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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8〉 요승 신돈과 라스푸틴과 창녕 화왕산

“신돈과 라스푸틴도 최태민·최순실 부녀에 비하면 새 발의 피(血)”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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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돌이 수도사 라스푸틴, 최면술로 황후의 환심 사
⊙ 자기 제거하려던 수상 암살하고 전쟁터의 황제에게 작전 명령
⊙ 신돈에 대해 ‘근본 없는 요승’ ‘문수보살의 화신’ 평가 엇갈려
⊙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으로 개혁 시도, 최태민 일가는 권력 사유화
⊙ 《고려사》 속 신돈은 요망한 인물… 조선시대 기록이라 일방적일 수도
신돈이 태어난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에 단풍이 화려하다.
  지난 10월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역사적 인물이 두 명 있다. 고려시대의 승려 신돈(辛旽·?~1371)과 제정러시아 멸망을 앞당긴 요승(妖僧) 라스푸틴(G Rasputin·1869~1916)이다. 두 사람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을 41년 동안 둘러싸고 대(代)를 이어 대한민국을 농락한 최태민·최순실 부녀 때문이다.
 
  역사는 신돈을 두 가지로 평가한다. ‘실패한 개혁가’ 혹은 ‘권력만을 추구한 욕망에 사로잡힌 중’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몫이기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에 의해 사실과 다른 왜곡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때문에 신돈에 앞서 라스푸틴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본다.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꺼져가는 등불 같았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경제가 파탄 났다. 국민들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국민들은 ‘조국 방위의 성전(聖戰)’이라며 자신들을 전쟁터로 내몰며 이득을 챙긴 자본가와 정치가를 불신했다. 그들은 악(惡)의 정점을 황제라고 여겼다.
 
 
  말 훔치다 쫓겨난 후 떠돌이 수도사로 최면술 배워
 
제정러시아 멸망을 앞당긴 요승 라스푸틴.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농민이었다. 말을 훔치다 발각돼 마을에서 쫓겨난 후 그는 수도원을 전전하는 ‘떠돌이 수도사’가 됐다. 그의 종파는 최면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이비 종교였다. 그는 1904년 페테르부르크로 가 귀부인들을 신도(信徒)로 삼았다. 마침내 황후 알렉산드라마저 그에게 사로잡혔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사이에는 알렉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 모계 쪽으로 독일 왕가의 피가 섞였는데, 근친결혼이 유행했던 유럽 왕실은 유전적으로 혈우병을 달고 살았다. 황제와 황후는 작은 상처에도 고통받는 아들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때 라스푸틴이 최면술로 알렉세이의 병을 ‘치유’했다. 과학적으로 믿기 힘든 일이지만, 알렉세이는 이후 혈우병으로 고통받지 않았다. 라스푸틴이 황후에게 살아 있는 성자(聖者)가 된 순간이었다. 대가 센 황후는 심약한 황제가 고민할 때마다 라스푸틴에게 자문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이렇게 어울리면서 황제 부부와 라스푸틴은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1910년 무렵 라스푸틴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민심(民心)에도 황제 부부의 그에 대한 신뢰는 높아만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궁정(宮廷)에서 라스푸틴은 정중하고 소박했다.
 
 
  궁 안팎에서 달라진 라스푸틴
 
  그런 라스푸틴은 궁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돌변했다.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며 설교한 뒤 농락하는 짓을 반복한 것이다. 수상 스톨리핀은 그를 시베리아로 유배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라스푸틴을 철석같이 믿은 황후를 배경 삼았기 때문이다.
 
  1915년 가을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이 돼 전선(戰線)으로 나갔다. 라스푸틴은 임자 없는 제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수하(手下)를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에 앉히고,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을 밀어내기 위해 개각(改閣)을 반복했다. 장관들의 목숨과 정책 방향이 라스푸틴의 것이 된 것이었다.
 
  라스푸틴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이용한 게 ‘꿈’을 통한 ‘계시’였다. 그것을 라스푸틴은 황후를 통해 전선의 니콜라이 2세에게 전했다. 그것은 조언이 아니라 사실상 명령이었다. 상하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는데도 황제와 황후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후가 남편에게 전한 것은 이런 내용들이다.
 
