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최태민-최순실 스캔들

사회학도의 역사읽기 〈2〉 국가경영에 있어서 공사(公私) 구분의 챔피언은 박정희였다

글 :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유교적 가치관에 의하면 효도, 형제간 우애도 공(公)에 해당
⊙ 박정희는 유교적 이공멸사(以公滅私)를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바꾸어
⊙ 박정희의 형 박동희, 한전에서 전기공사 시작하자 청와대에 얘기해 중단시켜

유광호
1958년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
연세대 강사, 이승만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1967년 5월 고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식사를 하는 형 박동희(오른쪽) 옹. 박동희 옹도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공사 구분이 철저했다.
  우리는 지금 통치자가 공사(公私) 구분을 결여한 데서 초래된 사태로 인해 대통령의 정당성이 위기에 빠진 광경을 보고 있다. 이 기회에 우리 역사에서 공사 구분 관념의 변천과 현대 한국 통치자들 중에서 공사 구분이 가장 철저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공과 사는 영어의 public 혹은 official과 private 혹은 civil의 번역어다. 한자로서의 공(公) 자와 사(私) 자의 어원은 아직도 설이 분분하여 단정하기 어렵다. 공사 구분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고대부터 정치사상의 중심적 주제였으며 사회 및 정치분석, 도덕 및 정치 논쟁과 일상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주요 이슈들을 논할 때 핵심 포인트로 사용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과 사는 사회에서의 기본적인 두 개의 위상과 영역 그리고 사회생활, 특히 정치적인 장면에서의 인간의 기본적인 두 개의 심정(心情)이나 태도를 말한다.
 
  동서양의 공사관(公私觀)에는 차이가 있었다. 서양의 공사 구분은 영역적인 구분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국가를 ‘res publica’(공적인 것)라고 일컬었듯이 여러 사람에 관련되고 영향을 미치는 영역의 것들을 공이라고 하고 개인적 영역을 사라고 했다. 물론 동서양 모두 국가라는 장의 질서는 그 장에 속하는 모든 성원이 공동으로 간여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었다. 그 점은 한자문명권에서도 최소한 기원전 3세기에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라는 ‘천하공(天下公)’ 관념 속에 배태돼 있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공(公)
 
공자에게는 효도와 형제간 우애도 정치의 일부였다.
  반면, 유교 전통을 중심으로 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공과 사가 우선 장소적으로 구분되기보다는 가치적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서구 근대적 관점에서 정치는 전형적으로 공공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공자가 정치를 두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우며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의 정치는 결코 공공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근대 서구적 관점에서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는 가족 속의 윤리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형제간에 우애로운 것’ 모두를 공자는 ‘정치’ 속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적절한 효행이 공이 된다. 즉, 도덕적으로 좋은 것, 선한 것은 공이고 나쁜 것, 악한 것은 사로 생각됐다. 금수와 다른 ‘사람다운 행실’을 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둘째로, 공자의 공사관은 본말(本末)론적 차등성을 가졌다. 부모·자식 관계는 ‘나’라는 생명의 근원이기에 뿌리, 즉 근본에 해당한다. 그래서 국가라는 공동체는 필요하지만 부모·자식, 부부 및 형제 간의 가치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는 장소적으로는 사적 영역에 속하지만 가치적으로는 근본적이고.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는 공적 영역에 속하지만 가치적 차원에서는 지엽말단에 지나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공이요, 또 군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도 공이다. 둘 다 좋은 것, 즉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치가 경합할 경우 공맹(孔孟)의 원본 유교는 근본인 효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병자호란 때 김상헌이 노모를 봉양한다면서 임금 곁을 떠나 귀향한 것이나 구한말 동대문 밖에 집결했던 의병의 총대장 이인영이 친상이 났다는 부고를 받고 바로 귀향한 것 등은 유자(儒者)들의 공사관과 윤리의식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유교의 도덕적인 공사관은 평균성을 지향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공은 평분(平分 :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사는 간사함이다’라고 한 데서 그런 특성이 오래됐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교적 공사관은 조선시대의 ‘이공멸사(以公滅私)’라는 성리학적 관념으로 이어졌다. 여기서의 공은 앞에서 말했듯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형제간에 우애로운 것’,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가치이고, 사는 사욕, 정욕, 불충, 불효 같은 순정하지 못한 것들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공멸사’는 도덕적인 가치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발본색원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부모·자식 관계를 근본으로 하는 도덕주의적인 전통 한국의 공사관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약한 국가와 강한 양반사회 및 예법의 번잡함이었다.
 
