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갑식의 주유천하 〈9〉 번암 채제공

책임총리의 도(道)를 번암 채제공에게 묻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수원 화성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조선사(朝鮮史) 최대의 미스터리가 임진왜란(1592년)·정유재란(1597년)과 정묘호란(1627년)·병자호란(1636년)이다. 조선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있던 일본과 청(淸)을 44년 동안 맞아 네 차례 싸웠다. 일본과의 7년 전쟁에서 버텼던 조선은 청의 두 차례 침략에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유능한 재상(宰相)의 유무(有無)가 아니었을까 싶다. 선조나 인조 모두 명군(明君)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군주였지만 특이하게도 선조시대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정승과 판서들이 잇따라 배출됐다. 그것이 의심 많은 임금 선조의 복(福)이었는지 모른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 3명이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에 가깝다. 조선시대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에는 여지없이 쟁쟁한 재상과 판서가 왕들을 보필했기 때문이다. 태종 때의 조준·민제·하륜, 세종 때의 황희·맹사성·최윤덕·황보인, 세조 때의 한명회·권람 등이 그들이다.
 
 
  명재상의 십계명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退陣)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국무총리의 역할이 더욱 중해졌다. 그동안의 총리는 대통령의 ‘부하’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다는 의미밖에는 없었으나 이제는 국정을 통할할 책임(責任)이 더 중요하게 됐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 명재상들이 보인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공정한 국사(國事)처리다.
 
  둘째는 전란(戰亂)에 대한 준비다.
 
  셋째는 위기를 맞았을 때 흔들리는 국왕의 중심을 잡아 주는 일이다.
 
  넷째, 임금의 수모를 스스로 대신해 받는 일이다.
 
  다섯째,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고 그 한을 풀어 주는 것이다.
 
  여섯째, 청렴결백하게 공직을 마치는 것이다.
 
  일곱째, 임금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직(職)을 걸고 간언(諫言)하는 것이다.
 
  여덟째,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아홉째, 편중되지 않은 인사(人事)다.
 
  열째, 스스로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조선의 5대 명신
 
채제공을 모시는 상의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도로 옆에 서 있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5대 명신(名臣)으로 황희(黃喜)·류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채제공(蔡濟恭)·최명길(崔鳴吉)을 생각하는데 황희를 제외한 세 명의 재상들은 전란 때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류성룡·이원익과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그렇다. 채제공(1720~1799)은 다소 예외적인 인물이다.
 
  본관이 평강인 채제공은 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응일의 아들이자 효종 때 대제학을 지낸 채유후의 방계 5대손이다. 그가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다. 조선 최대의 야사집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열다섯 살 때 향시에 합격한 채제공이 23세에 대과에 응시하려 했으나 지필묵을 마련할 길이 없어 고생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채제공은 생각 끝에 명망 있는 정승 집을 찾았다. 채제공은 정승에게 말했다.
 
  “열다섯에 초시(初試)를 한 이후 대학(성균관)에서 7, 8년 정진하다가 한번 재주를 시험코자 하나 지필묵이 없어 도움을 청합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정승이 지필묵 한 짐을 하사했다. 그런데도 채제공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보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정승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채제공이 말했다.
 
  “소인이 비록 궁핍하나 선비에게 이 물건을 손수 지고 가게 하시렵니까?”
 
상의사의 전경이다. 이 근처에 화성(化城)중학교가 있다.
번암이 필생의 사업으로 쌓은 경기도 수원 화성(華城)과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다.
  놀란 정승이 사과하곤 하인을 시켜 보따리를 가져다 주게 했다. 채제공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일어서는데 옷 속에서 개 가죽이 뚝 떨어졌다. 조선시대 가난한 상민들은 솜을 살 수 없어 개가죽을 내의로 사용했다. 채제공은 낯빛이 변하지도 않은 채 하인에게 말했다.
 
  “구피(狗皮)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매어 주게.”
 
  이 모습을 본 정승은 속으로 감탄했다. ‘가히 정승감이로다.’ 과연 정승의 예상대로 채제공은 1743년 문과 정시에 급제했다.
 
  채제공은 충청남도 홍주, 지금의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후손들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인지 청양읍에는 상의사(尙義祠)라는 사당만 있을 뿐 유적지는 변변한 게 없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에 있으며 그의 유물은 그가 총력을 기울여 완성한 수원 화성 부근 화성역사박물관에 기증됐다.
 
