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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근대의 상징 ‘철도’

“우렁찬 기적, 딴 세상 절로 이뤘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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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는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괴물’이자 자본주의의 기호
⊙ 구한말 철도부설 사업은 일본과 미국 등 열강들의 먹잇감
1910년대 열차모습. 사진은 익산역 개통당시의 증기기관차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꼭 100년이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그해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한국소설의 기원이 된 《무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조연현)이요,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은 ‘시대적인 거작(巨作)’(백철)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정》의 주인공은 소설 속 이형식이나 박영채, 김선형이 아니다. 바로 기차다.
 
  기차를 통해 기연(奇緣)이 이어지고 과거와 오버랩되며 반전이 일어난다. 문학평론가 김철은 《무정》에 등장하는 ‘기차’야말로 이 소설의 숨은 주인공이라고 진단한다.
 
  당대 기차, 엄밀히 말해 증기기관차는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괴물’이자 자본주의의 기호다. 요란한 굉음과 길게 뻗은 철로, 거대한 잿빛 연기를 뿜으며 육중한 몸을 일으키는 기차만큼 당대인들을 놀라게 만든 물건은 없었다. 육당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1908)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汽笛) 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 내외 친소(親疎) 다 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 최남선의 〈경부철도가〉 중에서

 
경인선 철도 개통식 장면. 노량진 역이다.

  〈경부철도가〉는 문명개화가 가져온 ‘철도 쇼크’를 노래한 것으로 기차의 빠르기를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라고 읊은 점이 흥미롭다. 기차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 밖 모습을 통해 내면을 성찰케 하는 ‘풍경의 발견’을 가져다주었다. 또 기차시간의 출발·도착을 의미하는 ‘시간의 표준화’, 한반도를 가로질러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이어진 ‘공간의 정복화’가 가능해진 점도 기차를 통해서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는 1929년 월간잡지 《학생》 9월호와 10월호에 걸쳐 실렸다. 철도가 가져다준 20세기 문명의 변화를 담은 글이다. 각국의 이해관계로 고단했던 경인선 개통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사실 구한말 조선에서 철도사업은 열강들의 먹잇감이었다. 중국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일본의 야욕이 철도부설에 담겨 있었다.
 
  국내 최초 철도인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첫 삽을 떴으나 자금난을 겪자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인천항만공사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일본이 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 모스가 자금난을 겪게 됐다고 한다.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현대식 표기로 고쳤다.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
  최진순(崔瑨淳)
 
  1. 서언
 
  교통기관의 발달로 인문의 진보와 함께 급격한 발전을 하여 육지로 해양으로 항공으로 천만리 장정을 단시간에 왕래하게 된 것은 참으로 경찬할 현상이다. 더욱 지구의 넓은 육지면을 거미줄과 같이 늘여놓은 철도망의 총연장은 160천(粁·킬로미터)이다. 즉 적도 장(長)의 40배가량이나 된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이 비교적 단기간 즉 1세기 이내에 된 것이다.
 
 
  2. 일본 철도 연혁
 
1929년 9월호 《학생》 표지.
  일본에서 철도부설(敷設) 계획은 명치(明治) 이전부터 발단되었다. 경응(慶應) 3년(서기 1867년) 12월 23일에 당시 덕천(德川)막부 노중(老中·직명) 소립원일피○(小笠原壹○)씨가 미국공사관부(附) 서기관 호루멘 씨에게 교섭하여 미국인의 손을 빌려 경빈(京濱·게이힌-편집자) 간 철도선로 부설계획을 하려 하였으나 마침 그때에 덕천막부가 정권을 봉환(奉還)하게 되어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었다. 그 후 명치 2년(서기 1869년)에 정부는 동경과 경도(京都·교토-편집자)~대판(大阪·오사카-편집자) 간 급(及) 오우(奧羽)로부터 산양(山陽)·산음(山陰)·서해 제도(諸道)에 이르는 철도에 대하여 결의하고 우선 동경과 대판 병고(兵庫) 간의 간선과 동경~횡빈(橫濱·요코하마-편집자) 간의 지선급 비파호(琵琶湖·비와코-편집자)로부터 돈하항(敦賀港·쓰루가항-편집자)에 달(達)하는 노선을 예정하고 명치 2년 10월에 먼저 경빈 간에 경비 50만냥으로 경빈 간 상인에게 위탁하여 부설 경영하려고 하였으나 상인 등은 위험을 느껴 이에 불응함으로 부득이 정부는 이달종성(伊達宗城·다테 무네나리-편집자), 대외중신(大喂重信·오오쿠마 시게노부-편집자),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편집자) 등 제씨로부터 이 사업을 제임(提任)케 하고, 또 외채 100만 방(磅·파운드-편집자)을 모집하여 사업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명치 3년 3월에 정부는 민부대장(民部大藏) 양성(兩省)내에 철도계를 두고 상야경범(上野景範·우에노 가게노리-편집자)으로 이 사무를 총리하게 하고 영국인 ‘에드몬드 모렐’ 씨가 공사 간독장(看督長)이 되어 동경 정거장의 위치를 정하고 4년 4월 3일부터 선로측량에 착수하고 동 12일에 석적(汐笛) 근방부터 공사를 착공하고 또 대판, 신호(神戶·고베-편집자) 양처(兩處)에 출장소를 두어 관서철도국이라고 칭하고 8월에 우선, 신호~대판 간 선로측량에 착수하고 동 11월에 본선공사를 기공하여 동서가 상응하여 공사를 급속히 진행시켰다.
 