  “우리의 친구(라스푸틴)가 걱정 말랍니다. 다 잘될 거라는군요.” “우리의 친구가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지 말라고 합니다. 손해가 더 클 거래요.”
 
 
  라스푸틴에 빠진 황제 일가, 주변의 만류도 일축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황후와 라스푸틴의 기묘한 관계를 조롱하는 벽보가 페테르부르크 거리에 나붙었다. 두 사람이 성관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심지어 둘이 독일과 결탁해 강화(講和)를 추진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보다 못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가 전쟁터까지 달려가 황제를 수도로 데려오려 했다.
 
  그때마다 황제는 ‘신께서 보낸 성자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다. 1916년 가을 국민들의 시위가 격해지고 군사들마저 동요했다. 황실과 귀족사회에서는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大公)을 옹립하려 했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의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이지 않는 한 황제를 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황제의 조카이자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유스포프 공(公)과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는 라스푸틴이 평소 이리나 공주의 미모에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을 이용해 1916년 12월 말 라스푸틴을 공주 저택으로 불렀다. 공주는 다른 곳으로 빼돌린 다음이었다.
 
  저택 1층 식탁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유스포프 공은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곧 내려올 거라며 라스푸틴을 안심시킨 뒤 술과 과자를 권했다. 몸에 독이 퍼져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라스푸틴은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에게 집시 노래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
 
  라스푸틴이 죽지 않고 몇 시간이나 술을 마시며 기타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자 유스포프는 마침내 권총을 뽑아 들고 라스푸틴을 쐈다. 라스푸틴의 시신은 양손이 묶인 채 얼음이 얼어 있는 강물에 유기됐다. 라스푸틴의 시신은 사흘 뒤 발견됐는데 암살자들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로프는 풀린 채였고 폐에는 물이 가득했다. 그는 술과 과자의 독에 죽은 것도 아니고 권총에 의해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사인(死因)은 익사(溺死)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라스푸틴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죽기 전 황제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나의 피에 젖어 25년간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죽인 자가 폐하와 친척이라면 폐하의 자녀와 친척 누구도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예언대로 황제는 라스푸틴 사후 두 달 후에 제위(帝位)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뒤 온 가족은 살해됐다.
 
  라스푸틴처럼 신돈도 재주를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신돈에 대해 부정적인 조선시대 사서(史書)에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등장한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총명하고 지혜스럽다’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다’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라도 항상 해진 납의(衲衣) 한 벌로 지낸다’….
 
 
  창녕 옥천사의 종이었던 어머니
 
옥천사지는 신돈의 몰락과 함께 폐사됐다. 지금은 표지판만 남아 있다.
  신돈의 어머니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조선시대 계성현) 화왕산 옥천사의 종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신돈의 본관이 영산(靈山)이고 묘가 영산에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의 유력자와 사통(私通)해서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가 사찰의 종이었기에 신돈은 자연스레 중이 됐다.
 
  당시 법명은 편조(遍照)였으며 신돈은 훗날 공민왕을 만난 뒤에 만든 속명(俗名)이다. 중은 중이었지만 ‘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승려들 틈에 끼지 못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그는 제도권 불교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 신돈이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1358년(공민왕 7년)이라고 한다.
 
  공민왕이 신돈을 발탁한 데 대해 야담(野談)이 있다. 하루는 공민왕이 누군가 자신을 칼로 죽이려 하는 꿈을 꿨다. 위기의 순간 한 스님이 나타나 왕을 살렸다. 그런 꿈을 꾼 지 얼마 안 돼 김원명이 신돈을 궁으로 데리고 와 왕에게 인사시켰다. 김원명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신했을 때 호위한 인물이다.
 
옥천사지의 모습이다. 주춧돌을 쌓아 올린 터는 관룡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공민왕은 김원명이 소개한 승려가 꿈에서 본 승려라고 생각했다. 신돈이 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받고 왕의 사부(師傅)로 국정에 본격 참여하게 된 것이 첫 만남 이후 7년이 지난 1365년이다. 신돈의 등장은 그해 2월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 끝에 세상을 뜬 것과 관련 있다.
 