  또 하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망〔人慾〕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인 물질적 욕구를 죄악시함으로 인해 경제가 흥성할 동력이 억압됐던 점이다. 물질적 건설이라는 이슈가 배제된 당시의 주요 정치적, 사상적 담론은 퇴계 이황 계통이나 율곡 이이 계통이나 모두 도덕과 명분을 내건 양반들의 권력투쟁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국가는 더욱 약화되고 최종적인 결과는 19세기 안동김씨 척족세도와 고종대 여흥민씨 척족세도 정치였다. 여기에서는 유교 본연의 도덕적인 공의 가치는 물론 국가라고 하는 보편적인 공적인 장도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민주정을 민주주의로 번역
 
민주정(democrcy)이 ‘민주주의’로 번역되면서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광신하게 됐다. 사진은 6·3사태 당시 시위를 벌이는 중고생들.
  대한민국 건국 후 만연한 ‘민주주의’ 구호 정치는 조선시대 유교의 도덕주의적 공사 구분과 잘 어울렸다. 필자가 ‘민주주의’라고 번역한 ‘democratism’이라는 영어 단어는 ‘민주’를 광신하는 데서 나오는 방종 상태를 냉소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민주정(democracy)을 ‘민주주의(democratism)’로 오해하는 데서 중대한 문제들이 발생해 왔다. 자유민주 체제를 선택한 한국은 제도적으로는 서구 근대의 영역적인 공사 구분에 입각하고 있다. 반면에 공산당 독재라고 하는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은 국가라고 하는 공이 시민사회라고 하는 사적 영역을 완전히 포섭하여 아예 공사 구분을 전면 부정하는 원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도 국가를 지배하게 돼 있는 공산당과 그 수령이 공과 사를 모두 빨아들여서 전지전능한 유일 존재로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거기에는 유교와 조선이 서 있던 ‘나’라고 하는 주체와 가족이라는 자율적 단위가 애초부터 부정된다. 현대 한국은 그런 공산 전체주의에 반대하여 싸워서 성립된 체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주의적이고 명분주의적인 조선의 유교적 공사관을 물려받은 한국 정치 엘리트들은 국민들의 인욕, 즉 이기(利己)를 충족시키는 경제 건설에는 관심과 소양이 없고 정치놀음에만 빠졌다. 게다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좌경 지식인들이 사상계와 정치계에서 성장하면서 한국 정치와 사회의 위기는 만성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교적 전통 한국의 ‘이공멸사’를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대체했다. 그것은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멸사봉공’이란 법가적 개념으로, 전통시대에 한국·중국과 달리 영역으로서의 공사 구분을 하고 있던 일본에서 근대에 성립한 개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에도 봉건시대에도 정부의 직분에 간섭하지 않는 한 개인으로서의 사(私 : 와타쿠시)는 직업, 여행, 일상생활 등 모든 것과 관련해 자유자재였다.
 
  이런 전통의 바탕 위에 서구 근대의 공사 구분을 도입했다. 근대적인 개인으로서의 사의 성립을 전제한 위에 공, 즉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순자의 유학을 계승한 법가도 제도와 법을 엄정하게 하는 것 이상의 국가개입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민을 자유롭게 해 줘야 활발한 경제활동이 일어나 민이 유족하고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반(反) 도덕·명분주의적 공사 구분은 전통시대에 억눌렸던 사로 하여금 경제 영역에서 합법적으로 마음껏 인욕, 즉 이기(利己)를 추구하도록 해서 국부를 기적과 같이 신장시키도록 물꼬를 터 줬다. 경제 영역에서의 공은 능력주의와 업적주의였다.
 
