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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도의 역사 읽기 〈6〉 왜 ‘지식인’은 좌경하고 전체주의에 이끌리는가?

글 :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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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intellectual)’은 원래 부정적인 의미… 마르크스 이후 ‘사회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
⊙ ‘지식인’ 일반의 좌경성과 혈통적 민족주의, 정치적 낭만주의가 결합해 한국 지식인의 모습 형성
⊙ 지식인들은 혁신을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여서 자본주의에 적대적

유광호
1958년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
연세대 강사, 이승만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정치적 낭만주의와 반자본주의정서는 지식인들을 좌경의 길로 이끈다. 왼쪽부터 마르크스, 사르트르, 홍명희.
  언론인도 배웠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좌경(左傾) 세력이 조직하고 좌경 정치인들이 이용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실체적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노조·민노총의 뜻에 반해서 보도를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교사들도 배웠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좌편향을 시정한 국정 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못하게 일사불란하게 저지했고 민노총과 전교조의 행동대는 전국에서 유일한 채택 학교에 쳐들어가서 협박하고 있다.
 
  왜 지식인들이 이렇게 사상적으로 편향되고 전체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왜 그들 대부분은 반공(反共)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자본주의화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룬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폄하하고 증오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은 요즘의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1~1963년 사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이낙선(李洛善) 중령은 국가개조 사업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방관적인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그의 말이다.
 
  “이조(李朝)당파의 생리적 후예라는 정통을 잇고 일제(日帝)의 폭정에 대한 ‘민족적 레지스탕스’의 외곽 운동으로서의 부정적 태도의 여운이 아직도 불식 안 된 데다가 근자에는 또 의의와 연혁을 몰각한 피상적 레지스탕스의 풍조에 휩쓸려서 혈기의 장기로서 ‘이유 없는 반항’을 신조로 삼고 현실 생활에서 늘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한다. 상대방에 일리가 있다 하여도 다른 비리와 같이 도매금으로 부정해 버린다. 상대방과 공통되는 점에서 서로 타협하고 협조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소한 상이점을 확대시하여 배격하고 상발(相撥)하고 있다.”
 
 
  부정적 용어로 사용되어 온 ‘지식인’이라는 단어
 
영국의 역사가 폴 존슨.
  이보다 더 정확한 지식인 비판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지식인에 속하는 부류는 학자, 문필가, 언론인, 예술가, 교사 등의 직업인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지식인’이라는 말도 서양어 ‘intellectual’ 내지 ‘intelligentsia’의 번역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저술가 폴 존슨은 문명에 대하여 비판적인 좌경 지식분자들을 ‘지식인(intellectual)’이라고 규정하고, 그에 반대하는 지식 종사자들은 ‘counter-intellectual’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반(反)지식인’ 혹은 ‘대항 지식인’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열거한 직업인들 모두가 ‘지식인’이라는 특정한 개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이 즐겨 부여하는 사회·직업적 범주로서의 지식인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상 담론(談論)과 정치 투쟁의 장에서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특별한 개념을 가져왔다. ‘현재 한국의 사상 지형을 자유민주주의 대(對) 전체주의의 대결상황’이라고 규정하고 전체주의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한국자유회의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인 듯 싶다.
 
  구미(歐美)에서 ‘지식인’이란 ‘전통, 인습(因習) 및 관습에 매인 사람과 구별되는, 변화 지향적이거나 과격한 성격의 추상적 사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어원(語源)을 따라 올라가면, 17세기에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모든 지식은 순수한 이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런 개념을 위한 더 일반적인 용어는 ‘intellectualist’였다.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 내지 ‘이지주의자(理知主義者)’ 정도로 번역되겠다. 둘 다 경멸적인 함의를 가졌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605년에 출간한 《학문의 진보》에서 ‘intellectualist’를 ‘추상적인 형이상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데이비드 흄은 ‘intellectu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성(理性)을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유일한 안내자로 여긴 18세기의 선험적·연역적 사상가들을 호되게 비판했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비난했던 ‘궤변가들’, 즉 ‘추상적 철학자들(philosophes)’을 의미했다. 각기 다른 이유 때문이긴 해도 낭만주의자와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들도 똑같이 경멸한 범주였다. 그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가까이 맺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지식인은 상상, 황홀과 공포의 힘 및 단순한 이성적 인식을 넘어서는 존재의 총체적 영역을 무시했다. 그 대신 그들은 관념적인 정치담론을 폈다.
 