  공민왕은 개혁정책을 펴다 안팎으로 거센 도전을 받았다. 그런 왕을 유일하게 위로한 이가 몽골에서 온 노국대장공주였다. 그런 아내가 죽자 왕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때 신돈이 나타나자 공민왕은 그에게 의존하게 됐다. 신돈은 공민왕이 중책을 맡기려 하자 오히려 각서를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신돈이 “다른 사람의 참소(讒訴)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공민왕은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이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라고 서약한 것이 그것이다. 두 사람의 이 굳은 맹세는 얼마 가지 않았다.
 
 
  전격적인 토지개혁으로 민중의 환호받아
 
공민왕.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은 신돈을 ‘근본 없는 요승’으로 경계했으나 신돈의 개혁정책을 본 백성들은 그를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처럼 여겼다. 신돈의 업적 가운데 최고는 원종과 충렬왕 때 잠깐씩 설치됐다 없어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다. 이 기구는 토지와 노비제도를 혁신했다.
 
  신돈은 귀족들에게 불법으로 탈취한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서울(개경) 15일, 지방 40일의 기한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이뤄졌다. 귀족들은 격분했으나 땅을 되찾은 천민과 노예들은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다른 기록도 나온다.
 
  당시 항간에선 ‘진사(辰巳)에 성인이 나온다’라는 참설이 돌고 있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이런 참설이 유행하는 법이다. 신돈은 “내가 개경에 다시 나타난 1364년이 갑진년이요, 이듬해인 1365년이 을사년으로 국정에 참여했으니 참설의 성인이 내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또한 신돈이 성인인 척하면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부녀자들과 음행(淫行)을 일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지내면서 왕 앞에서는 채소나 과일만 먹고 술 대신 차를 즐기는 이중인격자처럼 묘사한 구절도 있다. 이것은 권문세가들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먼저 이승경은 신돈이 처음 등장한 1358년 무렵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필연코 이 중놈일 것이다”라고 지목했으며, 당대의 명장 정세운은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공민왕은 그를 몰래 피신시켰다. 신돈이 다시 왕을 만난 1364년은 이승경(1360년 사망)과 정세운(1362년 사망)이 죽은 뒤였다.
 
 
  자신을 경계한 이승경과 정세운 사후 본격적인 전횡
 
  방해자가 사라진 뒤부터 신돈은 권력을 휘두른다. 신돈은 자신을 신승(神僧)이라 부르며 설법 들으러 온 여자들을 매번 간음했다. 밀직(密直) 김란(金蘭)이 자기 딸을 둘씩이나 신돈에게 준 일을 최영(崔瑩)이 책망하자 김란과 신돈은 힘을 합쳐 최영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신돈은 최영파인 찬성사(贊成事) 이인복, 밀직 조희고·홍사범·최맹손 등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김란·김보·이춘부·임군보·박희 등을 앉혔다. 또 찬성(贊成) 이구수, 평리(評理) 양백익, 판밀직(判密直) 박춘, 예성군(芮城君) 석문성, 환관인 부원군(府院君) 이녕·김수만 등도 참소해 유배보냈다.
 
  신돈은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상호군(上護軍) 이득림과 순군경력(巡軍經歷) 오계남을 시켜 최영과 이구수 등을 국문한 뒤 “두 사람이 김수만과 결탁해 왕과 신하들을 이간질하고 충신을 배척하는 등 불충한 짓을 했다”고 죄목을 날조했다. 고문에 못 이긴 최영 등이 거짓자백 하자 관작을 삭탈하고 땅을 몰수했다.
 
  이렇게 신돈에 의해 실각한 인물이 백여 명이 넘었다. 신돈은 잔인해 정적을 유배시키는 것은 물론 머리를 깎고 절로 보낸 뒤 곤장 쳐 죽이거나 아예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어질고 훌륭한 이를 뽑는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명단을 보면 자기와 친한 자들만 발탁했다.
 
