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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외도(外道)와 정조

“혼인의 형식은 남녀 화합, 실질은 남녀 투쟁”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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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입법례는 지배계급의 철저적 승리(1933년)
⊙ 여성의 정조… 남녀 간 인격을 균등히 구비한 미래사회에서는 없어질 말(1927년)
1930년대 후반의 결혼식 모습. 신여성과 모던보이의 결혼이다. 사진=황정호
  근대의 물결은 결혼과 연애에 대한 봉건적 사고를 바꾸었다. ‘연애 없는 결혼생활(早婚)은 비도덕적’이란 서구의 사조가 들어왔고 신교육을 받은 여성 사이에서 봉건적 가족제에 대한 각성이 이뤄졌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사상도 구시대 결혼관에 대한 비판을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정조에 대한 인식이 깨지고 축첩·외도·이혼·간통의 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서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성에 예속된 여성의 경제적 의존관계가 결혼관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생겨났다.
 
1939년 2월 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엇지하릿가(어찌하리까)’.
독자는 “남편 있는 여자를 사랑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신여성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신구 풍습의 충돌은 곳곳에서 마찰음을 빚었다. 조혼을 한 남편(연애 없는 결혼이란 이유로)이 신여성과 연애하거나, 자유연애를 열망하는 신여성 역시 아내가 있는 인텔리 남성과 연애하는 현상 때문이었다. 여성으로선 또 다른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판례에 나타난 정조〉(1933년)와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1927년)은 당대 결혼과 정조, 이혼, 연애에 대한 사회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글이다. 원본을 살리되 현대 표기법으로 고쳤다.
 
 
  판례에 나타난 정조
  신태악(辛泰嶽)
 
《신가정》 1933년 7월호 표제지.
  일기는 찌는 듯한 이때 여러분이 법률강좌를 읽고 앉아 있을 일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나로서는 미리 마음이 갑갑하여집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재미있는 재료를 택하야 쉬웁게 써 보려고 하니, 원래 법률이라는 것은 시나 소설과 달라서 굳고 빽빽한 것이라 용이히 그 목적을 달하기는 곤란할 듯하야 순전한 법률상 설명보다도 차라리 판례에 나타난 재미있고 알아둘 필요 있는 사실을 뽑아 써 보는 것이 좋을 듯싶어 이에 남녀 간 중대문제인 정조문제에 관하여 한두 가지의 판례를 적어 보겠습니다.
 
  × ×
 
  정조라는 관념은 근래 사상계의 변천에 따라 그 해석이 달러 간다. 그러면 법률이 보는바 ‘정조’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법률이 보는 정조라는 문제는 결국 남녀 간에 정조의 의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법률문제라기보다 도덕문제이다. 도덕상으로 말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조를 지켜야 할 것이며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법에는 그 183조에 간통죄에 관한 규정을 설하야 ‘남편 있는 부녀가 간통할 때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함’이라 하여 놓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간통할 때는 어찌한다는 규정은 설하지 않었다. 이 법률은 방종하는 남자들을 ××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 남의 처가 된 여성의 간통은 이혼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자의 간통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러한 법률에 의하야 조선의 고등법원은 소화 3년 10월 6일에 재미있는 판결을 내리었다.
 
  이○○이라는 자가 그의 처 박씨를 학대하야 두 살 먹은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쫓아 버리었다. 그리고 이○○은 첩을 얻어 가지고 살아오던 중 박씨는 너무도 분하야 이러한 사실을 이유로 하야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일을 당한 이○○은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사건은 1심과 2심을 지나 고등법원까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고등법원에서는 ‘조선에 있어서는 첩 제도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일반사회에서는 첩 두는 것을 그리 큰 비행(非行)으로 알지 않는 형편이니 축첩하였다는 한 가지 일만 가지고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하야 박씨의 청구를 기각하야 버리었다. 이 판결은 남자에게는 정조를 지킬 아무러한 의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 대심원(大審院)의 판례에는 이와 반대되는 재미있는 판결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일본 어떤 한 촌에 ‘마사’라는 노파가 있었다. 그의 딸 ‘가네’에게 십수 년 전에 ‘고헤이(五平)’라는 서양자(壻養子)를 맞아 결혼하야 주었었다. 그 부부간에 아이 셋까지 낳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던 중 ‘고헤이’는 그 집에서 나가 그 근방에 사는 ‘아끼’라는 과부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 주인 과부하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처 ‘가네’와 어머니 ‘마사’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그 말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돈도 한 푼 보내지 않아서 생활은 극히 곤란하게 되었고 아이들의 양육도 어렵게 되었다.
 
