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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도의 역사 읽기 〈4〉 한국의 민주화는 부국강병 세력이 만들어 냈다

글 :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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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과 환상이 반체제투쟁 확산시켜
⊙ 김대중, 좌익세력 끌어들여 ‘충성하는 야당’을 반체제성을 띤 정당으로 변질시켜
⊙ 김근태, 남한에서의 당면 혁명을 ‘민족민주혁명(NDR)’으로 규정하는 것을 선도

유광호
1958년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
연세대 강사, 이승만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1989년 1월 재야단체의 결집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출범했다. 김근태는 이 단체의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군중시위에 올라타서는 ‘민주세력’임을 자처하는 야당의 정치인들이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기각할 경우에는 혁명적 방법밖에 없다는 발언을 비롯해 대통령과 헌법재판소라는 헌법기관을 겁박하는 언행을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터트려 왔다. 자유민주제 헌정질서는 대통령 탄핵과정을 각각의 소관 헌법기관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변란을 획책하는 위법성이 농후한 언행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과연 민주적인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야당이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른바 ‘민주화운동’과 그 주도세력을 이 시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투쟁과 운동
 
  민주화(democratization)는 국민의 정치참여 확대와 행정권자 또는 정치권력에 대한 책임의 강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나라는 공산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처절하게 싸운 결과 1948년에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건국했다. 모든 생소한 제도는 도입, 시행했다고 해서 일거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꾸준히 심화, 발전시켜 가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화는 토착적인 조건을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에 맞도록 개선해 가는 과제를 지닌다. 그런데 양동안 교수의 말대로 민주화의 의미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세력의 사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다 같이 민주화라는 동일한 용어를 쓰지만,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민주화란 사회주의화를 뜻하는 것이고, 무정부주의자가 말하는 민주화는 무정부화를 뜻하는 것이고, 자유민주주의자가 말하는 민주화란 자유민주주의화를 뜻하는 것이다. 민주화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사상에 따라 이처럼 크게 차이가 나는데도 한국에서는 지금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그간의 반정부 반체제 세력들의 ‘투쟁’ 행위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통일전선전술’을 공인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좌익까지도 모두 보상을 받았으며 정치적 자산으로 크게 활용되어 왔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주도세력은 스스로 ‘민주화투쟁’을 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을 때,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민주화투쟁’을 미화하여 명예로운 일로 만들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해 주고, 자신들이 한 일 즉 과거 반정부 시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여 권력 획득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투쟁은 비합법적이고 폭력을 불사하는 것을 이른다. 운동은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이른다. 정부에 대한 과격한 도발에 따른 희생을 통한 세력확대 전술은 투쟁에 속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민주화운동’은 사실은 ‘민주화투쟁’이라고 불러야 정확할 것이다.
 
 
  김일성의 예견
 
  그러면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는 한반도 전체의 차원에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까? 6·25남침을 했고 1968년 1·21사태와 1974년 8·15저격 사건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려 한 김일성은 1977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한에서 박정희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반공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에서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민주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 군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남한 민중이 그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한이 민주화되면 설사 반공주의자가 집권해도, 노동자와 농민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므로 민노당 통진당 같은 종북정당도 만들 수 있어 대남공작에 유리하고, 좌경세력의 선동에 넘어간 한국 사람들 손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던 것이다. 그런 김일성의 전략판단과 예상은 적중했다. 적의 침투와 전복공작에 취약한 자유민주제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여 역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정희만을 배타하고 죽이려 했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대립구도에서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보루였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하지만 1960-70년대의 지식인들이 박정희 정부가 찾아낸 수출주도형 공업화 노선이라는 한국형 국가혁신 체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심이 사회주의라는 환상에 경도되는 성향이 있는 데다가 그 시절은 제3세계에서 탈식민지주의 즉 이른바 민족해방 열풍이 불었고, 선진국과 교역하면 선진국에 종속되어 착취된다는 종속이론이 풍미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계의 분위기도 상당히 그런 수준이었다.
 
  이영훈 교수의 말대로 흔히들 그 시대의 사회를 권위주의 정치에 억눌린 암울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저항한 소수 정치세력에 의해 조성되어 널리 유포되어 온 것이다. 그 시대를 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정부-기업-노동자의 상호 유인적인 성장체제에 포섭되어 그들의 인생과 가족을 위해 활발하게 노동하고 헌신했다. 사회는 의외로 밝았으며 역동적이었다. 이런 진실을 반정부 투쟁가 백기완씨는 1990년대의 어느 날 “박정희는 우리 같은 사람 3만명만을 못살게 했지만 다른 정치인들은 국민 3000만명을 못살게 했다”고 고백적으로 폭로했다.
 
 
  이철승
 
  ‘민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치고 진정으로 자유민주적인 사람은 드물다.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민주’라는 말 속에 ‘인민민주주의’ 내지 좌경적 민주주의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 레닌의 용어혼란 전술을 의식적으로 구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감염됐다는 증좌다. ‘민주화투쟁’ 세력이라고 자처한 부류는 대개 권력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야당의 선동적 정치인들과 좌경 재야인사와 종교계 인사들 그리고 좌경 학생운동권과 혁명적 좌익세력이었다. 1960-70년대에는 전자가 ‘민주화투쟁’을 주도했지만 1980년 광주사태를 구실로 후자가 세를 급격히 확대하여 과격한 선도투쟁을 벌이면서 이후 주도권에 접근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통일’과 ‘민족해방’을 명분으로 내건 종북세력이 장성하여 좌익진영의 헤게모니를 쥔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의 심화로서의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과격한 ‘투쟁’으로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60년대 중반 이후 건설이 이루어져 가는 나라를 처음으로 희망을 갖고 바라보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자 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경제를 비롯한 나라의 인프라가 성장하면 자유민주주의도 심화될 수 있을 것임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계에서는 ‘중도통합론’을 내걸었던 이가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권력획득을 위해서는 좌익과의 동침을 서슴지 않았던 선동정치인들과는 유가 달랐다. 그는 국가안보가 있고서야 정치게임도 있을 수 있음을 꿰뚫어보고 정치를 했다. 그러나 좌익과 뒤엉켜 권력 추구에 여념이 없던 1970-80년대 이 나라 정치판에서 이철승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내몰렸다. 학계에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자 김동길 연세대 교수 같은 인사들이 있다.
 