  이런데도 공민왕은 진평후(眞平侯)로 봉하더니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긴 벼슬을 내린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라는 벼슬이 그것이다.
 
  신돈은 기현(奇顯)의 후처와 절에서 만나 간통한 적이 있었는데 높은 자리에 오르자 아예 기현 집에 살며 통정했다. 신돈은 자기 집에서 연등회(燃燈會)까지 열었다.
 
 
  왕처럼 방자한 행동
 
  위세가 당당해진 신돈은 왕과 자신을 동격(同格)에 놓았다. 왕이 누대에서 격구(擊毬)와 잡희(雜戱)를 구경할 때 신돈이 말을 타고 도당(都堂)의 장막 앞에 이르자 재상이 모두 기립했으며, 신돈은 말을 탄 채로 누대까지 와서 왕과 함께 누대 위에 앉았다. 시중(侍中) 유탁이 음식을 올리자 신돈은 앉은 채 받았는데 복장이 왕과 똑같아 보는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했다.
 
  공민왕이 고라리(高羅里)에서 격구를 관람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신돈이 장막 앞에서 말을 타자 시중 이하 관리가 모두 기립했으며, 신돈은 채찍을 늘어뜨린 채 태연히 말을 타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시중 윤환과 함께 왕을 모시고 잔치할 때는 윤환이 술을 권하자 신돈이 마시다 남은 것을 윤환에게 주니 윤환이 받아 마셨다. 왕이 신돈의 집에 갔는데 신돈은 전혀 예의를 차리지 않았으며, 궁에 출입할 때마다 백여 명의 수행원이 말을 타고 호위하니 그 의장이 임금의 행차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신돈도 뜻을 이루지 못한 때가 있었다. 밀직 허강의 처 김씨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의 손녀였다. 허강이 죽은 후 신돈이 김씨와 혼인하려 하자 김씨가 말했다. “우리 남편은 생전에 여색에 눈길을 주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배신하겠는가! 내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자결하리라.” 김씨는 결국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됐다. 그 말을 들은 신돈은 결국 혼인을 포기하고 말았다.
 
  왕이 후사를 두지 못해 늘 수심 띤 얼굴로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자 신돈은 왕에게 문수회(文殊會)를 열면 군신이 화합하고 부처와 하늘이 기뻐하여 반드시 왕자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은 그 말에 따라 궁중에서 이레 동안 문수회를 열었다.
 
  공민왕은 또 문수회를 연복사(演福寺) 안 불전(佛殿)에서도 열었는데, 채색 비단을 엮어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을 빙 둘러 큰 촛불을 밝혔다. 불전 주위에도 촛불을 밝혔는데, 초의 크기가 불전 기둥만 하고 높이는 한 길을 넘었으며, 사자와 코끼리 형상의 촛대 위에서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란 설도
 
남쪽에 남아 있는 고려 공민왕의 흔적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다.
  다섯 줄로 진설된 진수성찬과 비단 꽃, 채색 봉황이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으며, 채색 비단 열여섯 묶음을 폐백으로 사용했다. 뜰에는 금·은으로 만든 산 모양의 장식물이 놓였고 온갖 깃발과 덮개들이 오색으로 빛났다. 승려 300명이 수미산을 에워싸고 법요식을 행하니 범패(梵唄) 소리가 진동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아들은 신돈의 첩 반야(般若)에게서 나왔다.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불렀다. 이것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우왕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나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훗날 수원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관리 임박이 “왕께서 찾는다”고 거짓으로 말하자 신돈은 기뻐하며 말했다. “나를 부르심은 아지(阿只)를 위해 배려해 주신 것이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신돈의 비첩 반야가 모니노(牟尼奴)를 낳자 공민왕은 모니노를 자기 자식으로 오인했다.
 
  그런가 하면 신돈이 처형당하면서 손을 모아 임박에게 “공께서는 아지를 보아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참수한 그의 사지(四肢)를 잘라 각도(各道)에 조리돌리고 머리는 개경 동문에 내걸었다. 우왕에 관련한 공민왕의 믿음은 신하 이미충의 증언으로도 기록돼 있다.
 