  때는 바로 대정 13년 9월 28일. 노파 ‘마사’는 ‘곤도’라는 어떤 변호사 사무원에게 이 일의 해결을 의뢰하였다. ‘곤도’는 ‘그놈! 참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그날 곧 노파를 데리고 ‘아끼’의 집에 가서 “처자가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동거하는 것은 형법상 간통죄가 성립되는 것이니 만약 고소만 하게 되면 2년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돈만 내게 되면 고소는 그만둘 터이니 알아서 하여라” 하고 위협하였다. 이 말은 변호사 사무원이 거짓으로 한 말로 기실은 처 있는 남자가 다른 독신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할지라도 간통죄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을 모르는 두 사람은 그만 놀라서 ‘고헤이’와 처 ‘가네’와의 이별하는 돈으로 ‘아끼’에게서 현금 100원을 받고 또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으로 매달 9원씩 5년간 주겠다는 ‘아끼’와 ‘고헤이’가 연대한 계약서를 받었다. 그런데 이것이 형사문제가 되어 ‘곤도’는 공갈죄로 기소되어 제1심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고 다시 제2심에서 징역 9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신가정》에 실린 〈판례에 나타난 정조〉 첫 장.
  피고 ‘곤도’는 자기의 한 일에 대하야 변명하기를 “원래 피고 ‘고헤이’는 처에 대한 정조의 의무에 위반하였고 ‘아끼’는 ‘고헤이’로 하여금 그 의무에 위반하도록 하게 하야 처 ‘가네’의 권리를 침해하였음으로 처 ‘가네’는 이들에게 대하야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었다. 그래서 자기는 ‘가네’를 위하야 그 권리를 실행하였음에 불과하므로 다소의 강요는 있었다 할지라도 공갈죄를 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종래의 법률론으로선 당초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 변명이었다. 그러므로 2심 재판소에서도,
 
  “우리나라의 현행법으로는 남자의 간통죄, 즉 남자의 정조의무를 인정치 않았고 또 사회통념으로 본다 하더라도 처가 남편에게 대하야 정조를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따라서 ‘곤도’가 행한 바 공갈수단은 권리의 실행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
 
  라고 하야 피고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의 대심원장 ‘요고다’ 박사를 부장으로 한 대심원 제1형사부는 이 점에 대하야 견해를 달리해 원판결을 파기하고 대심원 자신이 사실심리를 다시 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정 15년 7월 20일의 결정이다. 이 결정 중에 유명한 ‘남편에게도 정조의 의무가 있다’는 신안(新案)이 발표되어 있다. 이러한 신안을 전제로 하야 대심원 제1형사부는 소화 2년 5월 17일의 판결로 피고 ‘곤도’에게 무죄를 언도하였다. 이 대심원의 남자 정조론을 이에 간단히 말하면 대체로 이러하다.
 
  “혼인은 부부의 공동생활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배우자는 서로 협력하야 공동생활의 평화와 안전 행복을 보전하기 위하야 서로 성실을 지킬 의무가 있다. 배우자의 한편이 불성실한 행위를 하면 이는 확실히 다른 한편에 대하야 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서로 정조를 지킬 의무가 있다. 민법 제813조 제3호는 남편이 간통하였다 할지라도 처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으며 형법 제813조도 또한 남편의 간통을 처벌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인습에서 나온 특수한 입법정책에 속하는 규정이므로 이 규정이 있다고 하야 민법상 남편에 대하야 정조의 의무를 요구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후략)”
 
  이와 같이 정조에 관하야 현행의 법률은 남녀 불평등주의를 가졌으나 대심원의 판결은 남녀평등주의로 항하여 간다. 그러면 어찌하야 현행 법률은 남녀 불평등주의를 가지게 되었는가. 이 점에 관하야 요전에 문제를 일으켜 크게 떠들던 경도제국대학 교수 ‘다끼가와(瀧川)’ 씨의 말을 빌어서 설명하면 이러하다.
 
  “남녀평등의 원칙은 혼인제도의 논리적 요구이다. 그러나 종래에 여자는 경제적으로 따라서 법률적으로 남자에게 예속된 상태에 있다. 남녀 간에 이러한 관계는 혼인에 반영되었다. 즉 혼인은 형식적으로는 남녀의 화합이나 실질적으로는 남녀의 투쟁으로 사회생활에 있어서 지배계급을 대표하는 남편과 피압박 계급을 대표하는 처의 가정 내의 투쟁의 축도(縮圖)에 불과한 것이다. 간통은 투쟁의 필연적 산물이니 현행법과 같이 처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입법례는 지배계급의 철저적 승리의 표현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입법례는 차차 평등주의의 경향을 가짐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벌하는 방향의 평등이냐 벌치 않는 방향의 평등이냐 하는 점에 있다. 이 점에 관하야 다시 ‘다끼 가와’ 교수의 설명을 빌어 말하면,
 
  “결론은 스스로 정하야진다. 그것은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를 낳은 경제관계가 소멸됨에 따라 간통죄로 소멸될 것은 물론이다.”
 
