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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12〉 육척고아를 맡길 만한 신하는 드물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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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공(周公), 어린 조카를 도와 주나라를 기반에 올린 후 물러나
⊙ 태종 이방원, 명나라 연왕 주체를 만난 후 “연왕은 왕으로 있을 인물이 아니다”
⊙ 명 영락제(주체), 3년간의 내전 끝에 조카 혜제 몰아내고 즉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주 무왕이 죽은 후 성왕을 잘 보필했던 주공.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아들 성왕(成王)은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이때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성왕을 대신해 섭정(攝政)했다. 당연히 주공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렸다. 심지어 관숙(管叔)을 비롯한 여러 동생까지 주공을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주공은 앞으로 결국 성왕을 해칠 것이다.”
 
  군주제하에서는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조선시대 때도 세조가 보여주듯 어린 군주는 삼촌들 앞에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논어》 태백(泰伯)편에서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말한 다음과 같은 신하가 있을 때라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육척의 어린 임금[六尺之孤]을 부탁할 만하고, 백리 되는 제후국의 흥망을 맡길 만하며, 국가의 위기상황에 임해서 (그 절개를) 뺏을 수 없다면 이는 군자다운 사람입니다.”
 
  주공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태공망과 소공(召公)에게 말했다.
 
  “내가 오해받는 것을 피하지 않고 섭정하는 것은 천하가 왕실을 모반할까 두렵기 때문이오.”
 
  심지어 주공의 형제들인 관숙과 채숙(蔡叔)이 주공을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망한 은나라 잔존세력인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함께 동이(東夷)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은 그 나라 임금들을 주살했다.
 
 
  ‘寬’의 의미
 
  한편 주공은 자신의 아들 백금(伯禽)은 봉국(封國)인 노(魯)나라로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때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논어》 미자(微子)편에 실려 있다. 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임금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선대왕의 옛 신하들이 큰 문제[大故]가 없는 한 버리지 않으며,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관(寬)의 본래적인 의미다. 즉 신하 한 사람에게 하나의 재능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너그러운 지도자인 것이다. 관(寬)의 반대는 인(吝)이다. 말 그대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쩨쩨한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논어》를 지금보다 훨씬 깊게 제왕학으로 이해했던 한(漢)나라 때 관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반고의 《한서(漢書)》 오행지(五行志)의 한 대목을 보자.
 
  〈“생각과 마음[思心]이 너그럽지 못한 것[不睿]을 일러 빼어나지 못하다[不聖]고 한다”고 할 때의 생각과 마음이란 마음에 사려 깊음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睿)는 너그러움[寬]이다. 공자는 《논어》 팔일(八佾)편에서 말하기를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너그럽지 못하면[不寬] 내가 무엇으로써 그 사람을 살필 수 있으리오!”라고 했다. 이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너그럽고 넓게[寬大] 신하를 품어 감싸주지[包容] 못하면 빼어난 자리[聖位=君位]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임금의 임금다움[德]이 바로 너그러움[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빼어남[聖]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윗사람을 볼 때 마치 자식이 효도하는지 여부를 통해 그 자식됨을 판단하듯 너그러움을 실마리로 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주공의 인재 사랑
 
주나라 성왕.
  지인지감의 차원에서 주공을 짚어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인재 사랑 때문이다. 그냥 저기에 인재가 있구나 하고 알아보는 데 그치는 것은 지인지감이 아니다. 열렬함이 동반돼야 한다.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는 주공의 인재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한유가 듣건대 주공이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이 됐을 때 뛰어난 이를 만나보게 돼 그 상황이 급박하자 바야흐로 한 번 먹을 때 세 번이나 먹던 음식을 토해냈고[一食三吐] 바야흐로 한 번 머리를 감으면서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붙잡아 올렸다[一沐三捉]고 했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 천하의 뛰어난 인재들은 다 이미 들어서 쓰였고 간사하고 중상모략으로 잘 속이는 무리는 다 이미 제거됐습니다.”
 