  “주상께서 금화를 만들어 제게 주시면서 신돈의 집에 가서 아지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소. 갖다주자 아지가 뛸 듯이 좋아했으며 당시 신돈은 나에게 ‘주상께서 자주 우리 집에 행차하시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돌아와 보고드렸기 때문에 주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신돈의 처형에 간여한 임박이 사관(史官)들에게 한 말도 《고려사》에 나온다.
 
  “신돈을 처형시킨 것보다 더 큰 국가의 경사가 있으니 자네들은 아는가? 주상께서 궁인을 가까이해 왕자를 낳았는데 지금 일곱 살로 신돈이 몰래 기르면서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 또한 죽어 마땅한 죄다. 사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도 이전·과도한 벼슬욕이 몰락 자초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도 공민왕의 글이다. 공민왕이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홍건적의 침입 때문이다.
  이렇게 신임을 얻었던 신돈이 공민왕에게 버림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과도한 권력을 추구한 탓이다. 신돈은 자신이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 자리에 오르려고 삼사(三司)를 시켜 해당 관직을 복구하도록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했다. 이에 대한 공민왕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내 선왕 충숙왕(忠肅王)께서 가뭄을 당해 향을 피워 하늘에 고하면서 이 관직을 없애버리자 하늘이 비를 내렸다. 과인이 어찌 그러한 선왕의 뜻을 잊을 수 있겠는가?” 공민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삼사에서 올린 문서를 불살라 버렸다. 그런데도 신돈은 과욕을 멈추지 않았다.
 
  신돈이 각 도 주현(州縣)의 사심관이 올린 건의문을 가지고 다시 왕을 찾아가자 공민왕은 “오도도사심인 첨의(僉議·신돈)께서 알아서 하시지요”라고 희롱조로 말한 후 “제일 큰 도적은 여러 주의 사심관이지” 하고 못을 박았다. 결국 신돈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왕의 의심만 샀다.
 
  둘째, 두 차례에 걸친 천도(遷都) 논의다. 맨 먼저 신돈은 개경의 지세가 쇠했다며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은밀히 심복 이춘부를 시켜 도읍을 충주로 옮길 것을 건의하게 했다. 왕이 노하자 신돈은 개경은 바닷가에 위치해 적이 침구할까 두려워 그리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겨우 왕의 노여움을 풀었지만 신돈은 평양과 충주에 이궁(離宮)과 노국대장공주의 혼전(魂殿)을 짓게 했다. 그에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모두가 신돈을 두려워한 나머지 나서서 비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공민왕은 끝까지 신돈의 뜻을 꺾고 천도하지 않았다.
 
  셋째, 신돈의 무도한 과시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돈은 공민왕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 신돈이 팔관회(八關會)를 열 때였다. 그는 왕을 대신해 신하들의 조회를 의봉루(儀鳳樓)에서 받았다. 이 일이 시기가 많고 잔인한 공민왕의 의심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공민왕은 아무리 자신의 심복 대신일지라도 그 권세가 커지면 반드시 가려내 처단해 버렸다. 이런 사실을 안 신돈은 자신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졌음을 깨닫고 왕으로부터 배척을 당할까 우려해 은밀히 반역을 도모했다. 승려 석온은 당초 신돈에게 빌붙은 자로 약간의 공을 세워 보리군(輔理君)에 봉해졌다.
 