  채제공은 숙종 46년(1720년)에 태어나 영조 11년(1735년) 향시에 급제하고 영조 19년인 174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영조의 특명으로 29세에 한림 벼슬을 받았고 34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돼 균역법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변방을 방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훗날의 분쟁을 예견했다
 
수원성역의궤도.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을 섬겼다. 때는 당쟁(黨爭)이 국가의 기틀을 흔들 만큼 거센 시절이었다. 채제공이 왜 재상으로서 유능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을 짚어 본다. 첫째, 채제공은 왕조의 기틀을 흔들 수 있는, 즉 훗날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결정을 한사코 반대했다. 다른 신하들과 다른 점이었다.
 
  둘째, 채제공은 왕의 뜻이 바른 것이라면 정확히 받들어 시행했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수원 화성(華城)을 짓는 공사에서 그는 최고 책임자가 됐다. 한양을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수원 화성 건설은 채제공의 목표이기도 했으며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숙종은 정비 인현왕후 민씨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 희빈 장옥정에게서 왕자 균을 얻었는데 그가 경종(景宗)이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궁인인 최씨에게서 아들 금을 보았는데 그가 영조다. 장희빈이 과욕을 부리다 숙청당하자 당장 세자였던 균(경종)의 폐세자 문제가 이슈화됐다. 1720년 숙종이 죽자 균이 왕위에 올랐다.
 
  병약한 경종은 연잉군 금을 왕세제로 세웠다. 당연히 연잉군은 경종 지지파들의 과녁이 됐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수없이 독살 시도가 있었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기도 했는데 연잉군은 왕대비 인원왕후의 치마 속에 숨어 자객의 칼날을 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이 된 영조는 매사에 엄격했다.
 
  이런 영조에게 어릴 적부터 똑똑했던 아들 선(사도세자)은 귀여움의 대상이었으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선은 기행(奇行)을 반복했다. 험담과 무고가 난무한 데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아버지 영조의 책망에 ‘격간도동(膈間挑動)’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에 걸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 선의 자질과 병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자는 천자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으나 10여세 후에는 점차 학문을 태만히 하고 대리청정한 이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이 낫기를 바랐으나 정축년(1757년) 이후부터 증세가 더욱 심해져 병이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 문득 후회하곤 했다.
 
  영조는 이런 왕자를 두고 볼 수 없었다. 1758년 영조는 세자를 폐하려고 비망기의 초를 내렸다. 이때 온몸을 던져 비망기의 철회를 요구한 이가 바로 도승지였던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은 비망기가 내려진 이튿날 창경궁 함인정에 행차한 영조를 찾아가 계단에 엎드린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가 어제 저녁에 내리신 초책에 기주(記註)할 만한 사실을 써 넣으라는 명을 보았사온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조처를 내리십니까? 이를 쓰지 말도록 하면 왕명을 어기는 것이요, 쓰도록 하면 이것은 신하의 직분상 감히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문서를 돌려드릴까 합니다.”
 
  처음에 영조는 노한 기색이었으나 비망기를 철회하며 “도승지의 말이 옳다. 가납하겠노라”라고 답했다. 자신은 비록 주변 신하들의 눈치를 보아 아들을 폐하려 했으나 아들을 살리려는 채제공의 충성에 영조는 훗날 손자 정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채제공은 진실로 나의 사심(私心) 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다.

 
  정약용이 채제공을 기리며 쓴 《번옹유사》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영조께서 제 손을 잡고 해 주시는 말씀이 ‘나와 너로 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 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영조)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희대의 불운한 천재였던 다산 정약용은 채제공을 흠모했음인지 〈번옹화상찬〉에서 이런 찬양시를 바치기도 한다.
 
  바라보면 근엄해 무섭게도 보이지만 대면해 보면 유화하여 뜻이 잘도 통하네 / 고요히 계실 때야 쌓아둔 옥이나 물에 잠긴 구슬 같으나 움직였다면 산이 울리고 바다가 진동하도다 / 거센 파도 휘몰아쳐도 부서지지 않고 돌 무더기 짓눌려도 닳지를 않네 / 아무리 짧고 길며 작고 큰 창날이 겨누어도 정승으로 발탁됨을 막지 못했네 / 그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천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었지만 /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마음속에 두질 않았네 /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벼슬을 떠나서도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를 궁리했다
 
수원 화성 창룡문 근처에 있는 연무대는 군사를 조련하는 곳이다.
  이런 채제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762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숨지고 말았다. 이 일이 벌어졌을 때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간 터여서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1767년 관직에 복귀한 채제공은 1772년 세손우빈객·공시당상을 했다. 세손, 즉 정조의 보필과 훈육 책임을 맡은 것이다.
 