  섭정 7년째가 되던 해 성왕이 성장하자 마침내 주공은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섭정을 마친 주공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주공은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북쪽을 향해 신하의 자리에 서서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마치 뭔가를 두려워하듯이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주공은 성왕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정사에 게을러질까 두려워 무일(無逸)이라는 글을 지어 경계로 삼도록 했다. 말 그대로 안일함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태종은 무일전(無逸殿)이라는 건물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 속에서 육척지고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한 삼촌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방원이 만난 명나라 영락제 주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명 영락제.
  나라를 세우는 과정과 집권의 드라마에서 보자면 조선의 태종(太宗)은 당나라 태종을 빼닮았고 조카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세조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판박이다. 우리가 흔히 영락제(永樂帝)라 부르는 성조의 묘호도 원래는 태종이었다.
 
  주체(朱棣·1360~1424)의 생몰은 대체로 조선의 태종 이방원(李芳遠·1367~1422)과 겹치며 심지어 조선 역사에서는 아주 드물게 중국 황제와 조선 국왕이 비록 두 사람 다 황제나 국왕이 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이런 경우는 두 번 더 있었다. 한 번은 세조가 단종 즉위년에 사은사로 가서 명나라 경제(景帝)를 만난 것이고 또 한 번은 청나라 두 번째 황제 홍타이지가 병자호란 때 조선을 정벌해 삼전도에서 인조로부터 항복선언을 받을 때였다. 묘하게도 조선에서 일어난 네 번의 쿠데타 중에서 3번은 다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와 묘한 인연을 맺었다.
 
  먼저 주체와 이방원의 인연이다. 태조 2년(1393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황영기와 최연이 조정에 전달한 문서에는 ‘조선이 명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며 책망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란 태조 이성계는 즉각 중추원 학사 남재를 주문사(奏聞使)로 임명해 명나라 금릉(지금의 남경)으로 가서 황제에게 이에 관한 해명을 하도록 했다. 당시 황제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었다. 그해 9월 돌아온 남재는 주원장이 “앞으로는 3년에 한 번씩만 사신을 보내라. 앞으로 하는 것을 보아가며 내가 사람을 보내 너희를 부르겠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이성계는 바로 중추원학사 이직을 사은사로 임명해 다시 예전처럼 ‘1년3사’로 조공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라며 금릉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직 일행은 요동성 밖 백탑에 이르러 입국 거부를 당해 그냥 돌아왔다.
 
  게다가 이때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조선 해적이 중국 연안을 침입한 사건이고 또 하나는 조선의 요동정벌론이었다. 뒤엉킨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문제는 다음해인 태조 3년 최연과 황영기가 각각 연이어 파견되면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북벌(北伐)에 필요한 말 1만 필을 보낼 것, 그리고 이성계의 장남이나 차남이 조선해적사건의 범인을 직접 압송해 금릉으로 들어올 것 등을 요구했다.
 
 
  태종과 영락제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진안공 이방우는 이미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아들인 정안공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학식을 갖춘 아들이 없었다. 이방원은 이미 6년 전인 1388년 이색을 따라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성계로서는 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을 이방원에게 맡기기에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국 직후 대부분의 신하가 당연하게 세자감으로 보았던 이방원을 제쳐 두고 신덕왕후 강씨의 눈물작전에 넘어가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게 불과 2년 전의 일이 아니던가? 태조 3년 6월 1일 태조는 이방원을 불러 이른다.
 
  “명나라 황제가 지금 우리에게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다. 네가 아니면 답할 사람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원의 스케일을 보게 된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태조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길을 떠난 정안공은 다행스럽게도 황제를 여러 차례 직접 만날 수 있었고, ‘민생을 구휼하고 천명을 경계하라’는 조칙을 받아서 돌아왔다. 조선에 대한 주원장의 의구심을 말끔하게 풀어주고 돌아온 것이다.
 
  당시 정안공 이방원은 도중에 북경에서 주원장의 아들인 연왕(燕王)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연왕을 만나본 후 이방원은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연왕은 왕으로 있을 인물이 아니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말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이방원이다. 실제로 4년 후인 1398년(태조 7년) 5월 명태조 주원장이 사망하자 황태자는 7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황손인 명 혜제(惠帝)가 즉위하지만 얼마 후 연왕은 형제, 조카들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內戰)을 치른 끝에 황제의 자리를 쟁취했다. 이를 중국사에서는 ‘정난(靖難)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이때가 태종 2년(1402년)이다. 그가 바로 영락제 성조다.
 