 
  사상이 있고 사건이 있다
 
  그 용어의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의 일군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식인은 언제나 사회의 기초를 허물어뜨려야 한다”고 말한 카를 마르크스의 개념과 용법에 영향을 받았다.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기성의 사회제도들에 몹시 반대하는 교육받고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상정한다. 먹물 먹은 자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상(思想)이 있고 사건이 있다”는 역사의 이치를 알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레닌은 혁명의 사상은 노동자 계급 밖에서만 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식인으로서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패배주의적이거나 공상적(空想的)인 경향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운동에 지식인들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공산주의로의 과도 정부에서 지식인들이 차지할 지배자 자리들을 이론적으로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 주로 맨해튼에서 온건한 세속주의에서부터 스스럼없이 공산주의를 변호하는 것까지에 걸치는 좌익의 정치적·사회적 운동들에 일체감을 갖는 한 범주 내지 계층의 지식인들이 형성됐다. 그들은 ‘지식인’과 ‘리버럴’이란 단어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에 대응하여 교육받은 보수주의자들은 ‘지식인’이란 칭호로 불리기를 사절하고, ‘학식 있는 사람(bookman)’ ‘학자(scholar)’ 또는 ‘작가(writer)’와 같은 칭호로 불리기를 선호했다. 생각 있는 보수주의자는 지식인의 가정들, 즉 추상적인 원칙이나 원리들을 거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지식인’이란 명명을 사절했던 것이다.
 
 
  지식인은 사물의 현상을 공격하는 자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르벨.
  하지만 모든 리버럴이나 과격분자들이 ‘지식인’이란 칭호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나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고, 누구도 감히 내 면전에서 나를 그렇게 불렀던 적도 없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보수주의자들을 ‘멍청한 당’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지성사를 개척한 역사가 크레인 브린턴에 따르면, 결국 ‘지식인’은 ‘사물의 현상을 공격하는 자’다. 그럼으로써 대중의 고달프거나 평범한 일상적 삶으로부터 환상에로 일시적이나마 도피하고 싶은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대가(代價)를 받거나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서구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라이트 밀스를 따라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에 대한 사상의 영향력에 대해 점점 더 주목하게 됐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미래를 가지려면 먹고사는 이익만이 아니라 지식과 예술을 사회주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이런 성향은 ‘전체주의에의 유혹’으로 이끈다. 프랑스의 저술가 장 프랑수아 르벨에 의하면, ‘전체주의에의 유혹’이란 지식인들이 전체주의적 정치 시스템들-특히 마르크스주의-을 감싸 안으려는 지식인들의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 원인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추상적 원칙들에 의해 추론(推論)된 반응, 그리고 그 전체주의 정치 시스템들이 지식인들 자신에게 약속하는 특별하고도 뛰어난 역할 때문에 그렇게 거기에 끌리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대부 계급의 ‘치자의식(治者意識)’이 낳은, 신복룡 교수의 표현인 ‘지식인 사회주의’ 같은 것과 비견된다.
 
 
  전체주의에의 유혹
 
  전체주의와 유럽 지식인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그들은 ‘전체주의론’을 프로파간다로 치부해 버렸다.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소련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화 현상이 없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발표됐지만 좌익 지식인 모두가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솔제니친의 고발을 남의 이야기인 양 대했다. 대한민국은 게릴라전쟁 상태(1945~1954)를 안고 출발한 나라다. 불행 중 다행으로 6·25공산남침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게릴라를 소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지식인들이 베트콩이 돼 버린 상태다.
 
  왜 한국에서 이런 좌경적 ‘지식인’들이 형성되었을까? 여기에는 앞에서 살핀 구미 ‘지식인’ 일반의 좌경적이고 전체주의에의 유혹에 덧붙여, 구한말(舊韓末) 이래의 혈통적 민족주의와 식민지 시기를 통해 전해진 정치적 낭만주의의 영향이 컸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초기 민족주의 문필가들은 최초로 자본주의적 근대성(近代性)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근대성은 네이션-스테이트(nation-state·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적 구조를 떠받치는 것이었다.
 
  문명개화(文明開化)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던 구한말 애국계몽운동 시기의 문필가로 비슷한 출발을 했던 이승만과 신채호(申采浩)의 사상적 행보는 두 갈래의 길을 보여준다.
 
 
  이승만과 신채호
 
이승만은 대항 지식인의 길을 걸은 반면, 신채호는 민족주의·무정부주의에 기반한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1919년 통합상해임시정부 때부터 신채호는 이승만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국민국가들의 평등한 국제질서하에서의 민족독립을 위한 운동노선을 견지하고 발전시켜 갔다. 폴 존슨의 말로 하면 ‘counter-intellectual’의 길을 간 것이다.
 
  이에 반해 신채호는 혈통적 민족주의에 입각해 역사를 국조(國祖) 단군의 후예들의 운명에 대한 서술로 수렴했다. 신채호에게 국가는 민족에 비하면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국가는 ‘민족의 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였으며, 영원하고 절대적인 민족에 비해 순간적이고 잠정적인 존재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공통 시조는 단군이며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세 국가는 같은 민족, 즉 동일한 전체의 세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일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의 개념은 단순한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개념이었다. 신채호는 1920년경에 민중에 의지하는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전환했다. 문명개화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사회진화론(민족 단위들 간의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모순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채호가 변신하기 이전에 그의 사회진화론적 사유에는 진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것은 부자연스럽고도 모순 상태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화 프로젝트도 ‘계몽’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새로운 민족국가는 군주의 소유가 아님을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왕실 중심의 역사적 전통을 타파했다. 신채호는 독립적인 민족의 주체성을 창조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와 코냑
 
  1920~30년대부터 독일로부터 일본을 거쳐 전해진 낭만적 민족이 사랑의 대상이 됐다. 그것은 발생부터 무엇에 대한 원한을 품고 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 이런 민족을 구현하는 것이 북한 체제라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났다.
 