  뒤에 죄를 짓고 달아나 머리를 기르고 고인기(高仁器)로 변성명해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 벼슬을 받았다. 이 고인기가 신돈의 역모를 일러바치자 신돈은 스스로 왕에게 변명하고는 다시 고인기의 머리를 깎아 금강산으로 내쫓았는데, 기실 역모를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의 오동도는 신돈 때문에 피해를 본 곳이다. 봉황이 이곳 오동나무에 날아든 것을 본 신돈이 고려왕실에 대한 반역자가 날 것을 우려해 섬의 오동나무를 전부 베어버렸다. 사진은 오동도 용굴이다.
  왕이 헌릉(憲陵·광종릉)과 경릉(景陵·문종릉)을 참배하게 되자 신돈은 자기 일당을 나누어 보내 길가에 매복시켰다가 왕을 시해하려 했다. 왕이 무사히 궁궐로 돌아오자 신돈은 일당에게 왜 명령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일당은 왕 주변의 호위가 삼엄해 범접할 엄두를 낼 수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이에 노한 신돈은 “너희 놈은 겁쟁이라 아무 쓸모가 없다”고 꾸짖은 뒤 밤낮으로 일당과 모여 모의한 뒤 다시 날을 정해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벼슬을 구하는 자는 모조리 신돈에게 빌붙었는데 신돈의 문객으로 있던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靭)이 그 음모를 자세히 탐지해 몰래 기록했다.
 
  상황이 급해지자 이인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서명한 익명의 글을 써서 밤에 재상 김속명의 집에 그 글을 던져 넣고 달아났다. 김속명이 내용을 보고하자 왕은 순위부(巡衛府)를 시켜 신돈의 일당을 잡아들여 국문했다. 왕은 처음, 문서가 날조된 것으로 의심했지만 심문해 받은 자백을 보고는 믿게 됐다.
 
  다음날 신돈이 자기 어린아이 생일이라 하여 광명사(廣明寺)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왕은 승선(承宣) 권중화를 시켜 향과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했다. 그 뒤 신돈이 정릉(正陵)을 참배하러 가자 이인임·염흥방 및 두리쉬구치(頭裏速古赤)를 보내 수원(水原)으로 유배해 버렸다.
 
  신돈이 유배된 뒤 공민왕은 문하성(門下省)과 중방(重房)에서는 왜 소를 올리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신돈은 본래 용렬한 승려로 과분한 은총을 받아오면서 속임수로 권세를 도적질하고 몰래 한 패거리와 결탁해 반역을 도모한바 다행히 하늘의 도움 덕분에 그 일당을 제거했습니다. 신돈은 반역의 수괴인데도 다만 외지로 유배하고 아직 목숨을 보존케 하였으나 극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남아 있는 자식과 형제 및 그 일당인 기현과 최사원 등의 자식도 처형하고 그 잔당도 모두 죄를 끝까지 다스리소서.”
 
  문하성에서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신돈은 본래 미천한 중으로 외람되이 주상의 지우를 입어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백관들의 진퇴를 제 마음대로 하면서 흉악한 무리를 도처에 심어두고 제 분수에 당치 않는 자리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선대 영령들과 전하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힘입어 그 흉모가 발각되긴 했으나 관대한 은전을 입고 유배형만 받았기에 모든 나라 사람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돈의 일당은 기현과 최사원 등 7명만이 아닙니다.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신돈을 극형에 처하고 가산(家産)을 몰수할 것이며 그 일당을 모조리 처단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이어 헌부(憲府)에서도 신돈을 처형하고 그 피붙이들을 유배 보내며 가산을 몰수하고 집자리를 다 못으로 만들라고 건의했다. 이에 왕은 “법은 천하만세의 공의(公義)로 내가 사사로이 어쩌지 못할 바이니 건의하는 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첩 둬
 
  넷째, 신돈의 지칠 줄 모르는 성욕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하기 전 자신이 써줬던 맹세문을 신돈에게 들이대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氣)를 기르는 것일 뿐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버리도록 하라.”
 
  신돈이 당초 승려로서 왕의 신임을 받을 때, 관리들은 신돈을 두려워해 많은 노비와 보물을 바쳤고, 이미 김란의 딸을 맞아들인 데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첩을 두었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처 가운데 용모가 아름다운 자는 반드시 몰래 불러 간통했다. 이런데도 왕은 신돈이 봉록을 받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전원(田園)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고려사》는 ‘신돈이 죽은 뒤 대궐 뒤켠 숲속에서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서 그를 반역열전에 올리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했으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호색 음탕하여 매일 검은 닭과 흰 말을 잡아먹고 양기를 돋우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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