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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근대의 희로애락 ‘유행가’

“황야(荒野)를 달리는 인생아. 너 가는 곳 어대냐”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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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가는 근대의 표정… 우리 민족의 진솔한 목소리
⊙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 한국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 종로2가에 있던 ‘조선 축음기 상회’ 모습.
  유행가는 근대의 표정이다. 그 표정에는 사랑, 이별, 슬픔, 망향 등 원초적 감정과 나라 잃은 설움이 묻어 있다. 식민지 격동의 시대를 산 우리 민족의 진솔한 목소리다. 유행가가 본격화되는 과정에 민요와 동요, 가곡도 한국 가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고산(新高山)이 우르르 기동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舊高山) 큰 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민요 ‘신고산 타령’ 중에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윤극영의 ‘반달’ 중에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조두남의 ‘선구자’ 중에서)

 
  유행가의 확산은 일본 레코드 자본의 국내 상륙과 관련이 깊다. 1907년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원반(圓盤) 레코드 〈양산도〉를 발매한 것이 국내 최초다. 당시 레코드는 ‘소리판’, 축음기는 ‘유성기’라 불렸다. 1920~30년대 레코드계 스타는 당대 명창이던 송만갑·이동백·정정렬·김창룡·김창환이다. 다섯 명을 ‘국창(國唱)’이라 불렀다.
 
  1925년 처음으로 본격적인 유행가가 나왔다. 채규엽(蔡奎燁)이 부른 ‘봄노래’가 시초였다. 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일본의 콜럼비아 회사가 서울에 지점을 내고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정사(情死) 사건’으로 유명한 윤심덕(尹心悳)이 1926년에 부른 ‘사의 찬미’는 부유층의 전유물인 레코드를 일반에 널리 보급시켰다. ‘사의 찬미’는 한국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인이 최초로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는 ‘황성옛터’다. 1928년 발매될 당시 곡명은 ‘황성의 적(跡)’. 빅타 레코드에서 출시, 순식간에 5만 장이 판매됐다고 전한다. 이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李愛利秀)는 ‘민족의 연인’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오노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 피고 새 우는 이 봄을 노래하자.(‘봄노래’ 중에서)
 
  광막(曠寞)한 황야(荒野)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대냐.(‘사의 찬미’ 중에서)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황성옛터’ 중에서)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8·15까지는 가요의 암흑기다. 전쟁에 반하는 노래는 부를 수 없었고, 경쾌한 리듬의 멜로디도 전쟁의욕 저하를 이유로 배제됐다.
 
  잡지 《사행공론》 1938년 9월호에 실린 〈조선 유행가의 변천〉은 시인 이하윤(異河潤)이 썼다. 당시 이하윤은 콜럼비아 레코드의 문예부장이었다. 이 글은 초창기 한국 가요를 설명하는 귀중한 자료다.
 
 
  〈조선 유행가의 변천〉 대중가요 소고
  이하윤(異河潤)
 
일제 때 간행된 잡지 《사해공론》 1938년 9월호 표지(왼쪽).
《사해공론》에 실린 이하윤의 〈조선 유행가의 변천〉.
  유행가라고 하면 누구나 레코드를 연상할 만치 그 관계가 깊다. 그러나 우리가 유행가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민요나 잡가, 속요 등과 연락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다른 일방으로 창가 혹은 동요의 유행을 더듬어 상고(想考)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생각한다.
 
  ‘학도야~’ 하는, 또는 ‘공부할 날 많다 하고~’ 등으로 시작되는 ‘근학가(勤學歌)’라든가, ‘열차가’ ‘축구가’ ‘망향가’ ‘관동 8경가’류의 창가, 그리고 서양가요의 번역, 예(例)하면 ‘매기의 노래’(매기의 추억), ‘클레멘트의 노래’ 또 서과서(書科書)로부터 퍼져 나온 ‘카나리아의 노래’ 등은 ‘카츄샤’ ‘장한몽(長恨夢)’ ‘이 풍진 세상을’ ‘지난 엿새 동안~’ 등과 시기를 전후하야 그 유행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동요가 유행하던 그 시대에는 지금 있는 것 같은 유행가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야 윤극영 작곡의 ‘푸른 하늘 은하수’ 하는 ‘반달’을 위시하여 ‘봄 편지’ ‘오빠생각’ 등의 압도적 유행은 여기 특기할 만하며 따라서 그 당시에는 동요단체의 조직, 동요집 출판, 동요 레코드의 제작 등이 왕성하였으며 뒤를 이어 인기를 잠시 집중시킨 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가요 레코드라 하겠다. 정사(情死)를 앞두고 ‘다뉴브 왈츠곡’에 작사·취입한 ‘사(死)의 찬미’가 한동안 유행계의 물의를 일으킨 기억도 너무 또렷하다.
 