 
  김대중과 김영삼
 
김영삼·김대중씨에게 ‘민주화운동’은 권력쟁취를 위한 것이었기에 1987년 6·29 선언 후 서로 갈라섰다. 1987년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서 고개를 돌린 두 사람.
  한국의 ‘민주화투쟁’으로서의 민주화운동은 권력획득을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김대중은 일찍부터 명확한 신념 위에서 좌경 행보를 보였다. 1973년 일본에서 북한의 대남공작 전위대인 조총련 내의 ‘베트콩’파가 주도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오기도 했다. 1985년에는 이 철 의원을 같은 좌파로 오인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설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대중은 좌익세력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불리를 보완하면서 전통 보수 야당을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도가 애매한 정당으로 탄생시켰다. 평민당으로 시작된 그의 당은 좌익세력의 신분 세탁소 역할을 하여 좌익세력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이 좌익세력을 품어서 엉켜 돌아가기는 경쟁하는 비좌파 선동 정치인 김영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치열한 권력욕 이외에는 사실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던 김영삼은 좌경세력과의 연합을 두고도 김대중과 경쟁했다.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키고 김대중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에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속내평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근태와 민족민주혁명론
 
1988년 7월 12일 열린 ‘양심수전원석방 수배해제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 김영삼·김대중씨와 함께 김근태(오른쪽 끝)도 앉아 있다.
  한편 좌파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불리는 김근태는 ‘민주화투쟁’ 내 혁명세력의 정체와 선동 정치인과의 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김근태는 1970년대부터 경인지역에서 육체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했고, 1983년에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규합하여 혁명운동 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만들었다.
 
  그는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남한에서의 당면혁명을 민족민주혁명(NDR)으로 규정하는 일을 선도했다. 김근태의 민족민주혁명론은 대학가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접목되었으며, 후일 운동권 학생들은 자기들이 실현하려는 당면혁명을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정립했다.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이란 북한이 1970년대부터 남한에서 일으킬 혁명으로 제시해 온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과 내용이 동일한 것이다. 단지 한국의 법집행기관과 대중을 기만하기 위하여 북한이 사용한 ‘인민’을 ‘민중’으로 바꿨을 뿐이다. 혁명운동권 구성원에게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중간단계의 혁명이다.
 
  김근태는 그후 반(半)합법 운동단체들을 만들어 이끌면서 투옥을 거듭하다가 김대중의 대선운동을 하면서 그의 공천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면서도 자신의 과거 혁명운동에 대한 반성을 말하거나 사상전향을 선언한 바 없다. 그리고 반(反)대한민국 활동을 제도권 내에서 활발히 벌였다. 이 점은 김근태의 동지들은 물론 후배인 386 학생운동권 출신 정치인들과 시민운동가들도 대동소이했다.
 
  이와 같이 ‘민주화운동’은 제도권 정치 엘리트들과 재야의 좌익세력들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박정희의 발전국가 세력에 비해 미약한 각자의 세불리를 보충하기 위한 연합 즉 통일전선 투쟁이었다. 이런 ‘민주화운동’ 세력은 10년간의 좌파정부를 거치면서 더욱 장성하여 현재 여야에 두루 걸쳐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화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박정희를 위시한 산업화와 국가안보에만 열중한 ‘부국강병’ 세력이 이룬 성취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진전을 실제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람시의 진지전
 
  이 나라는 사상적으로 좌경화된 상태다. 그람시의 진지전이 성공했다. 적어도 말로 하고 펜대를 굴리는 분야들 모두에서 무정부적이고 해체적이고 전복적이다. 그나마 다수 언론은 우리 눈에 보이므로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분야에서 벌어져 온 해악은 잘 알지 못한다. 전교조, 노동계, 문화계, 이른바 시민운동계, 법조계 일각 등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상태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1960-70년대 구미의 반(反)문화혁명 열풍이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한창 벌어지고 있다. 전체주의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이 먹혀들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상 최악이다.
 
  결국 학계와 언론에서 이런 좌익세력, 좌경 리버럴, 그들을 품은 선동정치 세력 즉 그들이 자처하는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을 ‘진보’ 세력이라고 불러주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사실이 들어설 수 없는 사회와 나라는 결코 세상에서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수 대 진보’라는 허위의 프레임에서는 촛불시위에 올라타서 토해 내는 혁명의 광언(狂言)들은 분석·비판되지 않는다. 성역이 돼 왔다. 지구상의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체제 대립 구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진보고 전체주의가 반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자유민주적 건국 세력과 자유민주적 부국강병 세력이 진보고, 좌익의 숙주 역할을 했고 한국형 국가혁신 체계를 해체함으로써 IMF 사태를 초래한 ‘해체 세력’, 국부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북한 김정일과 연방제 추구를 서약한 ‘야합 세력’, 국가보안법 해체를 추구했고 한사코 북한을 변호해 온 북한 ‘변호인 세력’들은 반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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