  (중략)
 
  명치 22년도 말에는 개업선 전장이 1136리(哩·mile을 의미-편집자)에 달하였다. 더욱 모든 문화와 경제계도 익익왕성하여 철도공사도 일층 완성 개량되고 영업시간도 매우 신속하게 됐다. 명치 43년에 국가 백년지계로 약 2억3000만을 써서 현재 선로를 광궤(廣軌)철도로 개축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후 점차 개량 증설하여 8484리란 거장(巨長)한 선로를 유(有)하게 되어 동양에서는 제1일의 철도망을 가지게 됐다. 연(然)이나 아직도 구미 각국에 비하여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4. 조선 철도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는 1929년 월간잡지 《학생》 9월호와 10월호에 실렸다.
  창설시대
 
  가. 철도창설 이전 조선의 교통 : 사회가 진보되지 못하고 민족이 미개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보답(步踏)하여 생(生)한 경로와 천연으로 항행할 수 있는 하천이 유일한 교통운수의 기관이다. 조선에서는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방으로 도로의 계통이 있었다.
 
  제1로(路) 《서북(西北)》 경성~의성 간 이정범(里程凡) 1086리(이전 10리가 지금 1리). 중요한 경유지는 고양(高陽), 개성, 황주, 평양, 박천, 의주.
 
  제2로 《동북(東北)》 경성~경흥 간 이정범 2414리. 중요한 경유지 수유리, 김화, 수양,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종성, 부령, 무산, 회령, 은성.
 
  제3로 《동(東)》 경성~평해 간 범(凡) 810리. 중요 경유지는 망우리, 양주, 양근, 지평, 원주, 강릉, 울진.
 
  제4로 《동남(東南)》 경성~부산 간 범 907리. 중요 경유지는 한강, 용인, 충주, 문경, 대구, 청도, 양산.
 
  제5로 《남(南)》 경성~제주 간 범 2016리(해로 970리). 중요 경유지 동작진(시흥), 과천, 수원, 천안, 공주, 약산, 여산, 정읍, 장성, 영암, 해남.
 
  제6로 《서(西)》 경성~강화 간 범 130리. 중요 경유지는 양화도, 양천, 김포, 통진, 강화.

 
춘원 이광수.
  이외에도 간선이 있고, 또 지선이 유하며 도중 중요한 간소(簡所)에는 역(驛), 참(站), 원(院) 등의 설비가 유하고 또 하천에는 도선(渡船)의 설비가 유하였다.
 
  교통운수기관으로는 물자의 운반용에는 우(牛), 마(馬), 여라(驢騾·노새와 당나귀-편집자), 대차(大車), 경차이었고, 승용으로는 우마, 가마, 보교, 남여(籃輿·벼슬아치가 타는 작은 가마-편집자), 초헌(軺軒·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편집자) 등이 유하였으나 대개는 보행으로 1일 수 리의 길을 왕래함에 불과하였다.
 
  나. 경인철도의 개통 : 서기 1895년(명치 28년) 1월 청국(淸國)과 전운이 분분할 때에 일본 내무대신 정상형(井上馨·이노우에 가오루-편집자)은 주한공사가 되어 와서 한국정부에 대하여 일찍 경인철도특허계약에 관하여 체결한 잠정합동조관(條款)의 세목을 결정하려고 그 교섭을 시작하였으나 용이히 해결을 짓지 못하였다. 전년 말부터 경인(京仁), 경부(京釜) 양 철도선로를 답사한 체신기사 선석공(仙石貢·센고쿠 미쓰구-편집자) 일행의 보고에 의하여 일본 정부는 양 철도를 분리하여 우선 경인철도 부설에 관한 협정을 지으려고 다시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때 구미 제국은 여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드디어 5월 4일에 영, 미, 독, 러 4국 대표를 외부대신 김충식(金充植)씨에게 공문을 보내어 ‘철도 등의 이권을 전혀 일국(一國)에만 허함이 한국 급 기타 각국 상민에게 불리하다’는 경고가 있어 이 교섭은 여의히 되지 못하였다.
 
