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동중서는 “임금다운 임금[王者]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행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움과 교화[德化]의 힘을 통해 다스릴 뿐 형벌에 의지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즉 황제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하늘과 덕치(德治)의 힘을 빌려 제한하려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재위 초기의 무제는 동중서의 이 같은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무제가 동중서를 스승과 같은 신하[師臣]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문제는 가의의 건의를 좋다고만 여겼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의를 스승과 같은 신하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제와 동중서의 만남은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지는 못했다. 나라를 크게 번성시킨 무제는 하지만 동시에 지나친 대외정벌 사업과 진시황 못지않은 불로장생 추구로 백성들을 크게 힘들게 했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이런 점들을 반성했다.
 
  동중서 또한 중앙의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한 채 오히려 공손홍의 견제 속에 제후왕의 승상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특히 교서국(膠西國)의 승상으로 있을 때 고조의 사당에 화재가 일어나자 그것을 천인감응설에 입각해 진단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을 위에 올리지 않고 두었다. 그런데 역경(易經)박사인 주보언(主父偃)이 그것을 훔쳐다가 자신의 글인 양 위에 올렸다. 그런데 조정에 있던 동중서의 한 제자는 그것이 자기 스승의 글인 줄도 모르고 ‘불경스러운 내용’이라고 탄핵했고 이에 무제는 동중서에게 사형을 명했다. 다행히 사면령이 내려져 목숨은 건졌다.
 
  이처럼 비록 끝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초기에 두 사람의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가 없었다면 한나라 무제는 그저 평범한 제왕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승과도 같은 신하를 곁에 두려는 겸손한 마음가짐은 제왕의 제왕다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만에 예나 지금이나 다르다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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