김우진과 윤심덕. 국내 최초의 성악가인 윤심덕과 극작가 겸 연극운동가 김우진의 비극스토리는 당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운항하던 관부 연락선(德壽丸)에서 투신했다.
  이렇게 레코드 예술이 진전됨에 따라 ○창(○唱, 판독불가·편집자주)이라는 데서 소위 유행가란 명목으로 ‘낙화유수’니 ‘세 동무’니 ‘암로(暗路)’니 ‘봄노래’니 ‘방랑가’ ‘오동나무’ 등 아직도 귀에 새로운 가요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이 방랑을 노래한 것이었고 ‘봄노래’만이 비교적 씩씩한 기상을 띤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그 대체적 경향이 역시 창가의 범주를 확실히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만은 사실이겠으며 더구나 편곡, 그 반주 등은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리가 있다. 그러자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부른 ‘황성(荒城)의 적(跡)’은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새로운 ‘쇼크’를 주어 방방곡곡 청춘남녀의 입에서 입으로 그 유행을 용(踊)하게 되니, 아직까지 채규엽, 강석연(姜石燕), 이애리수, 이정숙(李貞淑) 등 몇 사람 못 되는 레코드 가수의 수효가 늘고 작곡하는 사람이 일가를 이루게 되고 회사 측으로서도 한층 이 방면에 새로운 주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영화와 유행가와의 밀접한 관계는 실로 오늘에 있어서 세계적 현상이지만 다른 의미에 있어 조선의 유행가 초창기에도 그 가수나 또는 주제가적 성질로 보거나 ○○(판독불가·편집자주) 하나인바 실례가 연극과 영화에서 이를 분리하지 못한 것이 증명된다. 물론 여기 대하여는 따로 논해야 할 한 가지 과제에 틀림없는 것이다.(중략)
 
  이미 일부의 문인이 하여튼 이 방면 작사의 붓을 대게 되었고 또 문단과 악단에서 이 문제가 약간 논란이 되어온 결과 오늘까지의 유행가에서 많은 진보의 자취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나머지 다른 한 가지 경향은 ‘도(島)の 양(孃)’ 이후 ‘독도의 정한(情恨)’ ‘애상곡’과 같은 작품의 출현이다. 이리하야 작곡에 있어서는 이고범(李孤帆), 김안서(金岸曙), 유도순(劉道順) 그리고 필자가 비교적 전문 삼은 듯한 감이 있었고 작자로는 전수린(全壽麟), 김영환(金永煥), 김교성(金敎聲), 전기현(全基玹), 김준영(金駿泳), 이면상(李冕相) 제씨를 초기의 공헌자로 이 자리에 예거치 않을 수 없다.
 
이난영의 불후의 명작 〈목포의 눈물〉 앨범 커버.
  ‘목포의 눈물’이 역시 뒤를 이어 유행가계를 풍성하게 될 때에는 빅타-콜럼비아만의 무대가 아니었고 이경설(李景雪), 김용환 등을 가진 폴리도르(Polydor레코드·편집자주)와 ‘목포의 눈물’의 가희(佳姬) 이난영(李蘭影)을 끌어간 오케(Okeh레코드·편집자주)가 서로 눈을 붉혀가며 다투어 그 진용을 꾸미기에 전력을 다하게 됐다.
 
  작시(作詩)의 작곡에 그리고 신(新)가수 발굴에 그들은 과연 전지(戰地)에 있는 병사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 활약하는 작시에 박영호(朴英鎬), 작곡가에 손목인(孫牧人), 김해송(金海松) 등 쟁쟁한 현역을 일일이 열거키 어려울 만치 많은 포옹하게 된 것이다.
 
  ‘처녀 총각’이 신민요에 속하는 유행가라면, 선우일선이 부른 ‘꽃을 잡고’도 신민요라고 부르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소위 신민요란 어떠한 것을 말하느냐. 유행가란 어떤 것이냐에 대한 이상으로 여기엔 이론도 많을 것이요, 또 장황한 설명이 없이는 그 뜻을 밝히기 힘들 것이로되 막연하나마 일언으로써 말하자면 고유의 민요성을 띤 유행가라고 해두는 수밖에 없다.
 
  다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선의 유행가만을 분리해 가지고 그 변천 내지 발전상을 말할 수는 없다. 그중에서도 ‘酒は淚か’(술은 눈물인가), ‘丘を越えて’(언덕을 넘어), ‘港の雨’(항구의 눈물), ‘哀しい夜’(슬픈 밤), ‘無情の夢’(무정의 꿈), ‘二人は若ぃ’(우리 둘은 젊은이) 등의 유행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제작된 유행가 이상으로 유행하였고 또 감명 깊은 그것들이 아니면 아니다. 과연 고가정남(古賀政南), 강구야시(江口夜詩) 대관우이(大關祐而) 같은 작곡가는 반도(半島) 작곡가의 사실상 선배요, 그들에게 끼쳐준바 영향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 하겠다. 오늘에 와서는 우후죽순같이 다시 일어서도 유행가의 생산 과잉적 현상은 면(免)할 수 없다. 침체기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 개척한 경향에서 또 침체로 또 그 모방적 현상의 유행을 따라서 이렇게 변천하는 동안에 시대는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아무튼 유행가의 유행시기가 레코드 회사의 범주와 같이 매우 짧아진 것만은 세계적 경향이요 필연적 귀결이다. 따라서 어느 모로든지 조선적 내지 독창적 그러나 그것이 대중적인 특색이 없이는 레코드판의 음악적 향상에 따라서 서양 재즈에 나아가서는 명곡에 그 세력을 빼앗길 우려가 적지 아니하다. 팬의 청각이 살찌고 한계가 넓어지고 상업술이 발달된 오늘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노래를 어느 가수가 어떠한 매력으로 그 노래를 부르게 해야 될런지 제조자 측의 뇌심(惱心)하는 바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는 실로 수천 종의 유행가가 제작되어 혹은 사라지고 혹은 나타나고 있는 동안에 몇 가지의 가작(佳作)을 남김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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