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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12〉 옥타비오 파스의 〈태양의 돌〉

“거기 항상 있으면서 있지 않는 … 우리는 삶의 기념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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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의 돌〉, 아즈텍의 달력용 거석(巨石)에 영향 받은 584행의 장시(長詩)
⊙ 시인은 1962~68년 인도주재 멕시코 대사로 재직하며 불교와 동양사상 심취
  태양(太陽)의 돌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1914~1998·조칠환 옮김)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 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 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밝음으로 넘쳐 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 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 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 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즈텍의 달력인 〈태양의 돌〉. 이 거석에는 금성과 태양의 움직임이 새겨져 있는데 전체 주기가 584일이다.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 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 — 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은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 이 시는 무려 584행에 이를 만큼 장시다. 〈태양의 돌〉은 거대한 아즈텍의 달력용 돌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 거석에는 금성과 태양의 움직임이 새겨져 있는데 전체 주기가 584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584일의 주기를 584행의 시로 형상화했다.
  1990년 참빛출판사에서 펴낸 《태양의 돌》에 실린 시 중 일부를 소개한다. 스페인어로 된 원문은 《월간조선》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한다.)

 
젊은 시절 시인의 모습. 옥타비오 파스는 1952년 인도와 일본에서 1년간 머무르며 중국과 일본의 고전을 탐독했다.
 
1957년에 간행된 옥타비오 파스의 시집 《태양의 돌》.
  199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 출신의 옥타비오 파스의 대표적 작품이 〈태양의 돌〉이다. 1957년에 쓰인 이 시는 지적이고 현란하다. 이미지의 시적(詩的) 회랑을 따라 걷기란 독자로선 행복한 일이다. 그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언어로 조탁된 아름다운 골짜기와 인간사의 애증이 촘촘히 박힌 계곡, 죽음의 영감으로 가득한 묘지를 만날 수 있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1행),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3행), ‘횃불 속에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7행),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9행),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19행), ‘창문들 없는 현재’(20행),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60행),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66행),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86행) 같은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은 언어가 빚은 성채 같다.
 
  이런 울림은 여느 서양시인들과 다르다. 파스의 시에는 동양사상이 스며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40~41행)이 있는데 그 눈은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에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어린 아들이 보인다.(45, 47행) 또 딸(여자아이)에게서 어머니의 시선(46행)이 느껴진다. 이런 시선은 삶의 바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들(48행)이다. 삶의 회귀(50행)다. 불교의 윤회론적 사고와 닿아 있다.
 
  옥파비오 파스가 쓴 시 중에서 방랑 수도사를 그린 시 〈브린다반(Vrindaban)〉이 있다.
 
  광대
  절대(絶對)의 원숭이
  쭈그러진
  갈고리 모양을 하고
  창백한 재로 덮인
  방랑 수도사가 나를 쳐다보고 혼자 웃고 있었다.
  그 연안에 앉은 채 멀리 멀리서 동물이나 성인(聖人)들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헐벗고 산발한 더러운 모습을 하고
  …
  아마도 크리스나를 본 모양이야
  그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죽은 자들을 불사르는 부둣가 화장터에서 살고 있다.
 
  - 〈브린다반〉의 시 일부. 번역 김현장.
 
1990년 참빛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옥타비오 파스의 시집 《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는 1952년 인도와 일본에서 1년간 머무르며 중국과 일본의 고전을 탐독했다. 주역(周易)에 관심을 가졌고 팔괘의 시각적 효과를 원용한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불교와 동양사상에 빠지게 된 것은 1962년부터 6년간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무(無)의 세계관은 인도철학의 ‘찰나(刹那)’와 관련이 있다. 모든 존재가 찰나(순간)에서 생성하거나 사라지기도 하는데 계속적인 생멸 현상이 우리 삶에서 일어난다. 불교에서 일생은 찰나와 같다. 또 찰나는 순간의 영원성과 닿아 있다. ‘거기 항상 있으면서 있지 않거나’(61행),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삶’(73, 74행)이다.
 
  시인은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본뜬 시를 쓰기도 했다. 하이쿠는 각 행마다 5, 7, 5음으로 이뤄진 단시를 말한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파스의 시 첫 행은 대개 간결하게, 그러나 대상의 본질에 가깝게 묘사하려는 듯 비유적이다. 〈시간〉의 첫 행은 ‘바람이 아니다’다. 〈독백〉의 첫 행은 ‘허무와 꿈 사이’, 〈새벽〉의 첫 행은 ‘차갑고 재빠른 손길’, 〈시(詩)〉의 첫 행은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바람〉의 첫 행은 ‘현재는 영속한다’다.
 
  옥타비오 파스는 1968년 오르테스 멕시코 당시 대통령이 학생시위를 탄압하자 대사직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부임했고 2년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시학(詩學) 담당 교수가 된다. 그의 문학은 파블로 네루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등과 함께 남미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정권 시인의 결빙의 시학 〈산정묘지〉
 
한국 시단의 ‘정신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꼽히는 조정권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를 읽다 보면 조정권 시인의 연작시 〈산정묘지〉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 산정(山頂)의 정신세계를 그린 이 시는 혹한의 고통 속에서도 ‘허옇게 얼어터진’ 순수한 결빙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프랑스 시 전문 계간지 《포에지》는 1999년 한국 시인 특집호에 〈산정묘지〉를 소개하며 찬사를 보냈다.
 
  조정권 시인은 2006년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보르도대 강연에서 “시간의 고요가 깃든 험준한 봉우리를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경험은 삶의 물음에 대한 방향으로 틀을 잡을 때 경건하고 숭고한 정신의 표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 〈산정묘지(山頂墓地)1〉의 첫 연 중 일부
 
  민음사에서 간행된 《산정묘지》(1991년 간)는 이후 프랑스에서 번역됐으며 현지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당시 조정권 시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옥타비오 파스와 더불어 ‘세계 15대 대표시인’으로 꼽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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