  즉 간통죄에 대하야는 남녀를 다 같이 처벌하지 않게 되리라는 말이다.(끝)
 
  (출처=《신가정》 1933년 7월호)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
  옥순철(玉順喆)
 
《신민》에 실린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 첫 장.
  기아에 몰리어 동주서사(東走西死)하는 판에도 연애문제와 정조문제로 상당히 세상의 여론은 비등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물론 먹은 후에 다음가는 문제이니만큼 사회적으로 충분히 떠들어 토론할 바임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근일에 와서 청년남녀들 간에 거의 상습적으로 고창절규(高唱絶叫)하는바 양성의 연애결혼이라는 어의가 무엇이며 현금 행하고 있는 남녀관계의 현상을 통찰한다 하면 연애결혼이니 자유연애라고 할 만한 점이 나변(那邊·어느 곳·편집자 註)에 있는지를 전력을 다하여 탐득(探得)하여 보려고 하여도 보이지를 아니한다. (중략)
 
  남녀관계의 최초의 형태는 물론 일부다처(一夫多妻)이었으니 추장(酋長)이라는 것이 권력으로 많은 여성을 독점하였었고 감히 경쟁하는 자들이 없는 한에서는 그대로 유지하였었고 일부다처라든가 다처다부(多妻多夫)의 난혼이라는 것은 일시 특수한 사정으로 인하야 일어난 것이다. 예를 든다면 권력으로 많은 여성을 독점한 자를 축출(逐出)하고 포로의 많은 여성을 각각 자유로 취하는 비상시기에 난혼이라는 것이 생기며 또는 전쟁이 일어나서 남성이 출전한 시에 다처일부(多妻一夫)의 상태들이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일례로는 구주(歐洲)전쟁 당시에 구주의 형편을 보아도 알 것이다. 이것을 죄악이니 부도덕이라고는 못하였을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으로는 기인하야 정조관 또는 혼인관이 변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회적 사정에 의하야 변한 것이다.
 
  지금 일부일처(一夫一妻)제를 현금 도덕상으로 찬양한다 하더래도 일부일처제 역(亦) 도덕에 준비하야 성립된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사회적 사정에 의하야 성립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바 사실이다. 먼저 남성의 성욕적 요구 또는 경제적 과시에서 포로 겸 첩으로 정하였던 여성은 남성의 ○○물의 감소로 산아를 양육할 수 없으니 그 처지에서 다처다자(多妻多子)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서는 부득이 1인의 남자와 1인의 여성이 결합하게 하여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성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부일처제의 기인(基因)은 경제적 즉, 식량문제이다. 지금도 오히려 유여(裕餘)있는 계급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현존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라는 것보다 자기 일신도 유자히 곤한 자는 일부일처제커녕 가정적 파탄을 이루는 사례도 부소(不少)하다.
 
《신민》 1927년 5월호 표지.
  기독교 신자들은 일부일처제가 교리에 의한 도덕관념에 의하야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니 기독교 신자의 일부일처설은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유혹물로 취급하고 등한시하는 중에 우연히 된 것이다. 재래의 종교 신자로는 1인의 여성으로 그 만족할 수 있음으로써이었다. 그럼으로 현대의 남녀의 결합 또는 이혼이 대반(大半) 경제사정에 의하야 기(起)하는 이상 또는 이에 동요하는 이상엔 붙고 떨어지는데 신성·불신성 운운도 가소로운 일이며 정조 운운도 망발이다. 왜 그러냐 하면 현하(現下)의 남성은 여성을 소유시하는 것이며 여성은 남성을 의지하고 기식(寄食)하려는 육신의 부양자에 불과함으로써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최초부터 인간으로 결합하고 그 근본을 살핀다면 상호 인간으로써의 결합이 아니었음으로써이다.
 
  만일 여성으로도 그 사회의 인격적 요소를 충분히 구비하고 일개의 인격으로 경제적 상호 독립한 남녀관계라 하면, 즉 처(妻)는 부(夫)의 부양을 바라지 아니하고 부에 대한 처의 기식이 없다 하면 종래의 경제적 대상인 정조에 대하여는 평가 운운이 없어질 것이다. 결합도 이혼도 하등의 부도덕이 없을 것이다. 지금 여성의 공격점인 정조문제에 대하야 남녀 간 인격을 균등히 구비한 미래사회에서는 없어질 말이다. 그러므로 인격적 요소를 구비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경제적으로 기식하기로 정조를 제공하고 순(純) 인간 결합이 되지를 못함으로 정조 운운의 시비가 기하는 것이다. 물론 정조라는 말은 과거에서는 여성에 한한 말이었지만 이후 신 사회에서 양성이 완전한 인격결합을 보게 된다 하면 정조의 시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구로부터 표정인형으로 진화한 부인들도 행복된 인형보다도 불행한 인간이 되어 보겠다는 것이, 즉 부인 해방운동이다. 남성사회운동이 아울러 인간운동이다. 이 인간운동이 종결을 고하기 전에 정조 운운은 부르주아의 여성독점을 강요하는 논조이며 연애결혼 운운은 현하의 남녀관계를 애써 가면서 허위로 신성화시키려는 말이다. 지면의 관계로 더 쓰지 못하고 후일을 약하고 각필(閣筆)한다.
 
  (출처=《신민(新民)》 1927년 5월호, p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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