  영조 말년인 1775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손 산은 1776년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로 등극했다. 왕에 오른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무고(誣告)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책임자는 채제공이었다. 당시 정조의 오른팔은 ‘세도(勢道)’라는 말을 낳은 홍국영과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은 홍국영이 몰락할 때 함께 탄핵받아 8년간 서울 명덕산, 즉 지금의 수락산에서 칩거했다. 이 오랜 기간 그는 절망하지 않고 붕당정치의 타파를 위한 정책을 구상했다. 마침내 1788년 정조는 친서를 내려 그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6조 진언’을 올렸다.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세울 것, 둘째 당론을 없앨 것, 셋째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넷째 의리를 밝힐 것, 다섯째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여섯째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이었다. 6조 진언이 받아들여지면서 정조시대는 화려하게 꽃피웠다.
 
화성의 돈대는 대포를 설치할 수 있는 구조다.
  반계 유형원과 이수광에서 시작된 실학(實學)이 이익·홍대용·홍만성 등에 의해 정점을 이루며 서유구·정약용에게 이어졌다. 박지원·박제가·박세당 등은 북학파(北學派)로 조선 지성의 시야를 넓혔고 그 맥은 박규수·김옥균에게 전해졌다. 안정복·이긍익·한치윤·유득공은 조선사를 정립해 신채호가 등장할 토양이 됐다.
 
  학문에 관한 한 영조·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는 세종 시대에 버금가거나 혹은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유능한 왕 정조와 그를 보필한 채제공의 몫이라 할 수 있다. 1790년 채제공은 좌의정이 됐는데 공교롭게도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어 3년간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홀로 주관하게 됐다.
 
  당시 채제공이 칠십 평생 지었던 시문(詩文)을 정리해 《번암시문고》로 엮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 시문집에 대한 평을 겸해 서문(序文)을 써 주었다. 제왕이 신하의 문집에 서문을 짓고 친필로 써서 하사하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정조가 노(老)재상의 글솜씨를 찬미하고 인간됨을 칭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걸출한 기운 구사하며 필력도 굳세니
  초상화의 그대 모습 그대로 보는 듯하오
  거침없이 치달리는 곳은 큰 파도의 기세가 있고
  강개한 대목에는 감개하고 슬픈 소리 많아라
  북극의 풍운은 만년의 만남에 밝았고
  창강의 갈매기는 옛 맹약에 속했네
  호주(湖洲) 이후에는 그만한 후손이 있으니
  중국의 사안(謝安) 같은 재상 문장가가 나왔음을 다시 기뻐하노라

 
  여기서 호주는 채제공의 종고조인 채팽륜으로 문장가였다. 그 후손에 번암이 나왔음을 칭찬한 것이니 이런 영광도 없을 것이다.
 
 
  수원화성의 주역-정조와 채제공과 정약용
 
채제공이 쓴 수문규칙이다. 즉 경비병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채제공은 1793년 화성 건설을 위해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留守)가 된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을 샀다. “멀쩡한 한양을 놔두고 굳이 수원에 성을 쌓다니” 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젊은 정약용에게 성의 설계를 맡긴 것뿐 아니라 가장 큰 문제는 돌(石)로 성을 쌓는 문제였는데, 야사가 전한다.
 
  막대한 양의 돌을 구하는 일은 정조에게도 고민이었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모궁에 앉아 아버지에게 기도했다.
 
  “아버지, 단단한 석성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낭보(朗報)가 전해졌다. “전하, 돌맥을 찾았사옵니다. 수원에 돌맥이 있었사옵니다”라는 보고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수원 인근 숙지산·여기산·권동·팔달산에서 돌맥이 무더기로 나왔다. 숙지산에서 8만1110덩어리, 여기산에서 6만2400덩어리, 권동에서 3만2000덩어리, 팔달산에서도 1만3900덩어리가 발견됐는데, 채제공이 하루는 이런 기묘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전하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묘한 인연입니다.”
 