  볼셰비즘과 더불어 정치적 낭만과 연결돼 있고 나로드니키의 브나로드 운동도 들어와 있었다. 곽상훈 등이 농민 계몽을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조선총독부가 저지했다. 그런 전통은 1980년대까지 농활(農活)로 이어져 왔다. 그다음이 노동자에 대한 계몽과 의식화 작업이었다. 이 모두가 ‘지식인 운동’이었다. 이광수의 《흙》의 주인공도 지식인이었다. 농민이나 노동자로 들어간 ‘지식인’들 중에 농민과 노동자로 삶을 마친 자는 없었다. 결국 지식인은 지배하려고 한다.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사르트르가 코냑과 상류생활을 즐기면서 공산주의 폭력투쟁을 선동했던 행태를 보면 지식인이 어떤 존재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 낭만주의에서는 대중이 스스로 만든 민화(民畵) 같은 것을 중시한다. ‘민족정신(Volkgeist)’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정인보(鄭寅普)는 ‘얼’을 내세웠다.
 
  자연적이거나 비인위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고가 정치에 접착될 때 사정이 고약해진다. 정치적 낭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中世)는 완벽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농경사회를 찬양하고 농민이 가장 자연적인 집단이라고 간주한다. 농민이 ‘Volk’, 즉 민족이고 민중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군주가 백성을 위한 일을 다할 때 가장 자연적인 지도자로 여겨진다. 여기서 “하나의 군주는 모든 민중을 위하고, 모든 민중은 하나의 군주를 위한다”는 유기체적(有機體的) 정치체제 개념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런 중세 군주제가 바로 공화정이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정치적 낭만주의와 혁명
 
월북한 홍명희는 김일성으로부터 ‘재간둥이’라며 총애를 받았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과 뱃놀이하는 홍명희.
  낭만주의에서는 피와 죽음이 미화된다. 열정을 불사르면서 피를 뿌릴 수밖에 없는 전투를 미화하고 일제시대에 ‘사(死)의 찬미’를 불러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윤심덕의 자살도 일제시대 한국인들에게 전해져 풍미했던 낭만주의 풍조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낭만주의는 혁명의 열정과 일치한다. 이런 감정의 계보는 전통으로 내려왔다. 이 생각을 정치론적으로 잘 표현한 이가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였다. 그 피히테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이가 신채호였다. 신채호에게 있어서 아(我)란 하나와 전체가 일체화된 유기체였다. 피히테에게 개인의 자주적 영역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신채호의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 ‘민중’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론이다. 엘리트는 필요 없고 민중의 영웅을 갈망하고 있다. 전(前)근대 농경사회의 농민이 하나로 일체화된 존재로 규정되고 이것을 이끌기 위해 출현하는 리더가 영웅, 즉 민중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신채호도 초기에는 칼라일의 엘리트 영웅론을 수용했으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폐기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적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민중영웅론을 받아서 쓴 것이 홍명희의 《임꺽정》이고 황석영의 《장길산》이었다. 그러던 끝에 이런 민중으로부터 출현한 영웅이 김일성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홍명희는 해방 후 자발적으로 공산 북한을 찾아 월북(越北)했고 김구에게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오라고 유혹했다. 황석영도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으로부터 ‘재간둥이’라는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지식인을 경멸했다. 스탈린이 ‘지식인’ 박헌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소속의 빨치산 대원 출신인 김일성을 괴뢰로 선택한 이유는 김일성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지식인을 “머리는 과장된 생각들로 찼고, 다리는 약하고, 혀는 날카로우나 배 속은 텅 빈 자”라고 묘사했다.
 
  이런 정치적 낭만주의와 그 유기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민중영웅론은 소련이 만들어 퍼트린 민족해방론과 무리 없이 일치했다. ‘민족’ 개념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인들을 지배하게 됐다. 많은 한국인은 체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것이 한국 사회를 전체주의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피해자들
 
  엘리트주의적인 지식인들이 대체로 대중을 폄하하고 무시할 때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사상가인 에릭 호퍼는 ‘보통 사람’을 내세웠다. 지식인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실제적 기술이 있는 ‘보통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왔다고 주장했다. 좌경 지식인 세계의 허구를 꿰뚫어 본 예리한 안목이다.
 
  조지프 슘페터의 말대로 혁신(革新)을 그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야말로 진보다. 이 진보와 혁신이 돌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나온다. 그들이 바로 ‘지식인’들이다. 문명 비판적이고 좌경적인 지식인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된다. 그래서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다. 자존심이 높은 지식인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문화적인 반대자들을 생산해 낸다. 거기에 자신의 문화적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자기모순 또한 있다. 이것이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이 그의 명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경고한 논지였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좌경적 지식인과 전통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하며 앙심(ressentiment)을 품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공격에 그 둘은 연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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