  대신에 박정희는 공적 영역, 즉 정치 영역에서 사의 추구는 엄하게 다스렸다. 정치인이 기업인과 유착하여 공적인 정책을 좌지우지하거나 특혜를 주는 사익 도모는 용납되지 않았다. ‘유신체제’라는 헌정의 조정 이후에는 특히 그런 사익 정치는 철저히 퇴출되었다. 박정희 통치 시기 전반에 걸쳐 기업들은 시장에서 경쟁한 성과를 가지고 국가라고 하는 공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평가되게 했다. 박정희 시대에 나라의 중흥을 이루었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公)조직을 가지고 국가를 경영한 박정희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지적 능력은 그 주변의 인물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통치자로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공사 구분에 대하여 살펴보자. 민주정은 원칙적으로 통치자를 세우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된 통치자가 일상적으로 행해야 할 통치, 즉 다스림은 또 별개의 범주다. 베버가 말했듯이 통치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평가받는 것이 정치의 본령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군주의 지적 능력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조직을 가지고 국무를 운영했다. 이른바 비선이나 실세를 따로 두지 않았다. 공자도 일찍이 “不在其位(부재기위)면 不謀其政(불모기정)이라”고 했듯이 이것이 공명정대한 통치기술(statecraft)의 근본이다.
 
  그는 1961년 혁명 후 관료제를 합리화하고 허명이 아닌 실사구시의 인재들을 발탁하여 통치했다. 그가 집권 18년 동안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회의를 주재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또한 업무에 정통한 중간 간부 공무원과의 의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기라성 같은 공직자들이 배출됐다.
 
  이것은 박정희의 평생에 걸친 독서로 다져진 교양과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비전과 역량이 베버가 의구심을 가지고 봐라봤던 근대성, 즉 현대 관료제를 역동적이고 지사적으로 만들었었다. 결국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내렸던 “좋은 조언이란, 어느 누가 하든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통치자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통치자의 지혜가 적절한 조언에서 비롯될 수 없다”는 결론이 박정희의 경우에 해당된다.
 
  둘째로,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국민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사랑, 두려움, 미움, 경멸의 경우 중에 경멸 받는 것을 가장 나쁜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통치자가 공사 구분을 못한 결과 벌어지는 현상일 경우가 많다. 박정희는 공사 구분에 철저했던 한국 현대사상 희귀한 통치자였다.
 
  몇 가지 일화만 들어도 다른 이들과 비교되어 우리가 알 수 있다. 예전에 박정희를 대신해 어려운 심부름도 하며 가까이 지냈던 조카는 사업을 확대하고자 했는데 대통령의 친척이기 때문에 은행대출이 되지 않았다. 그 조카는 결국 사업 자체를 접고 말았다.
 
 
  박동희와 오원철
 
오원철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
  또 박정희 대통령의 큰형 박동희 옹과 오원철 전 경제수석비서관의 처신이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의 역점 사업인 농어촌 전력화 사업 때 한국전력에서 대통령 생가가 있는 구미 상모동에 우선적으로 전기를 넣어 주려고 공사를 시작하자 박동희 옹은 청와대에 연락하여 중단시켰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야지 고향 생각해서 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상모동에는 7년 후 전국에서 제일 늦게 전기가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형은 촌의 농부에 불과했지만 권력자의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삼가는 자세와 정신은 한국 유교 문화의 공사 구분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런 것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후임자들의 하나같은 자식들 및 친인척 비리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리고 공무원으로서의 오원철씨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집에서 부부가 한방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공무원으로서 공무를 얼마나 경건하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예다. 오원철의 경우는 ‘멸사봉공’의 구도적 경지를 보여준다.
 
  박정희는 자신의 사적인 고난들과 명예욕에 일절 지배받지 않은 흔치 않은 존재였다. 이 나라에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수많은 명예박사 학위와 세계적인 상이 필요했던 어떤 대통령도 있었다. 또 친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대통령이 된 자신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면서 각자에게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한 또 다른 대통령도 있었다. 그들은 궁전 같은 집을 짓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육영수 여사도 공사 구분이 엄격했다.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에만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투여했다. 육영수 여사도 공사 구분이 분명해서 도를 넘는 행실을 일절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엄정하고 훈육적인 통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는 했을지라도 경멸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공조직으로 국가라는 공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시스템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도자의 지력과 지혜가 ‘암묵지(tacit knowledge)’와 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시스템은 한국도 갖춰져 있다. 요체는 운용하는 공인들의 정신(spirit)이다. 결국 문화인 것이다. 그런데 문화도 행위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는 했지만, 전통시대 유교의 공사관과 ‘이공멸사’ 관념을 비웃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농경사회에서 덕(德 : virtue) 대 부(富 : wealth)라는 이분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이었다. 자본주의는 윈-윈 게임이지만 농경사회는 제로섬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변화와 연속성으로 교직되듯이 정치에서의 도덕적 공사 구분은 현대인이 경건한 자세로 새겨들어야 할 대상이다.⊙
조회 : 19227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