 
  조카 혜제를 내쫓고 황위에 오르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는 홍무 3년(1370년) 11세 때 연왕에 봉해졌고 홍무 13년에 지금의 북경 일대인 북평(北平)에 나아가 번왕으로서 북방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연왕은 용모가 기이하고 장대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지략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능히 사람을 잘 부리고 일을 맡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변방을 맡아 몽골과 여진을 잘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잘살게 해 아버지 주원장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홍무 31년(1398년) 5월 을유일에 아버지 주원장이 서궁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연왕에 대한 금릉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2대 황제에 오른 주원장의 손자 혜제는 연왕에 대한 견제에 들어갔다. 다만 거대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모를 리 없는 연왕은 혜제의 탐색과 암살 기도에 맞서 역정보를 흘리는 등 치열한 정보전을 전개했다. 심지어 땅굴을 파고 무기를 만들면서 거위떼를 풀어 무기 만드는 소리를 감추기도 했다. 준비를 마친 연왕은 황제를 둘러싼 간신들을 제거하여 난국을 바로잡는다며 병사를 일으켰다. 3년에 걸친 치열한 내전 끝에 1402년 6월 마침내 황궁에 급습해 황군을 제압한 연왕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그의 입장이 떳떳할 리가 없었다. 그해 10월 새 황제는 조선에 보낸 조서(詔書)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옛날 나의 부황(父皇)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천하에 임어(臨御)하시어 40년을 드리웠기에 널리 해내외(海內外)가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 고황제께서 여러 신하를 버리시자 건문(建文·혜제)이 (황제의) 자리를 이었는데 권세가 간사하고 사특한 자에게 돌아가 헌장(憲章)을 바꿔 어지럽히고 골육을 죽이고 해쳐 화(禍)가 거의 짐(朕)에게도 미치게 되었다. 이에 삼가 조훈(祖訓·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부득이하게 군사를 일으켜 큰 악의 무리를 깨끗이 없앴다.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신령과 장사(將士)의 힘에 기대어 싸우면 이기고 치면 물리쳤다. 그러나 애초에 멀리까지 내달려가려 한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제남(濟南)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였고 다시 하북(河北)에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가까이 다가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주둔했고 이어서 경기(京畿)에 이르러 건문이 저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고 죄를 뉘우쳐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렸다. 예기치 못하게 건문이 간사한 권간들에게 핍박과 위협을 받아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제왕(諸王) 대신(大臣) 백관(百官) 만백성이 짐이 고황제의 바른 적자라 하여 함께 글을 올려 자리에 나아가기를 권해 대통(大統)을 잇도록 했다.”
 
 
  “성왕이 어디 있는가?”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임에도 뭔가 궁색한 변명의 느낌으로 가득한 글이다. 이런 피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업적 면에서 성조는 명나라의 최전성기라 해도 손색이 없다.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 자금성을 지었고 대운하를 팠으며 서양에 정화의 함대를 파견했다. 게다가 2000여 명의 학자를 동원해 《영락대전》 《성리대전》 등의 대대적인 도서편찬 작업을 추진해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우리의 사육신을 연상케 하는 일도 있었다. 혜제의 스승으로 일찍부터 연왕을 제거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던 대학자 방효유(方孝孺·1357~1402)를 살려서 어떻게든 회유하려 했다. 성조는 스스로를 주공이 성왕을 도운 일에 비교하며 그에게 즉위조서(卽位詔書)를 기초할 것을 명했다. 이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성왕이 어디에 있는가?”라며 거부했다. 그의 일족과 친지, 제자 등 847명이 이 일에 연좌돼 죽었다. 이런 점에서는 공도 크고 과도 큰 황제가 영락제라 하겠다.
 
  조선에서는 단종 1년(1453년) 10월 10일 쿠데타가 일어났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정난(靖難)이라 이름 붙인 것은 바로 이 세력들이 영락제의 찬탈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세조 또한 그래서인지 영락제와 마찬가지로 공도 크고 과도 컸다. 또한 공자가 말한 “육척지고의 임금을 맡길 만한” 삼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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