  미국인 ‘제임스 알 모스(James R. Morse-편집자)’가 구(舊) 한국정부에 대하여 반도 전부 간선철도를 청부(請負)하려고 미국공사를 통하여 교섭하였으나 한국정부와 일본과의 잠정조관 체결이 성립되어 모스는 부득이 이 교섭을 중지하고 전후 사세(事勢)만 엿보고 있던 중 철도부설권 확정에 관한 교섭이 지연되고 더욱 한(韓)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함을 간파하고 다시 특허운동을 한 결과, 구 한국정부는 서기 1896년(명치 29년) 3월 29일부로 경인간 철도부설의 특허를 모스에게 주었다.
 
  이 계약은 본(本)철도 기공기를 특허한 일자로부터 12개월 이내로 하고, 기공 후 3년간 준공하기로 하여, 만약 여기 위반할 시는 모든 계약은 무효라고 규정하였으므로 모스는 곧 회사를 조직하고 측량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이와 같이 모든 교섭이 실패에 돌아가고 미국인 모스에게 철도부설권이 가게됨에 불만불평을 가지었으나 어이할 수 없었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그해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모스는 측량한 결과 전선(全線)연장이 26리여(哩餘)이요, 선로는 약 1개년, 한강교량은 2개년을 요(要)할 예산으로 인천~경성 간 공사 기공식을 서기 1897년 3월 22일에 거행하고 실지(實地)에 착수하였다. 연(然)이나 모스는 자금조달에 곤란이 생하였다. 미국 자본가들은 너무도 원격(遠隔)한 곳에 투자하기를 싫어하여 모스는 점점 곤란한 입장에 입(立)하여 부득이 부설권 양도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당시 경부철도부설위원 섭택영일(澁澤榮一·시부사와 에이이치-편집자) 등은 외무대신 대외중신의 찬성을 얻어 경인철도를 양수(讓受)하기를 결정하고 교섭을 진행하여 경인철도 인수조합을 조직하고 서기 1897년 5월에 횡빈에서 모스와 양수계약을 조인하고 계약금 5만불을 주었다. 그 후 조합에서는 공학박사 선석공을 감독기사장으로 하고, 모든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모스는 6월 13일에 돌연히 계약금 증가를 요구하여 만약 불연(不然)이면 계약금 외 상당한 부상금을 지불하고 계약해제를 요구하였다. 조합은 정부와 여러 번 협의한 결과 해(該)철도 외 부속물 등으로 제보(提保)도 하고 횡빈정금(正金)은행으로 100만원 해관(偕款)계약을 성립시키고 계약금 증가 요구를 철회시켰다.
 
  이와 같이 경인철도 공사는 진행되었으나 정거장 설비와 선로의 구배(勾配) 기타 공사상에 모스와 의견이 충돌된 분규가 일어나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었다가 겨우 해결을 지었다. 익년 3월에 모스는 새로 불국(佛國・프랑스-편집자) 신지게트(신디케이트-편집자) 대표 크리고노의 300만원으로 본 철도를 양수하겠다는 말을 듣고 조합에 대하여 전매(轉賣)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모스로부터 시시(時時)로 추가 증불(增拂)의 요구를 받으며 공사 불완전을 염려하는 조합 측에서는 다시 모스의 교섭을 문(聞)하고 미준공 현상대로 매수코저 하여 서기 1899년 12월에 모스와 계약을 확정하고 외무성으로 한국정부에 대하여 이 교섭의 승인을 얻어 서기 1899년 3월 29일 170만2452원을 모스에게 지불하고 경인철도는 완전히 모스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경인철도 인수조합은 합자회사로 변경하고 금(金)자금을 72만5000원으로 하였다. 모스가 한 공사에 대하여 모든 결함을 수선 개량하고 일층 속히 공사를 진행시켜 서기 1899년 9월 13일에 인천~영등포 간 공사가 완료되어 동월 18일부터 동구 간 20리에 가영업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조선에서 철도개통의 효시이다. 더욱 동년 동월 30일부터 경성까지의 공사를 진행시켜 서기 1900년 6월말에 한강교량을 준공하고 궤조(軌條·레일-편집자) 인연(引延·잡아당겨 늘임-편집자)도 완성되어 동년 7월 8일에 경인 간 25리를 개통되어 경인선이 완성되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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