  채제공에 따르면 가장 큰 채석장이 된 숙지산은 숙지(熟知), 즉 깊이 안다는 뜻이다. 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더 놀라운 것은 숙지산과 여기산이 속한 곳이 공석면(空石面)이었던 것이다. 화성을 쌓느라 돌을 다 캐내 이제 돌이 없는 곳이 바로 공석면이다. 이 말에 정조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100년 전 화성을 방문한 독일 장교가 촬영한 사진이다.
  채제공의 세 번째 업적은 조선 상업사(商業史)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도고(都賈)를 폐지한 것이다. 도고란 독점적인 매점행위를 말한다. 그동안 조선은 정부에서 허가해 준 육의전 외에도 시민 도고가 난무해 상거래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약한 백성의 상거래는 거대한 도고상인들의 횡포에 짓눌려 왔다.
 
  채제공은 이런 악폐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고 정조가 받아들임으로써 조선 상업사는 일대 변혁을 이뤘다. 역사책에 나오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의 관료들은 대대로 사농공상이라 해 상업을 천시해 왔지만 경륜이 남다른 채제공은 상업 문제에도 깊숙이 개입해 백성들의 한을 풀어 준 것이다.
 
  이렇게 정조를 도왔던 채제공은 정조보다 1년 앞선 1799년 세상을 떴다. 정조는 최대의 예우와 최상의 대접을 해 가며 장례를 도왔다. 먼저 평생 번암 채제공의 친구로 형조판서와 홍문제학을 지냈던 당대의 문장가 해좌 정범조(丁範祖·1723~1801)에게 번암의 일대기를 정리한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정조는 채제공의 부음을 듣자 식사를 폐했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런가 하면 3월 28일 장례식에는 직접 뇌문을 지어 신하로 하여금 읽게 했다. 파란만장한 번암 채제공의 일생을 500여 글자로 정리한 뇌문은 지금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면 채제공의 묘 앞에 우뚝 서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사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서가에 가득한 문고(文稿)이니
  인쇄에 부쳐
  장차 오래 전하게 하려네
  친히 뇌문을 지으니
  오백여 말일세
  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
  나의 글에 부끄러움은 없네
  아들 홍원(弘遠)에게 이르노니
  선친 욕되게 말고 그대로 따르라.

 
  이 글은 ‘의정부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장용외사 사시(賜諡)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규장각 신하를 보내어 그 영전에 대신 영결을 고하게 하노라’라는 글로 120줄 480자이며 정조의 《홍재전서》에도 실렸다. 최상의 예우를 노신에게 바친 정조는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그의 르네상스는 미완이 되고 만다.
 
창룡문 일대의 넓은 벌판에 서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려는 정조와 채제공의 의지가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대동기문》에 또 다른 일화 한 편이 있다. 채제공이 죽은 후 정조는 아주 기발한 문제를 떠올렸다. 화부화(花復花), 즉 꽃이 다시 꽃으로 부활한다는 뜻이었다. 정조가 과거시험에 화부화라는 말을 과제(科題)로 냈다. 과연 정조의 예상대로 제대로 된 답을 써낸 선비들이 없는데 단 한 명이 정확히 의도를 짚었다.
 
  정조가 그 답안을 쓴 선비를 장원으로 뽑은 뒤 불러서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주었는가?”
 
  선비는 상경하던 길에 겪었던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경기도 용인을 지날 때 날이 저물어 하루 묵을 곳을 찾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자기 전, 노인이 선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의 제목은 ‘화부화’일 것이니 준비하시오.”
 
  선비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노인은 “굳이 풀이하자면 ‘꽃이 진 자리에 다시 피는 꽃’이라는 뜻이라오.”
 
  선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꽃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라오. 목화는 꽃이 피기도 하지만 꽃이 져서 솜이 되면 그게 또 다른 꽃처럼 보이지 않소?”
 
  그리고 과거장에서 선비는 노인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고 놀랐다.
 
  왕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그 노인의 생김새를 물었다.
 
  “얼굴이 길고 갸름하며 키는 훌쩍 컸습니다. 코도 컸고 입술은 두툼했습니다.”
 
  정조가 사람을 보내 선비가 묵었던 집을 찾았다. 현장을 확인한 관리는 “선비가 묵었다는 집은 없고 다만 무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전임 정승 채제공의 비석이 있었습니다.”
 
  정조가 감탄하며 말했다.
 
  “번암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조회 : 21191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영월에서 한달살기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